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하고 어려운, 이 문화유산들
베를린 보로스 컬렉션
(보로스 컬렉션 : www.sammlung-boros.de)
문화유산 연구자 이현경 박사가 이런 이야길 했다. “네거티브(negative)나 다크(dark)라는 개념보다 디피컬트(difficult)라는 개념이 우리 문화유산에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관점과 시대에 따라 문화유산은 다양한 맥락을 가지므로 특성을 고정하는 단어보다 복잡한 의미를 포착할 수 있는 열린 언어가 적절하다는 뜻이다. 디피컬트. 와닿는 표현이었다. 특히, 내가 관심 갖고 있는 건물군들은 이 단어가 필요했다. 외국어를 부러 쓴 이유는 ‘네거티브’ ‘다크’라는 단어가 문화유산과 결합해서 개념어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전쟁유적. 예전엔 전쟁영웅의 무용담이 흐르는 호국보훈의 장소임을 부각했으나 지금은 반전과 평화의 의미가 더 중요해졌다. 나는 전쟁 유적에 특별히 관심이 많다. 우리 현대사의 가장 강렬한 사건임에 틀림없는데, 어째서 모든 관점은 사라지고 정치만 남아있는 것일까? 방치된 전쟁유적지들은 상당수 사라졌다. 전쟁 체험은 휘발되고 본질을 바라볼 시간을 놓쳤을 지도 모른다.
파괴의 장소에 삶의 장소가 생겨난다면 그 역시 강력한 장소적 상징이 될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 속엔 교교히 전쟁의 아우라가 남아있지 않던가, 권력과 자본이 망각을 종용하며 흐르지 않던가? 삶도 땅도 건물도 이중적인 얼굴을 갖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그토록 어려우니 ‘디피컬트’다.
보로스 컬렉션(Sammlung Boros)은 그러므로 의미 있게 볼만한 건축물이다. 베를린 프리드리히슈트라세에 있는 거대한 장방형의 콘크리트 건물은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중 주민 방공호로 지었던 벙커다.(보로스 컬렉션 홈페이지에는 강제노동자들이 건설했다는 문구가 들어있다.)
제국 수도의 건축 총감독을 맡은 알베르트 슈페어의 마스터플랜 아래 카를 니콜라우스 보나츠가 계획했다. 알베르트 슈페어는 제3제국이라 불리던 나치 독일의 장대한 고전주의 건축물을 설계했던 건축가다. 웅장한 건축과 압도적인 퍼레이드가 합쳐진 나치전당대회를 조직했던 슈페어는 로마처럼 폐허가 된 뒤에도 아우라를 가지는 천년의 도시 게르마니아를 꿈꿨다. 불멸의 도시는 전쟁 종료와 함께 장렬히 산화했다.
보로스 컬렉션이라는 걸출한 미술관으로 탄생하기 전까지 건물은 흑역사로 얼룩진다. 무역회사의 창고로 쓰이기도 했지만, 전쟁포로를 수감하거나 보통은 에로틱하고 미심쩍은 대규모 행사용이었다. 1995년 이후로 전시공간으로 간혹 사용되었고 2003년 크리스찬 보로스가 구입해서 소장품을 전시하는 갤러리로 바꾸었다. 옥상에는 보로스 부부의 집이 꾸며져 있다. 유리와 노출 콘크리트로 가볍게 얹혀진 증축부분이 절묘하게도 거대한 벙커와 잘 어울린다.
예술은 역사의 어두운 부분을 기꺼이 치유해주는 도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간은 힘이 세다. 거칠고 복잡한 역사가 고스란히 질감이 되어버린 이 건물에서 예술작품은 맥 빠진 존재가 되기 쉽다. 장소의 기억과 그 장소의 감각이 각인된 후에는 작품에 몰입하기 어렵다.
그러나, 음지의 장소에 환한 빛을 뿌린다는 것은 용기있는 행동이다. 치욕스런 역사에 대해,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같은 전쟁 건축에 대해, 폭력과 광기에 쉽게 사로잡히는 인간에 대해, 그 모든 것을 감싸주는 예술이라는 인간의 활동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수 있기 때문이다. 침묵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알베르트 슈페어는 전쟁 지도부의 책임을 통렬히 언급함으로써 히틀러의 최측근 전범재판에서 유일하게 사형을 면했다. “정권의 수장이 독일 국민과 세계 시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해버린 이상 저에게 그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비극적인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회고록을 남겼다.
우리도 비슷한 무게의 짐이 있다. 우리는 침묵하는 세대가 될 것인가, 질문하는 세대가 될 것인가? 건물은 역사이고 역사는 결코 순결할 수 없다. 그 복잡함과 어려움을 감내하지 못한다면 결코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다. 디피컬트. 그게 인생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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