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역, 그 중에서도 간이역을 지나다니다 보면 요상하게 생긴 콘크리트 건물을 가끔 보게 될 터이다. 증기기관차가 다니던 무렵에 사용했던 급수탑이다. 증기기관차는 말 그대로 증기를 이용해야 하므로 역마다 물을 공급받아야 했다. 그래서 일종의 물탱크를 기차 선로 주변에 두고 그때그때 보충했던 것이다.
증기기관차가 사라진 후에는 급수탑도 제 할 일을 잃었다. 열차가 수없이 교차하는 대도시의 역사에는 급수탑이 일찌감치 자취를 감췄지만 기차가 느슨하게 다니는 작은 역이나 폐역 등지에는 여전히 남아있다. 철도 산업과 관련된 중요한 자료라 하여 대부분의 급수탑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중앙선 화본역에 도착했다.
군위 화본역을 두고 가장 운치있는 간이역이라고 했던가? 서울 청량리역에서 경주까지를 이어주는 중앙선 열차가 하루에 서너 차례 정차하는 것 외에는 한적하기만 한 곳이다.
간이역을 보러 관광객들이 꽤나 들른다. 아담한 역사를 뒤로 하고 철길 건너편에 키가 큰 급수탑이 있다.
멀찍이서도 급수탑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규모가 큰 건조물이다. 급수탑 주변으로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는 장소를 만들었다. 한여름 뜨거운 햇살에도 아랑곳없이 아이들이 땀흘리며 뛰어다니고 아이들의 부모나 친지로 보이는 어른들은 급수탑이 만드는 길고 넓은 그림자 주변에 모여서 한줄기 바람을 느끼며 왁자지껄이다. 역사에서는 '무궁화호'가 곧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고, 잠시 후 열차가 들어오고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증기기관차라면 엄청난 소음을 뿌렸겠지만 지금의 열차는 드나드는 소리조차도 소음이라고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조용히 정차하고 조용히 출발한다. 기차가 버스보다 조용하다.
화본역 급수탑이 특별한 이유는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기 떄문이다. 외관이 거의 그대로 남아있는데 다른 급수탑과 달리 문화재 지정이 되지 않았다. 다만 주요철도문화재라는 안내판이 붙어있을 뿐이다. 급수탑 내부에는 하단부에 나무 패널이 깔려있어 앉아서 감상할 수 있었다. 조명 시설도 있는 것으로 보아 저녁시간에도 급수탑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두께가 서로 다른 철구조물로 된 두 개의 파이프가 꼭대기까지 연결되어 있고 바깥으로는 중간에서 잘린 사다리가 있는 급수탑.
급수탑의 원리는 어떻게 될까?
급수탑 앞에는 물을 저장하던 저수조 시설이 남아있는데, 그 안에 급수탑의 급수 원리를 그림으로 설명해두고 있어서 궁금증이 쉽게 풀렸다. 두 개의 파이프는 입수와 배수를 관장하는 파이프이며, 낙차를 이용해서 급수탑의 물을 증기기관차로 옮길 수 있다. 급수탑 상부에 철로 된 막음 장치가 있거나 물탱크를 삽입하는 형태여야 옳은데, 그에 대한 설명은 없다. 급수탑이 이렇게 높다란 구조물이어야 하는 이유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기차역의 급수탑이 모두 이런 모양새일까? 문화재로 지정된 여러 급수탑을 찾아보면 모양새가 다른 듯 닮았다. 연대에 따라 장식적이기도 하고 재료가 달라지기는 하지만, 급수의 원리는 유사하기 때문에, 급수탑 외에도 저수조와 기계실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 일치한다.
중앙선이 1941년에 개통했으므로 중앙선 일대에 남아있는 급수탑은 모두 유사한 형태를 갖고 있으며 철근콘크리트로 된 최신 기술을 활용했다. 높다란 타워형에 상부를 돌출시킨 형태, 환기구가 마치 동물의 귀처럼 솟아있는 형태 등이 유사하다.
(좌)원주역 급수탑. (등록문화재 제138호)강원도 원주시 소재. 꼭대기에 환기창 4개 있으며 1940년대 급수탑의 전형적 구조.
(중)도계역 급수탑.(등록문화재 제 46호) 강원도 삼척시 소재. 다른 급수탑보다 높이가 낮은데, 그 대신 지대가 높아서 수압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한다.
(우)연산역 급수탑. (등록문화재 제 48호) 충남 논산시 연산면 소재. 남아있는 급수탑 중 가장 연대가 오래된 것. 석재를 사용한 점이 특징.
(좌)추풍령역 급수탑(등록문화재 제 47호). 충북 영동군 소재. 현존하는 급수탑 중 유일하게 사각형 평면을 가지고 있다.
