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임고초등학교. 멋지지 않나요? 숲과 함께 하는, 작지만 오래된 학교입니다.
학교의 입구입니다. 굳게 닫힌 교문도 없고 담도 없지만 쭉쭉 뻗은 나무를 친구삼아 등교하는 길, 꽤 괜찮을 것 같네요.
나는 초등학교 때 전학을 두번이나 했다. 그때는 초등학교라는 이름도 아니었던 시절, 즉 국민학교 시절이었다. 부산 장전국민학교에 입학하여 잠시 후 구서국민학교로, 다시 졸업할 때 되어서 수영국민학교로 옮겨갔다. 얼마전 티비를 보니 야구선수 이대호가 수영국민학교 출신이란다. 그래서 '급' 반가움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있다. 30년가까이 오래된 기억이긴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몇 가지 선명한 기억이 떠오른다.
흰색 콘크리트, 혹은 살구색 콘크리트로 지어진 학교 교사와 넓은 운동장. 아마 그 운동장을 지금본다면 피식 웃음이 날 정도로 작아 보이겠지. 급식용 우유가 배달되던 1층 창고의 비릿하고 콤콤한 냄새, 운동회날 학년 매스게임을 하던 기억도 있고, 전교 조회가 끝나고 열 맞춰 교실로 들어오다가 딴 반 킹카 남자애를 나란히 서게 되어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던 기억. 그때는 나란히 서있기만 해도 부끄러웠다.
그리고 학교를 둘러싸고 있던 푸른 숲. 그리고 눈이 오던 날, 강아지처럼 손을 흔들며 운동장으로 달려나갔던 기억도 있다. 어쨋건 나는 그때 여덟살, 열살, 그리고 열두살, 그런 시절이었으니 기억들이 참 올망졸망하고 풋풋하다.
얼마전 경북 영천에 있는 임고초등학교에 갔다. 작년엔가 드라마 '조은지 패밀리'에 등장한 학교가 너무 근사해서 검색하고 보니 바로 이곳이었다. 학교가 눈부셨던 것은 바로 나무와 숲 때문이었다. 저토록 크게 나무가 자라는 학교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은 참 좋겠다, 라는 약간의 부러움도 있었다.
학교는 작고 아담했다. 학교 교사보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세월을 잊은 듯한 거대한 나무와 숲이었다. 하늘 끝까지 솟은 플라타너스, 그리고 아름드리 나무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곳에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골학교다운 순진함과 깊은 숲에 들어온듯한 청량함이 학교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학교 너머로 빽빽한 아파트가 보이는 신도시와도 달랐고 학교 앞만 나서면 위험스럽게 달리는 내 주변의 학교들과도 달랐다.
학교에서 숨을 쉬었다. 요즘 학교에서 깊은 숨을 쉴 수 있는 경우가 과연 얼마나 있던가? 도시에서 묻혀온 먼지들을 탈탈 털며 폐 구석구석에 남아있을 오염된 공기를 모두 뱉어냈다. 숲이 좋으니 학교가 더 좋아보였다. 임고초등학교 주변의 숲은 2003년에 대한민국 아름다운 숲 대상을 차지했다고 한다.
숲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물과 공기가 순환되는 지구과학이야기, 곤충과 식물이 자라고 죽는 생물 이야기, 숲 속의 정령에 대한 신화와 문학 이야기 등 숲속에서 놀면서 아이들이 배우는 것은 단순히 학교 교실에서 배우는 것보다 훨씬 폭넓고 창의적이지 않을까? 요즘 '통섭'이라는 말이 등장했던데, 통섭형 인간을 위해서라면 숲이 필요하다.
지방의 소읍 뿐만이 아니라 도시에서도, 나아가 서울에서도 필요하다. 도시에 아무리 더해도 넘치지 않는 것이 숲이다. 숲은 도시의 허파라고 하지 않는가? 도시의 규모가 커지고 도심이 많아질수록 숲의 규모도 늘어나야 한다. 우리는 맑은 공기를 흡입할 권리가 있는 시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숲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놀 수 있는 건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건물로 가까이 가보았다. 보수공사중인듯 비계가 설치되어 있다.
2층 규모의 아담한 교사. 그 앞에는 독서상이 자리잡고 있다. 세종대왕상도 모자상도 아닌 독서하는 남매의 조각상이 좀더 살가워보인다.
학급은 각학년에 1개반밖에 없다. 학교 교사 뒷편에 또다른 교사를 하나 더 지어 필요한 시설물로 활용하고 있다.
