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어 중에 ‘플라뇌르(Flaneur)’라는 말이 있는데, 만보객이나 산책가라는 뜻으로 번역되곤 한다. 보들레르가 도시인의 특성 중 하나로 들었던 것이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관찰자라는 점인데, 이는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우리말로 딱 어울리는 단어를 찾기가 신통치 않은데, 만보객은 조금 예스럽게 들리고, 산책가는 다소 이지적으로 들리므로, 철학가나 문학평론가에게 적합할 만한 표현같다.



 

그렇다면 ‘노닐다’는 어떨까? 


턱을 치켜들고 눈을 내리깔며 유유자적하니 이리기웃 저리기웃하는 한량이나, 바스락거리는 고운 치마를 입고 물에 뜬 유등처럼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는 애기씨가 연상된다. 한창 도시화가 진행중이던 파리의 플라뇌르는 경이롭게 변모하는 도시 풍경을 사뭇 비판적으로 보았을지는 모르겠으나, 노닐다는 분명 지그시 바라보며 해학적인 통찰을 얻어내는 유쾌한 관람자의 시선이 담겨있다.



나는 오래된 건물에서 노니는 것을 즐긴다. 기웃거리고, 귀를 기울이고, 만져보고, 냄새 맡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 19세기 파리 사람들처럼, 나는 낯선 장소와 거리를 내 시대의 그것처럼 노닐어본다. 때론 시간의 답을 듣기도 하고, 때론 무위의 평온함을 느끼기도 하고, 때론 태고적부터 어어져온 것만 같은 깊은 통찰을 얻기도 한다. 


오래된 건물을 볼 때 늘 치열할 필요는 없을 거다. 우리는 삶의, 또 건축의 아름다움을 보러 그곳에 가지 않던가. 그리고 사라짐의 아름다움, 폐허의 아름다움을 덤으로 발견하기도 하고 말이다. 



개관한 지 두어달 되었나,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에 있는 삼례문화예술촌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나는 날카로운 매의 눈으로 구석구석을 쏘아보며 신기한 것들을 찾아내는 탐험가였고, 오래된 것이 어쩔 수 없이 풍기는 먼지를 이해하는 나이든 할머니 같기도 했고, 이러저리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이곳저곳 기웃거리느라 정신없는 세살짜리 꼬마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모아놓은 종합선물세트 같은 곳이었다. 


책, 커피, 미술, 목공, 

그리고 오래된 창고. 


더 바랄게 없다.









건물마다 건축재료가 조금씩 다르다. 붉은 벽돌을 드러낸 것이 있는가 하면,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진 것도 있고 철판으로 덧댄 것도 있다. 창고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넓은 광장이 형성되어 행사를 치르기에도 좋다.






여름이 다가오기 전, 전주에 사시는 형님이 전화를 주셨다. 사시는 곳 근처에 양곡창고를 개조하여 예술촌이 생겼는데, 꽤 볼만하다는 말씀이었다.


요즘 지역재생을 위한 예술촌이 얼마나 많은가. 근대건축물을 테마로 박제된 민속촌으로 만들어놓은 곳도 많고, 공연히 돈만 들이고 볼 것 없는 전시공간도 도처에 있다. 그렇고 그런, 많고 많은 예술촌에 피로함을 느끼고 있었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장소가 내내 마음에 걸려 여름의 끝자락에서 전주로 향했다. 


어렵사리 방문한 셈이지만, 기대와 만족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삼례는 전주와 멀지 않은 곳으로, 지금도 농업이 주를 이루는 지역이다. 양곡창고는 삼례역 바로 인근에 있다. 삼례역은 1914년에 개통하여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일제강점기 미곡 수탈의 현장이라는 기억을 안고 있으나 후에 농협이 소유하고 활용해왔다. 모두 7동의 창고와 1채의 일식 건물이 이 장소에 남아있는데, 창고는 컨템포러리 아트 갤러리, 디자인 뮤지엄, 목공소, 책 박물관, 북아트 공방, 갤러리 카페 및 커피 공방으로 운영되고 예술촌 초입에 위치한 일식건물은 인포메이션 센터로 사용된다. 



기분 좋게도, 오래된 건축물의 분위기는 그대로 유지하고 적절한 선에서 새로운 컨텐츠를 유입했다. 갤러리든, 카페든 다른 관람시설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특징을 내세운다.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분위기라고 할까? 



건물마다 세월의 흔적들이 곳곳에 보인다. 창고의 문에 수놓은 듯한 농협의 엠블렘과 외벽에 적혀있는 구호들은 내게도 낯설지 않다. 페인트 붓으로 쓴 것들도 눈에 띈다. 구역을 표시한 것, 어떤 용도의 건물인지를 적어놓은 것 등 건물과 건물을 사용한 사람들의 활동을 기록한 흔적들이다.



이곳에 없는 것이 있다. 비용이 높을 뿐 그 효용성에서 언제나 의문을 갖고 있던 멀티미디어 전시물이 없고, 딱히 다른 곳과 다를 바 없는 역사관이 없다. 내부의 벽을 가리고 넓고 높은 공간을 쪼개는 흰색의 가림벽이 없다. 그래서, 창고 건물의 장점이라 할 수 있는 높고 넓은 공간을 시원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각 공간이 공방을 운영할 계획이라는 점도 매력적이다. 멤버십을 유지할 수 있는 공방 활동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드나들게 하는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멋지게 복원된 근대문화재가 컨텐츠가 부실하여 결국 한번 왔던 사람들은 더 이상 찾지 않는 장소가 되어버린 것을 종종 보았다. 그럴 때마다, 지속가능한 컨텐츠,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드나들고 오래도록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컨텐츠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느꼈다. 

목공소와 북아트 공방은 이미 공방을 시작했고, 카페는 로스팅을 배우는 커피 공방을 준비중이다. 아직은, 신선하고 때묻지 않은 느낌이 있다. 전주 한옥마을이 고즈넉한 한옥의 분위기를 즐긴다기보다 엄청난 관광객이 드나드는 관광지가 되어버려 다소 아쉬움이 있었는데, 넉넉하면서도 문화적인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보완적인 장소를 만난 것이다. 




서로 소통하면서도 고유의 특성을 지켜가는 각각의 공간들. 어떤 점이 각기 다른 분야가 한자리에 모이도록 한 것일까 궁금하다. 흥미롭게도, 삼례문화예술촌은 "삼삼예예미미 협동조합"이 위탁을 받아 운영하고 있다. 요즘 협동조합의 가능성에 대해 여러 차원에서 논의가 나오고 있는데, 다소 생소한 예술협동조합의 출현이 무척 반갑고 또 그들의 활동이 기대된다. 



갤러리 카페의 음악 선곡은 일품이다. 하지만 메뉴는 좀더 보충되어야 할 것이다.







  

인포메이션 센터에 붙은 이런 포스터를 보았다. 액토건축에서 진행하는 집짓기 프로젝트다. 철암,인제, 서천 등의 시골마을의 폐가들을 건축학교 학생들과 함께 새로운 공간으로 바꾸는 작업인 것 같다. 올해는 삼례다. 



길을 따라 나오면서 집짓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몇몇 집들을 보았다. 지방의 작고 바스라져가는 집들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활동하고 있었구나. 이제 삼례는 이야기거리가 많은 지역이 될 것 같다. 














삼례문화예술촌 곳곳에서 찾은 옛 활동의 흔적들. 건물 내부의 빗살무늬 목재는 미곡을 저장할 때 벽과 간격을 두기 위해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이런 구조적인 요소들을 남겨두고 공간만 활용하여 컨텐츠를 삽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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