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래동 영단주택. 1940년 서울의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만든 집합주거들이다. 집집마다 내부 구조와 디자인, 용도는 바뀌었으나 영단주택의 규모와 유형을 파악해볼 수 있다.




서울은 깊다. 어느 동네를 가더라도 길과 집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길은 끝나지 않는데다 차곡차곡 시간이 쌓인다. 이야기의 여러 층위가 덮이면서 역사가 된다. 장소는 점점 깊어진다. 그러므로 모든 장소는 역사의 다른 이름이다.

어제 읽은 책에 이런 말이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인간을 좋아하지 않은 탓에,
한 장소를 대상으로 사랑에 빠졌다.
그는, 안개에 잠긴 카프리 섬의 매력을 발견하자,
이스키아 섬을 주고 카프리를 사들였다. "


나 역시 장소를 대상으로 맥없이 반하거나 질투하거나 소유하고싶은 감정을 느낀다. 어쩌면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감정을.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다른 점이라면 단지 하나의 장소만을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많은 장소들에서 특별함을 발견한다. 장소에서 눈에 띄는 거대한 변화를 보기도 하고, 미묘한 스크래치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 발견들이 흥미롭다.

장소 그리고 발견.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장소, 혹은 나를 감싸고 있는 장소, 혹은 나를 소유하고 관리하며 교육하는 장소,
어쩌면 내 눈 앞의 모든 것인 장소.

내가 장소를 찾아 헤매는 것은 그 '곳'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란 다양한 의미를 지니며, 다양한 요소에서 솟아나와 내 마음으로 달려들다. 아직 그 아름다움을 적절하게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임금님귀는 당나귀귀'처럼 대숲은 아닐지라도 내 마음 속에서 자꾸 외칠뿐이다.


나는 이 장소들이 아름답다. 오랜 시간이 머문 장소들이.
오늘은 문래동이다. 이곳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현재진행형인 과거였다. 삶의 궤적이 넓기에 내가 몸담고 있는 시공과 다른 시공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음을. 그들과 내가 서로 맞부딪힐 확률은 많지 않으나, 나는 잠시 이 삶에 머물렀다 간다.

오늘은 머무름이 만들어낸 발견이다. 우리는 정확히 1941년으로 타임슬립 할지도 모른다.
심호흡이 필요하다면, 그리하여도 좋고.










1941년, 신도시 문래동

1939년 만주사변 후 조선반도가 병참기지가 되면서 많은 일본인들이 서울로 몰려들었다. 일본인 거주자들을 위한 주택이 시급한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일본에서 미리 시범적으로 활용되었던 주택영단을 모델로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주택영단이 1941년 출범했다. 영단은 6만호의 주택을 공급하기 위해 4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그 첫단계로 구획정리가 사업이 완료된 영등포, 돈암동, 대방동, 신길동, 상도동에 사업을 추진했다.

영등포 문래동의 당시 이름은 도림정. 1941년 신도시였다.

비가 오면 한강이 넘치고 모래가 많던 강변마을을 구획정리하여 대규모 주택단지를 건설하는 것이다. 문래동에는 200채마을이 한꺼번에 세워졌다하여 이백채마을이라는 명칭도 한때 불렸다고 한다.

격자형으로 집이 들어설 자리와 도로가 날 자리를 구획하고 부분적으로 녹지와 병원, 목욕탕, 상점 등의 시설물을 계획하여 설치한다. 흥미로운 것은 요즘 분양 아파트처럼 평형대별로 다양한 평면을 구성했다는 점이다. 단독주택형태로 건평만 20평이 넘는 갑형, 단독 혹은 연립주택 형태의 15평 규모의 을형을 비롯 중하류 거주민을 위한 10평짜리 병형, 8평짜리 정형 등으로 나뉘었다. 다다미방과 온돌방이 공존했고 평형에 따라 욕실 화장실등이 내부에 있는 경우도 있었다. 수도와 우물도 함께 사용되었다. 집의 뼈대는 중복도와 현관, 오시래(벽장) 등 일본식구조로 이루어졌다.



영단주택의 방침을 이러했다고 한다.

"주택은 총독부의 방침을 기초로 외관은 공통적으로 내지식(內地式)의 주택을 원칙으로 하고,
거기에 조선에 적합하도록 1실은 반도시 온돌로 살 수 있도록 한다.
특히 일본인용이나 한국인용 등의 구별을 하지 않는다."



이는 "주택에서도 내선일체의 이루고자 한 것이"며 영단주택은 주택을 보급하는 것과 더불어 식민문화를 정착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임창복 교수가 쓴 <한국의 주택, 그 유형과 변천사> 참조) 영단주택은 일제 말기의 전쟁 등으로 물자부족을 겪으며 원래의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일본인과 한국인이 공존하던 이 지역은 광북 후 적산가옥이 되면서 한국인들에게 불하되었다.








네이버지도에서 찾아본 영단주택, 인근지역과 확연히 다른 형태. 필지가 뚜렷하게 보인다.



 


갔다가 오고, 왔다가 가고,
한 간 좁은 방 벽은 두터워,
높은 들창 가에
하늘은 어린애처럼 찰락거리는 바다

...(중략)

동해바닷가에 작은 촌은,
어머니가 있는 내 고향이고,
한강물이 숭얼대는
영등포 붉은 언덕은,
목숨을 바쳤던 나의 전장



1936년에 쓰인 임화의 시에 영등포가 언급되어 있다. 공장과 상업지구였고 이들의 사택이 대규모로 들어섰기에 사택마을로도 불렸다고 한다. 타임스퀘어의 주인인 경방은 경성방직의 줄임이다. 경성방직공장의 건물들은 여전히 영등포의 한자리를 차지한다.
영단주택은 원래 영등포 인근 지역의 노동자들의 삶터로 지어진 주택은 후대의 세월을 거치며 중소규모의 산업지역으로 자리잡았다. 주거지로 일부분 사용되고 있으나 도로변은 대부분 공업사다. 예전의 일본식 가옥의 흔적은 우리식 주택 언어로 바뀌었음은 당연하다. 또한 창고, 공업사, 중소 상업건물로 바뀌면서 입면에 다양한 변화가 이루어졌다.

문래역에 내려서 어슬렁거리며 걸어간다. 그냥 걸어서는 정확히 이 거리의 형태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네이버지도로 살펴보니 주변지역과 확실히 다른 필지가 눈에 들어온다. 지도를 보며 도로를 따라 걸어보았지만 뭔가 답답하다. 높은 곳을 찾다보니 꽤 층수가 높은 교회가 보인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곳이라 믿으며, 우리 일행은 교회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야 비로소 영단주택이 모였다.  


거리에서는 변화된 모습만 보였다. 낮은 건물들이 나열된 거리라는 점은 분명했다. 하지만 대규모 단지라는 점은 높은 곳에 올라갔을 때 더욱 뚜렸하게 보였다. 개개 건물은 어쩌면 그 형태를 많이 잃어버렸을 지도 모르나, 마을 단위로 보니 그 형태가 뚜렷해졌다.

다가가지 않고 멀리서만 눈에 보이는 것들. 오래된 흔적은 이렇게 멀리서 보아야 완성될때도 있다.





영단주택이라는 이 지역의 역사는 오직 여기, 영단수퍼에만 남아있는 것같다.















그리고 문래동의 다른 흔적들

문래동 일대를 누비며 오래된 공장과 사택의 흔적을 발견한다. 널따란 공장부지와 또한 널따란 아파트가 공존하는 희안한 동네. 문래동은 과거와 현재가 동시대의 시간을 누비며 흘러간다.

하기야 집이 오래되었다고 그 속의 삶도 과거라 부를 수 있을까, 또한 우리의 삶이 과거와 얼만큼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구나 같은 삶이 아니듯, 장소도 똑같은 시간을 사는 것은 아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 우리를 둘러싼 것들에 똑같은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문래동에서 만난 재미난 흔적- 갤러리 정다방 프로젝트

오래된 다방에서 예술공간으로 바뀐 신기한 공간. 전시와 공연도 열리고, 커피와 와인도 마실 수 있고 무언가를 배울 수도 있는 장소란다. 그날따라 점심나절에 문이 닫혀있다. 내부에 불이 켜진 채 음악도 들리는 것을 보니 잠시 주인이 자리를 비운 모양이다. 아쉽게도 들어가보지 못한 장소다. 곧, 좋은 날 찾아가보리라.



갤러리 프로젝트 정다방

주소-서울시 영등포구 문래4가 7-1번지
http://www.jungdabang.com/










 

부산의 토폴로지. 굴곡이 넘치는 이 도시는 흥미가 솟구치는 골목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유명한 40계단 앞에 서다

부산은 내게 고향이나 다름없는 도시지만 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부산에 계속 살았다면 그런 점을 알아차리기 어려웠을 거다. 이 도시 저 도시, 이 나라 저 나라를 거쳐 살아온 덕분에 나와 인연이 있었던 도시들에 특별한 애정이 생겼고, 도시들마다 차이점과 유사점을 알게 되었다.
내가 거쳐온 수많은 도시들은 각기 나름의 풍경으로 기억된다. 유사한 도시들도 있었고 아주 특별한 곳도 있었다. 부산은 늘 특별하다. 양파껍질처럼 하나씩 하나씩 보여준다. 오래 살았다는 이유로 그곳을 다 아는 척하지 않고 여행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니 참 많은 좋은 것들이 보인다.

혹시 여러분은 살고 싶은 도시가 있는가?
나는, 직장 때문에, 직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된 도시가 아니라, 내가 특별한 인연이라 생각하는 도시를 만나 그곳에서 살아보고 싶다. 그런 목표가 있어서인지 도시-그것이 소읍일지라도-를 들여다보는 일이 특별하게 다가온다. 


동광동은 부산에 오래 살았고 여러 차례  근대건축답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처음으로 방문한 곳이다. 왜 이제야 왔을까 싶을 정도로 흥미로운 동네였다. 자생적 동네라나는 유사성 때문인지 지난 달 답사차 다녀온 서소문 충정로 일대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어떤 도시에서도 보지 못했던 부산만의 지형구조를 흥미진진하게 체험했다.

동광동은 연안부두에서 산쪽으로 바라보는 지점이다. 바다가 지척이라 바람이 습하고 찼다. 날씨가 스산했고 아직 봄이 찾아오지 않은 거리에는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아마 코와 입으로 소금기가 가득 배어들었을 것이다. 이제 길을 따라 출발해보자.





답사의 시작은 동광동 40계단이다.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는 장소로 등장한 바로 그곳이다. 이제는 영화 찍기가 어렵게 되었다. '40계단문화테마거리'를 조성해서 기념비와 조형물을 대거 설치했기 때문이다. 보도블럭으로 깨끗하게 정리된 거리에 서서 40계단을 바라보았다.


원래 부산포의 지형은 계단이 있는 곳에서 끝나고 바다로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 지하철이 다니는 부산역, 중앙동, 남포동 인근이 예전에는 바다였던 것이다. 부산이 개항한 후 일대의 산지의 나무와 돌을 이용하여 지형을 넓히는 매립공사가 진행되었다. 초기에는 청국의 주도로 매립공사를 실시하여 해관(세관)을 설치했으며 이후에는 일본인이 주축이 된 부산매축주식회사를 세워 단계적으로 매립공사가 이루어졌다. 평지를 넓히고 부두시설과 철도시설을 연결했다. 1908년 경부철도가 열리고 부두에는 일본과 연결되는 관부연락선이 오갔다. 시모노시케에서 부산으로 뱃길이 연결되고, 바로 옆에 자리잡은 부산역에서 서울역(경성역)을 거쳐 만주까지 철도가 이어졌다. 부산항은 대륙으로 향한 여행, 대륙을 향한 침략의 첫 시발점이었다. 


동광동 지역은 조선시대 일본인 사신들이 머물던 왜관이 있던 초량과 가까웠고 사신들이 통행하던 문이 있던 지역이다. 숲으로 둘러싸인 한적한 장소였으나 개항 이후에는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되어 가옥이 빼곡히 들어찼고 이후로도 주요 주거지역으로 활용되었다. 지금도 동광동 영주동 대청동 일대에는 어마어마한 주거지가 층을 이루며 형성되어 있다. 

광복후 타국에서 부산항으로 들어온 동포들 중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정착한 사람들, 6.25전쟁으로 피란온 팔도의 사람들이 부산에 정착했다. 평지보다 산과 언덕이 많은 부산에서 피란민들은 산의 나무를 베어 판잣집을 만들고 길을 닦으며 모여 살았다. 절망과 희망이 맞닿은 곳이 부산이다. 고향을 떠나온 절망감과 목숨을 부지한 기쁨을 층층이 빼곡히 산비탈을 채운 사람들의 삶은 지금까지 이어져 산복도로를 지나면 산의 지형 그대로 앉혀진 수많은 집들의 현란한 풍경을 보게 된다.

 

40계단은 피란민들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40계단은 그 시절 피란민들의 만남의 광장이었다. 여객선이 드나드는 연안부두와 바로 마주보고 있어 해외에서 실어온 보급물자를 받아가려는 피란민들과 부두노동자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만나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가 하면, 생사가 불분명했던 사람들과 만나기도 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누군가와 만나고 누군가를 들여다보며 살았을 삶. 지금의 도시는 그 시절을 떠올리기 어렵다. 땅의 굴곡을 연결해주는 계단과 굴곡에 따라 앉혀진 주택들 사이에서 짐작해볼 따름이다. 삶이 변화하듯 도시도 변했지만 길은 이전의 역사를 조용히 증언하고 있다.

그 시절 40계단을 추억하는 노래가 있다. <경상도 아가씨>라는 노래의 가사를 들여다보자.


사십 계단 층층대에 앉아 우는 나그네
울지 말고 속 시원히 말 좀 하세요
피난살이 처량스레 동정하는 판자집에
경상도 아가씨가 애처려워 묻는구나
그래도 대답없이 슬피 우는 이북 고향
언제 가려나

고향길이 틀 때까지 국제시장 거리에
담배장사 하더라도 살아보세요.
정이 들면 부산항도 내가 살던 정든 산천
경상도 아가씨가 두 손목을 잡는구나
그래도 뼈에 맺힌 내 고장이 이북 고향
언제 가려나

영도다리 난간 위에 조각달이 뜨거든
안타까운 고향 얘기 들려주세요.
복사꽃이 피든 날밤 옷소매를 부여잡든
경상도 아가씨가 서러워서 우는 고나
그래도 잊지 못할 가고 싶은 이북 고향
언제 가려나




계단 아래 광장에서 바라보니 동네가 참 아늑하다. 겹겹이 둘러싼 동네들이 광장을 품어주는 듯하다. 분위기가 좋아서인지 작고 특색있는 카페와 레스토랑이 하나둘씩 생겨나고 오래된 밥집도 여전히 영업중이다. 동네의 활기는 예전만 못하지만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는 듯하다. 40계단 주변에는 인쇄소가 많아 '동광동 인쇄거리'라 불린다. 찾아간 날은 주말이라서인지 인쇄소나 카페가 대부분 문을 닫은 상태였다. 아직 주말 손님이 많은 유흥지역은 아닌 모양이다.

 

 

 





계단 주변에 있는 수공예점 간판에는 <원도심 창작공간 또따또가>라는 표시가 있다. 인근 지역에는 이런 간판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빈집을 아틀리에 삼아 교류하고 행사도 갖는다고 한다. 비어있는 공간이 알뜰살뜰 예술의 향기로 채워지고 있는 모양이다. 계단 아랫쪽에 있는 빌딩 3층에 사무실이 있는데, 주말이라 문이 닫혀있다. 또따또가에 대해 좀더 알고 싶었으나 홈페이지의 내용으로 만족해야겠다.





경사 지형이 만들어낸 동광동 산책길



 


평지에 자를 대로 그린 것처럼 쭉쭉 뻗은 도로체계를 가진 신도시와 달리 부산은 굴곡이 많은 도시다.

이 굴곡이야말로 부산의 특징이다. 제멋대로 뻗어있는 골목들은 구불구불 어디로 이어져있는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오래된 것과 덜 오래된 것이 마구잡이로 섞여있다. 해운대나 신시가지의 화려하게 빛나는 초고층 빌딩도 많지만 빛바랜듯 옛 정취를 품고 있는 지역도 공존한다. 구도심이라 불리는 이 지역도 100년 전 개발될때는 신도시였을 것이다. 

지형적 요인이 도시의 성격과 거주민의 성향에도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굴곡진 지형에 겹겹이 쌓듯 지어진 집들, 오르락내리락 굴곡진 지형을 따라 변화무쌍한 뷰를 보고 자란 나로서는 전라도 일대의 너른 평야 지대의 풍경을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평선이 보이는 풍경이라니! 10리밖까지 보일 듯한 평평한 들녘을 직접 보고서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경기도 신도시는 어떤가. 지대가 담요처럼 평평하고 격자형으로 뻗은 도로를 본 순간, 도시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다. 바다도 굴곡도 없이, 한눈에 모든 것이 들여다보이는 이 작은 도시. 게다가 보이는 것이 모두 아파트단지라니. 이러니 이런 도시를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가 없다. 신도시는 모든 것이 격자형으로 구획되어 생활에 편리할지언정 도시자체의 매력은 전혀 없다. 어딜 둘러보아도 똑같은 길과 집들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경사진 골목을 걸어올라가니 모양이 똑같은 9채의 건물을 만났다. 좁은 필지에 들어찬 건물은 경사로 인해 레벨차는 있으나 구조와 마감이 똑같다. 어떤 집은 방과 창이 하나씩 있는 구조이며 어떤 집은 계단을 중앙에 두고 두 집으로 이어져있거나 복도를 가장자리에 두고 방이 두개인 구조로 되어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외관 장식도 변하고 옥탑을 올리거나 저층부를 상가로 바꾸는 등 집마다 조금씩 다른 변화를 보였다. 이렇게 단지로 형성된 주택들이 아마 이 지역을 채우고 있었을 것이다.

