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회도’는 18세기부터 


등장한 그림의 한 종류로 문인들의 사적인 모임을 그린 그림을 통칭하는 말이다. 내가 아회도라는 그림을 알게 된 것은 원서동에 있는 춘곡 고희동 가옥에서였다. 고희동이 그린 ‘아회도’의 모사본을 보고서 참 유쾌하다 싶었고 그림에 얽힌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고희동의 '아회도'는 솔직담백한 필치로 재치있게 그려낸 모임 풍경이다. 몇 순배의 술이 돌고 모임의 흥취가 무르익을 무렵 먹으로 가볍게 그린 듯하다. 그림 속에는 여섯 명의 남자들이 서로 둘러 앉아 음식을 즐기고 있다. 그 주변으로 전등, 책, 벼루, 종이 등이 흩어져있다.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매화가 심어진 화분이 놓여 분위기를 돋운다. 어여쁜 꽃나무를 완상하는 일은 시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 그때 한 인물이 그릇을 들고 들어온다. 인물을 세밀하게 그리지 않았으나 얼굴이나 몸집의 특징이 살아있다. 얼굴이 둥글며 콧수염이 양쪽으로 난 인물은 고희동 자신을 표현한 것이고, 그 옆에 짧은 머리에 콧수염이 있는 인물은 육당 최남선, 그 옆은 위창 오세창이다. 모임의 친구들이 그토록 좋았던지 볼수록 다정한 정취가 배어나온다.



춘곡의 집은 1910년대 말부터 여러 문인들이 드나드는 사랑방 역할을 했는데, 그 중에는 지속적인 여러 모임이 생겨났다. 특히 최남선, 오세창 등과 나이와 입지를 뛰어넘는 교류를 했던 것으로도 잘 알려져있다. 시서화에 능했고 고미술품을 수집하고 완상하는 취미가 있던 그들이므로 정기적으로 모임을 열어 흥과 미를 나누었다. 모임의 내용을 일지로 적고 각자 시를 짓고 또 글을 써서 '시축'을 남기기도 했다. 특히, 자주 어울리던 일곱명의 명사들은 각자의 집을 돌면서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짓고 미술품을 감상하는 시회를 자주 열었다. 시회 후에는 조촐한 문집으로 그날의 결과물을 펴냈다.   


조선후기 어느 문인은 자신의 아회를 ‘날씨가 좋은 날에 모여 술은 세 순배를 넘지 않으며 안주는 세 가지를 넘지 않는 대신, 차와 책은 마음껏 마시고 읽으며 흥이 나는 대로 시를 읊는 모임’이라고 했다. 어쩌다 모여서 절제없이 마시고 즐기는 모임이 아니라 지켜야할 나름의 기준과 규칙을 갖추어 참석자에게 절제와 정성의 마음가짐을 요구했던 것이다. 조촐한 규약은 유쾌한 아회를 위한 필요충분조건이었다. 여흥을 즐길 때도 품위를 갖추었고, 은둔하면서도 심미의 활동을 접지 않았다. 미적인 것이 생활이 되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고희동의 아회도는 ‘일기회’라는 모임의 회합을 그린 것이다. 모임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한가지씩 음식을 들고왔다고 하여 그렇게 불렸다. 춘곡의 사랑방 풍경이 그림과 같았으리라. 어깨를 맞대로 앉은 사람들이 매화분을 완상한 후, 술과 음식으로 흥을 돋우고 차를 마시며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모습들. 그들은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술을 마셨을까, 어떤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는가, 지금 저 그림에서는.



 





















춘곡 고희동의 집이 



창덕궁 서편 돌담길을 따라 올라간 위쪽 마을에 자리잡고 있다. 고희동이 누구인가. 우리나라 최초로 그림 유학을 떠나 서양화의 기법을 배워온 예술가다. 서화협회를 조직하고 전람회를 개최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중앙고보, 휘문고보에서 미술을 가르치며 제자들을 길러냈던 인물이다.


고희동은 1918년에 원동이라 불리던 이 동네에 자신의 집을 지었다. 안채와 바깥채가 ‘ㄱ’자 모양이었다가, 나중에 화실이 있는 사랑채를 증축하여 약간 꺾인 듯한 ‘ㄷ’자 모양의 집이 되었다. 집은 약간 경사진 언덕에 살짝 기댄듯 서있는데, 담 너머로 보면 창덕궁의 돌담 안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와 사철나무 등이 무성하게 푸른 빛을 흘린다. 너른 마당 안에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집을 지키는 수문장마냥 든든하게 집을 내려다본다. 마당에서 보면 단단한 바깥채의 외면만 바라보일 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안쪽에는 내밀한 공간들이 오밀조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집 구조가 독특하. 현관으로 들어가면 긴 복도가 좌우의 공간으로 연결되고 복도의 유리문 너머로 또 하나의 마당이 숨어있는 것이 보인다. 현관의 왼쪽에는 방과 부엌 등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공간이 있고, 오른쪽에는 화실과 사랑방이 있어 기능적으로 잘 나뉘어 있다. 부엌과 안방은 실내 계단을 두어개 디디고 올라서야 한다. 경사지에 앉힌 집이기도 하지만, 계단 덕분에 자연스럽게 안채와 바깥채가 나뉜다. 하지만 이 집에는 대청마루는 없다. 이런 점이 전통한옥과는 다른 분위기를 준다. 오히려 방을 이어주는 복도로 인해 일본식 주택같은 느낌도 있다.  


