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의 마당은 참으로 정갈했습니다. 누군가의 집에 초대를 받아 놀러갈 때, 이런 집을 만나게 되면 참 좋겠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일견 평범해보이는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80년의 세월을 간직한 한옥이 나타났습니다. 


댓돌이 신발을 벗고 대청에 올라앉으니 맞은편 담벼락으로 어여쁜 장식이 넘겨다보입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집을 가꾸었지요. 과하지 않게 취향을 담아서 장식하고 고치고 다듬고... 


이 장식들은 누구의 솜씨일까요? 


전통 산수화를 그린 아버지일까, 그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림을 그리거나 혹은 다른 일을 했던 아들의 솜씨일까, 얼마나 오래전부터 담을 장식해왔던 것일까요? 대답 없는 집을 한바퀴 돌아봅니다. 정갈하고 단정한 집. 마치 화선지에 검은 먹으로 그리는 수묵화처럼 조신하고 조용한 느낌이 집 안에서도 담뿍 묻어납니다.  














근대 전통화의 주요 인물인 청전 이상범 선생이 살았던 청전화옥과 그의 화실인 '청연산방'입니다. 누하동 조용한 골목 안쪽에 자리잡고 있지요. 요즘 서촌은 어딜가나 관광객과 산보객으로 들끓고 있지만 누하동 아랫골목은 다소 조용하니 다행입니다. 


화가는 특별하지 않은 우리 산하를 자주 그렸습니다. 검은 먹선으로 전통적인 필법을 정교하게 구사하여 우리 산수를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전통의 그늘을 고집스럽게 추구했던 청전의 길은 고요히 침하하는 것 같습니다. 


화가는 제자를 길러낸 산실인 화실을 영구 보전해줄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1972년에 타계했습니다. 화실 '청연산방'은 선생 가족이 살던 한옥과 또한 후에 가족들이 개축한 양옥집 사이에 있었습니다. 원래 작은 일본식 목조가옥이었는데, 양옥집을 증축하면서 화실도 그 안에 자리잡게 됩니다.   























2006년에 문화재청에서 발행한 기록화보고서는 한옥과 화가의 화실이 복원되기 전의 모습을 실측한 자료를 싣고 있습니다. 이 자료를 보면, 담이 있는 곳 앞에 방과 화장실이 증측되어 있음을 알 수 있어요. 



청전은 1971년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긴 글을 잡지<신동아>에 썼습니다. 그는 몰락하는 옛 왕조 말기에 태어나 식민지 시대와 해방, 전쟁을 모두 경험했습니다. 그 경험이 화가로 하여금 검은 점으로 환원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먹고 살기 위해 붓을 선택한 이야기, 때마침 당대 훌륭한 선생으로 불리던 안중식과 조석진 문하에서 사숙하며 스승의 필법을 닮기 위해 노력했던 나날들, 함께 배우던 동인들과 창덕궁 대전 벽화를 그리던 순간, 그리고 동아일보사에서 삽화 기자로 일하며 만난 주당들의 이야기는 마치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 즐겁습니다. 



1936년 8월 이상범은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하고서도 얼굴을 숙이고 있는 마라톤 선수 손기정의 가슴에 걸린 일장기를 지웁니다. 그 후로 동아일보는 신문을 발행하지 못하게 되고 관련자들은 모두 요주의 인물로 감시 당하게 됩니다. 청전은 몇 해 동안 붓을 멈춘 채로 있어야 했습니다. 외부활동을 끊고 집에 화숙을 차려서 그림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스승이 했던 대로 그림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을 제자로 삼아 그림에 정진합니다. 그 후로도 은신하며 조용히 살아온 화가는 글의 말미에서 “우리가 얼마나 훌륭한 친구들과 사위며 우리미술을 진작시켰는가”를 꼭 알려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나는 퍽 감동스러워 이 글을 여러 번 읽었습니다.  




















나는 화숙을 보전해달라는 유언을 남긴 화가를 떠올리며 그의 화실로 들어섭니다. 딱지처럼 조그마한 판화지에 그린 삽화들과 빨간 전각들을 들여다봅니다. 화가가 채 완성하지 못한 그림들, 소품들. 개인전을 한번도 열지 않았던 노화가의 의지를 읽어봅니다. 후대 화가들이 감동하며 이야기하는 그의 인품에 대해서도 생각해봅니다. 그의 그림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미술관에 다수 소장되어 있습니다.




아니,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청전의 붓이 허공에 잠시 멈추었던 시간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가 쓰지 않았으나 엄연한 사실들. 도려내고 싶은 시간으로. 청전은 신문사를 그만두고 칩거하는 동안, 고요히 자신으로만 향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청전은 1940년대 일제의 대동아공영을 찬동하는 그림을 그려 다수의 전람회에 출품했고 징병제를 옹호하는 삽화를 그렸습니다. 해방 직후 그는 부역한 댓가로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제외되었지만 미군정 치하에서 우익미술화단이 형성되자 다시금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국전작가와 국전 심사위원으로 추대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청전의 장남이자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동양화를 그린 화가인 이건영이 북한으로 간 사건은 다른 의미에서 화가에게 시련이었습니다. 친일 부역과 월북한 화가 아들. 화가는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나는 화가가 조용한 삶을 선택한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집을 끝까지 지켜달라는 마지막 부탁이 참으로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가 말하지 않은 것까지 더듬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을 통해 아직 명확히 규명되지 않고 잊히기에 급급한 시절을 확인하고 다시 회자되는 가능성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청전의 집은 한 인간의 복잡한 인생과 평가를 바라보는 곳입니다. 이런 장소가 중요한 것은, 우리 삶은 단 하나의 모습만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씌어진 것과 씌어지지 않은 것, 드러내고 싶은 것과 도려내고 싶은 것을 함께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많이 더 자주 우리의 근과거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 복잡하고 지난하고 치욕스런 순간들이 계속 덮이고 지워지고 잊힌다면 청전의 붓은 여전히 멈춰진 상태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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