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마북동의 조용한 동네에 기와를 얹은 전통 민가가 한 채 있다. 양반댁 큰 저택은 아니지만 안채와 사랑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사랑채 앞으로 넓찍한 마당이 있는, 제법 모양새를 갖춘 집이다. 풍성한 나무들이 있어 집이 더 넓어보인다. 겨울엔 이 풍경이 조금은 싸늘하게 느껴지겠지만 봄이 오면 분홍으로 만발할 꽃나무들이 지천이다. 

한옥만 보았다면 이 집의 절반만 본 셈이다. 뒤쪽 언덕 위에 붉은 벽돌로 된 이층 양옥이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 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서있다. 건물 옆에는 두꺼운 돌판에 우산을 든 사람과 양옥집 하나가 그려져 있다. 그림 속 집과 어쩐지 닮았다. 그림 위에는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이라는 명패가 붙어있다.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에 등장한 집이라고 기억할 것이다. 이곳은 화가 장욱진이 여생을 보냈던 집이며 화가의 예술혼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곳이다. 

장욱진은 집을 자주 그렸다. 초가삼간 작은 집이 땅과 하늘을 모두 담은 듯 광활하다. 온 가족이 복닥복닥 들어앉아 있어도, 누정처럼 마루와 기둥과 지붕만 있어도 좋았다. 그림 속 집은 하늘도 땅도 물도 집의 일부인 것처럼 세상 모든 것을 보듬어주었다. 그 집엔 새가 앉았다 날아가고, 황소와 수탉과 호랑이가 들락날락한다. 부처도 아이들처럼 슬며시 미소짓고 있다. 화문석 한 장으로, 방 한 칸으로 세상과 맞먹는 그림도 있다. 그림 속은 모두 평등하다. 나무 한 그루가 긴 강물처럼 하염없이 깊은 곳, 도인의 이상향처럼 말갛고 밝은 곳이다.

수많은 ‘집’ 그림은 화가가 살아온 여러 ‘집’에서 그려졌을 것이다. 화가에게는 특별한 화실이 여럿 있었다. 남한강가 덕소에 화실을 짓고 혼자 생활하기도 했고 가족들이 사는 서울 명륜동 집 근처 한옥을 아틀리에로 꾸미기도 했다. 예순을 넘긴 뒤에도 수안보로 가서 농가를 고쳐 그곳에서 그림을 그렸다. 가족과 떨어져 화실 생활을 고집한 것은 그림에 대한 집념이었을 것이다. 어떤 경계를 넘어가기 위해 세상과 절연한 채 은둔하며 오로지 그리기만 했다. 그 덕분에 어떤 경지에 이른 맑은 화폭과 개구진 표정의 인물들이 탄생하게 되었고, 맑고 옅게 절제된 이상향이 펼쳐졌다. 

1986년 예순아홉의 화가는 용인 마북동의 조선 후기 한옥을 사서 고쳤다. 아내와 둘이 살며 그림을 그림에 매진했던 화가는 3년 후 양옥을 지었다. 몸이 쇠약해지고 기관지가 약해진 화가가 조금은 편리한 생활을 염두에 두고 지은 살림집 겸 아틀리에다. 이 집은 화가가 술을 마시며 그림을 펴놓고 인부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흐른다. 그래서인지 양옥은 그림 같고 동화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이 집에서 맑은 밤을 유영하는 노인을 그린 ‘밤과 노인(1990년 작)’이 완성되었다. 

마북동 주택은 그림 속의 모든 집의 총합이다. 초가삼간처럼 아담한 작은 집도 있고, 양옥도 있고, 조그만 누정도 있으며, 화문석을 깔기 좋은 마당도 있다. 집도 온전히 화가의 작품이었다. 오래된 한옥을 손수 고치면서 하나의 완벽한 작품으로 완성했던 것이다. 길다란 나무판에 그림처럼 글자를 새겨 걸어두었는가 하면, 뒤쪽 정자에는 특유의 물고기 모양의 현판과 글자가 새겨져 있다. 안채를 살펴보면 재미난 부분이 많다. 작은 창문이 예상치 못했던 위치에 뚫려 있었고, 조그만 문은 키가 큰 화가가 제대로 드나들 수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그 어느 나무 기둥도 반듯하게 재단된 것이 없었다. 구부러지고 휘어진 채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 모양새가 흰 캔버스에 그어놓은 검은 선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부드럽고 온건한 형태의 밝음이 집을 채우고 있었다. 고독하지만 밝고 따스한 온기야말로 웅숭깊은 고옥이 드러내는 예술가의 모든 것이 아닐까? 이 집은 인간으로서, 또 예술가로서 흔들리며 또 스스로를 세우며 어떤 경지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집은 한 인간이 예술가임을 깨닫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한 흔적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것을 발견할 때 진정한 감동의 공간이 된다. 

나는 그림 속 작은 집을 향해 걷는다. 작디작은 문을 열고 아랫목에 슬그머니 발을 뻗는다. 그림과 나는 일체가 되어 밝은 밤을 유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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