무엇보다, 이 집의 중심공간인 사랑방과 화실을 구경하는 게 먼저다. 화실은 크고 넓은 창이 있어 서양식 거실의 느낌을 준다면, 사랑방은 좁은 문살과 작은 규모로 보아 단연 한옥의 느낌 그대로다. 화실에서는 큰 그림을 그렸을 테고, 사랑방에서는 붓을 먹에 찍어 작은 그림을 그렸을 게다. 구불구불한 복도 너머로 묵향도 느껴지고 유화물감의 진한 냄새도 풍겨났을 터이다. 이 집에 머물렀을 향기를 떠올려 본다. 춘곡의 자손에게는 테레빈유나 먹의 냄새처럼, 그림에서 나는 냄새들로 유년의 기억이 채워져 있지 않을까?


본래 서양화를 배웠고 ‘부채를 든 자화상’에서 풍기는 빛과 어둠의 흔적들이 여실히 그의 배움을 증명하고 있지만, 춘곡은 오랫동안 누려왔던 전통의 품격으로 되돌아 사군자와 산수로 방향을 틀었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멀찍어 떨어져 시서화로 도피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림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보이기도 하고 깊은 숲 속으로 숨어들수도 있는 그런 곳이었다. 1940년에야 비로소 고희동의 첫 개인전람회가 부민관에서 열렸는데, 이때에 유화뿐만 아니라 동양의 전통적인 사생과 정서를 담은 그림들이 많았던 이유도 그것이다.




















지정된 휴일 외에는 



구나 춘곡의 집에 들어가 구경하고 고희동이라는 화가의 삶을 감상할 수 있다. 옛 문인들은 매화를 완상했다고 하는데, 나는 옛집을 완상하는 취미를 갖고 있다. 쓰다듬으며 촉감을 느끼고 오래 묵은 재료들이 한꺼번에 풍기는 냄새를 즐겨 흡입한다. 빛이 바랬거나 금이 가고 뒤틀린 지점은 오래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런 틈에서 건물은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깊에 빠져서 완상하기에 춘곡의 집은 그리 좋은 대상은 아니다. 복원의 절차를 거치면서 공간의 구조 외에는 많은 부분이 훼손되어 원형을 잃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말, 춘곡은 삼대가 함께 살아온 이 집을 떠나 제기동의 양식집으로 거처를 옮겼고, 소유주가 바뀌면서 여러차례 수리를 거쳤다. 1995년에 안채와 사랑채가 옛 형태로 복원되었으나 2005년에는 한샘이 주차공간으로 쓰기 위해 이 집을 매입하여 건물 일부를 철거하기도 했다. 이 집의 멸실을 막으려는 지역문화단체들이 활발히 나섰고, 이윽고 종로구청이 매입하여 복원이라는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실측조사에서도 사라진 옛 흔적을 찾아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기록을 찾아 대조하는 과정도 충분하지 못했다. 결국 집의 기단과 창, 담장과 대문은 춘곡 선생이 살던 시절과 확연히 달라졌으며, 벽지와 조명 등의 디테일한 부분에서도 다시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 많다.
















 


 

이 집의 가장 아름다운 곳은 



복도다. 화가가 직접 설계했다는 이 집의, 마치 달팽이처럼 꺾인 복도에 들어서면 나는 1920년의 어느 날에 초대된 것 같다. 시간이 미끄덩하게 늘어나서 어딘가 모호한 그림 앞으로 데려다 놓을 것 같은 기대감이 생긴다. 나도 음식이 담긴 접시를 가져와야 옳을 텐데, 그 당시에는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제육보쌈이나 잡채, 궁중떡볶이 같은 거라면 서로의 입맛에 맞는 음식이 되련가? 먹고 마신 후에는 맑은 육수의 냉면으로 입가심을 하면 되련가?



나는 상상만으로 꾸며놓은 서양식 화실을 지나 마당으로 나가는 문앞에서 서성거렸다가, 반대편으로 계단을 올라가 열리지 않는 문의 문고리를 잡아당겨도 보았다. 대청은 없지만 마루바닥을 깔아놓은 안채의 부엌에 놓인 의자에 앉으면 집이 또다른 모양으로 보인다. 


그렇게 오래 복도를 걷다가 앞 마당으로 나와서 키 큰 은행나무 아래에 선다. 나무 아래 서면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많은 것들이 보인다. ‘최초의 서양화가’라는 서술 외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어느 화가가 즐겼던 인생의 많은 순간들을 더듬어본다. 화가와 내가 서로 만날 만한 지점은 많지 않지만, 나는 불혹을 앞둔 화가가 시회를 열어 글을 짓고 감상을 나누었던 그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해보았다. 


그런 운명같은 시간을 그냥 스쳐보내면 안된다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