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 소설가의 집필실은 오래된 한옥이었다. 이미 소설가도 세상을 떠나고 없이 빈 집만 남은 셈이다. 다행히 완전히 빈 것은 아니다. 소설가의 딸이 손녀 내외가 자신의 삶을 부려놓은 채 이곳을 지키고 있으니까. 안채, 사랑채, 행랑채가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있는 고택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개량식 한옥이라 하겠지만 유려한 처마선과 연못가로 살짝 몸을 내밀어 'ㄷ'자 형태로 이루어진 사랑채는 소설가가 오랫동안 사랑한 곳다운 힘을 느끼게 했다. 소설가는 이곳을 주수루라 불렀다. 물을 낚는 곳. 낭만적이고 풍류가 가득하다. 

오랫동안 주수루의 주인이었던 소설가의 이름은 월탄 박종화 선생.



문학 전공자가 아니라해도 박종화 선생의 이름은 낯설지 않지만 대표작을 떠올리라고 하면 가물가물하다. 어디쯤엔가 고등학교 수업시간에 배운 것 같기도 한데, 근대 문학에 대해서라면 이육사의 청포도, 윤동주의 별헤는 밤, 김소월 진달래꽃, 이광수 무정, 김동인 감자, 김유정 봄봄, 채만식 탁류,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누가 썼더라, 화수분, 빈처, 그리고 이상의 오감도!...........간헐적이고 단편적인 기억들만 떠오른다. 민족주의냐, 아니냐, 라는 이분법으로, 모든 문학작품을 민족적인 슬픔과 한을 격하게, 반어적으로, 풍자적으로, 해학적으로, 자연주의기법으로, 사실주의기법으로... 이렇게 배웠던 것 같다.


1920년대 우리 문학에는 낭만주의, 퇴폐주의 문학 사조들이 등장했다. 1919년 3,1만세 운동이 좌절된 후 절망에 빠진 젊은 문학도들이 허무와 퇴폐를 언어로 쌓고 쌓았다. <백조>< 폐허>같은 시 동인지들이 이들의 중심에 있었다. 백조를 창간한 시인이 박종화다. 백조에는 홍사용, 현진건, 이상화, 나도향, 김기진, 이광수가 참여했다. 이광수만 30대였고 나머지는 모두 20대 초반의 젊고 뜨거운 청년들이었다. 그 시대에 시를 쓰기 위해 모여든 젊은이들이라니. 박종화는 시인이었다. 백조 창간호에 발표한 그의 시 '밀실로 돌아가다'의 한부분이다. 


"하늘엔 고요히 별이 흐른다
거짓같은 젊은 삶의 날은
끝없이 끝없이 별 위에 춤을 추는데 
아아, 나는 돌아가다
쓸쓸하고 고요한 
나릿한 만수향 냄새 떠도는
캄캄한 내 밀실로 돌아가다"



요즘에도 시가 부쩍 많아졌다. 출판물 중에도 시의 비중이 높아졌고 옛 시를 다시 읽고 추려읽고 해석하며 읽기를 권하는 수많은 책들이 있다. 사람들이 시를 좋아한다고 스스럼 없이 말하며 시 읽기를 권한다. 시는 그 짧고 간결한 문장 속에 시대를 반영한다. 시대에 바라는 게 많을 때, 시대가 격변할 때, 시대가 울분할 때, 시가 쓰여지고 읽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오랫동안 시인으로 기억하고 있던 박종화는 근대문학계에서 역사소설의 개척자로 불린다.


