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린 '르 코르뷔지에' 전시가 뜨겁게 막을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건축가의 삶에 이토록 깊은 관심이 있다는 건 건축이 우리에게도 더이상 낯설지 않은 분야라는 증거일 것이다. 이 전시의 중심에 카바농이 있었다. 건축가가 남프랑스 가장자리 도시에 지은 작은 별장이다. 그는 이 장소를 무척 사랑했고 카바농에서 내려다보이는 푸른바다에 뛰어들어 수영하길 즐겼다. 그는 결국 이 아름다운 장소에서 운명을 달리했고 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마을 묘지에 잠들어있다.
몇 해 전 이 카바농을 취재하러 프랑스 끄트머리의 로크브륀 카프 마르탱(Roquebrune-cap-matin)까지 간 적이 있다. 절벽을 따라 얇은 선처럼 둘러진 오솔길- 르코르뷔지에 오솔길이라고 적혀있다-을 걷다보면 표지판 하나 없이 서있는 작은 나무집을 발견하게 된다. 주인이 떠난지 반세기가 흐른 만큼 낡아버린 나무집과 여전히 변함없이 드넓고 푸른 바다의 간극이 묘하게 다가왔다. 기후대가 달라지는 것처럼 아열대의 달근한 꽃향기가 계속 퍼졌고 강렬한 햇살은 건너편 고지대 마을의 풍경을 황금빛으로 만들었다. 지난 세기 건축의 대가로 꼽히며 그의 건축물을 예술작품처럼 저작권 보호를 하는 건축가가 그토록 사랑했던 곳이라고 하기엔 뭔가 불충분해보였지만, 그의 마지막 장소라고 하니 그건 그런대로 어울려보였다.
그런 느낌이 든 것은 바로 로크브륀 카프 마르탱이라는 이 마을이 풍기는 정취 때문이었을까? 니스의 달콤한 해변과 달리 야생적이며 차가워보이는 바닷물과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낯선 식물들과 가득한 태양빛마저 기묘한 야생성을 갖고 있던 이곳. 여기인가, 홀린 듯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낯선 경험이었다. 나도 건축가처럼 그 바다와 작은 고지대 마을에 푹 빠져버렸다.
아래에 카바농에 대해 쓴 글을 덧붙인다. 내외부 사진이 많지만 저작권이 엄격한 작가라 공개하기가 어렵다. 혼자보기 아깝지만 어쩔 수 없다. 누구나 볼 수 있는 외관 사진은 아래에 있다. 혹시 문제가 되면 알려주길.
카바농은 르 코르뷔지에의 가장 작은 프로젝트다.
1951년 12월 30일 남프랑스의 작은 식당의 구석자리에서 한 남자가 무언가를 스케치하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커다란 정사각형을 그린 후 퍼즐을 짜맞추듯 4개의 직사각형과 1개의 정사각형으로 쪼갰다. 작은 직사각형 안에 다시 여러 개의 사각형을 그려넣었다. 크고 작은 사각형의 조합으로 보이는 이 스케치는 지중해 파도가 넘실거리는 절벽 암석 위에 세울 별장의 기초 도면이었다. 쪼개진 직사각형은 각각의 기능을 담은 공간이 되고 그 속의 작은 사각형은 가구가 되었다. 가장 바깥에 있는 정사각형은 이 기능을 아우르는 집이다. 그는 집의 기능을 함축하고 있는 하나의 방 주변으로 장대하게 흐르는 지중해의 풍경을 떠올리면서 연필을 놓았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가장 작은 프로젝트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아내에게 생일 선물로 줄 작은 여름별장을 그리고 있었다. 도면은 45분만에 그려졌다. 그렇게 확정되었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45분만에 그려진 스케치 속의 별장 ‘카바농’은 다음해인 1952년 여름에 이국적인 정취가 가득한 로크브륀 카프 마르탱의 절벽 위에 세워졌다. 남프랑스의 끝자락에 위치한 로크브륀은 온화하면서도 야생의 거칠음이 공존하는 도시였다. 르 코르뷔지에는 여름마다 이곳을 찾아왔다. 휴가라고 해서 잠시도 나른하게 보내는 일이 없었다. 해변에서 수영을 즐기거나 돌조각을 줍기도 했지만, 사람들을 이끌고 와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구상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혼자 있을 때도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일로 분주했다.
카바농이 세워진 다음 해 집에서 몇 미터 떨어진 장소에 카바농보다 더 작은 아틀리에를 하나 만들었다. 아틀리에 벽에는 르 코르뷔제가 그린 그림과 스케치들로 가득했다. 카바농과 아틀리에를 오가며 건축가는 열정과 영감을 충만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이 집에서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다. 1965년 8월, 수영을 하러 해변으로 나간 르 코르뷔지에는 심장마비로 생을 달리했다. “이 집에서 죽을 때까지 살고 싶다”던 그의 말처럼 바다를 바라보며 서있는 작은 집은 그의 마지막 모습을 간직한 장소가 되었다.