시기를 짐작하기 어려우나 상당히 오래된 건물들도 만났다. 건물은 외관을 도색하고 외벽에 새로운 마감재를 씌워 리노베이션을 했으나 내부의 형태는 그대로인 경우도 많았다. 다세대 주택들은 다른 집과 차별화된 색을 선택하여 자신만의 외장을 뽐내고 있었다. 굴곡진 지형 위에 세워진 탓에 앞 뒤 앞 뒤의 레벨차가 무척 큰 고층건물도 있었고, 경사지에 앉은 건무의 특성상 대부분 높은 축대를 세우고 그 위에 단을 올려 집을 지었다. 이때에도 축대와 단, 입면과 측면에 따로 색을 칠해 집들이 무척 컬러풀하다. 어떤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지역만의 특성으로 다가왔다.

 동광동에서 한블럭 뒤에 있는 영주동 코모도 호텔은 해운대의 특급호텔이 성업하기 전 부산을 대표하는 호텔이었다. 한옥의 지붕언어를 과감하게 차용한 이 건물은 중앙동 일대의 도로에서 산쪽을 바라보면 어디에서나 보게 되는 랜드마크였다. 오래된 호텔 특유의 쓸쓸함이 묻어나지만 높은 곳에서 이 지역을 조망하면서 주변 지역의 역사를 들여다볼 때 빼놓을 수  없는 건축물이라 생각한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틈, 아슬아슬한 골목길


 그리고 골목길. 좁고 경사진 아슬아슬한 길을 따라 오르내리다보면 변화무쌍한 풍경을 마주한다. 닮은 듯 다른 길이 건물과 건물 사이에 놓여있다. 심한 경사지라서인지 건물 틈사이에 뒷쪽으로 올라가는 높고 아찔한 계단에 놓여있기도 하다. 위에서는 아래가 잘 보이지만 아래에서는 겹겹이 싸인 윗길로 시야가 쉽게 열리지 않는다.

집 사이의 틈을 비집고 뒷 집으로 연결된 골목은 계단을 올라가 그 뒷집과 연결된 후 건물의 틈에서 또다른 계단이 된다. 이렇게 미로처럼 연결된 골목과 계단이 이 동네를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다.
 

 


 




 

건물 뒤에 건물이 겹쳐지고 골목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막다른 길이 나온다. 막다른 길인가 싶더니 엉뚱하게도 가파른 계단이 연결된다. 길을 따라가면 과연 어디로 나올까? 미로를 헤매는 기분이 든다. 자생적으로 생겨난 좁고 아슬아슬한 골목들. 한번 생겨난 길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 길은 과연 언제 생겨난 것인지 궁금해진다.

 





 





골목을 따라가면 부산타워가 나올까? 무척 가까워보이지만 꽤 높은 언덕을 오르락 내리락하며 한참을 가야 도착할 수 있다. 부산은 착시현상이 심한 도시다. 가까운 듯하지만 멀고 모두 다 보여주는 것 같지만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곳이다. 겹겹이 세워진 집들과 아슬아슬하게 연결된 골목길을 걸으며 도시의 속살에 조금 들여다보았을 뿐.
 
여전히 이 도시는 비밀은 많다.










도움이 될만한 웹사이트

부산광역시 중구청
www.bsjunggu.go.kr

-문화관광 페이지에 중구 일대의 관광지와 축제 정보를 찾아볼 수 있다.
-동네의 역사를 알고 싶다면 nice 중구/ 역사 쪽을 참고할 것.


40계단 문화관
http://40stair.bsjunggu.go.kr
40계단 주변에 역사와 당시 상황을 살펴보는 문화관이 세워져있다.
한번 둘러보면서 부산의 당시 모습을 자료로 확인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원도심 문화창작공간-또따또가
http://www.tttg.kr
40계단 주변에  또따또가라는 이름으로 활동중인 장소들이 궁금하다면 이 사이트가 유용하다.
어떤 단체인지,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 간단한 소개와 정보가 담겨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명동이란 동네를 멀리할 수 없다. 
누구는 우울한 날에는 압구정에 가라고 했지만 내게는 명동이다. 명동에 가는 것만으로도 해방을 느꼈다.


왁자지껄, 북적북적. 많은 물건들,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나란 사람 조차도 그 속에 쉽게 파묻힐 수 있어서,
차를 타고는 지나갈 수 없는, 도보자들의 천국같은 거리라서,
어느틈엔가 저렴한 화장품이나 티셔츠를 몇 개 충동구매하더라도 쉽게 지갑을 열 수 있어서,
그러고나서 명동돈가스나 명동칼국수, 충무김밥 같은 것을 먹고 기운내서 다시 산보를 할 수 있어서,
명동은 해방구와 같았다.

일상을 탈출하고 싶을 때 무조건 을지로 입구에서 내려 타박타박 명동길을 걸었다.



백화점과 근사한 레스토랑도 분명 있지만 주눅들지 않고 싼 물건을 살 수 있는 곳이 명동이다.
눈치보지 않고 길거리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익명의  도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익명성을 부여하는 곳이다.

그래서 명동은 특별했다. 신촌과도, 종로와도, 강남과도 달리
나란 존재를 잊어버릴 수 있는 블랙홀 같은 동네.



지금은 하루가 멀다하고 멀티쇼핑몰이 옷을 갈아입고 글로벌 SPA 패션 브랜드가 각축을 벌이며 상권을 형성한다. 
이제 명동하면, 일본인 관광객을 첫손에 꼽을 정도로 길거리에 일본인이 많다. 
그러나
여전히 명동성당에는 경건한 신앙을 표출하는 사람들이 많고
화교학교가 있는 중국대사관쪽은 여전히 외국잡지를 파는 서점이 서있다.

명동은, 참으로 다양한 얼굴을 가졌다. 국적도, 목적도 다양한 사람들이 거리를 헤맨다.
하지만 그 속에 파묻혀 어디론가 사라지더라도 상관없는 곳이 명동이다.








서울 역사 박물관에서 <명동이야기>라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지겨울만큼 익숙한 동네를 다시금 들여다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은 내가 좋아하던 것들이 많이 사라졌으나, 그럼에도 향수어린 그 동네를 다시금 들여다보려고 전시장에 들렀다.


명동은 조선시대 명례방이라 불리던 주거지였으며 일제강점기에 명치정이라는 이름의 상업지역으로 바뀌며 네온사인이 번쩍거리는 동네로 변모했다. 20세기초부터 명동은 백화점과 각종 상점, 은행과 우체국, 학교 등 각종 건물들로 빼곡히 채워졌다. 오락과 물건이 넘쳐나는 환락의 경성을 표현하기에 딱 좋을 장소가 명동이었다. 다방, 카페, 식당등 유흥 시설도 즐비해졌다.

전쟁 때는 폐허가 되었다. 종현성당, 프랑스성당이라 불리던 명동성당과 명치좌라 불리던 명동예술극장만이 제 모습을 하고 서있다. 온통 부서지고 무너진 건물 더미를 너머 삶으로 복귀한 사람들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박완서의 <나목>은 전쟁이 한창 진행중인 서울, 명동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미군 PX로 사용되던 신세계백화점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는 가게의 경리를 보며 호객행위를 하던 처녀는 퇴근 후 스산한 명동거리를 걸어서 집으로 가곤 했다. 여전히 폐허로 남아있는 건물들의 잔해, 불이 꺼진 어두운 거리를 몸을 움츠리며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곤 했다.

반짝반짝 빛났던 거리가 불꺼진 폐허로 바뀌었을때, 무너진 건물 잔해가 여전히 사람들의 시야를 괴롭힐 때 그때도 명동은 있었다.



전후의 허무의 무드를 가장 먼저 포착한 것은 예술가들이 아니었나 싶다. 명동은 그림을 그리고 작곡을 하고 연기를 하고, 소설과 시를 쓰던 사람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1930년대 모던뽀이의 안식처였던 명치정의 풍경은 1960년대 예술가의 삶을 견인해주는 명동으로 옮겨졌다. 그 중심에 다방이 있었다.


서울역사박물관의 <명동이야기>는, 전쟁의 상흔을 극복하며 예술의 씨앗이 발아하여 싹을 틔우던 시기, 1960년대의 명동과 명동에 머물던 사람들에 대한 단상을 다방을 중심으로 엮은 것이다. 예술가들, 예술가들을 지지하고 후원하던 친구와 후원자들, 명동에서 펼쳐졌던 문화현상들, 그리고, 그들이 남긴 흔적들은 다방을 중심으로, 크게는 명동이라는 장소를 중심으로 진한 커피처럼 남아있었다.








1960년대 명동을 가장 잘 설명해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전시는 '명동백작'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기자이자 작가인 이봉구(1916~1983)의 목소리를 빌어 옛 명동 거리로 관람객을 안내한다. '명동백작'이라는 낭만적이고 다소 웃음나는 별명은 누가 붙였을까 싶은데, 이는 이봉구가 명동에서 얼마나 유명했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수신인 주소에 명동의 모나리자 다방의 이봉구, 은성의 이봉구,라고만 써도 그에게 전달되었다고 하니 '명동파'의 수장답다.

이 시기 명동이 다사롭게 느껴지는 것은 대기업 브랜드나 프렌차이즈 따위가 아닌
작은 카페나 다방, 그리고 다방과 선술집을 오가던 많은 사람들이 이 거리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모나리자다방과 은성 술집은 이봉구의 중심거처였고 그곳에서 많은 예술가들과 만나 시대를 나누었다.








그리고 많은 예술가들이 명동에서 젊음을 소진했다. 시인과 소설가, 화가, 사진가, 무용가, 배우 등 그들의 삶이 투영된 육필원고와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에서 김수영의 육필 원고를 발견했다. 대학노트에 볼펜으로 쓴 일기와 원고지에 적힌 시와 글들.

고등학교 시절 <푸른 하늘을>을 배울 때부터 그의 팬이었다. 이런 시를 쓰는 사람은 과연 어떤 인물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이 시를 가슴속에 깊이 담아두었다. 그의 육필원고를 만나니 감회가 새로웠으나 글자를 읽어내려가기가 어려웠다. 푸른 하늘을 떠올려본다. 내겐 이 시가 곧 김수영이기에.




푸른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 비상하여본일 있는  사람이라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하는 것인가를,

- 김수영, 푸른하늘을





김수영의 일기와 글 묶음, 육필원고를 보는 순간 살짝 떨렸다.



 

 

 

거리는 모두 나의 설움이다 -수영

내 고독과 설움은 술만이 알 것이다 -이봉구

그들은 명동에서 온 설움을 내던질 자유와 평화를 얻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런 장소가 있는가,
나는 그것이 궁금해졌다. 우리가 온몸으로 겪어온 도시가 있는가,
그런 장소가 있는가, 애정으로 지켜본 장소가 있는가, 하고. 그런 장소, 하나 갖지 못한다면 그 또한
슬픈 일이 아닐까?






모나리자와 음악다방을 재현한 공간이다. 당시의 다방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당시의 다방은 커피와 술을 마시며 사람들을 만나던 곳일뿐만 아니라, 예술가들이 모여 창작열을 불사를 수 있었던 아지트였다. 다방과 카페에서 전시회, 시낭송회, 음악회 등 각종 행사를 비롯해서 문인의 유고를 간행하거나 추모회를 열기도 했고 때로는 연극무대나 영화관이 되기도 했다. 

요즘의 다목적 아트센터의 역할을 다방이 해주었던 것이다.

문인들과 예술가들은 파를 나누어 단골 다방을 정하기도 했다. 동방싸롱, 모나리자, 포엠, 초원다방, 문예살롱, 휘가로, 은하수, 비너스다방, 청동다방, 마돈나, 오아시스, 갈채, 낙랑, 싸롱 보아그랑 등지에서는 변엉로, 오상순, 서정주, 조지훈, 김동리, 구상, 김수영, 임광빈, 김진기, 조병화, 이진섭 등의 인물들이 다방을 뜨겁게 달구었다. 이들은 스스로 명동파라 불렀다. 당시 명동은 그림그리고 글쓰고 연기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퇴계로에 「포엠」이라는 술집이 생겼읍니다. 저녁이 오면 하루의 일과를 마친 저녁이 오면
병들어 앙상한 가로수 잎사귀를 돌아 우리들은 술을 마시러 「포엠」으로 갑니다.
(중략) 그림쟁이들이 먼저 모여 들었읍니다. 그리고 글쟁이들이 모여들었읍니다.
그림쟁이와 글쟁이와 노래쟁이들이 같이 취해서 노랑저고리를 웃기다가 돌아들 가곤 했읍니다.

-조병화

 


 

 

또한 명동은 유행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곳이었다. 패션에 목숨을 건 멋쟁이들과 과감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패션테러리스트들이 골목을 누볐다. <송옥> <칠성제화> 등 맞춤 패션과 제화 업체가 성시를 이뤘고 명동은 양장을 맞추고 구두를 사러오는 쇼핑거리의 대명사였다.

 


 

 "친구들이랑 명동으로 나가는 거야, 명동을 나가면 그건 최고의 하이클래스지.
배우들도 많고, 명동거리는 새로운 문화가 도입이 돼가지고, 전부 양장을 맞춰서 해입었어요.
정싸롱을 간다. 송옥 양장점을 간다. 무슨 미장원 해 가지고 면도칼로 머리를 착착 컷트를 해요.
명동을 가면 말쑥하게 아주 서양여자가 돼서 나오는 거야.
머플러, 멋있는 거 머리에다 메고 다녔어. 그때는 그담에 하이힐 신지,양산도 들었고, 그게 신식이예요.
그리고 또 눈이 안나쁜데도 선글래스를 써야 멋쟁이였어."


 -김숙년, 서울토박이의 사대문 안 기억, 서울시사 편찬위원회, 2010


 






패션의 거리와 명동예술극장은 마주하고 있다.

1936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세워진 명치좌가 국립극장으로 바뀌어 우리나라 최고의 극장으로 활용되었다. 명동은 연극의 중심지였고 영화사도 곳곳에 들어와있었다.



 
한때 텔레비전에서도 만나볼 수 있었던 여성국극. 여성들로 이루어진 극단이 춤과 노래, 연기로 어우러진 독특한 무대극을 만들었다. 전통극을 바탕으로 비극적인 로맨스가 펼쳐졌는데, 언제나 이런 소재는 인기가 많았던 것 같다.


개그 프로그램의 한 코너에서처럼 "여성국극, 다 어디갔어?"라고 소리쳐불러보고 싶다.



 


명동은, 저항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1970년, 명동의 다방문화가 쇠퇴하면서 명동파들은 점차 자취를 감추고 히피문화, 저항문화를 내포한 젊은이들이 명동으로 모여들었다. 시절이 수상하던 시기, 명동은 시대를 고민하고 그 틈속에서 외로워하는 젊은이들을 품어안았다. 명동성당은 저항의 아이콘이며, 심지다방과 오비스캐빈은 히피문화의 중심지였다.

1970년대 이후, 지가가 올라가면서 명동의 풍경은 바뀌기 시작한다. 지금은, 문화중심지로서의 명동은 명동예술극장과 삼일로창고극장 등 약간의 장소들로만 그 명맥을 이어갈뿐 상업지구로 바뀌었다.

그 문화와 예술의 흐름은 어디로 갔을까? 홍대 아니면 대학로인가?
이제 점조직처럼 곳곳에 넓고 옅게 퍼져있는 것인가?



전시실에는 박인환이 쓰고 박인희가 부르는 <세월이 가면>이 가득 울려퍼진다.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깊은 여운을 남긴다. 예전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진 것, 그것을 기념하는 진혼가.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세월이 가도 우리 가슴에 남아있는 것은 젊음, 혹은 열정, 이런 것이 아닐까?
명동이 늘 그리운 것은, 해방구가 필요했던 치기어린 젊음의 한 단면을 그곳에 남겨두었기 때문은 아닐까?
전시를 보았으니, 직접 명동을 만나고 싶다. 걷고 싶다.



 

<명동이야기>
장소: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2가 2-1번지


관람안내
일시: 3월 31일까지
관림시간: 09:00~22:00
입장료 :무료


불과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여관으로 운영하던 수덕여관. 문화재가 되어버린 지금은 썰렁하기 짝이 없다. 문화재가 갈 길은 어떠해야 할까?









지난 11월 어느날 트윗에서 이응노 생가 기념관 오픈 행사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건축가 조성룡 씨가 설계한 건물이 충남 홍성에 세워진단다. 다소 의아하기는 했다. 대전에 이미 보도엥이라는 프랑스건축가가 설계한 아름다운 이응로 미술관이 있고 전시회도 자주 열리기 때문이다. 원래 이응노 미술관은 서울 평창동에 있었는데 문을 닫고, 대전에 크게 미술관을 지으면서 각종 컬렉션들이 이동해왔다. 미술관 오픈 당시 취재를 갔었는데, 이응노 선생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그토록 다양하게 볼 수 있다는 기쁨이 무척 컸다.

그리고 선생이 태어난 충남 홍성에 세워지는 생가 기념관. 반가운 마음 한켠에 의아함도 있다. 왜 이응노일까. 대중들에게 이응노 선생의 그림이 갖는 의미가 무엇이길래 아무것도 남지 않은 터에 기념관을 세우는 걸까.

오픈 당시는 가보지 못했지만 지난 연말에 이곳을 방문했다. 꼬불꼬불한 시골도로를 달려가다가 언덕을 돌아서니 갑자기 탁 트인 마을이 나타났다. 논과 밭이 펼쳐지고 마을은 산자락까지 들어가야 나올법한 훤하고 너른 시골마을. 그곳에 기념관이 있었다. 장식 없는 입방체가 툭툭 던져진 듯하다.

놓칠래야 놓칠 수 없는 건물이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눈은 가득 쌓인데다 날이 날이니만큼 한적한 시골마을에 위치한 기념관은 조용했다. 도로 주변에 조성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발이 푹푹 빠질만큼의 눈을 헤치고 걸었다. 어떤 기능을 하는 장소일지, 내부는 어떠할지, 이 장소는 호기심이 일었다.


