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을 사랑했던 작가, 박경리 



박경리 선생의 소설 <시장과 전장>에는 전쟁이 한창이라 물자가 부족한 가운데서도 시장은 끊임없이 열렸다 닫히며 삶의 애환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전장과 시장은 따로 있으면서도 함께이고, 죽음과 삶이 교차하는 지점입니다. 꾸역꾸역 피난 보따리에 싸온 물건들을 가지고 나와 파는 주부들과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에도 먹을 것을 어찌어찌 구해오는 억척어멈들과 미군이 남기고 버린 물건, 미처 피난 보따리에 들어가지 못한 채 어수선하게 버려진 물건들을 꿰매고 붙여서 담요, 이불, 바지, 양말로 재가공한 희한한 물건들이 등장합니다.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서라면 가릴 것이 없지요. 고픈 배를 부여잡고 장터에 가면 꿀꿀이죽이란 것이 끓고 있지요. 



박경리 선생은 전쟁이 끝나고 10여년이 흐른 후, <파시>와 <시장과 전장> 등 전쟁 체험을 바탕으로 한 두 편 소설을 내놓습니다. 생생한 묘사와 감정들은 체험이 아니면 불가능한 서술이었겠지요. 문장들을 읽으며 그 시절에 성큼 가까이 갔었습니다. 선생은 시장을 참으로 빛나는 눈으로 바라보았구나, 시장에서 들끓는 애환에도 깊은 시선을 주었구나. 싶었습니다. 그것은 박완서 선생이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에서 서술한 풍경과 유사하면서도 태도가 다소 달랐습니다. 박완서 선생은 치졸한 인간세태를 목격하는 곳으로 시장을 서술했지요. 




 



<시장과 전장>에 나오는 시장이 과연 어느 곳일까, 궁금하여 장소를 파악해보았는데, 남대문 시장과 용산 시장 등 몇 개의 지명을 알아냈습니다. 시장 분위기를 보여주기는 충분하지만 장소에 대한 묘사는 많지 않았지요. 그때의 시장 분위기를 그저 상상으로 떠올려볼 뿐입니다. 한창 전쟁 중이던 시절에도 시장은 지금처럼 북적였던 거군요. 그랬군요. 모든 것이 깡그리 사라지는 그 순간에도 돈을 버는 사람이 있고 승승장구하는 사람이 있고 화려한 생활을 그대로 유지했던 사람도 있었으므로. 


역사의 행간을 문학이 채워주지요. 역사의 현장을 경험한 자들은 기록을 남겨야할 의무가 있는거죠. 

지금 우리는 어떠할까요. 지금 우리는 역사의 어떤 지점에 있는 걸까요? 




머리를 빗고 지영은 옷을 갈아입는다. 자리에 누워 있는 윤 씨가 

"어딜 갈라카노?"

하고 묻는다.

"시장에."

"시장?"

"남대문시장에 한번 가볼래요. 여름옷도 다 버리고 와서..."

윤씨는 알는 소리를 내며 일어나 앉는다.

"다리도 끊어졌는데 어짜 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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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룻터에는 한 사람 두 사람 모여들어 건너편 강가에 손님을 풀고 돌아오는 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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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서빙고, 잠실 쪽의 들판과 숲이 아지랑이에 흔들린다. 강 하류 마포 쪽은 햇빛을 ㄱ받아 강물이 보석처럼 번득번득 빛났다.

"노인장, 톡톡히 수지를 맞추시는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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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다 죽을 판인데 살 판 난 사람도 더러 있지. 고무신 장수, 비누 장수, 성냥 장수... 어쨋던 장바닥에 곡식이나 나돌아야 할텐데, 농사꾼들이 약사어 쌀을 내놔야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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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사람의 물결 속으로 지영이 휩쓸려 들어간다. 시장에는 골목골목에 상품이 그득히 쌓여있었다. 의류, 이상용품, 화장품, 신발 모두 옛날과 같이, 다만 식료품 앞에 사람들이 많이 무여들었으나 물건이 가난하다. 붉은 지폐가 벌써 나돌고 몸빼 입은 장사꾼 아주머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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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은 물건도 안사고 사람들에게 떠밀리며 가다가 그릇점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싸구려 음식점, 상품이 가난한 식료품 앞에만 사람이 모인다. 그릇점 앞은 바삐 그냥 지나간다. 지영은 푸른 케이스 속에 든 커피 세트를 슬며시 만져본다. 

