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랄딘 하비에르.(Graldine Javier)
그녀의 작품을 보지 않았더라면, 공간에 대해 쓸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물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공간건축이 도산하고 그 유명한 건축물이 매물로 나왔다. 미술 컬렉션의 큰 손이었다가, 예술가로 변신했다가, 국내에는 천안, 서울, 제주에, 해외에는 북경, 뉴욕에 갤러리를 두고 있는 아라리오 김창일 회장이, 답보 상태에 머물러있던 공간 사옥을 인수했다. 그리하여, 공간 사옥이 아라리오 미술관으로 바뀌어 9월 1일 개관했다.
이 소식은 꽤 유쾌하게 들렸다. 아라리오라면, 이 공간이 틀에 박히지 않은 신선한 장소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고, 오너의 폭넓은 컬렉션을 한자리에서 구경하는 것도 볼만하지 않겠나 싶었다. 김수근 건축의 정점이자 현대건축의 하나의 이정표를 찍었던 장소였으므로, 건축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더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었다.
개관하고서도 차일피일 미루다가 지난 주에야 비로소 미술관을 둘러보았다.
이 건물이 건축사무소였을 때, 나는 이곳을 여러차례 방문했었다. 십수년 전 잡지 기자였을 무렵의 일이다. 공간 사옥에는 <공간>이라는 잡지를 만드는 편집부가 있었다. 초짜 기자였을 무렵, 공간지에는 나에게 선배였던 최연숙 기자가 있었다. 나는 그녀를 꽤 좋아했다. 나와는 동향이었는데다 건축계에서 저돌적인 여인으로 소문나있었다. 점잖고 말이 느린 건축기자들 사이에서 직선적이고 성격이 급했던 그녀였으니 이런저런 말들이 왜 없었으랴. 그녀는 언젠가 나에게 함께 일해보자고 제안한 적도 있었으나 그러지는 못했고, 건축기자들끼리 친했던 만큼 워크숍을 함께 가거나 술자리도 하곤 했다. 존재만으로 든든한 선배였다.
건축계에 뼈를 묻을 것 같았던 그녀는 병마와 싸우다가 5년전 여름에 세상을 떠났고, 나는 그녀의 나이를 지나쳐 지금에 왔다. 벌써 그만큼 지났구나. 그 여름이.
그리고 그녀와 스치며 내 후배가 그 잡지사에 입사하여 오랫동안 그곳에 있었다. 그들의 안내로 회사 내부를 구경하기도 했는데, 그 기억조차도 꽤 오래되어 벽돌과 좁고 넓은 느낌만으로 남아있다. 그녀와 내 후배 모두 공간을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이 건물은 그렇게 가깝게 느껴졌다. 그저 단편적인 기억일 뿐인데도 말이다.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자주 지나다니는 원서동 길에 오랫동안 있었기 때문일까? 담쟁이가 덮였다가 떨어졌다가 하면서 검은 벽돌의 몸체를 드러냈다가 감추었다가 하는 그 건물.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표지석이었기에, 이 건물이 사라지게 된다면 무척 애석했을 것이다.
나는 익숙하게 출입구쪽으로 다가가다가, 문이 닫힌 것을 보고 당황했다. 미술관으로 바꾸면서 입구가 달라져있었다. 그러자 나는 처음 이곳에 온 사람처럼 모든 것이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미술관 동선에 따라 한쪽 면으로 5층까지 올라갔다가 다른쪽 공간으로 지하까지 내려오는 구조로 바뀌었고, 층층마다 귀에 익은 이름의 예술가들의 야심만만한 작품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백남준과 신디셔먼과 키스해링과 잘 나가는 국내 작가들의 작품을 건성 건성 바라보았다.
공간은 힘이 셌다. 어느 곳 하나 허투루 바라볼 데가 없었다. 벽돌로 단단하게 구축된 건물은, 층고가 낮아서 낯선 긴장감을 주었다. 조밀하게 쪼개진 공간과 그런대로 트인 공간이 뒤섞여 닮은 장소가 한군데도 없었다. 몇 번을 오가도 과연 내가 이 건물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대답하기 어려웠다. 건축을 이루는 익숙한 듯 낯선 질감들이 마치 환영처럼 온갖 기억을 재생시켰다. 창밖으로 언뜻 보이는 장면들도 모두 정교하게 설정된 것만 같았다. 나는 작품을 보는 시간 만큼 공간을 보았다. 창에 서서는 바깥을 바라보았고 계단에서는 묘한 틈들을 보았다. 이런저런 기억을 반복재생하느라 감정이 복잡해졌다.