고암 이응노는 화가다. 1904년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화가로 활동했고, 프랑스에 유학하여 한국적 색채를 널리 알렸다. 선생은 우리 문자를 이용한 문자추상이라는 장르를 개척했다. 문자가 가진 기가 막힌 조형성이 캔버스에 파묻힌다. 글자인 것도 같고 그저 추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암 선생의 일대기에서
동백림사건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사건을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1960년대 남북냉전기에 유럽에 거주하던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 사건과 관련하여 고초를 치뤘다. 고암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1967년에서 1969년까지 옥고를 치뤘고, 1970년대에 또한번 사건에 휘말려 국내 활동이 금지되었던, 안타까운 개인사의 소유자다.

예술가에게는 어떤 시련도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는 힘이 내재된 것인지, 고암은 출옥후 선으로 표현된 인간 군상의 뜨거운 혈기를 추상화로 표현한 군상 시리즈로 새로운 화풍을 전개한다. 고암의 흔적은 프랑스에 더 진하게 남아있다. 선생은 1989년에 작고하여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이렇듯 어두운 시대의 예술가로 태어나 세상을 넘나들며 예술혼을 펼쳤으며, 시대의 아픔과 시대의 수훈을 골고루 누렸다. 그리고 고국 땅에는 그를 기념하는 공간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다.






카페,아트숍 등의 용도로 쓰는 작은 동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기념관 입구.

 

 

큐브 덩어리 건물 내부는 이렇게 복도로 이어져있다. 어둡고 밝은 공간의 콘트라스트가 퍽 기분 좋다.

 

 


선생이 쓰던 유품들이다. 물감과 붓, 그리고 엽서와 전시회 방명록들. 생전에 썼던 물건은 아우라를 가진듯하다. 범접하기 어려운 느낌이다. 좋은 풍경을 보고 즉석에서 그린 그림 엽서와 꼼꼼하게 적어내려간 엽서와 편지.

우리가 평생 간직하게 될 물건은 무엇일까? 품고 있던 편지나 사진은 있기나 한걸까? 나의 유품으로 나를 설명해주는 물건들을 무엇일까? 책이나 노트 같은 것?


 



여러개로 나뉜 전시관은 크지 않지만 소품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대전 미술관이 작품을 충실히 보여주는 넓은 공간으로 구성된다면 이곳은 화가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듯 작은 공간들과 길(복도)로 이루어져있다.



 

전시장을 한바퀴 돌면 다시 매표소쪽으로 나온다. 동선이 명쾌하다.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1층 정도 높이로 올라간 모양이다.



 



생가 기념관이 있다면 생가도 있어야 할 터. 기념관 옆 부지에 방 두개와 부엌, 마루로 연결되는 4칸짜리 'ㅡ'자 형 초가와 헛간채가 복원되어 있다. 생가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고 기록도 없어서 완벽한 복원이라 부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이 장소는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따뜻한 햇살이 담뿍 들어오는 마루는 잠시 앉아 생각에 잠길 정도의 여유를 준다. 존재의 이유가 알쏭달쏭한 건물들임에도 무언가 기분좋은 것이 있다. 누군가를 기념하고 추모하는 것. 그런 행위를 할 장소가 정말로 필요했던가보다. 그것이 고암선생의 족적이어도 좋을 것이고, 내 속에 있는 그 누군가를 생각해보는 장소여도 좋을 것이다.

너른 연못은 동장군을 이기지못하고 꽁꽁 얼었고 눈이 쌓였다. 따뜻한 봄날에는 물이 놓고 연꽃이 만발할 것이다. 너른 뜰이 푸르게 변하면 건물도 덩달아 푸르러질 것이다. 기분 좋은 기운이 흐르는 곳이다.
조용한 마을에 들어선 아담하고 보기 좋은 공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장소가 되면 좋겠다.






이응노 생가 기념관이 있는 홍성과 멀지 않은 충남 예산의 수덕여관. 우리 여행의 목적지는 이곳이었다. 수덕여관은 수덕사 일주문 주변에 있다. 고암 선생이 옥고를 치른 후 몸을 추스렸던 장소. 고암 선생의 첫 부인인 박귀희 여사가 운영하던 여관이다.

수덕여관을 처음 구경했던 게 10년 전. 남편과의 연애시절이다. 날 좋은 봄에 덕산온천에 왔다가 수덕사에 올라갔다. 그때는 그저 봄바람이 좋았고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게 좋았다. 속닥속닥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수덕사를 돌아 내려오면서 수덕여관에 들렀다. 그때도 여관은 붐볐다. 그때 여관이 문을 열고 영업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으나 많은 사람들이 저 문패가 달린 문을 드나들며 수덕여관의 정취를 맛보았다.








수덕여관에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간다. 예술가 나혜석을 필두로 많은 문사들이 여관에 머물며 몸과 마음을 추스렸다. 나혜석이 이혼의 상흔을 달래기 위해 친구인 일엽스님을 만나러 온 곳이 수덕여관이다. 비구니가 되고 싶었으나 되지 못한 나혜석은 3년간을 수덕여관에 머물며 글을 쓰며 자신을 달랬다. <이혼고백장>을 쓴 곳이 수덕여관이다. 그때 쓴 글을 다시 칼날이 되어 나혜석의 가슴을 찔렀지만 마음 속의 것을 내려놓으며 온전히 하나의 인간으로서 자신을 찾아간 곳이 이곳이 아니었나 싶다.



나혜석이 수덕여관에 머물때 이응노가 선배화가인 그녀를 찾아왔다. 나혜석은 파리를 절대적으로 그리워했다. 예술의 모든 것이 숨쉬는 파리에 대한 꿈은 이응노에게 전해졌다. 이응노는 1944년에 수덕여관을 사들여 부인인 박 여사에게 운영을 맡겼다. 그리고 1956년에 파리로 떠났다. 옥고를 치른 이응노가 잠시 쉬어가긴 했지만 50년 동안 여관을 일구며 여관에서 살아온 사람은 선생의 부인인 박귀희 여사다.

여사는 2001년 돌아가실 때까지 50년간 여관을 운영했다. 수덕여관은 중고등학생들이 수학여행 오면 머물다가는 곳이었다. 요령부득의 아이들을 상대하며 여사의 마음 속에는 어떤 생각들이 자리잡았을까. 여사는 고왔을까, 강했을까, 까다로웠을까, 무뎠을까, 아름다웠을까.







10년전에도, 다시 찾은 지금에도 남편은 소리지른다.
"중학교 때 수학여행 와서 여기서 잤었는데. 어떤 방인지 기억이 안난다.

발코니같은 나무 기둥을 타고 이방저방 돌아다녔던 건 기억나."


기억은 참으로 오래 간다. 잠깐의 즐거웠던 것도, 잠깐의 놀라움과 슬픔도, 잠깐 동안 했던 거짓말도 오랫동안 감춰져있다가 어느 순간 툭 터져 나온다. 어떤 공간에 서면, 옛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어떤 장소에 있으면, 기억은 더 농밀해진다.



 


여사가 돌아가시고 여관은 문을 닫았다. 잡풀이 자라고 종이문이 뜯겨나가 폐허가 된 듯했다. 고암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재단장을 하자는 의견을 모아 2007년에 여관을 복원했다. 지금 여관을 구경하면 70년이 넘는 정감이나 정서를 읽어낼 수가 없다. 해체복원을 하면서 대부분의 자재를 폐기했고 모두 새 재료를 사용한 까닭이다.

복원할 때의 웃지못할 이야기들도 전해진다. 한옥자재를 모두 털어냈더니 새로 쓸 수 있는 자재가 별로 없었단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새 재료를 투입할 수 밖에 없었다는 시공자 측 이야기를 관련 전문가들은 납득할 수 없다는 의견이 많다. 초기에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인부들이 무조건 해체를 시도한 결과, 벽 등에 숨겨져있던 고암의 습작들이 대거 노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종이겠거니 하고 폐기한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복원한 건물은 계절마다 습기와 벌레의 싸움에 지친다. 옛날 방식을 그대로 수용한 재료가 아니기에 비가 오면 나무가 썪고 곰팡이가 생기며 초가에는 잡초가 자란다. 한옥이되 한옥이 아니며 문화재이되 문화재가 아닌, 기묘한 상황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사람손이 지속적으로 닿지 않는 박제된 공간이 갖는 한계점이리라.


고암이 거쳐한 방은 문패가 붙어있으나 자물쇠로 잠겨있었다. 8개의 방을 터서 3개의 공간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가 방문한 날은 모든 방문이 잠겨있었지만 날이 좋을 때나 특별한 날에는 방안에서 차를 나누는 기념공간으로 활용되는 모양이다. 마당 중간에 솟아있는 굴뚝은 방이 많은 여관의 구들을 모두 데우기 위한 굴뚝이다. 항아리를 덮어놓은 것이 재미있다. 한때 여관이 폐허가되었을 때 이 굴뚝을 타고 담쟁이가 기둥처럼 자라있었다고 한다.



'ㄷ'자 형으로 구성된 한옥이다.






인물을, 사건을, 역사를 기념하는 것이란 어떠해야 옳을까? 암중모색이라지만, 그 공간은 '기억', 집단의 기억이 투영되어야 할 것이다. 설명이 아니라 공감이 필요할 것이다. 문화재 건물의 과거, 현재, 미래를 종합적으로 바라보며 솔루션을 찾아보면 좋겠다.




 

 이응노 선생이 직접 바위에 새긴 암각화 두 점이 수덕여관 앞에 있다. 옥고를 치른 후 수덕여관에서 몸을 추스릴 때, 끓어오르는 표현의 의지를 이렇게 드러냈던 것이다.  바위에 새겨진 상들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무뎌지고 흐릿해진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음이다. 그러나, 왠지 공감이 간다. 인생이란, 사람이란 이렇게 세월에 따라 흐릿해지고 무뎌지는 것이 아닐까? 그저 '족적을 남겼다'는 것으로 존재를 알 수 있으면 그뿐.

그 열정에 공감하고 감동한다면 그뿐.















찾아가는 길

이응노 생가 기념관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이응노로 61-7번지 
041-630-9232 
매주 월요일 휴관(월요일이 공휴일이면 화요일 휴관, 1월 1일, 설날, 추석 휴관)
관람시간- 09:00~18:00(동절기 09:00~17:00)
관람요금-성인 1000원/어린이 청소년 500원



수덕여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수덕사 진입로 입구에 주차후 일주문까지 도보 15분.
관람료 무료




 



 





북성로를 다시 가보게 된 이유는 바로 삼덕상회 때문이었다.

작년 가을쯤이었나, 인터넷 매체에서 대구 북성로의 오래된 상점에서 카페가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하루에도 수십개 문을 열고 수십개 문을 닫는 카페가 대단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 이 카페는 가볼만하다고 생각했다. 이 카페를 운영하는 주인이 오래된 건물에 새로운 삶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서 오랫동안 북성로 재발견에 참여해온 20대의 건축학도였기 때문이다. 기사에서 본 주인은 갸름한 얼굴을 가진 여성이었다. 북성로에서 새로운 움직임을 포착할 사랑방을 운영할 것이라 야무진 포부를 밝히고 있었다. 어떤 사람인지 만나보고 싶었고 그 공간은 어떻게 변모하여 공개되는지도 보고 싶었다.



근대건축물을 허물지 말고 잘 보존하자는 말들은 난무하지만 실제 건물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많은 숙제를 품고 있다. 규모가 큰 문화재급 건물 중에는 옛 기능을 회복하거나 박물관이나 전시관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문화재로 지정되기도 어려운 개인 소유의 부동산은 늘 태풍 앞의 촛불같은 신세다. 개인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것는 불합리한 일이고 그렇다고 오래된 건물이 모두 사라지는 것도 불편한 일이다.


문제는 이렇게 건물이 사라진 자리에 들어서는 새 건물이 좋은 건축미나 공간미를 보여주지 못한 채 그저 돈으로 환산된 장소로밖에 설정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건축이 경제 논리와 맞물렸을 때, 도시 환경의 품격, 삶의 질, 아름다운 공간, 스토리가 풍부한 거리, 오고싶은 장소... 이런 감성적이며 우리 마음을 끄는 요소들이 모두 제거되고 만다. 옛 건물에도 경제논리의 잣대로만 볼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거리에 담겨진 역사성이야말로 돈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시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는 일은 '시간'이라는 것이 오랫동안 해온 일이다. 그것은 그 도시에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상호소통하며 이루어낸 결과다. 그 결과가 건물에 스며있다. 건물은 그 자체로 역사다.











북성로 모퉁이에 있다는 카페를 찾아갔다. 이름하여 삼덕상회. 원래 공구상회로 사용했던 건물이었다. 북성로 골목에는 여전히 기계를 움직이느라 부산하고 소음이 들끓는다. 덕지덕지붙은 간판이 건물의 외관을 가리고 있지만 간판만 떼어내면 이 거리는 옛 모습 그대로이리라.중간쯤에 잘 정돈된 건물의 외관이 나타났다.


예상했던 것보다 건물이 자그마했다. 2층짜리 일본식 목조주택이다. 일제강점기에 닦인 도로변에는 파사드(외관)가 좁고 안쪽으로 긴 집들이 거리를 채웠다. 현재 우리네 건물들이 폭이 좁고 파사드가 넓은 형태를 띄는 것과는 다르다. 아파트만 봐도 베이를 늘리고 테라스를 길게 만든다. 채광과 환기 때문이다. (사실 아파트에서 발코니면이 넓은 것은 발코니 확장과도 관련이 없지는 않다.)









예스러운 분위기의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자 커피 향기가 퍼진다. 양해를 구하고 2층을 먼저 구경했다. 2층 안쪽에는 다다미방이 있고 좌식 테이블이 놓여 사랑방다운 분위기가 났고 바깥쪽에는 오래묵은 의자와 테이블을 두었다. 천장은 높고 시원했다. 1층과 2층 사이에 뻥 뚫린 자리가 있다. 아마 예전에는 이곳에 계단이 있어 오르내렸을 것 같다. 지금은 건물 뒤쪽에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들어 오가는 길을 편하게 만들었다.


재미있는 구조였다.



날이 추워 자리에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관계자분이 말을 걸어온다.
"제가 주인은 아니고, 주인이 제 후배에요."라고 밝고 경쾌한 목소리다.
근대문화유산에 관심많은 사람이라 소개하고 북성로와 카페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제가 2009년에 연초제조창을 답사한 적이 있어요. 그때 ATBT라는 문화창작집단을 만났었는데요. 연초제조창 둘러볼 때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어, 그 후배가 ATBT에서 일했었는데.... 그때 아닌가?"

번개처럼 스치는 이름이 있었다. <청춘남녀, 백년 전 세상을 탐하다> 담배공장 이야기라는 부분을 쓸 때 답사했던 대구 연초제조창. 대구에 올 때마다 그 넓디넓은 폐허를 온전히 다 둘러볼 수 있도록 도와준 호리호리한 여인이 늘 생각나곤 했는데, 그녀가 바로 이 카페의 주인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 역시 건축을 전공한다는 이야길 했었지!


어찌보면 별 일 아닌 인연이지만 좋은 프로젝트로 다시 만나니 더없이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것도 참 신기한 노릇이라, 아기 돌보러 귀가한 카페 주인에게 급작스런 문자를 보내고 다음날 만나기로 했다.  




2009년 여름 대구 연초제조창 방문 당시 우리를 안내해주었던 최지애 씨가 카페 삼덕상회의 주인이었다. 그날 북성로에 대해 무척이나 진지하게 설명해주던 기억이 난다. 근대문화유산의 언저리에서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이야.






근대문화유산을 소개하면서 사진으로 다 보여줄 수 없고 글로도 모두 설명할 수 없는 건물들을 만나기도 했다. 80년된 철암의  탄광 시설물이 그랬고, 대책없이 스러져가는 일본인 대농장 시설물이 그랬다. 그리고 담배공장. 담배공장은 참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있다. 청주의 연초제조창이 그랬고 대구의 연초제조창이 그랬고 제천의 엽연초 수납시설물이 그랬다. 아직 가보지 못했으나 무주에 있는 연초재배장 관리사무소도 곧 발걸음하게 될 것 같다.

이들 건물은, 대책 없이 크고 죽음을 앞둔 공룡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겨우 숨만 쉬는 형국이다. 너무 거대해서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없고 없애버릴 수도 없다. 그렇다고 개조하여 새롭게 사용하기에도 규모가 만만치 않다. 

어쩔 수 없는 건물들.

어쩔 수 없는 인연을 보는 것처럼 아련한 건물들.


세월의 틈에서 기능을 잃어버린 채 긴 시간을 삭히고 있는 건물들이 가슴에 다가온다. 그 숱한 시간동안 이 건물을 스쳐간 사람들은 얼마나 많았을 것이며 그들은 건물 곳곳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심어놓았을까?



이 건물을 움직인 사람들은 모두 노동자들이건만, 그들에게서 생산된 재화들은 도시를 황금빛으로 만든 주요자본이었다. 철암의 탄광에서 대구의 담배공장에서, 김제의 농장에서 나온 것들이 지역을 먹여살렸다. 지금 그 황금의 재화들을 생산한 노동자들은 서서히 잊혀지고 있다. 공장이, 탄광이, 농장이 사라지면 어디서 그들의 삶을 유추해볼 것인가?

그중에서 철암의 탄광 시설물 20개 동이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것은 참 반가운 일이다. 철암탄광 관계자는 193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지어져 지역 산업의 중추 역할을 했던( 한창 무연탄 산업이 좋을 무렵에는 동네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왜 항상 개가 등장하는지 모를 전설이지만.) 탄광 시설물이 잘 보존되어 향후 탄광산업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박물관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그 의미를 밝혔다.

설명하거나 드러내 보여주지 않아도 이런 장소들을 보는 것만으로 체험하는 것만으로도 역사의 무게를 고스란히 느끼게 된다. 그것이 오래된 건물의 힘이다.




대구 연초제조창 본관. 내부는 위험하여 옥상을 건너다니며 건물을 조망했다.






 

시간이 멈춘듯한 연초제조창 본관의 강당. 옥상 위에 세워져있었다. 그날 그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갔을까?




2009년 당시 촬영한 연초제조창의 모습. 지금 이 건물은 어떤 변화를 맞이했을까? 지금도 그대로일까?





