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북성로는 공구제조 골목으로 유명하다. 북성로 재발견이 이루어지는 까닭은?
도로의 폭과 건물의 규모를 보면서 100년 전 풍경을 어림짐작해볼 수 있다.
대구에 또 갔다. 이번엔 독립기념관에서 시행하는 교사 연수 답사 진행차 다녀왔다. 이번 방문에는 답사지와 별도로 내가 좀더 둘러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북성로.
공구골목이라 우당탕쿵탕 소란스런 소리도 들리고 물류 이송차량도도 빈번히 다닌다. 예쁜 장소는 아니다. 그렇지만 조금 돌아다녀보면 뭔가 느낌이 온다. 오래된 곳임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건물들, 철지난 간판이 붙어있는 좁은 골목들, 큰 도로와 좁은 골목 사이에 존재하는 묘한 분위기의 집과 남루한 여관과 정체모를 상점들이 겹겹이 들어차 있다. 왠지 양파처럼 껍질을 벗기면 또다른 속살을 보여줄 것 같은 그런 곳이다.
북성로는 어떤 곳일까?
대구는 경상감영이라 하여 경상도를 아우르는 행정중심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 경상감영을 중심으로 임진왜란 이후에 석성을 쌓아 대구 읍성이 세워졌다. 사람들은 읍성 안에 모여살았다. 개화기 이후 외국인들이 대구에 들어왔지만 전통적으로 행정과 상업 중심지였던 대구에 대규모로 외국인들이 유입되기는 어려웠다. 인천, 부산, 군산 등지에는 외국인들이 자기네 국적 사람들끼리 합법적으로 모여살던 조계지가 있었는데 대구는 그렇지 않았다.
개신교 선교사가 대구를 세거지로 하는 달성서씨로부터 동산 지역의 땅을 매입하여 모여살았고 남산 쪽에는 달성서씨 부자들의 후원을 받은 카톨릭 성당과 수도원이 들어와 성지를 일구었다. 일본인들은 경부선이 놓일 때 이 지역에 많이 들어왔다. 철도회사와 은행에서 일하는 엘리트도 많았고 철도 공사를 맡아하던 노동자들도 많았고 노동자를 상대로 하던 매춘부도 많았다. 이들은 성의 북쪽에 터를 잡았고 거류민단을 형성하여 대구 행정관들과 결탁하거나 그들을 압박하여 읍성 철거를 주장했다.
친일파였던 대구군수 겸 경상관찰사 서리인 박중양이 1907년 읍성을 철거했다. 읍성이 철거된 자리는 신작로로 바뀌었다.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는 읍성이 있던 자리에 생겨난 도로 이름이다. 이 중에서 서성로와 남성로는 조선인 유지들이 많이 살았고 동성로와 북성로는 일본인들의 거리였다. 이 두 지역은 일본식 지명으로 본정(本町;혼마치)을 경계로 나뉘어졌다. 본정은 현재 포정동 일대이며 경찰서, 은행, 경상도청, 우체국, 헌병대가 포진해있다. 그 북쪽으로 일본인 학교와 주택지, 유흥가가 생겨났다. 더 북쪽 켜에는 일본인 노동자들의 집단주거지와 유곽이 자리를 잡았다. 전기왕으로 불리며 일찌기 대구의 거부가 되었으며 문화재 약탈가로 악명높은 오쿠라 다케노스케의 집은 대구역과 가까운 동북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일찌기 대구 읍성의 북문과 동문 인근에 땅을 사들였고 대구 읍성 철거를 앞장서서 주장했다. 현재 동아백화점 주차장 부지에 위치했던 오쿠라의 저택은 600평에 달하는 큰 저택이었다고 한다.
북성로 지역은 원정(元町;모토마치)이라 불리며 일제강점기 도시 발전의 중심 역할을 했다.
