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회색으로 바랜 원고지에서 세월을 읽을 수 없었다. 엊그제 필적을 남긴 것처럼 잉크의 흔적이 생생했다. 원고지는 반으로 접어 오른쪽 귀퉁이를 묶어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던 모양이다. 세로로 한 자 한 자 적어내려간 글씨에 잉크의 농담이 느껴졌다. 푸른 색 펜 글씨는 멋부려 구부린 흔적 없이 담담하고 단정했다. 펜으로 글자를 적으면서 약간 긴장한 듯도 싶었다. 시집을 출간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후, 스스로 필사해서 만든 시집이었으니까.   

글자와 글자 사이에 잠깐의 멈춤이 느껴진다. 원고지 속 사각의 칸에 한 글자씩 써 넣으면서 무던히도 호흡을 고르는 시인이 숨결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글자는, 한 편의 시가 되어 읽히기 전에 종이 위에 펜촉이 사각거리는 소리와 종이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한쪽 손바닥을 조용히 누른 채 글자를 채워가던 청년의 호흡으로 먼저 다가왔다. 나는 글자를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그 호흡을 따라간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일혼자 묻힌 언덕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게외다 …



이윽고 마침점


나도 격앙된 호흡을 길게 내쉬었다.  



작년 봄날의 일이다. 

시인 윤동주의 육필 원고가 모교인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기증되던 2013년 3월, 도서관 전시실에서 원고를 공개하는 전시회가 있었다. 나는 우연히도 연세대 교정을 지나다가 전시회를 알리는 현수막을 보았고 얼른 도서관을 찾았다. 평전이나 논문 속에서만 존재하던 육필 원고를 직접 볼 수 있는 귀중한 기회였다. 시인의 필체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도 잊지 못할 사건이다. 윤동주의 시는 내가 “책읽기를 참 좋아합니다.”라고 또랑또랑하게 발표하던 초등학교 시절부터 내 곁에 있었지만, 시인의 온기와 흔적이 담긴 원고지를 보는 순간, 시인은 그 이전과 다른 존재가 되었다. 그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원고 뭉치 속에서 그는 봄의 미풍처럼 머물렀고 불꽃처럼 타올랐다.





시인의 유족이 연세대에 기증한 시인의 소장품. 그가 사랑했던 시집과 문학책들이다. 




10대의 문학소년 시절부터 그토록 아끼며 읽었다던 정지용 시집과 한정으로 발간된 백석의 시집을 구할 길 없어 도서관에서 빌려 베껴쓰고 거듭 읽었다는 <사슴> 필사본도 한켠에 있었다. 시인은 이 자리에 없건만 시인이 소장했던 책들은 북간도 용정의 집에서 먼 시간을 건너 이곳까지 왔다. 시집 <사슴>에 대한 사연은 송우혜 작가의 ‘윤동주 평전’에서 읽고서 밑줄 그어두었던 부분이었다. 그런 책들을 눈으로 확인했을 때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윤동주의 학적부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학적부에는 ‘尹東柱’라는 이름은 붉은 색으로 지워진 채 ‘平沼東柱’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히라누마 도주'라는 그의 새로운 이름은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 위해 선택한 것이었다.

한참 동안 전시실에 머물다가 도록을 챙겨서 나왔다. 밖은 봄날 답지 않은 차가운 바람이 불었으나, 빛나는 햇살만큼은 참으로 아름답게 나를 감싸주었다. 어디론가로 바삐 걸어가는 신입생들의 발걸음이 참으로 경쾌했다. 대학 캠퍼스에서 번지는 따사로운 기운에 눈을 감고 어찌할 바 모른 채 잠시 머뭇거렸다. 나는 교문을 향해 가는 학생들과 반대로 옛 기숙사쪽으로 걸어갔다



 



연세대 교정의 윤동주 시비. 그의 아우인 고 윤일주 교수가 디자인했다.




2층 한켠을 윤동주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옛 기숙사. 그가 시를 쓰던 곳은

지붕 아래의 어느 작은 방이었으리라.




윤동주가 서울에 머물렀던 시기는 1938년부터 1941년까지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던 4년 정도이다. 그는 북간도 명동에서 1917년 12월 30일에 태어났고 평양 숭실중학교에서 잠깐 수학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명동과 용정에서 살았다. 서울의 대학시절을 마친 후에는 도쿄와 교토에서 짧은 유학 생활을 했다. 교토 동지사대학교에서 공부한 지 2년째 접어들 무렵, 사상범으로 체포된 그는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어 그곳에서 절명했다.

그의 흔적은 1917년에서 1945년 사이, 저 북간도에서 한반도를 지나 도쿄까지 오간다. 만 27년 2개월의 삶의 동선에 시대를 대입해본다. 그 시절 저 북간도에서, 바로 이 서울에서, 먼 일본땅에서 시인은 과연 무엇을 보고 어떤 일을 겪었을까? 왜 시인은 그토록 자주 참회를 했으며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끊임없이 시를 썼을까? 우리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기에 가장 빛나는 청춘을 맞이한 젊은 시인에게 서울이라는 도시는 조금의 위안이라도 선사했을까? 그는 어디에서 살았으며 어떤 동네를 걸었을까?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을까? 






