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 도라지, 장미, 88, 거북선. 이들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까요?
이들 모두 담배 이름입니다. 어렸을 적에 아버지와 친척 어른들이 태우시던 담배들이죠. 왠지 옛날 생각이 듭니다. 그땐 금지된 물건, 어른들만 사용하는 물건이었으니까요. "솔 한갑 주세요."하며 담배 심부름도 했던 기억도 불쑥 떠오르네요. 요즘은 이러면 큰일나겠죠. 위의 사진을 보니 한라산, 청자. 이런 담배도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청자는 시골 외할머니가 태우시던 것이고, 아버진 솔을 좋아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금연이 대세인 요즘이라, 담배산업도 예전만 못하겠다 싶습니다. 저는 담배를 피우지는 않지만, 담배공장 돌아보는 것은 좋아라 합니다. 오늘은 담배공장 다녀온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름하여 연초제조창!
청주 연초제조창의 초창기 모습. 현재의 건물이 세워지기 전에 다른 형태의 공장 건물이 있었나 봅니다.
연초제조창은 담배 원료를 가공하여 완성된 담배 제품을 만들어내는 공장입니다. 우리에게는 좀 낯선 이름이지만 어른들은 아마도 이 장소가 많이 친숙할 겁니다. 어쩌다 보니 다른 공장보다는 담배공장을 돌아볼 기회가 많았는데요. 대구와 청주, 제천 등지에 있는 연초제조창과 창고, 엽연초수납시설물, 그리고 엽연초 조합 사무실 등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대구와 청주 지역의 연초제조창이 도시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거대한 산업시설물 단지라는 점입니다. 건물을 몽땅 허물기에는 규모가 너무나 크고 활용하자니 그에 대한 제약도 크고 해서 방치된 상태죠. 이들 장소가 과연 어떻게 바뀌어 도시의 색깔을 만들어가는 데 일조할까, 그것을 유심히 지켜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청주 연초제조창의 메인 건물인 원료가공공장의 측면입니다. 규모가, 만만치 않습니다. 거대한 건물 구경할 생각에 가슴이 두근두근. 저 안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청주연초제조창은 1946년에 설립되었으며 현대적인 공장시설은 1953년부터 가동되었습니다. 그후 연간 100억 개비 이상의 담배를 생산하면서 청주를 비롯한 충북 지역 산업의 중추 역할을 해왔습니다. 총 대지면적은 122,407m2이며 공장과 창고, 부속시설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서있었죠. 청주 연초제조창은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담배공장 시설이며 3천 명 이상, 많을 때는 1만 명의 근로자들이 일했다고 합니다.
2009년 가을에 충북의 농촌에 사시는 분들을 정기적으로 만나뵐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에도 담배농사 이야기를 해주신 분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이런 분들이 농사지은 담뱃잎을 엽연초 수납시설에서 평가하고 매입한 후 거대한 통에 어느 정도 숙성을 시키죠. 그 후 보관되어 있던 엽연초들을 각 지역의 연초제조창으로 보내서 잘게 부수고 종이로 말고 자르고 패키징하여 담배 상품으로 제조하게 되는 겁니다.
청주 연초제조창은 1999년에 공장이 운영을 중단했고 2004년에 완전히 문을 닫았습니다. 공장건물 중 가장 뒤에 있는 1자형 공장은 청주문화산업단지로 바뀌어 어린이 교육시설과 문화시설 들이 입주해 있는 상황이었지만, 규모가 가장 큰 원료가공공장과 원료 창고는 7년여를 잠들어있었던 셈입니다. 창고 중 가장 가장자리에 있는 창고시설은 임대되어 활용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이 지역은 고즈넉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지요. 청주 수암골 등지에서 촬된 <제빵왕 김탁구>라는 드라마가 히트한 후에, 동부창고에 부분적으로 드라마 세트장을 설치하여 김탁구 전시장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 최근의 일입니다. 한때 이 지역은 공장과 창고를 모두 허물고 대규모 아파트단지를 개발하는 계획이 제시되기도 했지만 여의치 않아 무산되었던 전력이 있지요. 어쨋건 공장과 창고는 남아있었고, 창고지역은 예술가들이 작품을 전시하고 영감을 얻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2년에 한번씩 열리는 청주 공예 비엔날레를 옛 연초제조창에서 개최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잠들어있던 건물이 좋은 쓰임으로 활용된다는 이야기에 청주에 얼른 달려갔습니다. 공예 작품전도 볼 겸, 예전에 미처 들어가보지 못했던 공장과 창고 건물 내부도 구경할 겸 더없이 반가운 기회였습니다. 원체 내부 공간이 널찍하고 공장 건물 자체에 특별한 내부 장식이 없다보니 전시장으로 사용하는데 아주 적절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품의 수도 많았지만 공간 자체가 넓어서 쾌적하게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내부는 부분적으로 전시를 위해 손질하기는 했지만 10여년 전까지는 가동영되던 장소다 보니 많이 낡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습니다. 층고는 높고 공간은 넓고 광원은 적절했습니다.
