가끔 성당에 간다
. 기도를 드린다기 보다는 성당 주변을 어슬렁거리기 위해서다.
성당 주변에는 작고 소박하더라도 나무 그늘이 있고 걸터앉을 만한 자리도 있다. 마음을 한없이 가라앉혀주는 성모상, 넉넉한 품이 느껴지는 아름드리 나무도 만나게 된다. 마음 속에서 아우성치는 소리도 잦아든다.


사람의 소리는 모두 묵음이 되고 자연의 소리만 남아있는 곳. 성당을 거닐 때면 평범하지 않은 소리가 들려온다. 내 발 아래에서 마른 흙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머리카락을 헝클고 도망가는 바람 소리, 나뭇잎에 살짝 얹힌 풀벌레의 가냘픈 움직임. 그런 소리들.



날 좋은 가을날 풍수원 성당에 갔다
.
강릉에 12일 여행을 떠나던 날, 자동차를 달려 여정을 중간쯤 되는 곳에 풍수원 성당이 있었다. 점심식사도 할 겸 잠시 쉬어간다고 횡성에 들어섰는데, 그만 이곳에서 한참 시간을 보냈다. 일요일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가는 시간쯤이었다.






붉은 벽돌로 촘촘하게 다진 아담한 성당이 눈앞에 등장했다.
첨탑이 있고 등뼈가 솟은 것처럼 지붕 위가 뾰족한 박공 지붕이다. 붉은 벽돌이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켜 때문인지 작은 규모가 아닌데도 아담해 보인다. 성당 안에도 성당 밖에도 이미 사람이 많다. 서울이며 곳곳에서 피정 온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니 성지순례를 올만한 유서 깊은 성당인가 보다.




건물을 보면 그런 느낌이 전해진다
. 단순하고 단단한 형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간결하다.


정오
를 넘어가니 햇살이 더욱 진해진다. 햇살이 진할수록 건물은 더 투명하게 보인다. 형태를 이루고 있는 실루엣이 느슨해지는 대신, 그림자는 짙어진다. 건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적당히 서늘하고 적당히 포근한 햇살을 맞으며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몸을 굽혀본다. 성당 안에서 미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 신부님의 목소리가 나긋나긋하게 흘러나온다. 오늘 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왔나 보다.

 

포근한 산골짜기 안에 자리잡은 작은 마을 풍수원, 바람이 불고 시내도 흘렀다 하여 불린 이름이다. 첩첩 산중 작은 마을에 이토록 아름다운 성당이 자리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오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풍수원 성당의 역사를 조금 살펴보자.


풍수원 성당은 1909년 낙성식을 올렸으니 벌써 백 년이나 되었다. 그런데 성당이 생겨나기 전에도 천주교인들이 신앙촌 마을을 형성하며 모여 살았다고 한다. 그 역사가 1801년부터인데, 천주교를 허락하지 않았던 조선 왕실이 천주교인을 모질게 죽이기 시작했던 신유박해가 있었던 해다.

그 때 도성을 버리고 도망 온 교인들이 산 넘고 물 건너 이곳까지 흘러 들었던 모양이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수천 명의 목숨이 종교의 이름으로 사라졌을 때에도 도망 온 무리가 또 풍수원에 숨어들었다.
풍수원은 이렇게 성직자 한명도 없이 교인들이 모여서 만든 자생적인 신앙촌마을이다. 

병인박해가 일어난 지 20
년 후인 1886년 프랑스와 조선이 통상수호조약을 맺었고 이때부터 천주교의 포교와 교육이 자유로워진다.
강원도 산골에서 숨죽이고 살아온 이들이 점차 신앙촌으로 자리를 굳히자 1888년에 프랑스인 르메르신부가 부임하여 초가집에서 미사를 드리며 초기 교회의 모습을 갖추어 갔다.  


사진설명-성당 유물관에는 풍수원 성당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1900년대초반에 인쇄된 성경,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돌려보던 성서와 기도서, 
그리고 성당 안에 두던 다양한 성물들이 오래된 세월을 보여준다.

                                                                             

르메르 신부에 이어 부임한 한국인 정규하 신부에 이르러 제대로 된 성당을 축조하기로 하고 신도들과 힘을 합했다. 중국인 기술자와 신도들이 벽돌도 굽고 나무도 해오면서 이를 바탕으로 건물이 완공되었다.

1905
년에 기공식을 시작한 후 4년 만에 성당이 문을 열었다. 우리나라에서 오래된 성당을 꼽으라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유서 깊은 장소다. 한국인 신부가 앞장서서 지은 성당으로는 최초의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사진 설명- 좌측 아래에서 세번째 인물이 정규하 신부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감곡 매괴 성당, 용소막 성당과 닮은꼴이라 이들 성당을 설계한 시잘레(chizallet, 한국명 지사원) 신부가 건축설계를 담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도 있는데, 설계자가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에서 부임온 신부들 중에서 명동성당을 지은 코스트 신부처럼 성당 건축만 전문으로 담당한 신부가 있었다. 
정규하 신부의 노력으로 성당이 지어진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고딕식 외관을 지닌 건물이 한국인의 손으로 설계되었을까 하는데는 좀 의구심이 들기는 한다. 게다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오래된 성당이지 않은가.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펴낸 <뮈텔 주교 일기 4>에는 1910년 11월에 주교가 풍수원 성당을 방문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성당 건물을 본 주교 일행은 계곡 앞에 우뚝 솟아있는 성당을 보고 약현 성당의 모방이라고 단정하여 말했다.(김종기, 박희용, 최종철, 홍대형, 가시체계로 본 강원도 성당건축의 평면구성 변천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제24권 제7호 2008년 7월)
최초의 벽돌성당으로 알려진 약현성당은 1892년에 완공되었으며 코스트 신부가 설계하고 역시 프랑스인인 두세 신부가 감독하여 완공했다.


