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는 풍각쟁이야~”라는 노래가 있다. 여가수의 새침한 목소리 속에 앙탈과 애교가 가득 묻어있다. 가사를 보면 이렇다.


오빠는 풍각쟁이야 뭐 오빠는 심술쟁이야 뭐
난 몰라잉 난 몰라잉 내 반찬 다 뺏어 먹는 건 난 몰라
불고기 떡볶이는 혼자만 먹구 오이지 콩나물이면 나한테 주구
오빠는 욕심쟁이 오빠는 심술쟁이 오빠는 깍쟁이야

오빠는 트집쟁이야 뭐 오빠는 심술쟁이야 뭐
난 시려잉,
난 시려잉 내 편지 남 몰래 보는 것 난 시려
양취자 구경갈 땐 혼자만 가구 심부름 시킬 때면 엄벙띵허구
오빠는 핑계쟁이 오빠는 안달쟁이 오빠는 트집쟁이야

오빠는 주정뱅이야 뭐 오빠는 모주꾼이야 뭐
난 몰라잉 난 몰라잉 밤 늦게 술취해 오는 것 난 시려
날마다 회사에선 지각만 하구 월급만 안 오른다구 짜증만 내구
오빠는 짜증쟁이 오빠는 모두쟁이 오빠는 대포쟁이야."


누구나 따라 부르기 쉽고 가사도 친근하다
. 이 노래는 1930년대 불린 유행가다. 당시의 대중가요를 만가라고 부른다. 만가는 현실을 해학적으로 바라보는 가사와 유쾌한 가락이 특징이다.

1930
년대라면 일제강점기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아닌가? 노래는 발랄하고 노래 속 오빠는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오빠라는 존재들과 하등 다를 것 없다. 그 시절도 회사에 지각하고 월급 안 오른다고 짜증내던 인물이 살던 시대였던 것이다. 그 시절을 살던 사람들도 여배우와 여가수에 열광하고 심지어 2010년의 우리들도 좋아하는 떡볶이를 남주기 아까워하면서 먹었던 것이다.

우리 귀에 익숙한 전통가요나 동요 중에는 일제 강점기부터 불리던 노래들이 많다. 전통 가요 프로그램의 단골 레퍼토리인 카츄샤의 노래1916년 단성사에서 열린 신파극의 주제곡이었고, 이난영을 목포의 여인으로 만든 목포의 눈물1935년 향토 노래 현상 모집에서 당선된 노래였다. 윤극영의 반달홍난파의 달마중’, ‘울밑에선 봉선화도 그렇다.

1930년대는 노래의 시대다. 한해 평균 1만 장의 레코드가 팔렸다. 먹을 것도 부족하던 시대인데 사람들은 유성기를 샀다. 유성기를 들으러 다방과 카페를 드나들던 모던보이와 모던 걸도 흔했다. 음이 높고 간질간질한 노랫가락은 험한 세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달콤한 처방이었다.

사람들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대중가요가 생겨났고 요즘처럼 아이돌도 등장해서 극장마다 노래를 듣겠다고 모여든 사람들이 가득가득했다. 아이돌이라고 해도 쪽진 머리에 치마 저고리를 입었지만 말이다. 폴리도르 레코드, 콜롬비아 레코드, 오케 레코드, 빅타 레코드, 태평 레코드 등 5대 레코드 회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노래를 불러줄 아리따운 가수를 찾아 기생을 교육하는 권번을 들락거렸다

인천 권번의 기생
이화자장일타홍은 레코드 회사가 사랑하는 예인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불렀던 노래는 어떤 것이었을까
? 그들의 노래를 들어보려 인천아트플랫폼으로 가보았다.




100년 전 건물에서 옛 노래를 듣다




복합문화 매개공간인 인천 아트 플랫폼.
인천문화재단에서 운영하며 인천시 중구에 위치해있다.  
전시장, 공연장, 교육관을 포함하여
입주작가들의 스튜디오와 공방이 포함된 복합공간이다.




군회조점, 구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대한통운 창고 등
근대건축물 세 채를 중심으로 이들 건물과 닮도록 붉은 벽돌로
다른 건물들을 만들어 끼워넣었다. 비슷한 볼륨의 건물 10동이
중앙의 도로를 중심으로 양족에 나열되어 있다.



