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뒷받침하며 식민지 조선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던 금융기관들이다.


조선은행은 중앙은행으로 선은(鮮銀)이라고 불렸다. 중앙은행은 화폐를 조달하고 전체 금융을 관할하는 역할을 하지만 조선은행의 경우 일본은행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면서 일반 상업은행의 업무도 겸하면서 조선의 자금을 흡수했다.

식산은행은 대한제국기에 세워진 여러 농공은행들을 합병하여 1918년에 설립된 기관이다. 농공은행은 산업현장의 자금을 융통하는 업무를 하지만 식산은행은 조선 농토의 쌀산업에 깊숙이 관여하며 산미증식계획의 자금 지원을 담당했다. 중일전쟁 이후로는 채권을 발행하고 국민들로부터 저축을 강요하여 조선의 자금을 흡수한 후 일본의 전쟁수행자금으로 제공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이른바 '동척'이라 불리는 이 회사는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흡수하기 위한 국책회사였다. 일본인 지주들이 조선에서 대농장을 굴리며 엄청난 쌀을 생산하여 자국으로 유입시킬 수 있었던 뒷 배경에 바로 동척이 있었다. 동척은 그 어떤 일본 농장보다 더 많은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고 조선을 넘어 만주, 타이완, 남양군도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이들은 대한독립을 꿈꾸는 투사들에게는 폭탄을 던지며 조선땅에서 몰아내고 싶어했던 식민지 지배의 원흉이었지만, 샐러리맨을 꿈꾸던 반도 젊은이들에게 꿈의 직장이기도 했다. 이렇듯 역사는 많은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대구의 포정동 서문로길은 서울로 치자면 을지로다. 조선은행, 식산은행을 비롯해서 많은 은행과 금융권들이 밀집해있었고, 더불어 경찰서와 우체국, 도서관등이 자리잡고 있던 식민지 사업의 중심지였다. 당시 사진을 보면 경성 뺨칠만큼 화려한 서양식 건물이 줄줄이 세워져있었으며 그 주변으로 백화점이며 상점이며 겹겹이 일본인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원래 이곳은 경상감영이 있어 500년간 이어진 대구 행정의 중심지였으며 그 바통을 이어받아 근대 식민 도시의 중심지로 변화했다. 서문로의 옛 이름은 본정도로. 이름만 봐도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알 수 있다. 

우체국과 조선은행, 도서관은 이미 자리를 뜬 지 오래다. 고급 백화점이 있던 자리는 성인카바레와 선술집으로 바뀌었다. 멀지 않은 위치에 있는 동성로가 문화와 상업의 중심지다. 백화점, 영화관, 쇼핑거리, 먹자골목은 모두 그쪽에 포진해 있다. 업무시설조차 슬금슬금 빠져나간 서문로는 조용하기만 하다. 대책없이 넓은 빈터가 주차장으로 사용될 정도니까.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은 경찰서와 식산은행 정도랄까. 몇 해전까지 대구은행으로 사용되던 식산은행 건물은 현재 근대시기 대구의 역사를 보여주는 근대역사관으로 그 내용을 바꾸었다



 





무엇보다 식산은행의 건물은 예사롭지 않다. 직사각형으로 단순한 외형을 가졌지만 겉에서 봐도 탄탄하게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벽돌형 타일은 어찌나 단단해보이는지 흠집 하나 찾아내기 어렵다. 견고하고 권위적인 건물, 은행이 가져야할 필수요소를 고루 갖추었다. 높고 긴 창과 돌출된 현관 주변, 긴 지붕선을 따라 약간의 장식을 한 부분이 있다. 같은 색 타일로 통일감있게 연결한 장식이 과하지 않고 세련된 분위기를 준다. 오랫동안 대구 시민들의 기억을 함께 한 건물은 역사 속으로 다시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중이다. 건물의 탄생연도는 1931년. 그 전에 세워졌다면 르네상스 양식이니 하며 외형 자체가 화려했을 텐데, 1930년대부터는 국제주의 모더니즘의 바람이 극동까지 불어와 건물들은 대부분 장식성을 잃고 좀 만만해진다.
2009년 취재를 위해 내려왔을 때에는 개관 전이었기 때문에 내부를 볼 수가 없었다. 어떤 장소로 바뀔 지 기대를 많이 했던 터라, 올해 초 개관 소식을 들은 후 얼른 달려가보고픈 마음을 참아가며 기다렸다. 