(중)삼랑진역 급수탑.(등록문화재 제 51호). 경남 밀양시 소재. 1923년 건립. 철근콘크리트 구조이면서 상부에 석조모양의 장식을 했다.
(우)구 학다리역 급수탑.(등록문화재 제 63호) 전남 함평군 소재. 1921년 건립되었다. 석조 원형탑의 형태.
(사진 출처-문화재청 홈페이지 www.cha.go.kr)
증기기관차가 사라진 후, 쓸모없는 시설로 전락했지만, 고속도로도 없고 그저 기차만이 도시와 도시를, 나라와나라를 이어주던 옛 시절에는, 기차역과 급수탑이야말로 경찰서, 관공서와 마찬가지의 주요 시설이었다.
옛날 뉴스를 찾아보면, 중국의 장학량의 시위대가 봉천역을 급습하여 급수탑을 폭파했다는 소식과 더불어 변전소, 급수탑, 정거장(기차역) 등이 주요폭파 대상물이었다고 명시하고 있다. 당시에는 부산역-경성역-(만주)봉천역으로 열차가 이어져 국제급행열차가 운행되었다. 봉천의 소식은, 경성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진 뉴스였다.
혹한기에는 급수탑도 얼게 되어 열차가 다니지 못하는 일도 생겨났다.
영화 <안나카레니나>를 보면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증기기관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 나오는데, 그 정도는 아니라 해도 물을 사용해야 하는 만큼, 한파는 열차 여행을 방해하는 주요한 상황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급수탑이 얼어버려 열차가 임시 휴업을 해야하는 사태도 일어났다.
교통부에 보고된 바에 의하면 지난 15일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16일 상오 8시 현재 정읍지방은 32미리, 순천지방은 12미리의 적설량을 보여 열차운행에 지장을 가져오고 있다 한다. 한편 삼척 철도국관내 철암지구의 급수탑이 얼어붙어 제 1881, 1882 열차가 운휴되었다고 한다.
-동아일보 1958년 1월 17일
기능을 잃어버린 급수탑을 유쾌하게 활용하는 방법은 없을까?
여러 지자체에서 급수탑과 역사 시설물을 관광시설로 활용하는 방안을 내놓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좀더 새롭고 창조적인 방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네덜란드의 건축그룹 zecc는 네덜란드 쇠스트 지역에 방치된 급수탑을 주택으로 개조한 바 있다. 집에 대한 고정관념이 굳건한 우리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례지만, 기발하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사라져가는 오래된 건축물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일은 늘 관심을 가져야할 것이다.
근대문화유산을 재활용하는 프로젝트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지금, 관점을 바꾸는 새로운 활동이 분명 필요한 시점이다. 테마파크가 되어버린 근대건축물이 아닌, 주민들에게 정말 필요한 장소로서 재활용되는 아름다운 사례를 많이 많이 보고 싶다.
하우징 관련 잡지에 네덜란드 건축가 그룹 zecc의 프로젝트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이들 발상이 재미있어 소개한다. 이들은 방치되거나 폐허로 남은 건축물을 주택으로 변용하는 데 능수능란한 재능을 보여준다.
폐 기차역과 벽돌로 지은 공장은 근사한 주택으로 바뀌었고 다양한 시설들이 학교로 바뀌거나 학생들을 위한 장소로 바뀌었다. 그 중에서 눈에 띈 것은 폐 급수탑을 주택으로 바꾼 사례다.
네덜란드 쇠스트 지역에 1931년에 지어진 급수탑이 방치된 채 남아있었다. zecc는 이것을 9층으로 나눠 공간을 적절히 배열하여 주택으로 개조했다. 보통은 땅에 길쭉하게 집을 짓고 각기 다양한 공간을 배치하기 마련이지만 건축가는 수직으로 세워서 공간을 해결했다. 철재 나선 계단을 따라 현관과 거실, 주방과 식당, 게스트룸, 아이들 방, 욕실, 사우나, 서재, 마스터 베드룸, 라운지가 차례대로 형성되었다. 크고 넓은 집이 아니라 원형의 공간이 차곡차곡 쌓인 높은 집이 탄생했다.
화이트와 검정, 그리고 회색이 적절히 어우러진 내부는 세련된 분위기를 풍긴다. 욕실의 상부에 둥그런 철재 구조물은 이 건물이 급수탑이던 시절 물탱크의 아랫부분이다. 건축가는 이 부분을 남기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 공간을 물과 관련된 시설인 욕실로 꾸며서 건축물의 역사를 재치있게 남기고자 했다. 이들의 리노베이션 방식은, 문화유산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장소를 박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과감하게 변화를 주는 것으로 건물이 가진 역사적 가치에 질문을 던진다.
(사진 출처- http://www.zecc.n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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