이 공간 안에서 대단한 작품들이 맥을 못추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아마 나만의 느낌이 아닐 것이다. 거대한 작품들은 이미 지나가버린 어떤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우리 시대와 관통하기에는 섬세하게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지금 우리에게 플럭서스가, 그래피티가, 액션 포토가 과연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러다가, 그녀의 작품을 보았다. 제랄딘 하비에르의 <마담 A>라는 비디오 작품이었다.
28분짜리. 나는 꼬박 서서 이 작품을 보았다.
이 작품을 보지 않았더라면, 이 미술관에 대한 생각은 관람 하기 전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있었기에 건축은, 작품은, 사물들은, 모두 그 전과 달라졌다.
필리핀의 신예작가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었다. 동남아 열대의 환상적인 언어들이 낯설고 즐거웠다. 작품 언저리에서 조지아 오키프와 프리다 칼로가 함께 보였다. 제랄딘 하비에르는 도대체 누구일까? 나는 그녀의 이름을 얼른 메모했다.
마담 A의 내용은 복잡하지 않았다. 유려한 영상과 분명 작가가 직접 만들었을 수많은 소품들이 영상 속에 등장했다.
프랑스에서 건너와 전세계를 방랑하다 필리핀 케손 섬에 정착하게 된 마담의 일대기 였다. 나는 영상이 흐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담 A'가 벨 에포크 시대의 화가 존싱어 사전트가 그린 <마담x>의 주인공인 마담 고트로의 실제 스캔들과 예술가의 상상력이 빚어낸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야기는 마담이 평생을 모아둔 이상야릇한 물건들(동물의 뼈, 새의 그림, 아름답지만 무용한 종류의 소품들)이 가득한 마담의 오래된 집에 대한 것이었다. 마담은 그것을 박물관이라 불렀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마담은 마녀와도 같았다. 그녀는 오랜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아름다웠고, 풀이끼와 마른 꽃나무가 뒤섞인 정원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으며,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다. 마담이 떠난 후 사물들도 흩어지고 집은 점점 폐허가 되었고 어느 새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그 장소를 안타까워하던 몇몇의 사람들이 있어서 마담의 집에 대한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등장인물 중 한명이 이야기한다.
(작품은 촬영이 불가하므로, 나는 비디오에 나오는 내용을 부랴부랴 받아 적었다.
따라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질문에 모든 해답을 얻은 것은 아니었지요. 그러나 한가지는 알 수 있었습니다.
박물관은 건축이나 분류에 대한 것만은아니라는 겁니다. 박물관은 정신적인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
"우리는 사물을 모읍니다. 그것과 대화하기 위해서죠."
"사물들은 자신만의 시적인 언어로 이야기하고, 우리는 우연히 그것들의 이야기를 아주 조금 알아듣는 것이지요."
"사물들은 말합니다. 마치 오랜 친구처럼."
이 말은 며칠 동안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내가 모으는 사물들, 무용하지만 아름다운 것들에 정당한 위치를 부여해주었고, 내가 하고 있는 기록들, 내가 보러 다니는 그림들, 박물관들을 좀더 사랑스럽게 만들어주었다. 신비롭고 즐거운 이야기는 계속 존재해야 하는 것을 보여주는 유려한 영상이었다. 이것이 영상의 힘이었다. 물론 '아름다운' 영상의 힘이었다.
모든 멀리 있던 예술이라는 것이 내 가까이로 훌쩍 다가왔다.
나는 이제부터 원서동의 공간 건축을 제랄딘 하비에르를 알게 해준 곳으로 바꿔 기억하게 될 것이다. 기억을 위한 사물들의 아름다움과, 그 사물들에게는 귀를 기울이면 들리는 아름다운 시적인 언어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곳으로. 그런 예술가를 만나게 해준 곳으로서.
그렇다면 이 '공간'은 어떤가. 이 건축물도 하나의 사물로서, 특별하고도 시적인 이야기를 발산하지 않을까? 도시에 오래된 점으로서. 이 장소를 거쳐간 많은 인물의 기억과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장소로서, 혹은 애정과 음모와 배신 같은 드라마로서, 그리고 예술이라는 이야기로서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우연히 들리게 될 이야기로서 '공간'은 오랫동안 거기에 있을 것이다.
*** 아래는 마담A의 첫 장면이 나오는 티저 영상 중 캡쳐한 이미지다. 몇 장면이지만 영상의 느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제랄딘 하비에르의 작품을 칭송하며 쓴 글이니 이 사진이 저작권 관련해서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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