옛 기숙사 내부에서 바라본 시비

 

     

 기념관으로 꾸며진 옛 기숙사의 한켠에 시인이 거쳐간 장소들이 나열되어 있다. 연세대의 옛 기숙사와 그가 유학했던 교토의 동지사대학, 그리고 투옥되어 절명한 후쿠오카 형무소. 형무소 건물은 없어졌지만 그 구조와 형태가 서대문형무소와 닮았다고 한다.



연세대의 옛 이름인 연희전문학교는 교사가 세워진 지역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창천리가 원래 주소지였다. 1917년에 작은 목조 교사로 시작된 학교는 1920년부터 25년까지 화려하게 변신했다. 학생들이 공부하고 머물렀던 석조건축물과 기숙사, 운동장, 테니스 코트가 지어져 제법 캠퍼스다운 면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백양로라 불리는 캠퍼스 내부를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올라가면 유럽풍으로 지어진 당당한 건축물이 잘 다져진 대지에 펼쳐져있는 구조였다. 

1928년 ‘조선과 건축’이라는 건축잡지에 소개된 바로는 “경의선 신촌역에 내리면 15분이면 도착한다. 교사는 녹음이 짙고 오래된 소나무로 둘러싸인 산에 위치하고 있다. 공기가 신선하여 자연공권에서 즐기는 감이 든다. 건축은 대지내 산간에서 채굴한 운모편암을 주요 석재로 하여 요소요소에 화강암을 넣은 순 석조인 본관, 학관, 이학관 및 기숙사로 구성되는데..”라고 설명하고 있다.



본관 좌측편 언덕 위에 기숙사가 있다. 지금은 재단관련 시설과 시인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옛 기숙사 앞에서 윤동주 시비를 만났다. 누군가 두고간 꽃다발이 보인다. 높다란 시비 앞에서 잠시 멈추어섰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읊을 수 있다는 서시가 시인의 필체로 새겨졌다. 아까 보았던 육필원고의 그것이다. 

화강석 시비는 시인의 동생인 윤일주의 작품이다. 아우의 초상이라는 시에 등장하는 바로 그 아우다. 시인보다 9살이나 어린 아우는 형의 죽음 이후, 혼자 서울로 내려와 형의 유품과 유작을 찾아다녔다. 북간도 용정에 살던 가족들은 광복후 월남하면서 시인이 아끼던 책들과 책상, 어릴 때 썼던 시와 편지 들을 가져왔다. 혼란한 시기에 모두 잃어버릴 처지에서도 비참하게 절명한 시인의 남은 흔적들을 품고 또 품었다. 연세대에 기증된 책과 원고들은 바로 그런 것들이다. 가족들이 죽을 위험에서도 절대 포기하거나 놓지 못했던 것들. 아우는 시인의 시를 묶어 유고집을 냈고 시인의 족적을 찾아 다녔다. 나는 그 아우의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잠시 생각했다.



시인의 시비 뒷쪽 언덕 위에 거무스름하게 세월을 머금은 옛 기숙사 건물이 보인다. 2층짜리 건물이지만 지붕 아래에 다락처럼 공간이 있었다고 한다. 지붕 아래 공간에 동주의 방이 있었다. 대학 기숙사에서의 생활은 어떠할까? 한창 젊은 청춘들이 집을 떠나 기숙사에서 머물면서 만들어내는 문화가 무척 궁금하다. 당시의 대학생들은 현재보다 훨씬 더 어른 대접을 받았고 실제로 더 성숙한 상태이기는 했으나 아무렴 공부만 했을까? 일탈의 즐거움도 느끼고 이성을 떠올리기도 하고 그러지 않았을까? 순수와 낭만을 오가던 이 시기는 빨리도 흘러 암흑으로 치닫는다. 

 

1940년부터는 한국어강좌가 일본학이라는 과목으로 바뀌고, 금서가 늘어났으며 도서관을 수색하여 책을 압수하는일도 생겨났다. 한인의 황국신민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말과 글은 허락되지 않은 언어였다. 시인은 시를 쓰지 못했고, 삶과 종교를 회의했다. 그러나 암흑 속에도 빛이 있듯이, 그 한줄기 빛처럼 평생에 이어질 우정을 나눈 문우 정병욱을 만났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면서 결국 출간하지 못한 채 종이에 눌러쓴 글씨로만 남은 시들을 깨끗하게 정서하여 문우에게 맡겼다. 그는 시인이 죽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한글로 씌어진 시들을 어렵게 보관하고 있다가 시인의 아우에게 주었고 194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한권의 책으로 출간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날 쉽게 씌어지지 못했던, 허락되지 않았던 말의 흔적을 본 것이다.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죄의식과 치욕을 견디던 청춘의 시간을 본 것이다. 

종이는 거무스름하게 변해 버렸지만 잉크의 흔적도 점점 옅여졌지만, 뭉개진 글자의 흔적 속에서도 빛나는 그 무엇을 본 것이다. 나는 그것이 시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을 돌이키고 돌이켜 스스로를 일깨우고 또 일깨우는 목소리. 말의 정신. 그 신성한 봄날에 나는 투명하게 빛나는 정신을 보았다. 수십년이 지나 그 정신은 쉽게 꺼지지 않을 횃불이 되었고 쉽게 사라지지 않는 공유된 감정이 되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시의 정신이 아닐까. 지금 우리는 시인이 필요한 시대, 시가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지난 해 봄날 보았던 그 빛나던 순간이 나는 지금도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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