인천, 목포, 부산의 근대역사관을 둘러보고서 근대역사관이라는 전시관을 꾸미고 운영하는 일이 다른 어떤 박물관, 미술관보다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근대 시기는 길지 않았고, 전쟁이 터졌고, 개발시기를 거치며 많은 것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자료도 많지 않고 눈으로 볼 수 있는 문화재들도 다른 시대에 비하면 많지 않을 뿐더러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파괴되는 경우가 많다.

부족한 자료로 전시관을 꾸려내려는 역사적 가치가 미비한 자료들을 확대 재생산할 수밖에 없다. 스토리텔링형 체험공간이라는 요즘 트렌드를 반영하기 위해 애니메이션, 드라마, 3D 등 멀티미디어 전시물을 많이 세운다. 어린이를 위한 전시가 되어 버리거나 한번 보면 다시 오지 않게 되는, 답답한 전시공간이 되고만다.


요즘 많이들 생기는 체험형 전시공간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하지만 문화재급 건축물에 만들어지는 전시장이라면 좀 달랐으면 좋겠다. 자주 들러보고 공간에서 옛날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장치들을 꼭 넣어주었으면 좋겠다. 전시물 관련해서는 정말 신중했으면 좋겠다.



인천개항박물관의 경우 (예전 포스팅 참고- 옛날 은행을 보러갔다 http://sweet-workroom.khan.kr/8 + http://sweet-workroom.khan.kr/9) 전시물은 많지 않지만 하나하나 집중할 수 있게 디스플레이를 한 점이 좋았다. 사진, 물건(유물), 자료 등을 적절히 섞어 전시했고, 제작, 관리, 유지에 비용이 많이 드는 멀티미디어 전시물은 역사적 서술이 필요한 부분만 담당했다.

부산근대역사관의 전시는 재미있었다. 많이 사라져버린 옛 풍경을 알려주기 위해 패널작업도 신경썼으며 개항장 주변을 모형으로 만들어 멀티미디어와 연동한 점도 돋보였다. 교육적인 효과가 클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도서관이 있다는 점이 새로웠다. 미술관, 박물관 중에 도서관을 보유하고 있는 곳은 극히 드물다. 자료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그 시절 역사가 더 궁금한 사람들을 위해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다는 점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대구 근대역사관은 어떨까? 




우선 복사본 엽서로 구경하는 대구의 옛 금융기관의 모습을 보자. 아래 좌가 식산은행이다.






옛 은행 건물들의 공통점은 1층 층고가 무척 높다는 점이다. 한국은행 본점 화폐박물관으로 사용중인 옛 조선은행 경성지점 내부도 깜짝 놀랄 만큼 높다. 내부에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탁 트이고 높은 공간감에 휘둘리는 느낌이 든다. 겉은 단정한 모양새지만 내부의 기둥은 그리스식 기둥을 흉내내듯 장식했으며 천장 몰딩도 화려하다. 대규모 은행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안타깝게도 바깥과 연결된 그 어떤 빛도 내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물론 바깥에서 보이는 문으로도 출입이 불가능하다. 주출입구의 현관이 어떤 모양새일지 궁금했는데, 복원은 되어 있으나 패널 전시물로 겹겹히 잘 가려놓았다. 내부는 무척 어둡다. 촬영된 사진은 내부를 자세히 보여드리기 위해 모두 밝게 보정한 것이다. 실제 관람할 때는 훨씬 어두웠다. 조도는 낮고 조명은 붉다.





서측에 면한 출입구의 모습이다. 남측면보다 넓은 서측면이 정면 파사드라는 점을 보면 아마 옛날에는 이곳을 주출입구로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패널 전시물로 굳이 가려놓았고, 역사관 출입구는 건물의 북측 파사드 왼쪽 구석에 새로 만들었다. 아마 경상감영공원과 동선을 연결하고 역사관 출입구 앞에 광장을 놓기 위해서였으리라 짐작되었다.

창문을 모두 막은 것은 멀티미디어 전시물을 좀더 잘 보도록 하기 위함이었을까?  전시장이라면 관례적으로 빛을 차단해야 한다는 지극히 상투적인 관습을 고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박물관, 미술관에서 자연광에 민감한 이유는 유물 자체가 광원으로 인해 손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대부분 전시물이 인쇄 패널이거나 멀티미디어 구성물이며 몇 가지 주요 전시물만 실제 자료였다는 점을 본다면 빛을 피해야 할 그 어떤 이유도 없어보인다. 실제 유물 자료들은 따로 빛을 피할 수 있도록 장치를 만들어주면 된다. 실제로 내부가 너무 어두워 전시물을 읽는 데 피로감이 많이 느껴지기도 했다.