" 거 좋은 겁니다. 리치몬드 제품이죠. 잘해드릴테니 사가십시오."

"요즘에도 그릇이 팔려요?"

주인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저... 미제 홈세트를 안사시겠어요?"

젊은 부인이 보따리를 들고 가게 앞에서 묻는다. 주인은 손을 저으며

"온종일 팔러오는 사람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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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연방 옷가지를 싼 보따리가 시장으로 들어온다. 해방 직푸의 시장터처럼 헌옷 장수들이 길을 메운다. 시골로 곡식 하러 가는 장사꾼들이 그것을 흥정한다. 

떡장수, 메밀묵 장수, 국수 장수, 활기에 넘치고 가지가지 소리가 있는 시장, 페르시아 시장이 아니고 전쟁이 밟고 지난간 장터에도 음악은 있다. 장난감 파는 가게에 인민군들이 서있고 그들이 돌아갈 때 누이와 동생, 아들과 딸들에게 선물할 장난감을 고르고 있지 않은가. 

지나간 골목을 또 돌고 또 돌고 몇 번을 그러다가 지영은 아무것도 못사고 거리로 나왔다


                                                  -박경리, <시장과 전장>, 나남출판, 1999, p. 231~236






남대문 시장과 동대문 시장


보통 전통의 상권이라고 하면, 조선시대부터 있어왔던 시전, 즉 종로를 이야기하곤 하지요. 그런데, 남대문 시장과 동대문시장은 과연 언제부터 존재했을 지 다소 궁금해졌습니다. <서울의 시장(박원숙/서울시사편찬위원회, 2007>이라는 책을 훑어보고서 다소 궁금했던 것들을 해소할 수 있었지요. 




조선 후기, 철패와 이현이라는 시장이 자생적으로 생겨났습니다. 일종의 난전입니다. 철패는 남대문가, 이현은 동대문가에 생겼지요. 아무래도 외부의 물건들이 드나드는 성곽의 큰 문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시장을 열고는 했나봅니다. 선혜청은 지방에서 올라오는 공물들을 출납하는 창고를 두고 남창이라 했는데, 북창은 삼청동, 용산에는 별창 등을 두었다고 하네요. 

대한제국기, 남대문로와 종로 일대를 정비하는 대규모 도로 정비사업이 시행되었습니다. 남대문 주위의 시장을 선혜청 안으로 이전해서 선혜청 동대청에 이어진 곳간과 마당을 시장터로 활용하게 함으로써 공식적인 공간을 형성하게 됩니다. 당시 주소지는 '한성부 서서 양생방 창동'으로 나와있습니다. 이 시장을 '남문안장' '신창안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해요. 




그럼 동대문 시장의 시작은 어떠했을까요? 

1898년에 서대문-청량리-동대문 거리에 전차건설 공사가 시작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구들이 늘어나면서 그들이 막 지은 집들이 종로거리를 침범하고 그 길가에 시장이 형성된 이현시장은 위생도 좋지 않고 사건사고가 많았지요. 전차공사는 이 주택들을 싹 정리하고 제대로 시장이 정착되는 과정이 어어집니다. 

이현시장에서 포목상으로 큰 성공을 거둔 박승직은 1905년 화폐정리로 상인들이 피해를 입게 되자, 자본력 있는 상인들과 뜻을 모아 '광장주식회사'를 설립합니다. 종로5가 청계천 북편 광장시장이 바로 그곳입니다. 남대문시장이 여러 상인들이 모여들어 다소 어수선하게 시장이 형성된 것에 비해 광장시장은 처음부터 주식회사의 형태이자 상인조합의 형태로 시작되었습니다. 상인조합은 너른 터를 만들고 조합원으로 가입만 하면 누구나 장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광장시장, 하면 먹고 마시는 장터가 번쩍, 떠오르지만, 실제 시장은 포목이 중심이 되었지요. 