인천아트플랫홈은 개항장이었던 인천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중구청 앞 일명 차이나타운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 꽤 큰 규모의 예술 마을이다. 전시 홀과 공연장을 따로 두고 입주 작가들의 스튜디오와 공방, 게스트하우스 등을 설치하여 모두 열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고작
2년 전에 문을 열었지만 이곳에서는 100년 전의 풍경을 읽을 수 있다. 시간의 때를 묻힌 채 서있는 붉은 벽돌 창고 건물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대한통운 창고 건물과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 지점, 군회조점이라는 세 개의 근대 건축물이 이 예술 마을의 중심이 되는데, 다른 건물들도 붉은 벽돌을 주조로 박공지붕을 얹어 건물의 형태를 연결감있게 연출했다.

나는 이곳을 무척 좋아한다. 이 거리에 들어서면 차이나타운의 번잡함과 소란스러움이 사라지고 오롯이 역사와 마주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붉은 벽돌 건물이 양쪽으로 늘어선 거리는 50미터 가량 이어지는데, 느긋하게 걸으면서 생각에 잠기기에 좋다. 백년 전 세상에 온 듯 당시 분위기를 상상해보는 일도 좋고, 오늘은 어떤 전시가 열리나, 어떤 공연이 있나 프로그램을 들여다보아도 좋다.




교육관 및 전시관. 1902년에 지어진 군회조점 사무실 건물이다.


노란색 문이 인상적인 대한통운 창고.
옛날에는 미곡을 쌓아두던 창고였다.


구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사무소. 1888년에 세워진 건물로
근대건축물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은 자료관으로 일반에게 개방된 곳이다.



길 양 끝에
100년의 시간을 훌쩍 넘긴 근대 건축물이 자리 잡고 있다. 전시실과 교육실이 있는 교육관은 군회조점(郡廻漕店)이라는 해운업 사무소이며 1902년에 세워진 건물이다. 다른쪽 끝에는 1888년에 세워진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등록문화재 248호)가 자료실로 개방되어 있다.

맞은 편에는 대한통운이라는 흰색 글자가 적힌 창고 건물이 육중한 몸집을 자랑한다. 내부 공간이 깊고 넓은 창고건물은 공연장으로 사용된다. 오래된 근대 문화재 건물도 지키고 이 거리의 역사도 현재에 되살린 인천 아트플랫폼은 오롯이 역사의 풍경을 재현하고 있다
.

그리고 이 거리와 건물에는 옛 시대를 복원하는 다양한 예술 프로젝트가 열린다
. 건물이 재현하는 분위기 때문인지 이곳에서 보는 그림과 이곳에서 듣는 음악은 거미줄처럼 채워지고 엮인 시간의 흔적이 느껴진다.




거문고가 노래하는 일타홍





장 일타홍을 알게 된 것은 인천 아트플랫폼에서 열린 공연에서였다
. ‘매혹의 시대’. 1930년대를 연주자들은 이렇게 불렀다. 유성기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웃게했던 노래들은 지지직거리는 낡은 유성기 음반으로나마 생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연주자들은 유성기 속에서 예인의 목소리를 끄집어 내보고자 했다. 1930년대 사람들의 마음을 감싸주던 노래를 2010년에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오래된 붉은 벽돌 창고에서 들어본다면 말이다.

1930
년을 매혹의 시대로 풀이한 연주자들의 악기는 뜻밖에도 거문고였다. 유성기 속에 흐르는 1930
년대의 대중가요와 조선시대 사대부의 악기로 뇌리에 남아있는 거문고가 만들어내는 조합이 호기심을 끈다.







거문고 앙상블 '다비'는 '매혹의 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피아노와 퍼커션, 피리의 소리를 서로 섞어넣었다. 거문고의 비장하고 다부진 선율은 피아노가 있어 나긋해지고 퍼커션이 매끄러워졌다. 예인 장일타홍의 신민요 두곡, 작곡가 김탄포의 '세기말의 노래', 민간에서 전해지던 거문고 풍류 2곡, 그리고 우리 귀에 익은 동요 '반달'과 '달마중'이 차례대로 연주되었다.

