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구본창의 작업 중에 황량하게 비어있는 공간을 찍은 <인테리어>시리즈가 있다. 희게 빛바랜 공간에 가늘게 그어진 모서리들이 뇌리에 강하게 금을 그었다. 공간의 현현(顯現)을 보여주는 건 삶의 먼지와 시간의 흔적이 검게 들러붙어있는 남루한 모서리들뿐이었다. 벽들이 부딪히는 날선 흔적들. 이 엄연한 경계선에 시간의 주름이 자리잡는다. 우리 각자가 평온하게 누리는 아름답고 청결하며 경건한 공간들조차도 이 그늘진 모서리들을 담보하고 있다. 언젠가는 텅비어 그늘진 모서리만 남거나, 그조차도 사라진 폐허가 될 것임을 알고도 모른체하는 것같다.





도시에도 모서리가 있다면, 서울의 모서리 중 하나는 영등포가 될 거다. 20세기 초, 경인선과 경부선이 생겨나면서 번창하기 시작한 한강 아랫동네 영등포는 지리적 이점으로 공업지역으로 급성장했다. 철도공장 뿐만 아니라, 방직, 피혁, 요업, 벽돌제조업, 제분업 등의 공장이 검은 연기를 피워올렸다. 1930년대에는 일본의 맥주공장들이 영등포에 상륙했다. 광복 후에도 이전과 닮은 모습으로 60년을 이어왔다. 그건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개발붐을 타고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가고 과거의 모습 그대로 이 지역이 소비되고 있다는 뜻이다. 철공거리와 집창촌, 그리고 방직공장의 잔재들로 그늘진 사거리 한켠에는 타임스퀘어라는 화려하고 거대한 쇼핑몰이 영등포를 물신의 장소로 재정의한다. 그러므로 영등포은 온갖 욕망의 거리다. 존재의 깊은 우울을 잠재우는 성적이고 물적인 욕망들. 















커먼센터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서두가 길었다. 몇 해 전부터 영등포 문래동 일대는 예술가들에게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비어 있다가 무너져가는 건물들과 재건축이 유예된 골목에 어느새 예술가들이 스며들었다. 값이 싼 스튜디오를 찾아온 사람들, 기존의 예술의 틀에서 벗어나고픈 공간들이 자리를 잡았다. 커먼센터는 젊은 작가들이 그때그때 하나의 주제 아래 모이는 전시공간이다. 홈페이지 소개글에 따르면, 컬렉터-딜러-작가라는 미술시장의 고정관념에서 자유롭고자 갤러리가 아닌 ‘센터’라는 이름을 썼다. 그리고 현대작가들이 필수적으로 거치는 기금과 레지던시 프로그램에서 빠져나와 미술현장에 스스로 뿌리내리는 방법을 찾고 있단다. 미술칼럼을 쓰는 지인의 말을 빌리면 개관전인 ‘오늘의 살롱’전은 지금도 회자되는 전시이며, 컬렉션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커먼센터에 등장하는 작가들을 유심히 지켜보라고 했다. 




커먼센터는 영등포대로에 면한, ‘휴게실(다방)’이라는 간판이 붙은 4층짜리 사무실 건물이다. 낡고 바스라진 것들을 그대로 둔 전시공간은 오래된 물질과 디테일을 찾아온 예술가들의 페티시즘을 느끼게 한다. 볼품없이 각진 건물은 한때 타일로 도배되기도 했고 또 타일이 떨어져나가자 제대로 보수하지도 못한 듯하다. 그 위에 먹색 페인트로 덧칠하고 창문마다 검은 종이 위에 흰색의 두꺼운 테이프로 X자를 그렸다. 검은색의 창호와 먹색의 벽은 내부의 빛과 흰 공간과 적절한 리듬을 연주한다. 두꺼운 ‘X’가 저돌적이다.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음. 이것이야말로 커먼센터의 아이덴티티다. 또한 영등포에 스며든 젊은 예술가들의 아이덴티티이기도 하다. 





크기가 제각각인 사무실 공간은 적절히 분할된 전시장이 된다. 뜯어내다만 벽지, 그냥 내버려준듯한 전기 배선과 조명, 벽돌이 드러난 벽과 천장... 이전 삶의 기록이 역력하다. 훤히 열린 창문으로 빛이 새어든다. 옥상과 열린 창문은 건물 주변으로 낡아서 바스라지는 영등포의 속살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또다른 전시장이다.










회색덩어리같은 센터의 내부는 날선 모서리로 가득하다. 그늘진 주름 사이로 지금 우리의 모습이 겹쳐진다. 전시의 주제는 “혼자 사는 법”이다. 우리는 어째서 “지금, 여기” 있음을 이렇게도 자주 일깨워야하는가. 이 사회에 살면서 그토록 자주 정체성을 떠올려야 하는가. 혼란한 시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공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고민일까. 그늘진 모서리에 잠시 몸을 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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