연초제조창은 1910년대 처음 하나의 공장이 세워진 후로 공장이 확장을 거듭하면서 증축 또 증축하여 지금의 육중한 몸집에 이르렀다. KT&G가 대구공장을 영천으로 이전하면서 북성로 상단의 넓은 부지를 차지하고 있던 이 공장이 가동을 멈추었다. 원래 계획은 건물을 모두 허물고 이 자리에 초고층 주상복합 빌딩이 들어설 계획이었다.

그러다 건설경기가 좋지 않아 계획이 무산되었고 한참을 방치되던 건물에 문화창작단체인 ATBT라는 단체가 들어오게 된 것이다. 활기를 잃은 대구 중심부에 문화 프로젝트로 새로운 활력을 불러넣고자했던 단체다.





ATBT에서 시도한 것이 건물철거를 저지한 것과 연초제조창의 창고 건물을 활용하여 예술 페스티벌을 개최한 것이다. 60명이 넘는 예술가들이 4층짜리 건물에 예술의 향기를 가득 채웠다. 연초제조창 본관 건물은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되고 무척 낡아서 행사를 개최하는 데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벽돌로 차곡차곡 지은 장방형의 창고건물은 탁 트인데다 넓고 높아 예술 프로젝트를 하기에 적합했다.

최근 들리는 소식으로는 2013년에 창고건물을 복합문화단지로 바꾼다는 계획안이 발표되었다고 한다. 이 장소가 어떻게 변화할지, 어떤 컨텐츠를, 어떤 역사를 담을 지 지속적으로 지켜보고 싶다.



장소는 변화하더라도, 나는 처음 이 공간에 발을 디뎠던 그날의 서늘하고 눅눅한 감촉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 텅빈 공간에서 둥글게 말아올린 거대한 담뱃잎 뭉치들을 환영처럼 보았던 것도, 계단을 오르내리던 수많은 노동자들의 뒷모습을 떠올렸던 그 날의 체험을.







 

 
그리하여 다음 날 카페 주인을 만나 커피를 앞에 두고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 차분한 대구 사투리다.

그녀는 <북성로의 재발견>이라는 프로젝트 그룹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미술사와 건축을 전공한 사람, 대구의 옛골목을 샅샅이 정리한 대구 신택리지 팀 등 여럿이 모여 북성로를 활성화시켜보자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스터디를 하게 되었단다. 북성로의 몇몇 건물을 새롭게 활용하는 방안을 연구하던 끝에 삼덕상회 건물이 새주인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에 카페를 열게 되었단다. 단체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건물을 알맞게 디자인하고 공사를 하면서 1930년대 지어진 오래되고 낡은 공구상회 건물이 카페로 바뀌었다.



아직은 오가는 사람이 적어 손님의 발걸음은 많지 않지만, 예술이나 근대건축과 관련된 사람들이 워크숍을 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대구 부자들이 모여살았다는 진골목(근대문화유산투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리다)의 식당과 연합하여 점심시간을 이용한 근대문화 특강도 펼쳤다. 뜻있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조금씩 이어진다.
또 모 블로거의 글을 보니 바느질 카페의 회원들이 다다미 방에 모여 앉아 모임을 하고 갔단다. 공간을 필요로 하고 즐기는 사람은 어디라도 간다.


"아직은 관련자의 사랑방이고요. 제 놀이터에요." 라고 그녀가 수줍게 웃는다.
"동성로에 있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겠지만, 삼덕상회는 북성로에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거니까요."

"옆 집도 임대간판 붙였던데요. 같이 해보면 좋지 않을까요? 제 작업실을 이리로 옮기고 싶네요."

"임대가 아니고 매매래요. 매입하기엔 아무래도....."


북성로는 여전히 다방문화가 성업중이다. 공구상 아저씨가 전화하면 아가씨가 커피를 가져다준다. 그런 장소에 커피하우스라니, 아직은 낯설다.

"이 거리에 이런 집이 몇 군데만 더 생겨도 재미있게 해볼 일이 많을 것 같은데, 늘 고민이 많아요."



 

 



 

삼덕상회의 옛 모습을 보여주는 패널도 세웠다. 장소에 대한 약간의 기록을 남겨두었다.

 


 

 

 




 

 

옛 건물을 어떻게 잘 사용할 것인가? 이것은 연구자들에게도 숙제이며, 문화지킴이 공공단체나 지자체 등 정부기관에서도 속시원한 해결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든다.

젊은 우리는, 옛날 건물, 옛날 풍습을 들여다보는 것이 참 재미있다. 할머니 옛날 이야기같은 시절 속을 헤매며 당시 이야기를 찾아보는 그것이 또다른 유쾌한 여행이다. 안타까운 역사도 보고 가슴아픈 역사도 보고 가슴 뜨거운 역사도 보는 것에 어쩔 수 없이 끌린다. 젊은 우리가 이런 건물에 대해 좀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때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을까? 역사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즐겁게 무언가를 해볼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건 아닐까?

시행착오하며, 토론하며, 담론을 만들며, 하나하나 발자국을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반갑다. 부산에는 중구 골목에 예술가들이 모여 '또따또가'라는 단체를 만들어 거리 재생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고 인천에는 아트플랫폼이 있으며, 대전에는 30년대 지어진 대전 부윤관사가 카페겸 갤러리로 바뀌었다. 군산에도 예술가들이 도시를 스터디하며 오래된 일본식 주택에 머무는 레지던시 활동을 하고 있다.

나는 그
들을 만나러 가려고 한다. 그들이 오래된 집과 만나서 벌인 일들, 그 속에 담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볼 것이다.








카페 삼덕상회에 가보고 싶다면?
주소- 대구시 중구 북성로 2가 49-2 번지



 



대구 북성로는 공구제조 골목으로 유명하다. 북성로 재발견이 이루어지는 까닭은?




대구에 또 갔다. 이번엔 독립기념관에서 시행하는 교사 연수 답사 진행차 다녀왔다. 이번 방문에는 답사지와 별도로 내가 좀더 둘러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북성로.

공구골목이라 우당탕쿵탕 소란스런 소리도 들리고 물류 이송차량도도 빈번히 다닌다. 예쁜 장소는 아니다. 그렇지만 조금 돌아다녀보면 뭔가 느낌이 온다. 오래된 곳임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건물들, 철지난 간판이 붙어있는 좁은 골목들, 큰 도로와 좁은 골목 사이에 존재하는 묘한 분위기의 집과 남루한 여관과 정체모를 상점들이 겹겹이 들어차 있다. 왠지 양파처럼 껍질을 벗기면 또다른 속살을 보여줄 것 같은 그런 곳이다.


북성로는 어떤 곳일까?

대구는 경상감영이라 하여 경상도를 아우르는 행정중심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 경상감영을 중심으로 임진왜란 이후에 석성을 쌓아 대구 읍성이 세워졌다. 사람들은 읍성 안에 모여살았다. 개화기 이후 외국인들이 대구에 들어왔지만 전통적으로 행정과 상업 중심지였던 대구에 대규모로 외국인들이 유입되기는 어려웠다. 인천, 부산, 군산 등지에는 외국인들이 자기네 국적 사람들끼리 합법적으로 모여살던 조계지가 있었는데 대구는 그렇지 않았다.

개신교 선교사가 대구를 세거지로 하는 달성서씨로부터 동산 지역의 땅을 매입하여 모여살았고 남산 쪽에는 달성서씨 부자들의 후원을 받은 카톨릭 성당과 수도원이 들어와 성지를 일구었다. 일본인들은 경부선이 놓일 때 이 지역에 많이 들어왔다. 철도회사와 은행에서 일하는 엘리트도 많았고 철도 공사를 맡아하던 노동자들도 많았고 노동자를 상대로 하던 매춘부도 많았다. 이들은 성의 북쪽에 터를 잡았고 거류민단을 형성하여 대구 행정관들과 결탁하거나 그들을 압박하여 읍성 철거를 주장했다.

친일파였던 대구군수 겸 경상관찰사 서리인 박중양이 1907년 읍성을 철거했다. 읍성이 철거된 자리는 신작로로 바뀌었다.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는 읍성이 있던 자리에 생겨난 도로 이름이다. 이 중에서 서성로와 남성로는 조선인 유지들이 많이 살았고 동성로와 북성로는 일본인들의 거리였다. 이 두 지역은 일본식 지명으로 본정(本町;혼마치)을 경계로 나뉘어졌다. 본정은 현재 포정동 일대이며 경찰서, 은행, 경상도청, 우체국, 헌병대가 포진해있다. 그 북쪽으로 일본인 학교와 주택지, 유흥가가 생겨났다. 더 북쪽 켜에는 일본인 노동자들의 집단주거지와 유곽이 자리를 잡았다. 전기왕으로 불리며 일찌기 대구의 거부가 되었으며 문화재 약탈가로 악명높은 오쿠라 다케노스케의 집은 대구역과 가까운 동북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일찌기 대구 읍성의 북문과 동문 인근에 땅을 사들였고 대구 읍성 철거를 앞장서서 주장했다. 현재 동아백화점 주차장 부지에 위치했던 오쿠라의 저택은 600평에 달하는 큰 저택이었다고 한다.









도로의 폭과 건물의 규모를 보면서 100년 전 풍경을 어림짐작해볼 수 있다.








북성로 지역은 원정(元町;모토마치)이라 불리며 일제강점기 도시 발전의 중심 역할을 했다. 

일본
내에서도 유명한 체인 백화점이었던 미나카이백화점이 최초로 조선땅에 진출한 곳이 대구 북성로다. 미나카이 백화점은 엘리베이터가 있어서 유명세를 달렸다. 담배공장인 연초제조창도 북성로 수창동에 세워졌다. 연초제조창은 대구 산업을 이끌었다. 이 거리는 '순종황제어가길'이라는 이름의 도로가 있다. 1909년 대구를 시찰하러 온 순종황제가 대구역에 내려 달성까지 행차한 거리이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식민지 사업으로 일궈낸 근대화의 거리 북성로. 한일병합을 전후하여 북성로는 대구의 발전상을 오롯이 보여주는 곳이었다.

일제강점기 이 거리는 목욕탕인 조일탕, 재림소와 재목소, 포도주 판매점, 장신구점, 곡물회사, 철물점, 양복점, 조경회사가 거리에 포진해있던 상업 골목이다. 한 골목 안쪽에는 식당, 영화관, 여관 등 먹고 마시는 유흥의 거리가 연결된 다. 


 


대구 연초제조창.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지금은 비어있는 거대한 괴물.

연초제조창 창고 건물. 창고도 만만치 않은 규모를 자랑한다. 대구 연초 산업의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다.






광복 이후에는 미군부대가 근처에 생겨났고 이곳에서 나온 폐공구들을 수집하여 공구 영업을 하게 되면서 새로운 산업이 형성되었다. 태평로와 연결되어 기계 공구, 기계 부품 산업 및 창고업이 발달하게 되면서 명실공히 공구거리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 공구거리의 역사만 해도 60년이 넘는다. 1970년대 산업시대에는 북성로의 황금기였다. 넓은 골목에 지나갈 틈없이 사고파는 사람, 구경하는 사람, 운반하는 차량, 안전관리하는 경찰로 북적거렸다.

1998년에는 검단동이라는 지역에 기계부품 유통단지를 형성하여 중소업체들이 이전하도록 유도하여 많은 업체가 빠져나가기는 했지만, 서울의 청계천과는 달리 북성로 공구거리는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대부분의 업주들이 대를 물려 영업해오고 있다고 한다. 건물도 대를 물리고 가업도 대를 물리는 그런 장소다.

 

피란 시절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모나미 다방.

꽃자리 다방은 화재가 나서 내부가 사라졌다. 이야기도 흩어졌다.



야마구치 도자기점의 아름다운 장식은 흔적만 남았다. 골목 안에는 작고 오래된 여관들이 지금도 영업중이다.


 

 이 거리의 스토리라인을 만드는 또 하나의 축은 전쟁 즈음에 피란온 문인과 예술가들이 모여 삶을 논하던 거리라는 점이다. 구상, 조지훈, 유치환이 오가고 이중섭, 서동진, 권태호가 커피를 마시던 곳이다. 건물들은 한때 다방과 여관이 되었다가 다시 식당과 철물점이 되었다가 버려지거나 비거나 하며 공구 산업과는 다른 이야기를 이어갔다. 건물은 거대한 입간판으로 가려져있지만 간판과 외부 건축재료만 발라내면 옛과 다름없는 속살을 드러낼 것이다. 그 속에 담긴 오롯한 이야기들이 궁금해진다.

 

 



좀더 읽어볼 책

대구 신택리지/ 거리문화시민연대 지음
대구라는 도시의 역사를 빼곡하게 정리 수집하여 엮어낸 책. 시민탐사대들이 힘을 모아 이룩한 성과라는 점이 놀랍다. 오랜시간 자료를 찾아헤맨 사람들 덕분에 대구라는 도시를 좀더 이해하게 되었다. <청춘남녀 백년전 세상을 탐하다>의 대구 관련 원고를 쓸 때 이 책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골목을 걷다: 이야기가 있는 도시여행 / 김기홍 이애란 정혜진 이지용
대구 골목 답사를 할 때 다채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 영남일보 기자들이 골목마다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골라내었다. 삼덕동 빛살미술관, 북성로 연초제조창, 향촌동 이야기, 남산 카톨릭 성지 등이 인상적이었다. <청춘남녀 백년 전 세상을 탐하다>에는 답사하고서도 카톨릭 성지에 대해서 담지 못했다. 경향 인터넷 블로그에 차차 올려보려고 한다.







 

부산 국제시장 안 보수동 책방 골목. 세상의 모든 책들이 있는 골목.









보수동 책방골목은 나와도 인연이 있다. 고등학교 새학기가 되면 <수학의 정석>을 사러 갔던 그곳이니까. 책에서는 달걀냄새 비슷한 잉크냄새가 풀풀 풍기는 그 누구도 열어보지 않은 깨끗한 참고서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조금 할인된 가격. 보수동 책상에서 <정석>을 사지 않으면 신학기가 시작되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동네에도 헌책방이 곳곳에 있어서 낡은 책을 사고 파는 곳이 많았다. 그중에서 서면에 있는 헌책방을 자주 갔다. 몇 군데의 헌책방이 있었는데, 각기 판매하는 책의 성격이 달랐다. 대로변에 있어 북적거리던 헌책방은 세계문학이나 추리소설을 자주 사러갔다. 때로는 순정만화잡지<르네상스>, 영화잡지 <스크린>은 서면 뒷골목의 작은 헌책방에서 사곤 했다. 영화잡지에 실린 좋아하는 배우의 화보사진- 이자벨 아자니, 리버 피닉스 같은-을 참으로 아꼈었는데.... 그 책들 중 몇 권은 여전히 내 방 책꽂이에 있다.


지금 작업실이 있는 홍대 주변에도 헌책방이 몇 군데 있어, 가끔 새책같은 중고책을 사러 들른다. 인천 배다리 헌책 골목도 취재차 다녀오기도 했다. 아벨서점의 겹겹이 쌓인 책들. 그러고보면 헌책방이야 말로 도시인의 역사를 관통하는 장소가 아닐까 싶다. 누군가가 샀던 책이 돌고 도는 장소. 책은 사실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는 물건이 아니던가.


보수동 책방골목은 전국에서 가장 사람들이 많이 오는 헌책방 골목이 아닐까?. 이미 부산의 관광명소가 되었을 뿐더러, 책방의 수도 많아 거리를 형성하고 있고 더불어 볼만하고 살만한 책들도 참으로 다양하다. 책을 보러, 책을 사러, 사진을 찍으러, 그저 구경하러 사람들은 책방골목에 발을 디딘다. 내가 책방골목에 간 이유는, 그저 책 속에 파묻혀있고 싶어서였다. 묵은 내 나는 책, 지금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뻣뻣한 종이, 콩알만한 서체, 크기고 두께도 작지만 담을 이야기는 충분히 담겨진 책들. 수십년에 걸쳐 모여든 책들은, 내가 오랜 세월을 더 살아간 다음, 나의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을 상상해보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 책들은 누군가의 수집품 같았다.











과연 어떤 책들이 있을 지가 가장 궁금했다. 기억을 더듬어본다면, 참고서, 전집류, 사전, 만화전집, 그리고 이사갈 때 처분하게 되는 오래된 책들 정도일까? 그에 더불어 잡지, 외국도서, 각종 단행본들과 백년 가까이 된 고서들이 헌책방을 지키고 있었다. 이 거리는 헌책이 주인이다. 켜켜이 손때가 묻고 낡았지만 아직도 엄연히 책으로서 기능을 할 수 있는 사물들이 무심한 듯 시크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언제부터 있었던 것일까? 많은 헌책방 거리들이 한국전쟁 이후 물자가 부족하고 가난하던 시절에 등장했다고 한다. 보수동은 한국전쟁 때 이북에서 피난온 손씨 부부가 보수동 사거리 입구 골목 안쪽에서 박스를 깔고 각종 헌책을 팔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미군부대에서 나온 책, 고물상으로부터 사들인 헌책 등을 잘 추려 팔았다고 한다.

부산은 피난민이 밀집된 지역이며, 중구, 서구, 영도구 일대에 피난민이 정착하여 살았다. 각지역에 있던 학교들도 속속 부산으로 옮겨와 개교했다. 서울대학교가 부산에서 문을 열었고, 보수동 뒤쪽의 구덕산 자락에는 천막학교가
많았다. 헌책 노점은 꽤나 안목이 있었던 선택이있다. 책이 귀했던 시절, 학생들은 갖고 있던 책을 팔아 밥벌이를 하고 또 헌책을 사서 공부했다.

