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십대에 이르렀을까?
작은 체구에 둥근 얼굴을 한 여인은 활발하다기 보다는 조금 느릿하게 몸을 움직이는 편이었다. 무심하게 문을 밀고 나선 여인의 눈매가 갑자기 솟아오른다. 입술은 감정을 내보이는 기관이라는 듯, 꽉 다물고 있으면서도 불편한 상황에 맞서 부당함을 외치는 듯했다.
그 여인이 불쾌하게 바라보는 곳에 내가 있었다.
나로 인해서 그녀는 불쾌하고 불편했고 부당한 대우를 받은 듯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었다. 여인의 감정은 내게로 전달되었다. 나는 거리를 걷고 있었고 오래된 아파트 앞에 서서 그곳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카메라는 꺼내지도 않았다. 사진을 찍는 것에 대한 불쾌감이 아니었다. 건물 앞을 지나가거나 건물에 관심을 갖는 것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었다. 그 옆 건물로 옮겨갔을 때는 세 남자의 시선을 동시에 받아야했다. 건물 모퉁이 1층의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들로 보였다. 그들은 내가 사진을 찍어도 제지하지는 않았지만 등이 타들어갈 정도로 강력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그들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멀찍이서 건물 전체를 바라볼 때도 세 사람의 시선은 내게 고정되었다. 그들은 그 누구도 건물에 관심 갖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무심하게 거리를 지나가기를, 자신의 집이 마치 앞뒤에 있는 높은 건물의 그림자인 양 그 누구의 시선도 끌지 않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이 집에 사는 모든 사람의 눈빛이 그러할까? 그렇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아파트인 청풍장 그리고 소화장 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청풍장은 1941년에, 소화장은 1944년에 지어졌다. 지어진 연대가 3년의 차가 있을 뿐, 외관이나 내부 평면, 규모가 거의 같다. 두 건물은 멀티플렉스 영화관과 높다란 주차빌딩 사이의 좁은 도로에 나란히 있었다. '가장 오래된'이라는 수식어는 건물에는 그다지 매력적인 수식어가 되지 못한다. 그것은 '노후되고 퇴락하고 시대에 뒤떨어진'과 같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적절한 보수와 수선을 해왔다면 모를까. 집은 세월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아파트는 건축물 안전진단에서 위험등급을 받았다. 벽돌이 주 구조제로 되어 있고 물을 사용하는 곳은 콘크리트로, 생활공간은 목재로 구조를 세웠는데, 후에 재시공하고 공간을 변용하면서 목재 구조체가 안전성을 확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래 3층 건물인데 어느 사이에 4층이 증축되기도 했고 1,2층은 상업용도로 발코니를 넓히는 등 조금씩 집의 규모가 커져 온 탓이다. 게다가 좁은 골목에 인접하고 앞 뒤로 고층건물군에 둘러싸여 있어 재건축 사업도 큰 잇점을 보기 어려워 여러 차례 추진하다 무산되었다. 문화재 등록은 가당치도 않다. 각 가구별로 알아서 고치고 넓히고 해온 탓에 공동으로 사용하는 부분은 노후가 더욱 심화되었다. 페인트칠을 하고 뒤틀린 곳을 보수하는 일은 과연 언제가 마지막이었을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집이다.
연구자들은 당시의 건축기술과 현황을 살펴보는 주요자료로 가치를 평가하면서 어떻게든 유지하자고 촉구하지만, 그것이 이 집을 유지하도록 하는데 어떤 식으로 작용할 수 있을까?
1930년대, 서울, 부산 할 것 없이 도시화가 가속되던 시기로 거슬러가보자.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주택이 턱없이 부족했고 주택을 공급하는 일이 정부사업에 큰 축을 차지했다. 도시인들이 거주하기에 가장 적합한 형태가 아파트란 사실을 그때도 알아챘던가 보다. 그 전까지는 2층 정도로 일식 목구조의 연립주택이나 상가주택이 지어졌다면, 이때부터는 3층 이상의, 콘크리트 구조의 아파트가 지어지기 시작한다. 서울에 세워진 최초의 아파트로 기록된 미쿠니 상사의 관사(1930)가 이때 지어졌고, 조선영단이 세운 목조형의 혜화 아파트가 1942년이 지어진다. 부산에는 청풍장이 최초의 아파트라는 기록을 갖고 있으며 현존하고 있다.
청풍장, 소화장이 있는 남포동 거리는 일본인들이 부산 앞바다에 상륙한 후 생겨난 신도시다. 반듯한 도로가 생기고 각종 관공서와 쇼핑가가 들어섰고 용두산에는 신사가, 그 너머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이, 한켠에는 자갈치시장과 부평시장(국제시장)이 생겨나 활기가 넘쳤다. 도로를 가로지르며 전차가 달렸다. 번화한 거리의 중심에 3층으로 지어진 최신식 아파트 '청풍장'과'소화장'이 들어섰다. 20평과 27평 두 가지 평형으로 내부는 복도가 있는 다다미방이었다. 전기설비와 상하수도는 물론, 수세식 화장실이 설치되고 쓰레기를 모으는 장소(더스트 슈트)가 있는 최신구조였다.
부산으로 몰려든 인구를 적절히 수용하기 위해 해안가 매립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청풍장, 소화장이 있던 남항 부근도 한때는 해안가였다가 매립하여 주택지로 변모햇다. 매립은 동양척식주식회사 주도로 이루어졌는데, 동척은 자회사인 조선도시경영회사를 세워 주거지 개발과 주택건설업을 병행했다. 청풍장과 소화장은 바로 조선도시경영회사가 세운 아파트다.
광복 전에는 조선도시경영회사와 일본인의 소유였던 이 아파트는 적산으로 분류되어 한국인에게 불하되었고 전쟁 때 피란민을 수용하면서 4층을 증축하고 내부 구조도 여러 가구를 수용할 수 있도록 변화되었다. 그 후로 대지 소유주와 건물 소유자가 나뉘었는데, 등기가 된 집도 있고 누락된 집도 있으며 증축된 부분은 여전히 미등기상태다. 소유자가 실제 거주하기도 하고, 임대로 사는 사람도 있으며 도대체 어떤 인물이 살고 있는지 파악되지 않는 가구도 있다. 다다미가 여전히 깔린 방도 있고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변용이 이루어진 집도 있다. 그들 모두가 남루한 삶을 사는 빈곤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는 오산이다. 국제 시장을 배후로 쏠쏠한 재미를 보는 사람들도 있고 하루하루 만족하는 자영업자들도 있다.
벌써 70년을 오가는 건물. 이 아파트의 복잡한 상황이야말로 파고들수록 실타래가 엉켜있는 우리 사회를 종횡으로 압축해놓은 듯하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미문화원으로 잘 알려진 동척 부산지점은 1929년 9월에 세워졌다. 광복 후 미군이 주둔하면서 미문화원으로 사용되었고 한국전쟁기에는 미 대사관으로도 사용되었다. 1999년에 반환되어 2003년 부산 근대역사관으로 개원했다. 부산의 개항기를 보여주는 다양한 자료는 꽤 보는 재미가 있다. 3층에서 열리는 특별전도 빼놓지 말것. 전시관람은 무료다. 또, 1층 도서관도 늘 열려있다. 근대역사관과 연계되어 도서관이 있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이곳이 보물같다. 근현대 자료들만 모아둔 전문도서관이 생길 때도 된 것 같은데 소식이 없다. 활용법을 찾지 못해 닫혀있는 근대문화유산을 전문도서관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추진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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