그 당시 시장의 품목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포목이었습니다. 백화점의 옛 이름인 '오복점'도 포목을 판매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듯이 말이죠. 옷감을 끊어다가 옷을 지어입는 것이 그 당시 풍속이었으니, 포목점이라고 하면 지금의 패션몰과 유사한 어감이었을 겁니다. 지금도 광장시장은 포목부가 크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물론, 동대문 상가나 각종 의류상가들이 만연해있는 지역이라 다소 왜소해보이긴 합니다만, 광장시장의 포목부는 왠지 전통적인 느낌이 물씬 납니다. 그 시절 어머니들처럼 쪽진 머리를 하고 단정한 한복 자락을 여미고 서있는 여인네를 보는 것 같아요. 





                                                               




일제 강점기 시장은 어떻게 변화했을까요?  

남대문 시장의 경우, 그 터 자체가 정부 소유의 것이라 총독부 소관이 되었고 총독부에서는 이 대지를 일본계 중앙물산에 헐값에 팔았습니다. 이 와중에 내쫓기게 된 상인들은 결사적으로 반대하면서 상인연합회를 결성하게 되지요. 일제 패망 후에는 같은 이유로 남대문 시장이 적산으로 분류되어 정부 재산으로서 불하될 처지에 놓이는 바람에 상인들은 또다시 쫓겨날 상황이 되지요. 다시금 저항하고 항의하여 상황을 되돌려놓습니다. 

남대문 시장은 전쟁으로 초토화가 됩니다. 252개의 점포 중 성한 것이 하나도 없는 가운데, 상인들이 피란간 사이에 100여개의 노점들이 시장을 형성하고 있었지요.  위에 인용한 시장과 전장의 남대문 시장은 바로 이 상태였지요. 그 시절에는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물건들이 아니면 절대적으로 물자가 부족했기에, 불법으로 밀수품, 사치품, 미군부대 군수품들을 거래하는 곳이라 하여 '도깨비시장' '양키시장' 등으로 불렸지요. 지금도 미국 생필품을 파는 가게들이 꽤나 많이 있지요. 




동대문 시장은 조금 달랐습니다. 부유한 한국인 상인들로 구성된 주주들이 튼튼하게 자리잡고 있었던 덕분에, 오히려 자립적 독립적 노선을 취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시절에도 동대문 시장에는 한국인 상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지요. 패망 후에도 안정적으로 시장을 이끌어나갔지만, 전쟁 때는 모든 것이 불탔습니다. 천막을 치고 임시영업을 하던 동대문시장은 청계천으로 세력을 넓혀갑니다. 


그때, 청계천변에 월남한 피난민이 주축이 된 시장이 형성됩니다. 바로 평화시장입니다. 이들은 창신동에 자리를 잡고 봉제공장을 세우지요. 이들과 공생하고 또 경쟁하면서 동대문시장은 1970년대 동대문시장, 광장시장, 동대문종합상가로 나뉘게 됩니다. 청계천 남쪽에는 평화시장, 동화시장, 신평화시장이 생겨납니다. 












광장시장, 여기 살아있음


광장시장을 통과하여 종로 3가 방향으로 나오면서 아케이드로 덮인 건물과 건물들이 참으로 오래된 건물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건물의 역사보다 더 오래된 시장의 역사도 조금 더듬어 보았습니다. 시장은 늘 현재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광장시장을 보면서 조금 안심해도 될 것 같습니다. 우리 삶의 모습에는 이렇듯 시간의 적층이 남아있을 테니까요. 


번쩍거리는 쇼핑몰에, 거대한 백화점에 밀려 점차 쇠락해가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시장에서 느낄 수 있는 새로움, 생생함, 즐거움 같은 것은 백화점이나 쇼핑몰의 그것보다 훨씬 더 농후합니다. 
















한끼 든든히 먹기에 3,4천원이면 충분합니다. 회를 곁들여 소주 한잔 할 수 있는 곳도 있고 2-30년 전과 마찬가지로 코티분과 바셀린과 알록달록 수입과자가 잔뜩 쌓인 곳도 있지요. 소위, 마약김밥과 빈대떡집은 늘 문전성시를 이루며 시장의 참맛을 느끼게 해줍니다. 


촤악, 반죽을 뿌리는 소리, 지글거리는 기름 소리, 고소한 냄새, 사람들을 부르는 목소리, 푸짐하게 담고서 한 주먹 더 얹어주는 인심이 더해집니다. 오가는 천원짜리, 만원짜리. 뜨겁고 진득한 물과 불의 기운, 사람의 숨소리와 목소리가 있는 이 곳. 



시장은, 여기 살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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