과연 이 곳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궁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한켠에 연초제조창의 역사를 보여주는 간단한 전시공간이 있어서 더없이 반가웠습니다. 도면을 참고하면서 연초제조창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간단하게 살펴보고 각 시설물을 둘러볼까 합니다.
연초제조창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공간에서 촬영한 도면에 현재 남아있는 건물을 포토샵으로 색깔을 입혀보았습니다. 네이버 위성지도와 크로스 체크해보았더니 원래의 건물이 많이 사라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전시장에서 발견한 이 도면이 연도가 적혀있지 않았지만 연초제조창이 가장 규모가 탄탄했을 때가 아닐까 추측해보았습니다. 푸른색 건물이 전시가 진행중인 원료가공공장이고( 지도에 한글로 멋스럽게 적혀있습니다.) 뒤에 있는 분홍색 건물이 청주문화산업단지로 리노베이션된 건물입니다. 두 공장 사이에 공장이 1동 더 있었던가봅니다. 아랫쪽 연두색 건물이 동부창고입니다. 주황색 건물은 그 외 남아있는 건물입니다. 그럼 들어가볼까요?
1. 연초제조창 가공 공장 - 공예비엔날레 전시장
정면에서 본 연초제조창의 모습입니다. 주말이라 가족 나들이객이 많이 보이네요. 전시 공간도 좋지만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소가 되어서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원료공장은 'ㄱ'자 형태입니다. 규모는 5층이지만 층고가 높아 육중하고 거대합니다. 우측 옥상에는 거대한 환풍기 시설이 보이네요. 대구 연초제조창에서도 보았던 것이라 조금 반가운 마음도 드네요. 문닫은 지 오래된 공장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즐거운 분위기였습니다. 연초제조창을 예술문화공간으로 바꾸자는 여러 요청에 따라 '아트팩토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식당이랑 편의시설이 들어와 있는 건물입니다. 예전에도 식당으로 쓰지 않았을까요? 모던하면서도 단정한 콘크리트 건물이 인상적입니다. 한때 이런 건물들이 참 많았죠.
전시장 내부의 모습입니다. 깊은 공간감과 콘크리트의 회색빛이 차분하게 다가옵니다. 쪽쪽 뻗은 기둥들도 전시물에 크게 방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공간이 넓었기 때문이지요. 전시공간들 잘 살펴보면 부분적으로 옛 공장 시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환기통이라던가, 작업대가 있었던 자리라던가, 이런 흔적들을 엿보는 것도 오래된 건물을 들여다보는 재미라고 할 수 있지요. 공장이라는 산업화된 상품을 생산하는 곳에서 공예와 예술이라는 손맛나는 물건들을 만나보는 것. 그것이 공예 비엔날레를 아트 팩토리에서 개최하게 된 배경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공장이 가동될 당시에는 이런 모습이었겠지요. 당시에는 창문도 참 많았네요. 공장의 기계보다 사람의 일손이 더 많았던 시기였나 봅니다. 사진은 연초제조창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실에서 촬영한 것입니다. 몇 년도 사진인지 확인할 수 없어서 좀 아쉽습니다.
계단실 주변의 복도 공간입니다. 높고 깊으며 빛과 어둠이 적절히 있는 공간. 이런 미니멀한 분위기 때문에 산업시설물에서도 미학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겠지요?
전시관 중 유일하게 촬영이 허락된 장소. 이곳이 연초제조창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실입니다. 3 층 전시를 보고 외부계단으로 내려와 2층 전시로 옮겨가기 전에 만나게 되는 매개공간에 이 전시물들이 있는데, 저는 이곳에서 무척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예전에 이곳에서 일했던 근로자들이 갖고 있던 소중한 자료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사진, 도면, 노트도 있었고 담배 관련 전시물들도 많았습니다.
1920년대부터 최근까지 담배패키지. 담배에는 유난히 꽃과 식물의 이름이 많이 쓰였군요. 목련, 진달래, 라일락, 도라지. 그 외에도 1920년대의 아르누보 풍 패키지에 아리따운 여성이 그려진 것도 있습니다. 이 담배는 여성 애연가를 겨냥한 것인가 봅니다. 또한 일제강점기 일본 육군의 욱일승천기가 인쇄된 패키지도 있군요. 담배 패키지에도 역사적인 의미와 흔적이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담배와 관련된 에피소드들. 이곳에서 먹고 살고 이곳에서 번 돈으로 아이들을 키웠던 사람들을 들여다 봅니다. 군사정권과 혼란한 시국의 모습도 겹쳐집니다. 담배를 많이 피워야 했던 시절이었겠지요. 고되기도 했고 행복하기도 했고 사랑도 했고 죽을 듯 힘들다가도 결국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들여다 봅니다. 표창장, 직업연수확인증, 체육대회, 교련과 예비군 훈련 등등. 그땐 그랬던가 봅니다. 우리 부모님들의 모습 아닐까요?