임고초등학교는 1924년에 4년제 학교인 임고공립보통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했다. 1938년에는 임고심상소학교로 이름이 변경되었다가 1941년 국민학교로, 다시 1996년에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우리나라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공립초등학교들은 대부분 이렇게 학교 이름의 변화를 겪었다. 이름이 바뀐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나라에서 근대적인 형태의 초등교육이 시작된 것은 1890년대 말의 일이었다. 을사조약 이후에 통감부가 들어오면서 한번 변화를 겪었고 1910년부터 시작된 일제강점기에는 총독부가 교육의 주체가 되어 식민지화 교육을 시작했다. 1911년부터 1945년까지 3차에 걸친 조선교육령이 발표되어 학제가 바뀌었고 교육의 목표도 조정되었다.
보통학교라는 명칭은 1911년부터 사용되었는데, 초등교육기관이 보통학교, 중등교육기관이 고등보통학교와 여자고등보통학교라 불렸다. 일본학생들을 위한 교육기관은 이름이 달랐다. 소학교, 중학교, 고등여학교다. 이것이 1938년에 발표된 3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한국과 일본 학생들을 통합하면서 학교 이름이 모두 심상소학교로 바뀌게 된다. 조일 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했으나 이를 통해 조선인 교육기관의 장을 모두 일본인으로 교체되었고 조선인들은 황국신민으로서 병역의 의무를 지게 되었던 것이다. 소학교의 이름 속에는 이런 의미가 있었다.
이 조치는 태평양전쟁이 심화되는 1940년이 되면서 학교 수업이 단축되고 학교명칭도 국민학교로 바뀐다. 국민학교는 어찌된 일인지 광복 후에도 개칭되지 않고 오랫동안 초등교육시설을 대표해오다가 1996년에 초등학교로 개칭하게 된 것이다.
학교 건물의 역사를 보면 임고초등학교가 지어질 당시인 1924년이 중요한 갈림길이 된다. 예전 건축방식인 목조형 혹은 벽돌조의 건물에서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기능적인 형태로 바뀌게 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아래는 임고초등학교와 같은 시기에 건립된 인천 창영초등학교의 모습이다. 벽돌조로 지어진 이 학교는 중앙 출입구에 장식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는데다 박공지붕을 얹어서 유럽의 어느 사립학교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즉, 인천의 건축양식은 여전히 벽돌조를 추구하고 있지만 임고 지역은 총독부의 지침대로 국제주의적 양식으로 세워지게 된 것이다. 벽돌과 철근콘크리트는 1939년까지 함께 쓰이다가 1940년대에는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모두 바뀌게 된다.
아름드리 플라타너스의 규모가 압도적이다. 수백년은 되어야 이렇게 자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자료를 찾아보니 고작 백년도 되지 않은 나무란다. 학교가 지어질 무렵, 열 그루의 플라타너스를 함께 심었고 지금 그 중에서 일곱 그루가 남아있다. 플라타너스의 특성이 다른 나무들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속도로 생장속도가 빠르다는 점, 그리고 공기 정화 작용에 있어서도 타의추종을 불허한다는 점이다. 임고초등학교가 세워진 터가 물좋고 공기좋은 곳이라서인지 나무는 더할 나위없이 쑥쑥 자랐다.
플라타너스의 다른 종이 우리나라에서도 자생하는데 버즘나무라 불린다. 양버즘나무라 명명된 거대한 플라타너스는 벚나무, 회양목과 더불어 일제시대에 들여온 가로수들이었다고 한다. 임고초등학교의 플라타너스는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다. 촉촉하고 시원한 기운이 학교와 운동장을 감싸고 있다. 나무가 내려다보는 가운데, 아이들이 편을 나눠 축구경기를 시작했고 한쪽편에에서는 도시락을 싸서 피크닉을 나온 몇몇 가족들도 있었다.
정글짐. 오랜만에 정글짐을 보니 몸이 근질근질하다. 초등학생 때 나는 날렵하게도 철골 사이를 누비며 정글짐을 오르락 내리락 했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그런 놀이기구다. 옛 생각에 덥석 정글짐에 올라갔다가 균형을 잃고 떨어질 뻔했다. 시간이 참 많이 흐른 것인가.
1970년대에는 학생수가 1200명에 달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한 학년당 한개 반 밖에 운영되지 않는다. 학교 교사 왼쪽에는 병설 유치원이 있어서 나이어린 아이들도 교정에서 마음껏 놀 수가 있다. 유치원 원생과 학교 학생을 모두 합해도 70명 남짓이다. 학생 수가 줄어들면 학교는 사라질 지도 모르지만, 왠지 이 교정에서는 그런 걱정조차 들지 않는다. 숲과 나무, 길과 바람, 학교에 포함된 모든 생명들이 다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아서인가, 마음이 달콤해진다.
홈페이지에서 임고초등학교 상징을 찾아보니 교화는 장미, 교목은 은행나무다. 플라타너스야, 미안해. 지금은 플라타너스에 가려져 있지만 아마도 가을이 되면 노란색으로 물든 은행나무가 도처에서 빛을 발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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