노점 헌책방에 다른 피난민들도 가세하기 시작했다. 노점에서 가건물로, 의젓한 점포건물로 외양을 바꾸어갔을 뿐, 책방골목은 사라지지 않았다. 70년대에는 점포가 70여개에 달했다. 오래된 책을 팔고 다시 헌책을 사는 모습이 일상적인 풍경으로 자리잡았을 때니까. 한때 중고 책방이 위기를 겪으며 책방이 문을 닫기도 했으나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다수의 책방들이 여전히 골목 풍경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책방도 예쁘게 옷을 갈아입었다. 젊은이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헌책방의 묘미를 살려간다고 할까? 커뮤니티가 중심이 되고 오래된 책, 절판된 책이라도 친절하게 상담해주는 책방 주인들이 살갑다. 작고 따스한 공간에 발을 디디고 오래된 책 냄새를 맡아본다. 영국을 대표하는 책마을인 '헤이온와이'가 어떤 풍경인지 모르겠지만, 이 골목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느꼈다. 좁은 골목 양쪽편에 책방들이 어깨를 맞대고 서있는 풍경이 참 좋다.






길이 헷갈릴 즈음에 나타나는 안내판이 나타났다.이쯤에서 쉬어야겠다 싶은 사람들을 위한 따스한 카페와 도넛과 고로케를 먹을 수 있는 간이 분식점이 있다. 어떤 관광지라도 쉴 장소, 먹을 장소가 역시 인기가 높다. 찹쌀 도넛이 3개 천원, 고로케가 3개 2천원이다. 주머니 가벼운 나들이객들도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점도 이곳의 장점이다.





 

 

 

 

 

 


책방 골목에서 규모도 크고 다루는 품목이 다양하여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책방 한곳을 구경하러 들어갔다. 책방에는 1970년대에 출간된 책들이 즐비하다. 김현식 시집 초판본이 벽에 걸려있다. 오래된 책들이 대접받는 곳이다. 군데군데 걸려있는 흑백사진들이 왠지 향수를 자아낸다. 사람들과 헌책과의 교류를 바라보는 책방주인의 뿌듯함이 느껴진다. 레코드판이 반갑다. 한때 선물 주고 받았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재생하기도 어려운 물건이지만. 아직도 판이 튀는 소리에 대한 향수가 살짝 남아있다.

책방 중앙에 아랫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계단 주변에도 지금은 찾아보기도 힘든 오래된 문고본들이 무심하게 사람들을 바라본다. 벽에는 책 속에서 발췌한 좋은 글귀들을 손으로 꼭꼭 눌러쓴 메모들이 붙어있다. 아랫층에는 분야별로 책들이 잘 구분되어 있고 쉬어가도록 작은 카페도 마련되어 있다.

파리의 작은 서점, 세익스피어앤컴퍼니가 떠올랐다. 물론 세익스피어앤컴퍼니는 헌책방이 아니라 영어권 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이지만, 그 오래된 책방 속 풍경이 자꾸 오버랩된다. 세익스피어앤컴퍼니에서 책을 사면 꼭 스탬프를 찍어준다. 서점 주인의 따뜻한 웃음. 그리고 내 가슴에 콕 찍혔버린 스탬프.

책방이 가져야 할 미덕은 무엇일까? 고객이 원하는 책을 신속하고 쾌적하게 전달하는 것일까? 고객이 미처 몰랐던 책들도 발견할 수 있도록 훌륭한 영감을 선사해야 하는 곳은 아닐까? 나는 원하는 책을 살 때는 인터넷서점을 이용하고, 특별한 책을 만나고 싶을 때는 서점에 간다. 그리고 정말 완벽한 책을 찾고 싶을 때는 헌책방에 간다.



 

 




'책의 마음'이라는 서점으로, 따뜻한 불빛에 이끌려 슬금슬금 들어갔다. 단정하게 꽂힌 문고본 문학책들이 눈에 들어온다. 1970년대에 출간된 책들이다. 손에 딱 들어올 정도로 콤팩트하고 깨알같은 활자지만 읽기에 큰 무리가 없을 정도다. 무엇보다 콤팩트하고 딴딴한 편집이 마음에 들었다. 요즘에도 이런 문고본 책이 나온다면 참 좋을텐데. 하지만, 책은 세로쓰기로 되어 있어서 익숙치 않은 세대에게는 읽는 게 힘들 것 같았다.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을 조물락거리다가 그냥 나왔다.



 

 

 



빨간 가판대가 시선을 사로잡은 이곳은 고서 전문 서점이다. 오래된 책은 그 가치를 알아채기 어렵기 때문에 포스트잇으로 가벼운 설명도 덧붙여놓았다. 1960년대의 <여원>이라는 잡지, 일제강점기에 나온 일본어 시집들이 눈길을 끈다. 오래된 외국 서적들은 깨끗하게 정돈하여 커버를 씌워두었다. 그 시대를 엿보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들춰보아도 흥미롭겠다.




보수동 책방골목도 조금씩 변화가 생기는 중이다.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카페도 생겨나고 책방의 외관도 아기자기하게 변신하는 중이다. 작가의 작업실도 보인다. 커뮤니티를 활성화하기 위한 행사들도 열리곤 한다. 헌책방이 책을 사고파는 장소를 넘어서 문화와 정신을 교류하는 장소로 가치를 옮겨가는 중이다.




골목에서 대로변으로 내려가면 보수동 책방골목 문화관이 나온다. 책방골목의 역사를 보여주는 간단한 전시장이 있다.어린이 교육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으며 책방골목을 내려다보는 카페 라운지도 마련되어 있다. 책방 골목 풍경을 입체적으로 살펴보려면 잠시 들러도 좋겠다.





나는 어떤 책을 샀을까? 책을 좋아하지만 책방에서는 막연해질 때가 많다. 책이 손짓하길 기다릴수밖에. 잠시 후 응답이 왔다. 그 많고 많은 책 중에 내 손에 들린 건 바로 일본인 저자가 쓴 <명화를 보는 즐거움>이라는 책이다. 미술에세이지만 요즘 책들과 비교해도 내용이 손색이 없었다. 지금과는 표준어 체계가 달라 뉴욕을 뉴우요오크라고 하는 등 우스꽝스러운 표현도 꽤 되지만 번역은 크게 낯설지 않았다. 1978년도 책이며 당시 가격은 1400원. 내가 지불한 돈은 1만원이다. 싼 건 아니다. 하지만, 그만큼의 가치는 충분하다. 마음에 드는 책이 30년 간의 세월을 넘어 내게로 와주었으니까.






보수동 책방골목
위치-부산시 중구 보수동 1가 보수동 책방골목
참고 홈페이지-www.bosubook.com
보수동 책방골목 쇼핑몰- www.bosubookstreet.com





시인의 집에서 따뜻한 햇살을 쬐니 뭐라도 쓸수밖에 없었다. 부여 신동엽 고택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제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아모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고대문화, 1969.







시를 외던 시절이 있었다.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숱한 문학 작품들 속에서 푹 빠져 지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스무살부터는 무엇에 홀렸는지 시를 잊었다. 많고 많은 말들, 남을 아프게하는 말들, 애써 변명하는 말들, 현실을 회피하는 말들, 억지로 끼워맞춘 말들, 그 넘쳐나는 말들 사이에서 시를 읽을 수 없었다. 때로 내 입에서 시어 몇 개가 흘러나오다 냉큼 사라진다. 시가 사라진 세상이었다.

2011년은, 시가 도처에 생겨났다. 다시 시를 찾는 시대가 돌아왔다. SNS에, 책 속에, 시를 다시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점점 많아진다. 왜 우리들 가슴에, 입술에, 뇌리에, 손끝에, 시가 닿게 되었을까? 우리가 원하는 시가 가진 짧고 순간적인 감정일까, 시에 담긴 메시지일까?



시를 읽는 시간은 짧지만 강렬하다.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에 나열되는 욕설들이 강렬하다. <푸른하늘을>을 지금까지도 외고 있는 것은 언어가 쉽고 견고해서일것이다. 도종환이 <접시꽃당신>에서 '새벽이 있는 싸움을 위대하여라'라고 한탄하던 부분을 기억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쉼보르스카의 조근조근하면서도 관조적인 시선이 마음을 어루만진다. 저 멀리 1930년대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함경도 사투리는 신비로운 겨울밤같다. 나타샤와 당나귀를 말하는 백석의 시는 쫄깃거리다 못해 입안에 침이 고인다.
그리고 지금 독일 북부도시에서 고고학자가 된 시인 허수경이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이라고 툭 내던질 때 나는 그녀가 지금 살고 있는 지구 반대편의 어느 도시와 그녀가 고고학 발굴 때문에 가곤했던 중동의 모래도시와 그녀의 고향인 진주 사이를 오가며 그 어느 도시에도 정주하지 못하는 21세기 노마드가 되기도 한다.


시는 부르짖음이고,속삭임이고, 감정의 횡포이고, 탄식이다. 이십대의 나는 시를 읽지 않았지만 삽십대의 나는 시를 읽는다. 가슴 속으로 절절 끓이며. 시건 저널이건, 누군가가 사회를 향해 던지는 말들의 맥락 속에 나 스스로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게 된 까닭이다. 사회를 읽고, 그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저널을 읽는 것처럼 시를 읽는다.


종로 5가
신동엽


이슬비 오는 날,
종로 5가 서시오판 옆에서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는 군상(群像) 속에서 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
그 소년의 등허리선 먼 길 떠나온 고구마가
흙 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었다.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땅 어촌(漁村) 말씨였을까.
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눈녹이 바람이 부는 질척질척한 겨울날,
종묘(宗廟) 담을 끼고 돌다가 나는 보았어.
그의 누나였을까.
부은 한쪽 눈의 창녀(娼女)가 양지 쪽 기대 앉아
속내의 바람으로, 때묻은 긴 편지를 읽고 있었지.


그리고 언젠가 보았어.
세종로 고층건물 공사장,
자갈지게 등짐하던 노동자 하나이
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었지.
그 소년의 아버지였을까.
반도(半島)의 하늘 높이서 태양이 쏟아지고,
싸늘한 땀방울 뿜어낸 이마엔 세 줄기 강물.
대륙의 섬나라의
그리고 또 오늘 저 새로운 은행국(銀行國)의
물결이 뒹굴고 있었다.

남은 것은 없었다.
나날이 허물어져 가는 그나마 토방 한 칸.
봄이면 쑥, 여름이면 나무뿌리, 가을이면 타작마당을 휩쓰는 빈 바람.
변한 것은 없었다.
이조(李朝) 오백 년은 끝나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북간도(北間島)라도 갔지.
기껏해야 버스길 삼백 리 서울로 왔지.
고층건물 침대 속 누워 비료광만 뿌리는 그머리 마을,
또 무슨 넉살 꾸미기 위해 짓는지도 모를 빌딩 공사장,
도시락 차고 왔지.



이슬비 오는 날,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그 소년의 죄 없이 크고 맑기만한 눈동자엔 밤이 내리고
노동으로 지친 나의 가슴에선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동서춘추, 1967년

 


얼마전 시인이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진중공업의 직원 불법해고에 반대하는 노동자들과 고공 크레인에 올라가 300일이 넘도록 온몸으로 투쟁하던 김진숙 선생을 응원하기 위해 서울에서 부산 영도까지 수차례 운행했던 희망버스의 기획자 송경동 시인이다. 한진중공업 사태가 어찌어찌 마무리되는 쪽으로 흐르자 경찰은 희망버스를 조사하고 시인을 구속했다. 시인은 창작과비평사에서 주관하는 신동엽 문학상의 올해 수상자였다.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시상식에 구속된 시인은 오지 못했고 의자에는 시인의 이름만이 남았다. 시인이 구속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신동엽 시인이 살았던 집을 찾아 충남 부여에 갔다. 1960년에 민주세력을 억압하던 정치세력을 비판하며 쓴 "껍데기는 가라"가 시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1930년 부여에서 태어난 시인은 광복, 한국전쟁, 전후 혼란한 상황 두루 겪었다. 한국전쟁 중에는 부여가 북측 점령기였을 때는 민족청년연맹의 지도부로, 또 남측 수복후에는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되어 고초를 겪었다. 20대 초반의 감수성 예민한 시기에 혼란한 상황을 맞닥뜨린 시인은 내적 시름이 깊어졌다. 게다가 간디스토마라는 치명적인 질병을 겪으면서 39세로 요절할 때까지 이 병은 시인을 따라다니는 죽음의 그림자였다.

전주사범학교를 마친 후 상경하여 단국대 사학과를 다녔다. 1961년에 명성여고에 적을 두고 후학을 길렀다. 1959년에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여 등단했다. 그 해 <진달래산천(조선일보)> <새로 열리는 땅(새계일보) > 등을 발표했고, 1963년에 첫 시집 <아사녀>를 냈다.

1967년에 <껍데기는 가라> 등 7편의 시를 묶어 52인의 시집에 게재하며 시작 활동을 지속했다. 같은해에 동학농민운동을 주제로 쓴 장편 서사시 <금강>을 발표하면서 신동엽의 입지는 굳어졌다. 

시인의 요절로 시작활동이 10여년에 그쳤으나 시 속에 담긴 참여 의식과 분명한 저항 의식은 시인의 시가 지금까지 회자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때 판금조치를 당하기도 한 시인의 시들을 읽으며 당시만큼이나 2011년 지금 더욱 공감을 이끌어내는 면면을 발견하고선 쓴 웃음을 짓게 된다. 참으로 이 현실이란!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는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 곳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1967년 1월 《52인 시집》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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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두 채로 지어진 한옥이다. 예스러운 모습보다는 현대식으로 말끔히 고친 한옥이 좀 낯설다. 저, 파란색 인조기와가 참으로 천연덕스럽게 보인다. 안채는 부엌과 작은 방이 두 개 연결되어 있고, 별채도 두 개의 방과 창고로 보이는 장소가 이어져 있다.

이곳은 신동엽 시인이 8살때부터 이사와 자란 곳이다. 전쟁 후 피골이 상접한 채 돌아온 시인을 보듬어 안고 사람으로 만든 곳이다. 서울의 한 서점에서 일하다가 만난 눈빛 맑은 아내와 신혼살림을 차린 곳이고, 병마가 재발한 시인이 요양하며 시를 쓰던 곳이었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을 두루두루 지켜보며 아픈 몸을 감싸주던, 그의 부모같은 집이 지금 그자리에 남아있다. 

시인이 머물면서 글을 쓰던 장소는 어느 방이었을까? 알콩달콩 아내와 사랑싸움하던 방은 또 어디였을까? 일찍 요절한 시인의 흔적을 찾아본다는 게 쉽지 않지만 작은 방 너머 어딘가, 툇마루 안쪽 어딘가에 그날의 풍경이 남아있지 않을까, 싶었다. 시를 쓰는 동안 축음기의 교향곡 소리가 흘러나왔다고 하는 그 방. 철쭉과 목련이 피었던 그 집.


눈빛 맑은 시인의 아내는 집풀생활사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는 인병선 관장이다. 인병선 여사가 직접 쓴 글이 판각되어 방 문 위에 걸려있다. 아마도 시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방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모든 방은 문이 잠겨있어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별채의 중간 방만 문을 열어볼 수 있었다. 마치 얼마전까지 사람이 기거한 양 체취가 느껴졌다.

지금 이곳은 한창 공사 소음이 가득하다. 고택 뒷편에 신동엽 기념관이 한창 지어지고 있는 까닭이다. 시인이 보던 책과 그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놓고 가족들이 기념관을 운영하다가 고택과 유고, 유품 일체를 부여군에 기증하고 대신 기념관을 지어 그곳에 전시하기로 한 모양이다. 방문객들이 남기고간 쓰레기며 낙서들까지 있어 불편한 마음이 들었는데, 전시관이 세워지면 인
력이나 예산이 투입되는 만큼 잘 관리될 것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봉하마을 노무현 대통령 묘역을 디자인한 건축가 승효상의 설계로 진행된다고 한다.






1985년에 세워진 기념비가 마당 한켠에 자리잡고 있다.



한창 공사가 진행중인 고택을 돌아보자니, 여유있게 시인의 삶을 음미할 겨를이 없었다. 훌쩍 보고 바삐 돌아갈까 했는데, 툇마루에 내리쬐는 햇볕이 좋아서 잠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게 되었다. 그 자리에 앉으니 아트막한 돌담과 황폐하지만 널찍한 마당이 눈에 들어온다. 마당에 꽃과 나무가 예쁘게 자라면 보기 좋겠다.. 한옥이 공사장 소음을 막아주어 오롯이 볕을 즐기며 나만의 생각에 빠져들 수가 있었다.

참으로 따뜻하고 어여쁜 집이었다.

집에 깃들인 시심(詩心)의 향기가 나를 부른 것인가? 바삐 가려던 마음을 멈추고 노트를 꺼내 몇 자 끄적여본다. 신동엽 시인의 시집이라도 가져와 한 페이지 읽어보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한 나는 스마트폰으로 검색하여 디지털 활자로 몇 개의 시를 읽어보았다. 온통 책으로 둘러싸인 남향의 작은 방에서 음악을 들으며 시심을 읊던 시인의 하루를 떠올리며, 나는 단언할 수 있었다. 이 집에서 시인은 참으로 행복했을 것이라고.







 

백마강을 바라보는 기슭에 시인이 작고한 후 1970년에 동료 문인들이 세운 시비가 있다. 시비의 앞에는 신동엽을 기리는 시 한편이, 뒷편에는 시인의 마음을 담은 글이 새겨져 있다. 1970년 4월 7일이라는 한자에서 진득한 그리움이 퍼진다. <금강>이라는 장편 서사시를 쓸 정도로 시인은 부여를 흐르는 거대한 강의 흐름을 쫓고 그 속에서 역사를 읽어냈다. 지금은 4대강 사업으로 파헤쳐지고 강둑을 따라 자전거도로가 생겨난 상태였다. 강 주변에는 소란스러운 공사 소음이 지속적으로 들린다.



시비 주면에는 시인의 시를 읽을 수 있도록 적어둔 표지판이 많이 놓여있다.

 

 






시인의 시 중에서 하나를 덧붙여 적어볼까 한다. 시인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그의 시이기에.