건축은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기능적인 구조를 감싸는 거대한 풍경과 함께 존재한다.
로크브륀은 프랑스의 다른 도시들과 날씨가 확연히 다르다. 뜨겁고 달근한 꽃향기가 동네마다 농밀하게 밀려온다. 굵은 대가 휘어져 축 늘어진 용설란이나 상쾌한 향을 뿜는 유칼리 나무, 한창 푸르른 아칸더스 나무가 쑥쑥 자라 덤불을 이루고 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열대의 꽃들이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제각기 한창때를 표현한다. 온화한 날씨도 잠시, 폭풍이 밀려와 한바탕 비를 뿌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바다와 하늘은 더욱 푸르러지고 꽃과 나무는 더욱 짙은 향기를 뿜는다.
카바농은 절벽의 거친 돌과 하염없이 자라는 열대 식물의 덤불 속에 자리잡고 있다. 르 코르뷔제가 살았던 당시에는 바다를 가리지 않도록 덤불을 쳐내곤 했지만 야생의 자연은 쉴 줄을 모른다. 건너편 고지대 마을에는 별장과 호텔, 리조트가 촘촘이 들어섰다. 고지대 마을은 르 코르뷔제가 무분별하게 들어서는 주택들을 경계하며 제대로된 리조트 단지를 세우자던 ‘록 앤 롭(Roq et Rob) 프로젝트의 대상 부지들이었으나 이미 각각의 집들로 빼곡히 채워졌다. 바다 위에는 거대한 크루즈선이 로크브륀 해안의 절경을 공유하는 중이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 카바농이 있는 해안 절벽을 제외하고는 많은 것들이 변했다.
정작 카바농은 그전과 그리 다른 모습이 아니다. 소나무 패널을 합판 위에 붙여서 제작한 몸체와 슬레이트 지붕은 예전과 다름없이 소박한 모습이다. 모던한 콘크리트 큐브라면 또 모를까. 수직과 수평이 강조되고 수평띠창이 있는 흰색의 건축물을 주로 선보이던 르 코르뷔지에가 나무집을 지은 까닭은 무엇일까?
건물 내부로 들어서야 비로소 이 집의 매력이 확연히 다가온다. 좁은 공간을 기능적이고 효율적으로 표현한 것만이 아니었다. 건축가가 직접 디자인한 심플하고 기능적인 가구들은 충분히 세련된 미감을 간직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벽에 그려진 생생한 벽화들 때문도 아니었다. 이 집이 존재하는 이유는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 때문이었다. 절묘한 위치에 창문은 액자처럼 풍경을 가두었다. 세 개의 크지 않은 창문으로 에메랄드 빛의 풍경이 흐른다. 어두운 집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남불의 공기, 햇살, 암석 그리고 풍경. 집은 밀려드는 자연의 정취와 어울려 더 크고 더 넓게 느껴졌다.
공간 가장자리를 따라 2개의 침대와 작은 세면대가 있는 수납장, 약간 사선으로 놓인 테이블과 두 개의 의자, 벽장이 차례로 놓였다. 침대 왼쪽에는 커튼으로 구분한 화장실이 있고, 천장은 수납시설로 꾸몄다. 몇 가지 되지 않는 가구들이지만 침대 상판을 들어올리면 내부에 수납공간이 있고, 스툴형 의자도 무언가를 넣을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휴지걸이 모양의 조형물은 밤에 책을 읽거나 할 때 켰다 끌 수 있는 간이 스탠드 조명이다. 나무널이 깔린 마루바닥은 노란 색으로 칠해져있고 현관 복도에는 큐비즘을 연상케하는 벽화가 그려져있다. 천장은 화면이 분할되고 부분적으로만 칠해진 몬드리안의 추상화같다. 내부에는 벽이 설치되지 않았으나 공간은 온통 사각형의 결합이었다. 그 사각형은 답답하거나 딱딱하지 않고 시선을 유도하고 적절히 분산하며 공간으로 넓게 펴져있다.
복도 끝에는 커다란 나사를 끼우듯 목재 옷걸이를 조립했다. 옷걸이를 조립할 때 수치와 위치를 정하느라 그렸던 연필 선이 지금도 남아있다. 작지만 효율적으로 꾸미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 집의 주인은 이곳에서 어떤 영감을 얻고 또 어떤 구상을 했을까? 그리고 그의 아내는 생일선물로 마련된 이 장소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이 작은 집이 그의 질문에 어떤 해답을 주었을 지 더없이 궁금해졌다.
336cm의 공간에 건축가의 철학이 담겼다. 이것이면 충분하다.