1930년대에 이르러 박종화는 허무와 결별하면서 시에서 소설로 방향을 바꾼다. 그것도 역사소설이다. 1935년부터 대한매일신보에 <금삼의 피>를 연재하면서 역사 속에서 주제를 취한 본격 대하 소설가로 자리잡는다. 금삼의 피는 폐비윤씨의 죽음의 비밀을 알게된 연산군이 폭정을 저지르는 역사의 한 장면을 소설로 옮긴 것이다. 1981년 80세로 별세할 때까지 삼국지, 임진왜란, 여인천하, 세종대왕, 홍경래 등의 선이 굵은 작품을 남겼다. 오랜 세월 오직 문인으로서 집필활동을 해온 노 작가의 필력. 그 필력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나이가 들수록 더 단단하고 깊은 글을 써내고 싶은 신출내기 작가의 눈에도. 



 



평창동 언저리에 갑작스레 등장한 한옥집이 바로 월탄 박종화 고택이다. 벽돌 담장 위로 처마를 둘러싼 물받이 홈통이 날렵한 선을 드러낸다.  단정하고 규모가 큰 저택들이 즐비한 거리에 한옥은 아무래도 눈에 띈다. 높이 솟은 건물은 아니지만 날렵한 처마가 손짓하는 것 같다. 자연스레 시선이 머문다. 박종화 고택은 등록문화재 제 89호로 등록되어 있다. 어엿한 문화재 건물이다.







건물의 모양새가 정갈하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담한 정원이 나오고 가장 먼저 사랑채가 보인다. 이 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선생이 늘 머물면서 집필하는 장소, 동료, 후배 문인들이 찾아와 담소하는 장소다. 문학의 산실이라는 장소를 글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유하고 싶어할 터. 오래된 향기까지 곱고 단정해보이는 집필실에 경외감이 느껴졌다. 장소의 힘은 이런 것이 아닐까. 누구라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것.

처음부터 평창동에 집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선생의 한옥은 종로구 충신동에 있었다. 1975년에 도시계획으로 허물어질 위기에 처했는데, 그때 다른 장소를 물색하던 선생이 결국 이 한옥과 정원수를 그대로 세검정으로 옮겨온 것이다. 이렇게 좋은 공간을 후대 사람들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준 선생의 용단이 참으로 감사하다.




박종화 선생은 서울에서 태어나 교육받고 글을 썼던 서울사람이다. 1901년 한성 남부 반석방 자암동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서소문인데, 그곳에서 12년간 살았다. 선생의 집에는 신지식과 어학을 가르치는 사숙이 있었는데, 이로인해 선생은 한학교육과 신식교육을 두루 접할 수 있었다. 휘문의숙에서 공부하며 시의 세계를 알게 되었고 1920년대 시문학을 이끄는 문인 중 하나가 된다. 하지만 1920년대 카프문학이 득세하면서 그는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역사 소설의 분야로 들어섰다. 1930년대 말부터 충신동의 한옥에서 거처하며 집필하게 되었으니 이 한옥은 역사소설가로서 선생의 면면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곳이 틀림없다. 그리고 40여년 동안 작가를 어루만져주고 품어주며 두꺼운 원고와 함께 씨름해온 따뜻하고 든든한 방이고 심장이다. 그 특별한 기운이 사랑채 안팎에 흐른다.


역사소설가답게 선생의 서재에는 조선왕조실록 고려대장경 등의 기록물이 가득했다고 한다. 이 두려울 정도로 진지한 기록물 앞에서 선생은 이런 말을 남겼다.

" 역사소설이라고 고증에 얽매여 단순한 기록에 떨어진다면 문학의 향기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명력을 넣어주어야지요." (1966년 5월 14일 경향신문 인터뷰 기사 중)

문학은 종교라는 신념을 갖고 살았다,는 선생의 말씀이 45년이 지난 지금에도 와닿는다. 문학이 종교라면, 그 문학을 품어주었던 이 집은 종교를 담는 그릇이었을 것이다. 경건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다정하지 않을 리가 없다.