산문시 1
신동엽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묻은 책 하이덱거 럿셀 헤밍웨이 장자(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갯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곤가 불리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이름 극작가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쪽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하지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내는 미사일기지도 탱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사색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 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월간문학, 1968년 11월 창간호>



 



 


시인 신동엽 가옥터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501-3번지
등록문화재 제339호


더 읽어볼 책

 

김수영vs 신동엽/ 최성수 지음/ 숨비소리
60년대의 대표적인 시인 두 사람을 비교하며 읽어볼 수 있는 입문서. 



          


 




한동안 땅콩집에 대한 이야기가 연일 매스컴을 달궜다. 땅콩집이란 한필지에 두 집이 붙어있는 듀플렉스 형 주택을 지어 두 세대가 사는 것이다. 거침없는 집값, 땅값을 절반으로 낮추면서 마당있는 집을 가질 수 있다는 도심형 주택의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서울 근교에 널찍한 단독주택을 3억에 지을 수 있다는 게 더 매력적이었던 것 같다. 이렇듯 집은 경제적인 관점에서 비껴갈 수가 없다. 그게 평생 살고 싶은 집이건, 분양받았다가 되팔고 나가건 간에. 부동산 아니면 돈을 벌 수 없는 묘한 구조 속에 사는 우리로서는. 집은, 재산이며 또한 재산을 불려주는 화수분이다. 아마도 영원히 화수분이길 바랄 것이다.


집은 영원한 숙제다. 우리가 몸담고 사는 곳의 의미를 쉽게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남들과 다른 공간에서 살고 싶은 사람들도 많고 남들과 똑같은 장소에서 살아야 마음이 편하다는 사람도 있다. 집에서 삶의 효율을 찾는 사람도 있고 집을 통해서 취향을 과시하고픈 사람도 있다. 나의 집은 어떠한가?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다.


집이란 개개인들의 공간이다 보니 사적인 영역의 논의라 여겨지겠지만 주택을 둘러싼 각종 법규와 제도와 역사와 문화를 따져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 집은 공공의 영역이다. 나라에서 국민이 사는 집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의 형태와 상황과 돈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집의 공공성과 더불어 공공주택의 중요성은 점점 더 역할이 커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재개발, 신도시 개발 위주의 대단지 계획에 밀려 공공주택 분야는 정부의 주택 정책에서 부수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부분이 있다.


지금부터 반세기 전 서울이 가진 문제점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전쟁 이후 월남한 사람들과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로 서울은 미어지고 터질 지경이었다. 안그래도 폐허가 된 도시에는 턱없이 살 집이 부족했던 터, 집을 제공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들이 끊이지 않았다. 광부 후인 1945년 조선주택영단에서 실시한 국민주택 현상설계, 전후인 1957년에는 미국과 우리가 공동으로 주관한 전국주택설계 현상공모 등이 생겨나 집단계획이나 주택의 대량 생산에 대한 접근이 시작되었다.

그와 함께 공공부문에서 주택재건사업이 시작되었다. 지금으로 치자면 주공과 같은 역할을 했던 주택영단이 1952년에 부산 영도 청학동에 흙벽돌집 200호를 건설했고, 서울 환도 후에 재건주택이라 하여 외국의 차관을 도입하여 신속하게 공동주택을 설치했다. 이때 등장한 집들은 9평짜리 흙벽돌집이었으며 정릉천변에 세워졌다. 1956년까지 재건주택, 부흥주택, 희망주택이라는 이름으로 3000여 채에 이르는 주택이 공급되었다. 주민들에게는 집의 이름처럼 희망을 선사한 집들이었을 터이다. 1956년부터는 흙벽돌 대신 시멘트 블록을 사용한 국민주택, 연립주택들이 등장했다.










오늘 가볼 곳은 청량리 부흥주택이다. 청량리는 일제강점기부터 인구가 많이 몰리던 지역이었다. 서울과 원산을 이어주던 경원선의 시발역인 청량리역이 1914년에 개통되었고 1934년에는 중앙선이, 1941년에는 경춘선이 개통하였다. 강원도의 농산물이 자연스럽게 드나들게 되어 재래시장이 생겨났으며 시장에 터를 두고 사는 사람들도 늘어났으며 광복 후, 전쟁 후에도 이 지역은 대표적인 인구조밀지역이었다

홍릉과 가까워 일제강점기에 공원과 풍치지구로 지정되어 있던 빈터에 대단지 주거지를 개발하게 되었다. 서울시에서 1955년에 204호의 시영주택을, 대한주택영단이 1957년에 283호의 영단주택을 건설하여 민간에 보급했다.

원형은 2층으로 된 4호 공동주택이 도로에 맞춰 밀도 있게 배열되었던 것이다. 현재는 4개의 필지를 각각 나누고 담을 쌓고 대문으로 따로 만들어 마치 단독주택이 일렬로 배열된 듯한 분위기를 준다. 답사했을 때는 이 주택들이 그저 이웃집과 비슷하게 지은 단독주택인 줄로만 알았는데, 4호가 하나의 공동주택이었음은 자료를 보고서야 알았다.








50년의 세월을 이어오면서 원래의 구조를 그대로 갖고 있는 주택들이 과연 얼마나 남아있을까? 집의 외관과 내부는 살아오면서 많은 첨삭을 겪었지만 집의 원형을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니다. 집의 원래 형태, 구조를 짐작할 수 있는 흔적들도 많다. 더우기 지금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15~17평형대의 작은 규모의 단독주택을 보면서 놀랍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했다. 내부의 방은 얼마만한 크기이며 사람들은 불편함없이 살고 있을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들이 대책없이 크기만 지향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동안 집은 변화를 많이 겪었다. 우선 4호가 하나였던 공동주택의 구조에서 1호 개인주택처럼 담을 쌓고 대문을 달았다. 목구조 형식을 여전히 갖고 있지만 집 구조를 튼튼하게 하고 나름대로 집에 개성을 부여하기 위해  집집마다 다양한 모양새로 변화되었다. 타일을 바른 집, 벽돌을 쌓은 집, 콘크리트 시멘트로 깨끗하게 바른 집 등.... 또한 2층에 세를 주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가는 별도의 계단을 만들었으며 비어있는 곳으로 지속적으로 증축되다보니 집들이 각각 형태가 달라져있다. 원래는 내부에 계단이 있었을 것이며 목조형 2층집의 난방을 위해 다다미를 썼던 적도 있다고 하지만, 삶의 방식은 집의 구조를 변화시켰다.


 

전쟁 직후에 세워진 집들은 흙벽돌이 많았다. 미국에서 지원해준 건축재료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보는 적벽돌은 흙으로 빚어 구워낸 것이지만 흙벽돌은 말린 벽돌이다. 따라서 내구성이 적벽돌에 비해 떨어진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돌을 깨어 섞어서 벽돌을 만들기도 했다. 청량리 부흥주택에서도 이 상황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우리에게는 적벽돌을 하급의 재료로 인식해온 알 수 없는 역사도 있다. 벽돌구조에 시멘트를 발라 매끈한 몸체를 자랑하거나 타일을 붙여 반짝반짝하게 장식하는 것을 더 보기 좋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렇듯 건축재료에 대한 다양한 통념들, 변화된 생각들을 보여주는 사례들을 오래된 주거지에서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청량리2동 부흥주택 지역에서는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길을 따라 왼쪽편의 주택지와 오른쪽 편의 주택지가 도로 폭이 다르다. 왼쪽 주택지의 경우는 도로폭이 넓으면서 서로 대문이 마주보고 있고, 오른쪽 주택지는 도로폭이 사람 하나 지나다닐 정도로 좁으면서 한쪽에만 남측으로 대문이 나있다. 즉 왼쪽 주택지는 등을 맞대고 두 개의 건물이 붙어있는 경우이며 오른쪽은 1개의 건물이 하나의 방향으로 서있는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양쪽은 각기 주택 건설 주체가 다르다. 한쪽은 서울시, 한쪽은 대한주택영단이라는.

집집마다 내놓은 화분들이 정원 없이 좁은 마당을 갖고 사는 사람들의 숨을 틔여주는 것 같다. 초록의 나무들과 함께 숨쉬고 싶은 마음이 화분들을 집밖에 내놓는 것으로 표현되는가 싶다. 이렇게 오래된 주거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요즘 도시계획에는 해당 지역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함께 도로, 학교, 주차시설, 상업지구, 대중교통 시설 등이 함께 고려되지만, 부흥주택이 계획되고 지어질 당시에는 이 주변 지역에 대한 기반시설 계획은 함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대로변에 인접한 가옥들은 자연스럽게 상점주거 형태로 바뀌었다. 지역의 요구에 따라 주거지의 표정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오래된 집 뒤로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이 지역도 재개발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오래되고 좁은 가옥들, 이제 낡고 보잘 것 없어진 집들, 너무나 많은 층개축으로 인해 원형을 잃어버린 집들, 그리고 원형의 시작조차 선하거나 완벽하지 않았던 계획. 그러므로 부흥주택의 현재 모습은 어쩌면 재개발로 새로운 주거를 제안하는 것이 옳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층의 주거지를 둘러보면서 이 장소만의 매력이 분명이 있음을 보았다. 도시의 역사를 품고 있는 거리와 집들이 주는 이상야릇한 포스는 한번 보면 쉽게 잊히지 않는다. 서울에서는 보기드문 저층의 주거지라는 점도, 천편일률적인 다가구 빌라가 아직 점유하지 않았다는 점도 천연기념물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분명 좁고 남루한 집들임에 분명하지만 낡고 바스라지게 내버려두지 않고 꼼꼼하게 고치고 다듬으며 살아온 흔적들이 살뜰하다. 동네는 깨끗하고 조용했다. 이런 지역을 어떻게 논의하고 포괄할 지 선하고 의미있는 도시계획이 세워지길 기다려보고자 한다.



주택영단이란?
1941년 일제가 주택 보급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선주택영단은 광복 후에도 그대로 존속되었다. 1948년에 대한주택영단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62년에는 대한주택공사가 되었다. 알고 보면 많은 것들이 일제강점기에 정립되었다가 광복후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참고자료
정아선, 최장순, 최찬환, 청량리 부흥주택의 특성 및 변화에 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제20권 1호(통권 183호), 2004년 3월












 


남산이 보이지 않는다면 어느 도시인지 알 수 없는 풍경. 해방촌은 1950년대 전쟁후의 도시구조를 보여주는 곳이다.





해방촌이라는 지명을 인식하게 된것은, 압구정동에서 남산으로 향하던 버스 안에서였다. 이태원의 왼쪽 어느 부분을 지날 때 버스 안에서 들리던 정류장 지명이었다. 신앙촌도 아니고, 해방촌. 이름이 참 희망차다. 산등성이에 손바닥만한 집들이 오글오글 들어찬 동네를 아름답게 불러 달동네라 하듯이, 해방촌이라는 동네도 그런 역설적인 지명같았다. 아직도 무언가로부터 해방되지 못한 곳인가 보다, 라고 생각했다.


그때 이후 이곳과는 인연이 없었다. 우연찮게라도 발걸음조차 하지 않은 거리였다. 한 때 내가 일 때문에 자주 들락거리던 H호텔을 가느라 남산 순환도로인 소월길을 달려갈 때, 그때 눈 앞에 펼쳐진 거리의 일부분이었던 게 인연이라면 인연이다.

나는 소월길을 따라 달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 거리에서 보이는 서울의 풍경은, 종로나 광화문, 강남, 신촌 등의 풍경과는 달랐으니까. 사람사는 동네같은 느낌이 들었다. 비뚤비뚤한 골목, 막 쌓아놓은 탑처럼 보이는 집들, 빼곡하게 들어차서 옆집에서 무슨 반찬을 먹는 지도 알것 같은 그런 집에 사는 사람들. 서울의 또다른 모습이었다. 곧 내가 내려서 취재를 해야 할 호텔은 최고급과 최신 트렌드, VVIP 서비스 등 일상 생활과 괴리된 것들로 가득차있지만, 그 틈에서도 숨쉴 수 있었던 것은 그 너머에 자리잡고 있는 살아있는 서울의 모습 때문이었다. 이런 곳도 있었구나,라고 들여다볼 수 있는 그 골목, 그 냄새, 그 집들의 실루엣 너머로 붉게 번지던 노을같은 것. 아래로 내려다볼수록 더 많은 것들이 켜켜이 숨겨지고 차곡차곡 채워진 그 거리들.

서울에 사람이 참 많다,라고 생각이 들었던 곳이다. 그 속에 내가 몸 누일 곳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도 그곳이다. 약간의 희망이, 실낱같은 웃음이 얼굴을 스치는 것은, 내 고향이 서울 그 어느 곳도 아니기 때문이었을 게다. 나는 그 촘촘한 집들, 빼곡한 골목들이 더 나와 가깝다는 생각을 했다. 좁은 창문 속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떤 대화를 할까, 가장 높은 층은 다락방일까? 어떤 젊은이가 도스토옙스키의 책을 읽지는 않을까? 이런 상상도 가끔은 했다.

그곳의 일부가 해방촌이었다. 




 


해방촌의 골목을 돌아보는 건축 답사를 다녀왔다. 해방촌의 정식지명은 용산2가동이다. 4대문 바깥에 위치한 용산은 후암동과 마찬가지로 일제시대에 일본인 거주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곳이다. 그 전까지는 모두 언덕배기 산비탈의 나대지였을 뿐이다. 용산에 일본 군영이 들어오고 (지금의 미군부대자리) 경성역이 세워지면서, 후암동과 용산 일대가 일본인 주택지로 개발되기 시작한다. 용산고등학교의 전신인 용산중학교가 세워져 일본인 군인 자제들이 이 학교를 다녔다. 남산에는 거대한 조선신궁이 세워지고 신궁으로 올라가는 길이 계단으로 정비되었다. 주변에 경성신사와 호국신사가 세워져 일본인촌다운 모양새를 만들어갔다.


해방촌은 호국신사가 있던 자리 주변이다. 당시에는 부촌과 군영 사이에 위치한 신사 지역이기 때문에 자연으로 둘러싸인 호젓한 장소였으며 이렇게 촘촘하게 집들이 들어차게 된것은 전쟁 후의 일이다.



해방촌은 광복 후 귀환한 사람들,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이 용산 일대에 자리잡게 되면서 생겨났다. 용산 일본군영 자리의 관사에 모여 살던 사람들이 미군부대가 이곳으로 들어오자 쫓겨나 남산의 남쪽 귀퉁이에 머물게 되면서 산비탈이었던 이 지역이 사람들이 빽빽하게 모여사는 마을로 바뀌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 후 서울에 몰려든 피난민들과 도시빈민들도 살곳을 찾아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해방촌은 핍박과 전쟁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찾아가자는 뜻깊은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몸을 누일 방이 필요한 도시빈민들이 일용직으로 하루하루 먹고 사는 삶이 이어졌다. 그 시절은 모두 가난했다. 누가 덜 가난하고 더 가난한가, 구별하는 것도 의미없었다. 언덕배기를 따라 켜켜이 좁디좁은 판자집들, 달동네집들이 늘어서게 되었다. 밤에는 집마다 뿜어내는 불빛들로 별처럼 반짝였을 듯하다. 그 불빛처럼 남루하고 가난한 전쟁 후의 살림살이가 이어져왔다.


깎아지른듯한 산비탈을 오가며 살았던 사람들. 소설가 강신재의 <해방촌 가는 길>에 당시의 분위기가 담겨있다. 주인공 기애는 불시에 떠났던 가족들에게 돌아오기로 결심하고 해방촌으로 향한다. 중산층의 신분으로 잘 살던 기애 가족들이 모든 것을 잃고 이곳으로 들어오던 날을 떠올린다.


"이 년 전, 그 중턱의 판잣집으로 이사를 오던 날 서글픈 감정을 서로 감추느라고 세 식구가 미묘한 고통을 겪은 일을 지금도 생생히 마음 속에 되사려 올렸다. 초라한 판잣집은 정말 너무도 형편이 없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가슴이 쩌릿하게 아파오도록 그것은 그냥 닭장이나 헛간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오랜만의 귀환 후 첫 밤을 보내고 눈을 뜬 그녀는 좌절한다.


"눈을 뜨니까 잡지책을 뜯어 바른 천장과 벽의 괴상스러운 얼룩이 시야에 들었다.... 이 방에 그득 차 있는 것은 가난 그것뿐이라 느껴졌다.기애는 눈을 감았다. 사굴욕적인 정상이었다. 사람이 사람에게보다는 동물에 가깝도록 궁핍에 인종하며 살고 있다는 것은 기애에게 부끄러운 일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머리맡을 바람결같이 연달아 지나가는 것이 있어서 그녀는 본능적으로 목을 움츠렸다. 눈을 뜨고 그것의 행방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커다랗고 시꺼먼 쥐들이었다."


가난과 굴욕. 하지만 삶을 위해서 그것을 견딜 수 있었으리라. 무엇보다 살아야했기에, 무엇이건 먹고 배우고 일하며 살아야 했던 그 암울한 나날. 해방촌은 그날을 증언하는 공간이다.


" 주위가 온통 안개에 두루 말려서 산등성이에 밀집해 산다는 감이 더한 것 같았다. 기애는 장씨의 고무신을 끌고, 문마다 뺴끔빼끔 내다보는 까만 눈들을 곁으로 흘리면서 총총히 들어앉은 판잣집 곁을 지나쳤다. 찔꺽찔꺽 미끄러지는, 본래는 층계처럼 깎이었던 모양인 황토 샛길을 기어오르니까 뭉클하고 풀향기가 몰려들었다. 꽃을 떨군 아카시아의 싱싱한 초록, 우거진 잡초. 치마와 다리를 폭삭 적시면서 함부로 쏘다녀보았다. 벌써 어스름 저녁때였다.


산록을 돌면서 곧장 뻗어온 넓은 길은 여기서는 실낱처럼 가늘어져 가지고 그대로 산허리를 감싸며 기어오르고 있었다. 해방촌의 주민들이 그 길을 따라 속속 돌아오고 있다. ...놀랍게도 빠른 걸음새로 미끄럽고 좁은 산길을 휙휙 지나간다. 그러면서 동행끼리는 열을 올려 사업 이야기, 장사 이야기를 한 것이다. 파고드는 듯한 눈길, 여자고 남자고 힘찬 걸음걸이. 거친 호흡. 똑같은 표정이 어느 몸에나 있었다.... 길 한편이 깎아지른 듯한 벼랑을 이루어, 까마득한 아래쪽에서 연기같이 안개가 피어오르고 또 더욱 멀리 펼쳐져 가라앉으면서 시가지의 지붕들이 내려다보였다."



