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땅콩집에 대한 이야기가 연일 매스컴을 달궜다. 땅콩집이란 한필지에 두 집이 붙어있는 듀플렉스 형 주택을 지어 두 세대가 사는 것이다. 거침없는 집값, 땅값을 절반으로 낮추면서 마당있는 집을 가질 수 있다는 도심형 주택의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서울 근교에 널찍한 단독주택을 3억에 지을 수 있다는 게 더 매력적이었던 것 같다. 이렇듯 집은 경제적인 관점에서 비껴갈 수가 없다. 그게 평생 살고 싶은 집이건, 분양받았다가 되팔고 나가건 간에. 부동산 아니면 돈을 벌 수 없는 묘한 구조 속에 사는 우리로서는. 집은, 재산이며 또한 재산을 불려주는 화수분이다. 아마도 영원히 화수분이길 바랄 것이다.


집은 영원한 숙제다. 우리가 몸담고 사는 곳의 의미를 쉽게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남들과 다른 공간에서 살고 싶은 사람들도 많고 남들과 똑같은 장소에서 살아야 마음이 편하다는 사람도 있다. 집에서 삶의 효율을 찾는 사람도 있고 집을 통해서 취향을 과시하고픈 사람도 있다. 나의 집은 어떠한가?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다.


집이란 개개인들의 공간이다 보니 사적인 영역의 논의라 여겨지겠지만 주택을 둘러싼 각종 법규와 제도와 역사와 문화를 따져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 집은 공공의 영역이다. 나라에서 국민이 사는 집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의 형태와 상황과 돈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집의 공공성과 더불어 공공주택의 중요성은 점점 더 역할이 커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재개발, 신도시 개발 위주의 대단지 계획에 밀려 공공주택 분야는 정부의 주택 정책에서 부수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부분이 있다.


지금부터 반세기 전 서울이 가진 문제점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전쟁 이후 월남한 사람들과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로 서울은 미어지고 터질 지경이었다. 안그래도 폐허가 된 도시에는 턱없이 살 집이 부족했던 터, 집을 제공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들이 끊이지 않았다. 광부 후인 1945년 조선주택영단에서 실시한 국민주택 현상설계, 전후인 1957년에는 미국과 우리가 공동으로 주관한 전국주택설계 현상공모 등이 생겨나 집단계획이나 주택의 대량 생산에 대한 접근이 시작되었다.

그와 함께 공공부문에서 주택재건사업이 시작되었다. 지금으로 치자면 주공과 같은 역할을 했던 주택영단이 1952년에 부산 영도 청학동에 흙벽돌집 200호를 건설했고, 서울 환도 후에 재건주택이라 하여 외국의 차관을 도입하여 신속하게 공동주택을 설치했다. 이때 등장한 집들은 9평짜리 흙벽돌집이었으며 정릉천변에 세워졌다. 1956년까지 재건주택, 부흥주택, 희망주택이라는 이름으로 3000여 채에 이르는 주택이 공급되었다. 주민들에게는 집의 이름처럼 희망을 선사한 집들이었을 터이다. 1956년부터는 흙벽돌 대신 시멘트 블록을 사용한 국민주택, 연립주택들이 등장했다.










오늘 가볼 곳은 청량리 부흥주택이다. 청량리는 일제강점기부터 인구가 많이 몰리던 지역이었다. 서울과 원산을 이어주던 경원선의 시발역인 청량리역이 1914년에 개통되었고 1934년에는 중앙선이, 1941년에는 경춘선이 개통하였다. 강원도의 농산물이 자연스럽게 드나들게 되어 재래시장이 생겨났으며 시장에 터를 두고 사는 사람들도 늘어났으며 광복 후, 전쟁 후에도 이 지역은 대표적인 인구조밀지역이었다

홍릉과 가까워 일제강점기에 공원과 풍치지구로 지정되어 있던 빈터에 대단지 주거지를 개발하게 되었다. 서울시에서 1955년에 204호의 시영주택을, 대한주택영단이 1957년에 283호의 영단주택을 건설하여 민간에 보급했다.

원형은 2층으로 된 4호 공동주택이 도로에 맞춰 밀도 있게 배열되었던 것이다. 현재는 4개의 필지를 각각 나누고 담을 쌓고 대문으로 따로 만들어 마치 단독주택이 일렬로 배열된 듯한 분위기를 준다. 답사했을 때는 이 주택들이 그저 이웃집과 비슷하게 지은 단독주택인 줄로만 알았는데, 4호가 하나의 공동주택이었음은 자료를 보고서야 알았다.