이 집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경향신문의 옛날 기사를 발견했다. 이집이 왜 중요한지 선생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현대화에 밀려 사라지는 문화유산-  월탄의 고옥이 헐린다
경향신문 1975년 7월 3일 이조연기자



문화유산으로 길이 남기고 싶었던 월탄 박종화 시의 고옥(서울시 종로구 충신동 55의 5)이 헐린다. 월탄 문학의 산실이며 근대 한국문학의 태동지이기도 했던 이 유서깊은 한옥이 최근 동대문~이화동간 제1순환도로공사로 오는 6일까지 완전 철거케 됨으로써 문인들의 안타까움이 더하다.

대지 1백50평, 건평 70평의 이 집은 서울 옛 중인계급의 전형적인 가옥이라 해서 외국에 소개된 적도 있었고 해방직후 문인들이 모여 우리의 문학을 논하고 갖가지 문학협회를 창립, 발기시키기도 했떤 곳이다.

"아쉽고 서운한 마음이야 이를바 없지만 서울시의 시책이니 따를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이렇게 체념하다가도 문득 이 집이 며칠 후 아주 자취조차 없어지겠거니 생각하면 다시 서글퍼지곤 합니다."

주변집들을 헐어내는 해머소리가 소란한 중에도 집필을 계속하는 월탄의 70 노안이 흐려진다. 이 집은 한말 어영대장을 지낸 이봉의의 아들 이직제학이 지은 것으로 6간대청의 대들보에는 단군기원 사천이백육십팔년 을해구월십필십팔일이라고 적혀있다. 그러니까, 꼭 40년전 이직제학이 가정집으로 지은것을 월탄이 매입했던 것으로 "문명을 등지고 한걸음 자연의 품으로 나온것"(월탄의 수필 낙산월에서)이 또다시 근대화에 밀려나게 된 것이다.

낡은 나무 대문을 들어서면 작은 정원이 있고 정원 가운데로 'ㄱ'자형으로 지어진 본채는 기와, 마루, 난간, 방구들 등이 조금도 변형되거나 훼손됨이 없이 옛적 그대로의 모습이다. 이 본채의 동쪽 끝편에 낮은 돌담장이 가려져있고 그 건너가 사랑채 겸 월탄의 집필실로 쓰이고 있는 '조수루' .
조수루(釣水樓)라고도 쓰고 조수루( 棗樹樓)라고도 쓰는 이 마루방의 이름은 두뜰에 연못이 있고 앞뜰에 대추나무가 있어 월탄이 붙인 것. 방밑까지 파고든 연못에는 40년 전부터 길러왔다는 커다란 붉은 잉어들이 아직도 40여 마리나 노닐고 있고, 앞뜰의 대추나무는 월탄이 해방기념으로 심어 가꾼 것으로 6~7m로 자라 온 집안을 녹음으로 감싸주고 있다. 이 집의 기풍이자 월탄이 가장 아껴온 것들이기도 하다.

월탄은 이 방에서 <금삼의 피> <대춘부> <다정불심> <임진왜란> <여명> <홍경래> <신록> <여인천하> <가고가는 저 구름아> 등 주옥같은 수많은 작품들을 써왔던 것. 또 이 집은 이런 그윽한 정취 때문에 월탄 혼자서 독차지할 수만은 없었고 항상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었던 곳이기도 하다.

해방전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 같은 신문학의 선구자를 비롯, 해방 직후 수많은 젊은 문인들이 이곳에 모여 협회를 조직하고 밤새워 문학을 논의하기도 했다. 해방직후 김동리 서정주 조지훈 박목월 같은 문인들이 문총의 전신인 전조선문학가협회를 만든 곳도 이곳이고 예총의 전신 전국문화단체 총연합회나 전조선문필가협회 등이 창립된 곳도 바로 이 대추나무 밑이거나 연못주변이었다.

당시 문학 연극 미술 혹은 언론계인사들이 이 집을 드나들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 중에서도 특히 술을 즐겼던 변영로 염상섭 이하윤 등은 이 집에서 살다시피했고 가람 이병기나 화가인 춘곡 고희동  언론계의 우승규 조용만 홍종인 씨등도 자주 드나드는 편이었다.