사람들은 까마득한 산길을 오르내리며 장사하러, 공부하러 갔고 물을 길어 날랐다. 도시가 생겨나면 어쩔 수 없이 함께 발달하는 것이 슬럼가다. 도시의 빈민이 살면서 하부구조를 형성하는 것. 해방촌은 일감이 많은 서울역, 남대문시장 등과도 가까우며 도시와 일일생활권으로 오갈 수 있는 데다 아직 도시 개발이 되지 않은 지역이었다. 남산의 허리에 켜켜이 들어찬 집들, 사람들. 그들은 이곳에서 도시를 키웠다.


지금 해방촌에서 당시의 모습을 찾는 것은 어렵다. 재개발까지는 아니어도 많은 주택들이 보수를 거쳐 다세대 연립주택의 형태를 띠게 되었고 도로 역시 깨끗하게 정비되어 버스가 오간다. 당시의 기억을 가진 집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골목과 도로와 길에서 해방촌의 과거를 엿볼 수 있었다. 우리는 1920~30년대 정비된 도로와 깎아지른 산비탈을 가늠케하는 경사도의 도로들을 걸었다. 그 길 위에서 80년 전의 호국신사터와 60년 전 해방촌의 자리를 더듬어보는 게 전부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바뀌어있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계단은 호국신사로 올라가는 길목을 알려준다. 계단은 1930년대 말에 만들어진 것으로 호국신사로 통하는 계단이다. 호국 신사란 일본 건국의 신을 봉안한 신궁과 달리, 황국을 위해 죽어간 전쟁영웅들의 영혼을 기리는 곳이었다. 일본 야스쿠니 신사가 대표적인 호국신사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에는 중일 전쟁 후 경성과 나남에 호국신사가 세워졌다. 일본군영와 멀지 않으면서 남산의 조선신궁과도 인접한 장소인 용산에 호국신사가 세워졌다. 신사는 사라졌지만 길은 남아있다. 경성신궁은 계단까지 없애버렸지만 이곳은 계단조차 그대로 남아있다. 중앙 분리대 부분만 새로 고쳤을 뿐, 양쪽 계단은 옛날 그대로다.


당시의 기록을 보자.

불원에 경성, 나남에 호국신사를 창립.
간사회에서 원안작성

불원에 경성 및 나남에 창립될 호국신사의 조영에 관한 구체안을 심의할 고국신사봉찬회 제1회간사회는 30일 오전 10시부터 총독부 제 2회의실에서 개최, 간사장 대죽 내부국장 이하 각 간사, 총독부관계과장, 조선군십구, 이십양사단각부관, 육군어용괘 등 출석, 유생지방과장으로부터 총독부 원안을 설명하야 계획예산 및 부지 조영설게등에 대하야 협의를 하고 정오에 산회하엿다. 그리고 불원평의원회를 소집하고 원안을 부의결정한뒤 본격적게획수행에 착수할터이라 한다.
(동아일보 1939년 7월 1일)



 

호국신사건조비 일부 성열의 헌금모집

경성과 나남에 호국신사를 건조하기로 결정되었는데 오는 18일 조선호텔에서 봉찬회를 개최하기고 양지의 호국신사건조에 대한 구체적 협의를 하기로되었다. 이 호국신사의 건조비는 총액 백삼십만원으로 정하고 그중에서 이십만원은 국고에서 보조하려던 것을 다시 증액하야 삼십만원을 국고보조하기로 하엿으며 남어지 백만원은 일반기부로 거출하는데 관공서원, 민간, 학동 등에 각층각게급을 통하야 성열의 헌금을 모으기로 되었다.
(동아일보 1940년 7월 17일 )




 

 

 




신사 터 안쪽에서 찾아낸 공동주택들이다. 많지는 않으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듯한 집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정부에서 실시한 공동주택일 것이라는 설명이다. 나는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집 앞에서는 갈팡질팡하게 된다. 삐걱 문을 열고 그 속에 들어가 앉아보고 싶은 마음도 한켠에 있다. 집의 역사는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잘 알것이다. 하지만 문은 닫혀있고 모든 방이 소리없이 고요하다. 골목을 지나가는 사람도 보이지 않고 강아지나 고양이의 울음조차 들리지 않는다.


어느 집앞에 벤치가 놓여있다. 따뜻한 햇살이 잘 드는, 해바라기하기 좋은 자리다. 혹은 밤바람이 좋은 날,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어 이곳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라도 나누는 것일까? 과거 타임라인 어디에선가 뚝 잘라다가 끼워넣은 듯한 집들. 조용히 몇 컷의 사진을 찍는 것으로 타인의 삶을 엿보는 것을 멈추기로 했다.




 

 

 





해방촌 오거리에 있는 신흥시장. 신흥, 부흥이라는 명칭 또한 전후에 등장하는 표현이라고 한다. 신흥시장은 언뜻보면 오래된 동네 어디쯤에나 있을 법한 재래시장인데, 이곳이 특이한 점은 일렬로 늘어선 양쪽의 건물 사이를 메워 길다란 아케이드를 형성한 점이다. 내부를 들여다보면 주택으로 올라가는 계단, 집과 집의 틈새 등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내가 본 것은 해방촌의 전부도 아니고, 해방촌의 속살도 아니다. 나는 그 길을 걸었을 뿐이다. 1930년대에 만들어진 도로를 따라, 1960년대 사람들의 발길로 반질반질해진 흙길 위에 시멘트를 씌운 골목을 따라, 1980년대 옛길을 다시 정비한 도로를 따라 걸었을 뿐이다. 길, 골목, 도로 주변에 펼쳐진 삶의 모습이 내가 걷는 속도에 따라 점차 바뀐다. 세월의 흐름을 거슬러 볼 수 있는 흔적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오직 길, 그리고 길 위에 남겨진 명칭들뿐이다. 해방촌은 더이상 해방촌이 아닌 것이다. 



좀더 읽어볼 책

전후 해방촌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몇 편의 소설들을 소개한다. 구체화되지 않은 역사를 상상해볼 수 있는 연결고리를 문학이 채워준다.


이지민/ 나와 마릴린
<모던보이>의 작가 이지민이 전쟁과 그 후의 이야기를 썼다. 젊은 작가로서 쉽지 않은 주제를 선택하는 용기를 높이 산다.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시절이건만 쉽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는 점도 밝혀두고 싶다. 참고로 영화 모던보이와 소설 모던보이는 좀 많이 다르다. 나는 이 작가가 역사소설을 많이 써주면 좋겠다.

강신재 - 해방촌가는길
젊은 느티나무의 작가. 단편이다. 1920년대에 출생하여 역사의 굴곡을 지켜본 작가다. <해방촌 가는 길>은 전후 젊은 여자가 겪어야 했던 이야기다. 남자들이 죄다 죽거나 폐인이 되었을 때 어떻게든 살아야했던 강인한 여자들. 돈을 벌어야 했고 일을 해야했고 동생 공부를 시켜야했고 나이든 노모도 돌봐야했던 그래서 용산 미군부대를 출입할 수밖에 없었던 언니 누나들 이야기. 독일이 패망한 후 소련군을 맞이한 베를린의 처참한 상황을 그린 <베를린의 한 여인>이란 소설도 연결된다.


이범선- 오발탄
해방촌을 검색하면 가장 많이 걸리는 소설이 바로 오발탄. 전쟁이라는 거대한 사건에 휘말려 개인의 자존감조차 회복할 수 없는 존재의 나약함. 우리는 소설과 영화로 가상 전쟁을 경험하지만 실제와 다르단 것을 안다. 가장 전쟁은 끝이 있고 실제 전쟁은 끝을 짐작할 수 없다는 것.

박완서- 그 남자네 집
이 소설의 배경은 해방촌은 아니지만, 그 언저리에서 살아온 박완서 선생의 생각을 들어볼 수 있다. 전후 강인했던 여인과 나약했던 그 남자의 대립각이 흥미롭다.







 

 



노(老) 소설가의 집필실은 오래된 한옥이었다. 이미 소설가도 세상을 떠나고 없이 빈 집만 남은 셈이다. 다행히 완전히 빈 것은 아니다. 소설가의 딸이 손녀 내외가 자신의 삶을 부려놓은 채 이곳을 지키고 있으니까. 안채, 사랑채, 행랑채가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있는 고택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개량식 한옥이라 하겠지만 유려한 처마선과 연못가로 살짝 몸을 내밀어 'ㄷ'자 형태로 이루어진 사랑채는 소설가가 오랫동안 사랑한 곳다운 힘을 느끼게 했다. 소설가는 이곳을 주수루라 불렀다. 물을 낚는 곳. 낭만적이고 풍류가 가득하다. 

오랫동안 주수루의 주인이었던 소설가의 이름은 월탄 박종화 선생.



문학 전공자가 아니라해도 박종화 선생의 이름은 낯설지 않지만 대표작을 떠올리라고 하면 가물가물하다. 어디쯤엔가 고등학교 수업시간에 배운 것 같기도 한데, 근대 문학에 대해서라면 이육사의 청포도, 윤동주의 별헤는 밤, 김소월 진달래꽃, 이광수 무정, 김동인 감자, 김유정 봄봄, 채만식 탁류,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누가 썼더라, 화수분, 빈처, 그리고 이상의 오감도!...........간헐적이고 단편적인 기억들만 떠오른다. 민족주의냐, 아니냐, 라는 이분법으로, 모든 문학작품을 민족적인 슬픔과 한을 격하게, 반어적으로, 풍자적으로, 해학적으로, 자연주의기법으로, 사실주의기법으로... 이렇게 배웠던 것 같다.


1920년대 우리 문학에는 낭만주의, 퇴폐주의 문학 사조들이 등장했다. 1919년 3,1만세 운동이 좌절된 후 절망에 빠진 젊은 문학도들이 허무와 퇴폐를 언어로 쌓고 쌓았다. <백조>< 폐허>같은 시 동인지들이 이들의 중심에 있었다. 백조를 창간한 시인이 박종화다. 백조에는 홍사용, 현진건, 이상화, 나도향, 김기진, 이광수가 참여했다. 이광수만 30대였고 나머지는 모두 20대 초반의 젊고 뜨거운 청년들이었다. 그 시대에 시를 쓰기 위해 모여든 젊은이들이라니. 박종화는 시인이었다. 백조 창간호에 발표한 그의 시 '밀실로 돌아가다'의 한부분이다. 


"하늘엔 고요히 별이 흐른다
거짓같은 젊은 삶의 날은
끝없이 끝없이 별 위에 춤을 추는데 
아아, 나는 돌아가다
쓸쓸하고 고요한 
나릿한 만수향 냄새 떠도는
캄캄한 내 밀실로 돌아가다"



요즘에도 시가 부쩍 많아졌다. 출판물 중에도 시의 비중이 높아졌고 옛 시를 다시 읽고 추려읽고 해석하며 읽기를 권하는 수많은 책들이 있다. 사람들이 시를 좋아한다고 스스럼 없이 말하며 시 읽기를 권한다. 시는 그 짧고 간결한 문장 속에 시대를 반영한다. 시대에 바라는 게 많을 때, 시대가 격변할 때, 시대가 울분할 때, 시가 쓰여지고 읽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오랫동안 시인으로 기억하고 있던 박종화는 근대문학계에서 역사소설의 개척자로 불린다.


1930년대에 이르러 박종화는 허무와 결별하면서 시에서 소설로 방향을 바꾼다. 그것도 역사소설이다. 1935년부터 대한매일신보에 <금삼의 피>를 연재하면서 역사 속에서 주제를 취한 본격 대하 소설가로 자리잡는다. 금삼의 피는 폐비윤씨의 죽음의 비밀을 알게된 연산군이 폭정을 저지르는 역사의 한 장면을 소설로 옮긴 것이다. 1981년 80세로 별세할 때까지 삼국지, 임진왜란, 여인천하, 세종대왕, 홍경래 등의 선이 굵은 작품을 남겼다. 오랜 세월 오직 문인으로서 집필활동을 해온 노 작가의 필력. 그 필력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나이가 들수록 더 단단하고 깊은 글을 써내고 싶은 신출내기 작가의 눈에도. 



 



평창동 언저리에 갑작스레 등장한 한옥집이 바로 월탄 박종화 고택이다. 벽돌 담장 위로 처마를 둘러싼 물받이 홈통이 날렵한 선을 드러낸다.  단정하고 규모가 큰 저택들이 즐비한 거리에 한옥은 아무래도 눈에 띈다. 높이 솟은 건물은 아니지만 날렵한 처마가 손짓하는 것 같다. 자연스레 시선이 머문다. 박종화 고택은 등록문화재 제 89호로 등록되어 있다. 어엿한 문화재 건물이다.







건물의 모양새가 정갈하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담한 정원이 나오고 가장 먼저 사랑채가 보인다. 이 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선생이 늘 머물면서 집필하는 장소, 동료, 후배 문인들이 찾아와 담소하는 장소다. 문학의 산실이라는 장소를 글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유하고 싶어할 터. 오래된 향기까지 곱고 단정해보이는 집필실에 경외감이 느껴졌다. 장소의 힘은 이런 것이 아닐까. 누구라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것.

처음부터 평창동에 집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선생의 한옥은 종로구 충신동에 있었다. 1975년에 도시계획으로 허물어질 위기에 처했는데, 그때 다른 장소를 물색하던 선생이 결국 이 한옥과 정원수를 그대로 세검정으로 옮겨온 것이다. 이렇게 좋은 공간을 후대 사람들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준 선생의 용단이 참으로 감사하다.




박종화 선생은 서울에서 태어나 교육받고 글을 썼던 서울사람이다. 1901년 한성 남부 반석방 자암동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서소문인데, 그곳에서 12년간 살았다. 선생의 집에는 신지식과 어학을 가르치는 사숙이 있었는데, 이로인해 선생은 한학교육과 신식교육을 두루 접할 수 있었다. 휘문의숙에서 공부하며 시의 세계를 알게 되었고 1920년대 시문학을 이끄는 문인 중 하나가 된다. 하지만 1920년대 카프문학이 득세하면서 그는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역사 소설의 분야로 들어섰다. 1930년대 말부터 충신동의 한옥에서 거처하며 집필하게 되었으니 이 한옥은 역사소설가로서 선생의 면면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곳이 틀림없다. 그리고 40여년 동안 작가를 어루만져주고 품어주며 두꺼운 원고와 함께 씨름해온 따뜻하고 든든한 방이고 심장이다. 그 특별한 기운이 사랑채 안팎에 흐른다.


역사소설가답게 선생의 서재에는 조선왕조실록 고려대장경 등의 기록물이 가득했다고 한다. 이 두려울 정도로 진지한 기록물 앞에서 선생은 이런 말을 남겼다.

" 역사소설이라고 고증에 얽매여 단순한 기록에 떨어진다면 문학의 향기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명력을 넣어주어야지요." (1966년 5월 14일 경향신문 인터뷰 기사 중)

문학은 종교라는 신념을 갖고 살았다,는 선생의 말씀이 45년이 지난 지금에도 와닿는다. 문학이 종교라면, 그 문학을 품어주었던 이 집은 종교를 담는 그릇이었을 것이다. 경건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다정하지 않을 리가 없다.

이 집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경향신문의 옛날 기사를 발견했다. 이집이 왜 중요한지 선생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현대화에 밀려 사라지는 문화유산-  월탄의 고옥이 헐린다
경향신문 1975년 7월 3일 이조연기자



문화유산으로 길이 남기고 싶었던 월탄 박종화 시의 고옥(서울시 종로구 충신동 55의 5)이 헐린다. 월탄 문학의 산실이며 근대 한국문학의 태동지이기도 했던 이 유서깊은 한옥이 최근 동대문~이화동간 제1순환도로공사로 오는 6일까지 완전 철거케 됨으로써 문인들의 안타까움이 더하다.

대지 1백50평, 건평 70평의 이 집은 서울 옛 중인계급의 전형적인 가옥이라 해서 외국에 소개된 적도 있었고 해방직후 문인들이 모여 우리의 문학을 논하고 갖가지 문학협회를 창립, 발기시키기도 했떤 곳이다.

"아쉽고 서운한 마음이야 이를바 없지만 서울시의 시책이니 따를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이렇게 체념하다가도 문득 이 집이 며칠 후 아주 자취조차 없어지겠거니 생각하면 다시 서글퍼지곤 합니다."

주변집들을 헐어내는 해머소리가 소란한 중에도 집필을 계속하는 월탄의 70 노안이 흐려진다. 이 집은 한말 어영대장을 지낸 이봉의의 아들 이직제학이 지은 것으로 6간대청의 대들보에는 단군기원 사천이백육십팔년 을해구월십필십팔일이라고 적혀있다. 그러니까, 꼭 40년전 이직제학이 가정집으로 지은것을 월탄이 매입했던 것으로 "문명을 등지고 한걸음 자연의 품으로 나온것"(월탄의 수필 낙산월에서)이 또다시 근대화에 밀려나게 된 것이다.

낡은 나무 대문을 들어서면 작은 정원이 있고 정원 가운데로 'ㄱ'자형으로 지어진 본채는 기와, 마루, 난간, 방구들 등이 조금도 변형되거나 훼손됨이 없이 옛적 그대로의 모습이다. 이 본채의 동쪽 끝편에 낮은 돌담장이 가려져있고 그 건너가 사랑채 겸 월탄의 집필실로 쓰이고 있는 '조수루' .
조수루(釣水樓)라고도 쓰고 조수루( 棗樹樓)라고도 쓰는 이 마루방의 이름은 두뜰에 연못이 있고 앞뜰에 대추나무가 있어 월탄이 붙인 것. 방밑까지 파고든 연못에는 40년 전부터 길러왔다는 커다란 붉은 잉어들이 아직도 40여 마리나 노닐고 있고, 앞뜰의 대추나무는 월탄이 해방기념으로 심어 가꾼 것으로 6~7m로 자라 온 집안을 녹음으로 감싸주고 있다. 이 집의 기풍이자 월탄이 가장 아껴온 것들이기도 하다.