50년의 세월을 이어오면서 원래의 구조를 그대로 갖고 있는 주택들이 과연 얼마나 남아있을까? 집의 외관과 내부는 살아오면서 많은 첨삭을 겪었지만 집의 원형을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니다. 집의 원래 형태, 구조를 짐작할 수 있는 흔적들도 많다. 더우기 지금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15~17평형대의 작은 규모의 단독주택을 보면서 놀랍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했다. 내부의 방은 얼마만한 크기이며 사람들은 불편함없이 살고 있을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들이 대책없이 크기만 지향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동안 집은 변화를 많이 겪었다. 우선 4호가 하나였던 공동주택의 구조에서 1호 개인주택처럼 담을 쌓고 대문을 달았다. 목구조 형식을 여전히 갖고 있지만 집 구조를 튼튼하게 하고 나름대로 집에 개성을 부여하기 위해  집집마다 다양한 모양새로 변화되었다. 타일을 바른 집, 벽돌을 쌓은 집, 콘크리트 시멘트로 깨끗하게 바른 집 등.... 또한 2층에 세를 주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가는 별도의 계단을 만들었으며 비어있는 곳으로 지속적으로 증축되다보니 집들이 각각 형태가 달라져있다. 원래는 내부에 계단이 있었을 것이며 목조형 2층집의 난방을 위해 다다미를 썼던 적도 있다고 하지만, 삶의 방식은 집의 구조를 변화시켰다.


 

전쟁 직후에 세워진 집들은 흙벽돌이 많았다. 미국에서 지원해준 건축재료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보는 적벽돌은 흙으로 빚어 구워낸 것이지만 흙벽돌은 말린 벽돌이다. 따라서 내구성이 적벽돌에 비해 떨어진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돌을 깨어 섞어서 벽돌을 만들기도 했다. 청량리 부흥주택에서도 이 상황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우리에게는 적벽돌을 하급의 재료로 인식해온 알 수 없는 역사도 있다. 벽돌구조에 시멘트를 발라 매끈한 몸체를 자랑하거나 타일을 붙여 반짝반짝하게 장식하는 것을 더 보기 좋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렇듯 건축재료에 대한 다양한 통념들, 변화된 생각들을 보여주는 사례들을 오래된 주거지에서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청량리2동 부흥주택 지역에서는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길을 따라 왼쪽편의 주택지와 오른쪽 편의 주택지가 도로 폭이 다르다. 왼쪽 주택지의 경우는 도로폭이 넓으면서 서로 대문이 마주보고 있고, 오른쪽 주택지는 도로폭이 사람 하나 지나다닐 정도로 좁으면서 한쪽에만 남측으로 대문이 나있다. 즉 왼쪽 주택지는 등을 맞대고 두 개의 건물이 붙어있는 경우이며 오른쪽은 1개의 건물이 하나의 방향으로 서있는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양쪽은 각기 주택 건설 주체가 다르다. 한쪽은 서울시, 한쪽은 대한주택영단이라는.

집집마다 내놓은 화분들이 정원 없이 좁은 마당을 갖고 사는 사람들의 숨을 틔여주는 것 같다. 초록의 나무들과 함께 숨쉬고 싶은 마음이 화분들을 집밖에 내놓는 것으로 표현되는가 싶다. 이렇게 오래된 주거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요즘 도시계획에는 해당 지역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함께 도로, 학교, 주차시설, 상업지구, 대중교통 시설 등이 함께 고려되지만, 부흥주택이 계획되고 지어질 당시에는 이 주변 지역에 대한 기반시설 계획은 함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대로변에 인접한 가옥들은 자연스럽게 상점주거 형태로 바뀌었다. 지역의 요구에 따라 주거지의 표정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오래된 집 뒤로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이 지역도 재개발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오래되고 좁은 가옥들, 이제 낡고 보잘 것 없어진 집들, 너무나 많은 층개축으로 인해 원형을 잃어버린 집들, 그리고 원형의 시작조차 선하거나 완벽하지 않았던 계획. 그러므로 부흥주택의 현재 모습은 어쩌면 재개발로 새로운 주거를 제안하는 것이 옳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층의 주거지를 둘러보면서 이 장소만의 매력이 분명이 있음을 보았다. 도시의 역사를 품고 있는 거리와 집들이 주는 이상야릇한 포스는 한번 보면 쉽게 잊히지 않는다. 서울에서는 보기드문 저층의 주거지라는 점도, 천편일률적인 다가구 빌라가 아직 점유하지 않았다는 점도 천연기념물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분명 좁고 남루한 집들임에 분명하지만 낡고 바스라지게 내버려두지 않고 꼼꼼하게 고치고 다듬으며 살아온 흔적들이 살뜰하다. 동네는 깨끗하고 조용했다. 이런 지역을 어떻게 논의하고 포괄할 지 선하고 의미있는 도시계획이 세워지길 기다려보고자 한다.



주택영단이란?
1941년 일제가 주택 보급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선주택영단은 광복 후에도 그대로 존속되었다. 1948년에 대한주택영단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62년에는 대한주택공사가 되었다. 알고 보면 많은 것들이 일제강점기에 정립되었다가 광복후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참고자료
정아선, 최장순, 최찬환, 청량리 부흥주택의 특성 및 변화에 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제20권 1호(통권 183호),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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