일본 내에서도 유명한 체인 백화점이었던 미나카이백화점이 최초로 조선땅에 진출한 곳이 대구 북성로다. 미나카이 백화점은 엘리베이터가 있어서 유명세를 달렸다. 담배공장인 연초제조창도 북성로 수창동에 세워졌다. 연초제조창은 대구 산업을 이끌었다. 이 거리는 '순종황제어가길'이라는 이름의 도로가 있다. 1909년 대구를 시찰하러 온 순종황제가 대구역에 내려 달성까지 행차한 거리이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식민지 사업으로 일궈낸 근대화의 거리 북성로. 한일병합을 전후하여 북성로는 대구의 발전상을 오롯이 보여주는 곳이었다.
일제강점기 이 거리는 목욕탕인 조일탕, 재림소와 재목소, 포도주 판매점, 장신구점, 곡물회사, 철물점, 양복점, 조경회사가 거리에 포진해있던 상업 골목이다. 한 골목 안쪽에는 식당, 영화관, 여관 등 먹고 마시는 유흥의 거리가 연결된 다.
대구 연초제조창.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지금은 비어있는 거대한 괴물.
연초제조창 창고 건물. 창고도 만만치 않은 규모를 자랑한다. 대구 연초 산업의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다.
광복 이후에는 미군부대가 근처에 생겨났고 이곳에서 나온 폐공구들을 수집하여 공구 영업을 하게 되면서 새로운 산업이 형성되었다. 태평로와 연결되어 기계 공구, 기계 부품 산업 및 창고업이 발달하게 되면서 명실공히 공구거리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 공구거리의 역사만 해도 60년이 넘는다. 1970년대 산업시대에는 북성로의 황금기였다. 넓은 골목에 지나갈 틈없이 사고파는 사람, 구경하는 사람, 운반하는 차량, 안전관리하는 경찰로 북적거렸다.
1998년에는 검단동이라는 지역에 기계부품 유통단지를 형성하여 중소업체들이 이전하도록 유도하여 많은 업체가 빠져나가기는 했지만, 서울의 청계천과는 달리 북성로 공구거리는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대부분의 업주들이 대를 물려 영업해오고 있다고 한다. 건물도 대를 물리고 가업도 대를 물리는 그런 장소다.
피란 시절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모나미 다방. 꽃자리 다방은 화재가 나서 내부가 사라졌다. 이야기도 흩어졌다. 야마구치 도자기점의 아름다운 장식은 흔적만 남았다. 골목 안에는 작고 오래된 여관들이 지금도 영업중이다.
이 거리의 스토리라인을 만드는 또 하나의 축은 전쟁 즈음에 피란온 문인과 예술가들이 모여 삶을 논하던 거리라는 점이다. 구상, 조지훈, 유치환이 오가고 이중섭, 서동진, 권태호가 커피를 마시던 곳이다. 건물들은 한때 다방과 여관이 되었다가 다시 식당과 철물점이 되었다가 버려지거나 비거나 하며 공구 산업과는 다른 이야기를 이어갔다. 건물은 거대한 입간판으로 가려져있지만 간판과 외부 건축재료만 발라내면 옛과 다름없는 속살을 드러낼 것이다. 그 속에 담긴 오롯한 이야기들이 궁금해진다.
대구 신택리지/ 거리문화시민연대 지음
대구라는 도시의 역사를 빼곡하게 정리 수집하여 엮어낸 책. 시민탐사대들이 힘을 모아 이룩한 성과라는 점이 놀랍다. 오랜시간 자료를 찾아헤맨 사람들 덕분에 대구라는 도시를 좀더 이해하게 되었다. <청춘남녀 백년전 세상을 탐하다>의 대구 관련 원고를 쓸 때 이 책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골목을 걷다: 이야기가 있는 도시여행 / 김기홍 이애란 정혜진 이지용
대구 골목 답사를 할 때 다채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 영남일보 기자들이 골목마다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골라내었다. 삼덕동 빛살미술관, 북성로 연초제조창, 향촌동 이야기, 남산 카톨릭 성지 등이 인상적이었다. <청춘남녀 백년 전 세상을 탐하다>에는 답사하고서도 카톨릭 성지에 대해서 담지 못했다. 경향 인터넷 블로그에 차차 올려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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