"사람들이 모이면 항상 술판이 벌어졌지요. 대추나무 밑에서 술들을 마시면 의례 난간으로 올라와 연못에다 실례를 하던 일들도 생각납니다. 또 우리집사람이 담가내온 동동주는 아주 인기가 높아 하룻밤에도 몇 동이씩 바닥이 나기도 했읍니다. 이런 일도 있었죠. 어느 해 섣달 느금날 밤인데 모두들 내 방에 모여 밤새 술을 마신 후 다음날인 정월 초하루 아침에 집에들 가려고 보니 벗어놓았던 구두들이 몽땅 없어졌읍니다. 도둑이 든거죠. 할 수 없이 짚신 한 켤레씩을 사다가 나누어준 일도 있었읍니다."
 
월탄은 지난 날들이 즐거운 듯 대추나무 밑에서 회상했다


이 집은 6,25 때도 그대로 남을 수 있었다. 남로당 요인과 좌익계 문인들이 소위 문학가동맹이라는 것을 이 집에서 조직, 그들이 점거하고 있엇기때문에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 월탄은 수복이 되고 이 집을 찾았을 떄 서남쪽 추녀 끝이 포격에 조금 파괴돼을 뿐 모두 그대로였고 연못 속의 금잉어까지 살아남은 것을 보고 무척 기뻤다고 했다

그러나 이집도 이제 현대문명 속의 낡고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사라지게 됐다. 연전에는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 고고학자들이 김원룡 박사(서울대박물관장)의 안내로 이 집을 찾아 이곳저곳을 찰영한 뒤 '전형적인 한국옛집'으로 소개되기도 했고 자유당 시절 공보부에서는 세계 각처에 '한국의집'을 건립하면서 이 집을 모델로 택하기도 했다. 가구며 액자, 집기, 장식들도 수많은 문인들이 가꾸고 드나들던 고옥답게 귀한 것들. 추사의 휘호며 파리평화회담 장소의 거울방을 본떠 옛날거울들로 장식된 벽면 등 모두 영구히 보존하고 싶은 값진 유물들이다.

"물론 이런 장식이나 대들보 등 몇 개의 뜻있는장식들을 옮겨갈 작정이지만 저 연못이 메워지고 대추나무가 뽑혀 문인들의 숨결마저 없어질 것을 생각하니 정말 커다란 재난을 당하는 것 같습니다."

집을 구하러 며칠을 쏘다녔다는 월탄 부부는 당분간 큰아들집(서울마포구서교동 465의8)에서 방문객을 접대하겠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월탄의 아쉼움은 하나둘씩 사라지는 문화유산을 길이 보존하고 싶은 겨레의 뜻이기도 하다.











살림집인 안채가 바로 이어져 있다. 부엌은 뒤쪽에 있는 모양이다. 선생의 손녀 내외분이 살고 있는 곳이라 내부까지 들여다보지 못했다. 안채의 한쪽 벽은 꽃 무늬 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약간의 변화가 참 유쾌하다. 처음부터 타일 장식이 있었던 것인지 후대에 새로 덧대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덧대어진 것이라 해도 전체적인 분위기를 흐리지 않고 오히려 안채다운 여성미가 느껴진다. 사랑채에서 자신의 스타일을 마음껏 드러냈다면 안채에서는 멋스런 지붕선을 살리되 전체적인 분위기는 절제되어있다.



 

안채 뒤쪽에는 행랑채가 나온다. 옛날이라면 식모나 일거드는 사람이 살았을 것이다. 행랑채도 안채처럼 단정하고 정갈하다. 집이 이러하다면 사는 사람의 모습도 이러할 것이다. 집은 삶을 담는 그릇이라고 하지 않던가.




월탄 박종화 고택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 281-1번지
-등록문화재 제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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