카바농에는 샤워시설과 부엌이 없다. 외부에 수도시설을 끌어올려 샤워를 했고 사용했고 식사는 바로 이웃한 ‘불가사리 식당(Etoile de Mer)’에서 해결했다. 불가사리 식당의 주인 토마 르뷔타토(Thomas Rebutato)는 카바농을 실현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르 코르뷔제는 1930년대부터 로크브륀 해안에 세워진 건축가겸 디자이너인 아일린 그레이의 빌라 E-1027을 자주 찾았고 디자이너들과의 교류와 프로젝트 구상을 위해 이 집에 머무는 기간이 많았다. 1949년경 보고타 시의 도시계획에 대한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이 빌라에 머물던 중,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식사할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다가 바로 근처에 르뷔타토의 식당을 선택하게 되었다. 르 코르뷔지에와 르뷔타토는 이를 계기로 친분을 쌓게 되었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함께 구상했다. 마음 좋은 식당 주인은 기꺼이 건축가가 머물 집을 위해 작은 부지를 제공해주었다.
카바농은 코르시카에서 프리패브 방식으로 만들어 배와 철도로 이곳까지 옮겨졌다. 공장에서 생산하여 현장에서 조립하는 방식이다. 내부 공간을 구성하는 구성체계로는 르 코르뷔지에가 창안한 모듈러가 활용되었다. 신체의 황금비례를 수학적으로 적용한 모듈러는 공간과 사물의 비례척도라고 할 수 있다. 카바농의 길이와 너비에 적용된 336cm와 높이 226cm도 자신이 정립한 모듈러 체계에 따라 결정된 수치다. 가구의 높이, 창과 면의 구성 등 모듈러에 따라 형성되었다.
용설란에 둘러싸인 통나무집이라는 낭만적인 외관과 달리, 카바농의 내면은 건축가의 엄격한 건축적 이상과 기준에 따라 이루어졌다. 자유롭게 놓여진 듯 보이는 가구도 공간을 형성하는 사각의 틀 안에서 움직이고, 개인의 취향처럼 여겨지는 추상적인 선들도 공간의 흐름을 무한히 확장하는 요소로 배치되어 있다. 이 집 자체가 하나의 모듈로서 완전한 기능을 가진 큐브다. 작고 소박한 공간이지만 그 속에 담긴 건축가의 철학은 단단하고 뚜렷하다.
사적인, 아주 사적인 집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로크브륀 지역을 대상으로 다양한 계획안을 세웠다. 휴양지로 더할 나위없는 장소라 판단한 그는 지중해의 쪽빛 해안을 공유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쾌적하게 머무를 수 있는 리조트 타운을 계획했다. 로크 앤 롭 프로젝트도 이 때 계획된 것이다. 건축가는 투자를 얻어 이 계획을 성사시키려 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 아쉽게도 리조트 프로젝트는 르뷔타토의 식당 옆에 여행자 숙소인 ‘캠핑’을 세우는 데 그쳤다. 1957년에 건축된 캠핑은 2층으로 구성된 숙소이며 로크브륀 해안에 세워져 전망이 좋았다. 두 사람이 머물 수 있는 콤팩트한 구조에 가구와 세면대까지 설치하는 등 르 코르뷔지에는 카바농에서 실험한 바를 적극적으로 실현했다. 르뷔타토는 이 캠핑 덕분에 여름 휴가 시기에도 활발하게 레스토랑 영업을 할 수 있었지만 건축가에게는 아쉬움으로 찾아왔다. 개인별장으로 완성된 것은 오직 카바농 뿐이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카바농을 배경으로 많은 사진을 남겼다. 창문으로 벗은 몸을 내밀며 햇살을 쬐는 장면도 있고 카바농 바로 옆에 위치한 아틀리에에서 스케치에 매진하는 장면도 있다. 동그란 안경을 쓴 그는 개를 끌어안고 다정한 한때를 보내는가 하면,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 카바농과 로크브륀의 스케치를 넣어보내기도 했다.
카바농은 엄격한 이상의 공간이지만 건축가의 사적이고 내밀한 시간도 보듬어주는 장소였다. 그는 카바농을 마음껏 즐겼다. 폭우가 자주 쏟아져 길이 진흙밭이 되어도, 시도때도 없이 자라는 야생의 덤불에 계속 신경써야 해도, 샤워와 식사를 마음대로 하지 못해도 말이다.
건축가는 집 안에 있는 것보다 카바농 옆에 작은 테이블을 놓고 바다를 바라보며 일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수영복 차림으로 테이블에 앉아 일에 몰두하는 건축가 앞에는 거친 해안과 야생의 덤불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등을 굽히고 몰두하는 뒷모습에서 예술가적 기질을 본다. 이제 카바농이라는 단어만으로도 르 코르뷔지에를 떠올리게 되었다. '작은 별장'이라는 뜻을 가진 평범한 단어 ‘카바농’에 예술의 향기가 충만해졌다. 이 작은 집 ‘카바농’에서 발견한 건축가의 삶처럼.
'근대문화유산을 찾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호의 저택, 요정 그리고 문화재 : 부산 정란각 (3) | 2017.05.03 |
---|---|
도쿄도 정원박물관 : 아사카노미야 저택 (0) | 2017.04.03 |
서울한옥 : 명륜동 장면 선생 옛집 (1) | 2017.02.22 |
서울한옥 : 백인제 선생 옛집 (0) | 2017.02.07 |
공장이 좋아! F1963 (1) | 2017.0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