얼른 성당 내부를 구경하고 싶은데 한 시간이 넘도록 미사가 끝나지 않는다
. 피정을 위한 특별미사라서 신부님이 할 이야기가 많으신가 보다. 성당 뒤쪽에 있는 사제관을 먼저 구경했다. 1912년에 지어진 사제관은 성당의 오래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당은 강원도에서 지정한 유형문화재이고, 사제관은 근대건축물 등록문화재다.


사진 설명- 1912년에 지어진 사제관 모습.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제관이라고 한다.
근대건축물 등록문화재로 제163호로 지정되었다. 성당유물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본당을 이끈
정규하 신부의 업적이 패널로 전시되어 있다. 가무잡잡한 얼굴의 정규하 신부를 사진으로 보니, 깐깐한 성직자이자 넘치지 않고 소박하게 성당일을 이뤄 나갔던 분이 아닐까 싶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신도들을 맞이해온 한결 같은 큰 나무 같았으리라 생각해본다
. 라틴어 기도서에도, 재단의 불을 밝히던 촛대와 미사를 집전하던 신부님의 성복도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다.



나는 1800년대 말에 필사된 기도서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궁서체로 쓰인 필사본 기도서는 여성들이 썼던 것이라고 한다. 천주교가 전래되어 올 무렵(당시는 천주학이라는 이름의 학문이었다) 기도서는 양반가의 여인들이나 궁 안의 여인들이 돌려보기도 했다고 한다.
말씀에 가까이 간다는 마음으로 한 글자씩 써내려 가다가
, 그 말씀 때문에 죽음을 당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사람들. 그들을 구원한 것은 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스스로의 신념이 아니었을까? 여인의 글씨처럼 가늘게 흐르는 필사 기도서에 귀를 기울여보았다. 마음이 어지러운 나에게는 쉽게 말씀을 들려주지 않는가 보다.

 

 


이윽고 한 시간 반에 걸친 미사가 끝이 날 무렵이다
. 살짝 열린 문 안으로 들여다보니 교인들이 마룻바닥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서양 중세의 교회가 그러하듯 길게 나열된 두 줄의 기둥이 공간을 세 개로 나누고 있다. 재단으로 향하는 중앙 천장이 높고 양쪽은 낮다. 재단은 정성스러운 장식으로 채워져 있다. 베풀어주시는 사랑, 그리고 보답하는 사랑이 이곳에 있다.

신부님의 말씀이 끝나고 신도들이 모두 바깥으로 나간 후 잠깐의 공백기에 성당 내부를 둘러보았다.

검은 벽돌로 단단하게 쌓아 만든 기둥인 줄 알았는데
, 알고 보니 목재 기둥에 페인트로 벽돌처럼 색칠하고 줄눈을 그려 넣었다. 멀리서 보니 그럴싸하다.

서양식 구조로 만들었지만 아무리 봐도 서양식 돌 성당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은 없다
. 나무로 바닥을 만들고 기둥을 세우면서 경건한 성당에 소박한 따스함을 더했다. 장식도 없고 화려한 그림도 없지만 종교의 신념으로 하나하나 쌓아올린 행복감이 가득 피어난다.



 


사진설명- (위 좌+우) 성당 내부의 기둥은 검은벽돌처럼 보이지만 가까이가면 목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회색페인트를 칠하고 줄눈까지 그려넣어 멀리서보면 감빡 속을 정도다.

(아래 좌+우) 성당 외벽을 이룬 벽돌을 자세히 살펴보면 회색 벽돌에는 하늘색에 가까운 회색이,
붉은 벽돌 위에는 더 진한 붉은 색이 덧칠해져 있다. 붉은 색 페인트를 긁어낸 듯 벽돌 표면이 거칠다.



나무도 풍수원에서 구한 것이며, 외벽을 쌓아 올린 벽돌도 풍수원에서 구워냈다. 이 시대의 붉은 벽돌은 요즘보다 크다. 붉은 벽돌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표면이 거칠거칠하고 색깔이 차이가 나는 곳이 눈에 띈다. 색이 칠해진 표면을 긁어낸 것이다. 오래되어 낡은 건물을 보수하느라 벽돌 위에 붉은 페인트를 칠하고 흰색 줄 눈까지 그렸던 모양이다.
세월의 더께가 내려 앉은 건물에 페인트로 색을 내다니! 싶지만 한때 이 방법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어 지금도 수많은 붉은 벽돌 건물은 페인트를 뒤집어 쓰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인위적인 붉은 색이 과히 좋지 않았던지 이 부분을 긁어낸 흔적이 성당에 남아있다.

 

성당 건물에 눈이 어두워 십자가의 길을 초입에만 겨우 발을 디뎠다. 이철수 판화가의 소박한 그림체를 보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아쉬운 것도 남겨둬야 다음 번에 또 오게 되는 것이니까.  행복 한 줌 얻어가면서 가늘게 성호를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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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원 성당과 사제관
성당-강원도 지정 유형문화재 69호
사제관-근대건축물 등록문화재 163호

주소-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유현2리 1097번지
문의-033-343-4597
홈페이지-
www.pungsuwo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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