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고속열차와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여섯 시간을 달린 후에야 소록도가 바라보이는 녹동항에 이르렀다. 거금대교가 놓여서 배를 탈 필요는 없지만 소록도에는 개방된 지역이 많지 않다. 한센인들이 사는 마을은 외지인의 방문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록도를 출입할 수 있는 프리패스를 가진 사람과 동행하려고 오랫동안 기다렸다. 소록도에는 1930년대 지어진 건축물들이 상당히 많고 열 네 채의 건물이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건축물의 현황도 알고 싶었지만 그 섬에 가고 싶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문화재가 되지 못한 채 버려진 건물들을 보고싶어서였다. 그러려면 마을 가까이로 들어가야 한다.
문화재 명칭은 건물이 지어질 당시의 이름은 소록도갱생원이지만 누구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국립소록도병원이 현재의 이름이다. 작은 사슴이라는 뜻의 소록도지만 섬의 모양을 보면 중앙이 옴폭하게 들어가고 양쪽으로 날개가 팔랑거리는 나비 같다. 그 중앙에 국립소록도병원과 주요시설이 있다. 유일하게 개방된 곳이라 박물관과 기념관도 있다. 동쪽은 병원 관계자들이 살고 일하던 시설이 있고, 서쪽은 환우들의 마을과 병사가 있다. 한센인이라 부르지만 한센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없다. 병은 완치되었지만 후유증이 심해 지속적으로 치료를 받아야하는 환우들이 가족들과 산다.
문화재로 등록된 검시실과 감금실부터 둘러보았다. 이 과거의 산물은 소록도가 어떤 곳인지 정확히 보여준다. 죽은 환자들을 해부했다는 수술대가 과거를 증언하고 있다. 감금실은 소란을 피우거나 일본인 원장의 뜻을 어긴 사람들, 육지로 탈출하려다 실패한 사람들이 격리되었던 곳이며 여기서 나온 사람은 벌로서 검시실에서 단종수술(정관수술)을 받았다. 근대건축물의 주된 외피인 붉은 벽돌이 진짜 핏빛으로 보였다. 감금실 뒤로 보이는 마을 풍경은 고요하기만 하다. 학교, 운동장, 살림집이 촘촘한데 빈 집처럼 조용하고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전동휠체어 소리만 이이잉 울려퍼질 뿐이었다. 곧이어 아름다운 공원이 등장했다. 황금편백나무, 솔송나무 등 희귀한 나무들이 자유롭게 멋을 부리고 있다. 1930년대부터 존재했던 중앙공원은 지금에 이르러 더욱 푸르러졌다. 대만과 일본의 식물들까지 옮겨 심어 독특한 식생을 자랑한다고 한다.
마을로 향했다. 섬의 동서남북과 중앙에 자리 잡은 마을은 푸르른 숲으로 폭 싸여있었다. 숲에서 진짜 사슴이 나올 때도 있다고 한다. 서남쪽 바다를 향해 자리 잡은 서생리는 풍경이 좋았다. 한센인을 치유하던 소록도 최초의 병원인 자혜의원(1916년 개원)도 서생리에 있다. 지금은 버려진 마을이라 흩어진 폐가들이 부쩍 자라난 풀과 나무에 뒤섞여있다.
병사지역은 2017년 여름 한 원로건축가 보수공사를 했다. 오년 전 소록도를 방문한 조성룡 선생은 이 섬의 말 못할 아픔을 직면하고서 건축가로서 해야 할 일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버려진 건물을 조금이라도 되살리고 이 섬을 철저히 기록하는 일, 그리고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섬의 역사가 사리지지 않도록 다른 방식의 계획을 제안하는 일이었다. 건물은 기억이라서, 건물이 사라지면 이 마을의 아픔과 슬픔의 기억조차도 흐릿해진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남겨두려고 보수공사를 했다. 그러나 섬의 생명력을 그대로 타고난 식물들이 뭉텅뭉텅 자라나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을 뒤덮곤 한다.
과거 병원관리인들이 살았던 섬의 동쪽은 삶의 분위기도 건물의 모양도 완전히 다르다. 1930년대에 지어진 사무실과 강당, 그리고 병원장의 사택은 관공서 건물의 전형을 갖고 있으며 지금도 튼튼하게 잘 남아있다. 그러나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은 소록도의 다른 건물과 비슷하다. 이 건물들은 모두 문화재다. 유리로 지어진 온실이 있는데,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떤 꽃들이 피었을까 상상하는 일이 참 무람없다.
언덕 높은 곳에 놀랍게도 신사가 있다. 일제 패망 후 신사가 모두 사라진 줄 알았는데 여기 소록도에는 남아있다. 참배의 기능은 사라지고 전망대 겸 휴식터로 남아있다. 남동쪽 해안가에 면한 붉은 벽돌의 식량창고는 독특한 구조가 돋보이는다. 이름이 무색하게 텅 빈 붉은 벽돌의 창고는 수리가 필요한 전동휠체어들을 모아두는 곳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가 머물렀던 집을 방문했다. 1960년대 소록도에 와서 40년간 담담하게 온정을 베풀던 두 여인의 삶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다. 자물쇠로 잠겨있어 창문으로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었지만 두 여인을 다룬 책과 영화에서 이미 이 집의 고요함과 맑음을 경험했다.
삶은 얼마나 강한 것일까. 연민은 또 얼마나 깊은 것일까. 어째서 이 섬에 한번 발을 디딘 사람들은 떠나기 어려울까. 마리안느와 마가렛도, 조성룡 선생도, 나와 동행한 사진가도 소록도를 온전히 떠나지 못하고 어느새 되돌아와 이 섬을 바라본다. 거기엔 강제로 격리된 채 긴 세월을 보낸 사람들, 죽음을 넘나들며 고통 받은 사람들, 새파란 바다가 죽음처럼 차가웠던 사람들, 시민으로 태어나 시민의 권리를 누리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던 시절을 따뜻하게 덮어주고 봉합하는 거대한 자연이 있다. 이제는 소록도는 치유의 섬이라 부를 수 있을까?
섬을 떠나는데 이 말이 떠오른다. 인간의 존엄을 이야기했던 소설가 엔도 슈사쿠 기념관 앞 비석에 적힌 말이다. “인간이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 푸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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