다비가 선택한 노래들 속에는 거문고라는 가사가 들린다. 지금 사람들보다 당시 사람들이 거문고와 더욱 친했던 모양이다. 남실남실 타는 거문고, 내 사랑 거문고. 묵직하고 진중한 거문고 현이 노래가 되면 몰랑몰랑해지고 보드라워진다. 사랑스럽다.

거문고는 일타홍이 유성기 앨범으로 남긴 '옛님을 그리면서'와 '아리랑의 꿈을 노래했다. 일타홍은 앞서 말한 대로 인천권번의 기생이었다. 1930년대 인천은 향락의 도시였다. 육지의 여러 나라를 이으며 물건을 사고팔아 이익을 챙기는 회사, 배와 창고를 빌려주며 온갖 값나가는 물건을 쌓아두던 회사들이 우후죽순이었다. 일본은행들도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했고 투기장이나 다름없던 미두취인소가 있어 쌀과 재산을 한탕 노름에 걸었다가 하루아침에 거지가 된 사람이 수두룩했다. 돈이 모이던 그곳에는 예외 없이 유흥가가 형성되었다.

인천아트플랫폼이 위치한 지역은 일명 개항장 지역. 인천항이 있던 이곳은 새로운 것이 닿고 빠지는 접점이었다. 거리마다 요릿집과 여관, 호텔이 즐비했다. 구 일본해운주식회사 인천지점 윗쪽에 있는 비어있는 택지에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이라는 대불호텔이 있었고 그 주변은 먹고 마시고 돈을 쓰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가득했다.

일타홍은 이곳에서 노래를 불렀다. 나라를 빼앗긴 서글픔, 몸과 마음을 팔아야 하는 서글픔이 뒤섞인 노래들이다.

"...아리랑 어데요. 아리랑 부르며 꿈을 찾어서 노래로 고개를 넘고 또 넘네."-장일타홍, 아리랑의 꿈(리갈 레코드)

서글픔이 묻어나는 선율 속에, 떡볶이도 먹어보고 양취자의 노래도 들어보지만 시절이 하 수상하여 제 뜻을 펼치지 못했던 풍각쟁이 오빠의 뒷모습이 겹쳐진다.




거문고 앙상블 다비는 강희진, 안정희로 이루어진
거문고 연주단이다. 예스러운 소리에서 머물던 거문고에서
감수성 어린 가락을 찾아내 관객들에게 들려준다.
다양한 창작곡 레퍼토리도 보여준다.



앵콜곡인 달마중을 모던걸의 모습으로
직접 노래하는 다비 안정희 님.



일타홍의 마음처럼 구슬픈 선율 속에 거문고가 바람처럼 흔들린다. 악기의 서늘한 소리가 마음을 흟고 지나간 후에 귀에 익은 동요가 흐른다.

"아가야, 나오너라, 달마중가자. ....검둥개야 너도 가자 냇가로 가자...."(1929년, 윤석중 작사, 홍난파 작곡)

장난스럽고 사랑스러운 노랫자락에 희망이라는 두 글자가 머문다. 1930년은 갈길 잃은 서글픈 신세에 비탄에 젖고 어둡고 추운 거리를 헤매는 시절이지만 희망이라는 두 글자로 가슴 한 켠이 따뜻해지던 시대였을까?  

 


인천 아트 플랫폼 공연장에 모인 사람들.
새로운 음악과 낯선 악기의 호흡을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매혹의 시대는 지금도 계속된다. 2010년의 가을이라고 해서 1930년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우리 역시 그 만큼의 아픔과 절망과 서글픔을 뼈저리게 체험하며 이 시대를 살고 있으니. 가슴 한구석을 싸늘하게 만드는 것들을 덮어둘 수 있는 음악이 있기에 잊을 수 있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도, 그 시절도 음악 없이는, 노래를 부르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매혹의 1930년으로 여행을 다녀오면서 마지막 노래 달마중을 내내 흥얼거렸다. 그 시절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준 노래라는 달콤한 처방은 2010년 지금까지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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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아트 플랫폼
위치-인천시 중구 제물랑로218번길 3(해안로 1가)
www.inartplatform.kr

더 읽어볼 책과 더 들어볼 음악



오빠는 풍각쟁이야
장유정 저/ 민음인 (2006)



풍각쟁이 은진
최은진/ 비트볼뮤직(2010)



the스토리
가야금 앙상블 다비/로엔(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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