담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상물이 중간쯤에 상영됩니다. 담배공장과 엽연초 시설을 둘러보면서 느꼈던 궁금함들이 다큐를 보다보니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습니다.
촬영할 때는 오래된 벽만 보고 좋아했는데, 그 옆에 노란 꽃 화분이 놓여있었네요. 미처 몰라주어 미안한 풍경이로군요.
옛 근로자의 아드님이 기증한 공장 기계 도면입니다. 노란 기름종이에 손으로 직접 잉킹한 원본 도면이더군요. 소중한 자료이니 훼손되지 않도록 잘 보관했으면 좋겠습니다. 주요한 도면은 화첩 형식으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세밀한 선과 정교한 글씨. 지금은 컴퓨터가 하는 일을 그때는 모두 손으로 했던 거죠. 한땀 한땀의 장인정신도 그 당시에는 당연한 것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많이 잊어버린 풍경이지만요. 당시의 근로자들은 모두 예술가고 장인들이죠. 저는 이 도면이야말로 장인이 이룩한 공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공장- 청주문화산업단지
보라색으로 칠해진 문화산업단지의 외부 모습입니다. 내 외부가 모두 깨끗하게 리노베이션되어 오래된 건물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3. 동부창고
예술가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탐내볼 만한 동부 창고를 돌아보려고 합니다. 크게 4동이 남아있는데, 과거에는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각 동마다 창고가 두 개 이상으로 나뉘어집니다. 저는 8호 창고에 들어가보았습니다. 이곳에는 청주, 대구, 부산, 안양, 광주, 대전 등지의 미술 대안공간들이 모여 자신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보여주는 전시를 마련했습니다. <도큐멘타 2011>이라는 전시인데, 방문했던 날은 전시가 끝나고 철거가 시작될 즈음이었습니다. 현지 예술가분의 도움을 받아 창고 내부를 들어가볼 수 있었습니다. 또 못볼 뻔했는데, 다행이었죠.
장 스팬 트러스가 거대하게 천장을 받치고 있습니다. 장방형의 단순한 공간이지만 기능적으로 완성된 목재 트러스의 장중하고 엄숙한 구조미가 결합되니 더없이 감성적인 공간이 되었습니다. 기둥 하나 없이 오로지 트러스로 마감된 단순한 공간. 19세기 영국의 미술 평론가인 존 러스킨은 폐허에서 느끼는 멜랑콜리에 대해 쓴 적이 있는데, 예술가들은 이곳에서 과연 어떤 영감을 얻게 될까요?
창고 건물 역시 규모가 만만치가 않습니다. 대도시 갤러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군요. 전시에 참여한 대안공간은 그음공간(가평) 스페이스 배(부산), 스톤앤워터(안양), 매개공간미나리(광주) 스페이스SSEE(대전) 예술상회(청주), 작은공간이소(대구) 재미난 복수(부산) 하이브캠프(청주)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청주)입니다. 이름도 뜻도 재미있을 것 같은 그런 단체들이군요.
얄팍한 생각이긴 하지만 이렇게 넓은 공간을 보니 제가 좋아하는 미술가들의 작품을 이곳에서 전시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쉬 카푸어의 육중한 개념 설치작품, 서도호의 세밀하고도 거대한 설치 조형물, 올라퍼 엘리아슨의 건축미가 넘치는 설치작품과 키네틱 아트를 이곳에서 본다면 참 좋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제프 쿤스가 베르사유 궁전에 설치했던 풍선 강아지도 떠오르는군요. 대단한 작가들이 정말 대단한 작품들을 우리나라에서 보기란 쉽지 않겠지만, 그냥 한번 상상해봅니다. 또한 우리나라의 젊은 예술가들이 그림으로, 사진으로, 조각으로, 대형 영상물이나 음악 공연으로 공간을 채워준다면 그것 또한 얼마나 멋진 일일까요? 버려진 공간이 예술을 뒷받침해주는 멋진 상호작용을 기대해봅니다.
창고의 일부분은 지역 업체가 임대하여 사용하고 있고, 또 부분적으로 김탁구 전시장으로 활용됩니다. 전시장 내부는 들여다보지 않았지만 마지막 창고에 청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인 서문제과의 빵과 우동을 맛볼 수 있습니다. 우동과 빵을 함께 먹는 재미난 풍경이 벌어졌지만 독특한 면발의 우동, 쫄깃하고 담백한 단팥빵은 역시 오래된 빵집다운 포스를 보이더군요. 가격도 저렴하고 빵도 맛있으니 한번쯤 경험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새롭게 활용중인 연초제조창의 희망적인 모습도 보고 두툼한 빵봉지도 들고 나오는 길. 집에 돌아가는 길이 뿌듯하게 느껴집니다.
일정- 2011. 9.21~10.30
주제- 유용지물
입장료- 3000원~10000원
위치- 충북 청주시 상당구 상당로 314번지(내덕2동 201-1)
문의 - www.cheongjubiennale.or.kr / 043-277-25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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