여러 가지를 참고하고서라도 주출입구와 창을 철저하게 봉쇄한 점은 이 장소가 가진 건물 본래의 장점을 많이 잃어버렸다. 건물이 가진 아름다움과 특징이 전시 설계에는 왜 전혀 반영되지 않는 것인지 아쉬울 따름이다.



위의 현관문 바깥의 모습. 주출입구의 외부다. 양쪽으로 길쭉한 창도 모두 닫혀있다.






은행의 옛 모습. 천장 장식이며 출입구 현관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인다.





옛날에는 출입구로 들어서면 꽉 막힌 벽이 나왔던 모양이다. 이전에는 고객의 공간과 업무공간이 철저히 분리되어 있고 자연스런 소통같은 것은 없어던 모양이다.




그 벽의 흔적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부분적으로 최근까지 이어져온 듯하다. 전시장으로 꾸미면서 벽을 모두 철거하고 그 흔적을 조금씩 남겨놓았다.








내부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장소가 이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곳인 금고다. 육중한 금고문은 언제나 위압적인 느낌이 든다. 내부에는 식산은행 시절 사용했던 화폐, 당시의 열쇠, 채권, 문서 등 금융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대구의 정치, 산업, 문화, 예술에 대한 간략한 설명들이 구석구석에 이어진다.









예상치 못했던 유물을 만났다. 1927년 10월 독립을 꿈꾸던 젊은 청년 장진홍은 조선은행, 동척, 식산은행, 경찰서, 형무소 등 대구의 주요시설물을 폭파하는 거사를 단행했다. 그는 중국까지 가서 폭약제조를 배웠고 거대한 시설물을 단숨에 날려버릴 수 있도록 치밀하게 계획을 짰다. 그가 첫 목표로 잡았던 곳은 조선은행. 은행 내부로 폭탄을 반입하는 데 성공했으나 은행간부가 이를 눈치채고 폭발직전에 건물 밖으로 던졌다. 폭발은 바깥에서 일어났다. 폭발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전선이 모두 끊어지고 유리창이 깨졌다. 하지만 금고도 은행도 은행장도 살아남았다. 그는 6개월을 숨어살았지만 결국 투옥되었고 옥중에서 자결했다. 장진홍 선생이 남긴 옥중서신과 책들이 전시되어 있다. 내용을 모두 읽어낼 수는 없었지만, 글씨가 곱고 힘이 느꼈졌다. 글쓴이의 성품이 느껴졌다고 할까.





대구이기에 만나볼 수 있는 자료들이 반갑다. 전통적인 상업도시이자 당시에도 번영한 도시였던 대구. 거부와 갑부가 많았고 멋쟁이도 많았다. 상업이 발달한 만큼 상점가에서 뿌린 명함도 다양하다. 옛날 광고가 가득한 대구 지도도 재미있다. 정종이름인 월계관이 눈에 팍 들어온다.



커다란 모니터로 페이지를 넘기며 대구 옛 건물을 살펴보는 전시물, 대구와 관련된 인물들을 다룬 전시물도 있다.





전시장 내부 전시물 중에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바로 이것. 버스 내부처럼 꾸며진 어두운 방 안에서 스크린을 보며 1930년대 대구 거리를 달려보는 것이다. 부영버스 안내양의 구수한 대구 사투리로 안내를 들으며(상단의 소녀) 부영버스의 노선대로 길을 달리면서 도로변을 장식했던 건물들을 입체 그래픽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그 시절을 겪어보지 못한 우리로서 당시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80년의 역사 동안 수없이 변해버린 거리와 건물들 틈으로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또 다른 시간이 중첩되어 있음을 느꼈다. 켜켜이 채워진 시간들. 그 역사들.


이 건물이 없었다면 우리는 무슨 수로 그 시절을 회고할 수 있겠는가?





대구근대역사관(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

위치-대구시 중구 포정동 33번지
문화재 유형-대구시 유형문화재 제 49호
관람시간-09:00~19:00(4월~9월) /09:00~18:00(11월~3월) 월요일 휴관
관람료- 무료
홈페이지-http://artcenter.daegu.go.kr/dmh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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