월탄은 이 방에서 <금삼의 피> <대춘부> <다정불심> <임진왜란> <여명> <홍경래> <신록> <여인천하> <가고가는 저 구름아> 등 주옥같은 수많은 작품들을 써왔던 것. 또 이 집은 이런 그윽한 정취 때문에 월탄 혼자서 독차지할 수만은 없었고 항상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었던 곳이기도 하다.

해방전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 같은 신문학의 선구자를 비롯, 해방 직후 수많은 젊은 문인들이 이곳에 모여 협회를 조직하고 밤새워 문학을 논의하기도 했다. 해방직후 김동리 서정주 조지훈 박목월 같은 문인들이 문총의 전신인 전조선문학가협회를 만든 곳도 이곳이고 예총의 전신 전국문화단체 총연합회나 전조선문필가협회 등이 창립된 곳도 바로 이 대추나무 밑이거나 연못주변이었다.

당시 문학 연극 미술 혹은 언론계인사들이 이 집을 드나들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 중에서도 특히 술을 즐겼던 변영로 염상섭 이하윤 등은 이 집에서 살다시피했고 가람 이병기나 화가인 춘곡 고희동  언론계의 우승규 조용만 홍종인 씨등도 자주 드나드는 편이었다.

"사람들이 모이면 항상 술판이 벌어졌지요. 대추나무 밑에서 술들을 마시면 의례 난간으로 올라와 연못에다 실례를 하던 일들도 생각납니다. 또 우리집사람이 담가내온 동동주는 아주 인기가 높아 하룻밤에도 몇 동이씩 바닥이 나기도 했읍니다. 이런 일도 있었죠. 어느 해 섣달 느금날 밤인데 모두들 내 방에 모여 밤새 술을 마신 후 다음날인 정월 초하루 아침에 집에들 가려고 보니 벗어놓았던 구두들이 몽땅 없어졌읍니다. 도둑이 든거죠. 할 수 없이 짚신 한 켤레씩을 사다가 나누어준 일도 있었읍니다."
 
월탄은 지난 날들이 즐거운 듯 대추나무 밑에서 회상했다


이 집은 6,25 때도 그대로 남을 수 있었다. 남로당 요인과 좌익계 문인들이 소위 문학가동맹이라는 것을 이 집에서 조직, 그들이 점거하고 있엇기때문에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 월탄은 수복이 되고 이 집을 찾았을 떄 서남쪽 추녀 끝이 포격에 조금 파괴돼을 뿐 모두 그대로였고 연못 속의 금잉어까지 살아남은 것을 보고 무척 기뻤다고 했다

그러나 이집도 이제 현대문명 속의 낡고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사라지게 됐다. 연전에는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 고고학자들이 김원룡 박사(서울대박물관장)의 안내로 이 집을 찾아 이곳저곳을 찰영한 뒤 '전형적인 한국옛집'으로 소개되기도 했고 자유당 시절 공보부에서는 세계 각처에 '한국의집'을 건립하면서 이 집을 모델로 택하기도 했다. 가구며 액자, 집기, 장식들도 수많은 문인들이 가꾸고 드나들던 고옥답게 귀한 것들. 추사의 휘호며 파리평화회담 장소의 거울방을 본떠 옛날거울들로 장식된 벽면 등 모두 영구히 보존하고 싶은 값진 유물들이다.

"물론 이런 장식이나 대들보 등 몇 개의 뜻있는장식들을 옮겨갈 작정이지만 저 연못이 메워지고 대추나무가 뽑혀 문인들의 숨결마저 없어질 것을 생각하니 정말 커다란 재난을 당하는 것 같습니다."

집을 구하러 며칠을 쏘다녔다는 월탄 부부는 당분간 큰아들집(서울마포구서교동 465의8)에서 방문객을 접대하겠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월탄의 아쉼움은 하나둘씩 사라지는 문화유산을 길이 보존하고 싶은 겨레의 뜻이기도 하다.











살림집인 안채가 바로 이어져 있다. 부엌은 뒤쪽에 있는 모양이다. 선생의 손녀 내외분이 살고 있는 곳이라 내부까지 들여다보지 못했다. 안채의 한쪽 벽은 꽃 무늬 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약간의 변화가 참 유쾌하다. 처음부터 타일 장식이 있었던 것인지 후대에 새로 덧대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덧대어진 것이라 해도 전체적인 분위기를 흐리지 않고 오히려 안채다운 여성미가 느껴진다. 사랑채에서 자신의 스타일을 마음껏 드러냈다면 안채에서는 멋스런 지붕선을 살리되 전체적인 분위기는 절제되어있다.



 

안채 뒤쪽에는 행랑채가 나온다. 옛날이라면 식모나 일거드는 사람이 살았을 것이다. 행랑채도 안채처럼 단정하고 정갈하다. 집이 이러하다면 사는 사람의 모습도 이러할 것이다. 집은 삶을 담는 그릇이라고 하지 않던가.




월탄 박종화 고택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 281-1번지
-등록문화재 제89호






 

 





솔, 도라지, 장미, 88, 거북선. 이들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까요?
이들 모두 담배 이름입니다. 어렸을 적에 아버지와 친척 어른들이 태우시던 담배들이죠. 왠지 옛날 생각이 듭니다. 그땐 금지된 물건, 어른들만 사용하는 물건이었으니까요. "솔 한갑 주세요."하며 담배 심부름도 했던 기억도 불쑥 떠오르네요. 요즘은 이러면 큰일나겠죠. 위의 사진을 보니 한라산, 청자. 이런 담배도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청자는 시골 외할머니가 태우시던 것이고, 아버진 솔을 좋아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금연이 대세인 요즘이라, 담배산업도 예전만 못하겠다 싶습니다. 저는 담배를 피우지는 않지만, 담배공장 돌아보는 것은 좋아라 합니다. 오늘은 담배공장 다녀온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름하여 연초제조창!




청주 연초제조창의 초창기 모습. 현재의 건물이 세워지기 전에 다른 형태의 공장 건물이 있었나 봅니다.







연초제조창은 담배 원료를 가공하여 완성된 담배 제품을 만들어내는 공장입니다. 우리에게는 좀 낯선 이름이지만 어른들은 아마도 이 장소가 많이 친숙할 겁니다. 어쩌다 보니 다른 공장보다는 담배공장을 돌아볼 기회가 많았는데요. 대구와 청주, 제천 등지에 있는 연초제조창과 창고, 엽연초수납시설물, 그리고 엽연초 조합 사무실 등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대구와 청주 지역의 연초제조창이 도시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거대한 산업시설물 단지라는 점입니다. 건물을 몽땅 허물기에는 규모가 너무나 크고 활용하자니 그에 대한 제약도 크고 해서 방치된 상태죠. 이들 장소가 과연 어떻게 바뀌어 도시의 색깔을 만들어가는 데 일조할까, 그것을 유심히 지켜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청주 연초제조창의 메인 건물인 원료가공공장의 측면입니다. 규모가, 만만치 않습니다. 거대한 건물 구경할 생각에 가슴이 두근두근. 저 안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청주연초제조창은 1946년에 설립되었으며 현대적인 공장시설은 1953년부터 가동되었습니다. 그후  연간 100억 개비 이상의 담배를 생산하면서 청주를 비롯한 충북 지역 산업의 중추 역할을 해왔습니다. 총 대지면적은 122,407m2이며 공장과 창고, 부속시설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서있었죠. 청주 연초제조창은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담배공장 시설이며 3천 명 이상, 많을 때는 1만 명의 근로자들이 일했다고 합니다.

2009년 가을에 충북의 농촌에 사시는 분들을 정기적으로 만나뵐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에도 담배농사 이야기를 해주신 분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이런 분들이 농사지은 담뱃잎을 엽연초 수납시설에서 평가하고 매입한 후 거대한 통에 어느 정도 숙성을 시키죠. 그 후 보관되어 있던 엽연초들을 각 지역의 연초제조창으로 보내서 잘게 부수고 종이로 말고 자르고 패키징하여 담배 상품으로 제조하게 되는 겁니다.

청주 연초제조창은 1999년에 공장이 운영을 중단했고 2004년에 완전히 문을 닫았습니다. 공장건물 중 가장 뒤에 있는 1자형 공장은 청주문화산업단지로 바뀌어 어린이 교육시설과 문화시설 들이 입주해 있는 상황이었지만, 규모가 가장 큰 원료가공공장과 원료 창고는 7년여를 잠들어있었던 셈입니다. 창고 중 가장 가장자리에 있는 창고시설은 임대되어 활용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이 지역은 고즈넉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지요. 청주 수암골 등지에서 촬된 <제빵왕 김탁구>라는 드라마가 히트한 후에, 동부창고에 부분적으로 드라마 세트장을 설치하여 김탁구 전시장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 최근의 일입니다. 한때 이 지역은 공장과 창고를 모두 허물고 대규모 아파트단지를 개발하는 계획이 제시되기도 했지만 여의치 않아 무산되었던 전력이 있지요. 어쨋건 공장과 창고는 남아있었고, 창고지역은 예술가들이 작품을 전시하고 영감을 얻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2년에 한번씩 열리는 청주 공예 비엔날레를 옛 연초제조창에서 개최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잠들어있던 건물이 좋은 쓰임으로 활용된다는 이야기에 청주에 얼른 달려갔습니다. 공예 작품전도 볼 겸, 예전에 미처 들어가보지 못했던 공장과 창고 건물 내부도 구경할 겸 더없이 반가운 기회였습니다. 원체 내부 공간이 널찍하고 공장 건물 자체에 특별한 내부 장식이 없다보니 전시장으로 사용하는데 아주 적절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품의 수도 많았지만 공간 자체가 넓어서 쾌적하게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내부는 부분적으로 전시를 위해 손질하기는 했지만 10여년 전까지는 가동영되던 장소다 보니 많이 낡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습니다. 층고는 높고 공간은 넓고 광원은 적절했습니다.

과연 이 곳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궁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한켠에 연초제조창의 역사를 보여주는 간단한 전시공간이 있어서 더없이 반가웠습니다. 도면을 참고하면서 연초제조창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간단하게 살펴보고 각 시설물을 둘러볼까 합니다.  









연초제조창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공간에서 촬영한 도면에 현재 남아있는 건물을 포토샵으로 색깔을 입혀보았습니다. 네이버 위성지도와 크로스 체크해보았더니 원래의 건물이 많이 사라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전시장에서 발견한 이 도면이 연도가 적혀있지 않았지만 연초제조창이 가장 규모가 탄탄했을 때가 아닐까 추측해보았습니다. 푸른색 건물이 전시가 진행중인 원료가공공장이고( 지도에 한글로 멋스럽게 적혀있습니다.) 뒤에 있는 분홍색 건물이 청주문화산업단지로 리노베이션된 건물입니다. 두 공장 사이에 공장이 1동 더 있었던가봅니다. 아랫쪽 연두색 건물이 동부창고입니다. 주황색 건물은 그 외 남아있는 건물입니다. 그럼 들어가볼까요?






1. 연초제조창 가공 공장 - 공예비엔날레 전시장





정면에서 본 연초제조창의 모습입니다. 주말이라 가족 나들이객이 많이 보이네요. 전시 공간도 좋지만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소가 되어서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원료공장은 'ㄱ'자 형태입니다. 규모는 5층이지만 층고가 높아 육중하고 거대합니다. 우측 옥상에는 거대한 환풍기 시설이 보이네요. 대구 연초제조창에서도 보았던 것이라 조금 반가운 마음도 드네요. 문닫은 지 오래된 공장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즐거운 분위기였습니다. 연초제조창을 예술문화공간으로 바꾸자는 여러 요청에 따라 '아트팩토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식당이랑 편의시설이 들어와 있는 건물입니다. 예전에도 식당으로 쓰지 않았을까요? 모던하면서도 단정한 콘크리트 건물이 인상적입니다. 한때 이런 건물들이 참 많았죠.


 




전시장 내부의 모습입니다. 깊은 공간감과 콘크리트의 회색빛이 차분하게 다가옵니다. 쪽쪽 뻗은 기둥들도 전시물에 크게 방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공간이 넓었기 때문이지요. 전시공간들 잘 살펴보면 부분적으로 옛 공장 시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환기통이라던가, 작업대가 있었던 자리라던가, 이런 흔적들을 엿보는 것도 오래된 건물을 들여다보는 재미라고 할 수 있지요. 공장이라는 산업화된 상품을 생산하는 곳에서 공예와 예술이라는 손맛나는 물건들을 만나보는 것. 그것이 공예 비엔날레를 아트 팩토리에서 개최하게 된 배경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공장이 가동될 당시에는 이런 모습이었겠지요. 당시에는 창문도 참 많았네요. 공장의 기계보다 사람의 일손이 더 많았던 시기였나 봅니다. 사진은 연초제조창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실에서 촬영한 것입니다. 몇 년도 사진인지 확인할 수 없어서 좀 아쉽습니다.







계단실 주변의 복도 공간입니다. 높고 깊으며 빛과 어둠이 적절히 있는 공간. 이런 미니멀한 분위기 때문에 산업시설물에서도 미학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겠지요?







전시관 중 유일하게 촬영이 허락된 장소. 이곳이 연초제조창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실입니다. 3 층 전시를 보고 외부계단으로 내려와 2층 전시로 옮겨가기 전에 만나게 되는 매개공간에 이 전시물들이 있는데, 저는 이곳에서 무척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예전에 이곳에서 일했던 근로자들이 갖고 있던 소중한 자료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사진, 도면, 노트도 있었고 담배 관련 전시물들도 많았습니다.








1920년대부터 최근까지 담배패키지. 담배에는 유난히 꽃과 식물의 이름이 많이 쓰였군요. 목련, 진달래, 라일락, 도라지. 그 외에도 1920년대의 아르누보 풍 패키지에 아리따운 여성이 그려진 것도 있습니다. 이 담배는 여성 애연가를 겨냥한 것인가 봅니다. 또한 일제강점기 일본 육군의 욱일승천기가 인쇄된 패키지도 있군요. 담배 패키지에도 역사적인 의미와 흔적이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담배와 관련된 에피소드들.
 이곳에서 먹고 살고 이곳에서 번 돈으로 아이들을 키웠던 사람들을 들여다 봅니다. 군사정권과 혼란한 시국의 모습도 겹쳐집니다. 담배를 많이 피워야 했던 시절이었겠지요. 고되기도 했고 행복하기도 했고 사랑도 했고 죽을 듯 힘들다가도 결국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들여다 봅니다. 표창장, 직업연수확인증, 체육대회, 교련과 예비군 훈련 등등. 그땐 그랬던가 봅니다. 우리 부모님들의 모습 아닐까요?


담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상물이 중간쯤에 상영됩니다. 담배공장과 엽연초 시설을 둘러보면서 느꼈던 궁금함들이 다큐를 보다보니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습니다.
 



 


촬영할 때는 오래된 벽만 보고 좋아했는데, 그 옆에 노란 꽃 화분이 놓여있었네요. 미처 몰라주어 미안한 풍경이로군요.









옛 근로자의 아드님이 기증한 공장 기계 도면입니다
. 노란 기름종이에 손으로 직접 잉킹한 원본 도면이더군요. 소중한 자료이니 훼손되지 않도록 잘 보관했으면 좋겠습니다. 주요한 도면은 화첩 형식으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세밀한 선과 정교한 글씨. 지금은 컴퓨터가 하는 일을 그때는 모두 손으로 했던 거죠. 한땀 한땀의 장인정신도 그 당시에는 당연한 것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많이 잊어버린 풍경이지만요. 당시의 근로자들은 모두 예술가고 장인들이죠. 저는 이 도면이야말로 장인이 이룩한 공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공장- 청주문화산업단지





보라색으로 칠해진 문화산업단지의 외부 모습입니다. 내 외부가 모두 깨끗하게 리노베이션되어 오래된 건물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3. 동부창고







예술가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탐내볼 만한 동부 창고를 돌아보려고 합니다. 크게 4동이 남아있는데, 과거에는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각 동마다 창고가 두 개 이상으로 나뉘어집니다. 저는 8호 창고에 들어가보았습니다. 이곳에는 청주, 대구, 부산, 안양, 광주, 대전 등지의 미술 대안공간들이 모여 자신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보여주는 전시를 마련했습니다. <도큐멘타 2011>이라는 전시인데, 방문했던 날은 전시가 끝나고 철거가 시작될 즈음이었습니다. 현지 예술가분의 도움을 받아 창고 내부를 들어가볼 수 있었습니다. 또 못볼 뻔했는데, 다행이었죠.








장 스팬 트러스가 거대하게 천장을 받치고 있습니다. 장방형의 단순한 공간이지만 기능적으로 완성된 목재 트러스의 장중하고 엄숙한 구조미가 결합되니 더없이 감성적인 공간이 되었습니다. 기둥 하나 없이 오로지 트러스로 마감된 단순한 공간. 19세기 영국의 미술 평론가인 존 러스킨은 폐허에서 느끼는 멜랑콜리에 대해 쓴 적이 있는데, 예술가들은 이곳에서 과연 어떤 영감을 얻게 될까요?

창고 건물 역시 규모가 만만치가 않습니다. 대도시 갤러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군요. 전시에 참여한 대안공간은 그음공간(가평) 스페이스 배(부산), 스톤앤워터(안양), 매개공간미나리(광주) 스페이스SSEE(대전) 예술상회(청주), 작은공간이소(대구) 재미난 복수(부산) 하이브캠프(청주)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청주)입니다. 이름도 뜻도 재미있을 것 같은 그런 단체들이군요.

얄팍한 생각이긴 하지만 이렇게 넓은 공간을 보니 제가 좋아하는 미술가들의 작품을 이곳에서 전시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쉬 카푸어의 육중한 개념 설치작품, 서도호의 세밀하고도 거대한 설치 조형물, 올라퍼 엘리아슨의 건축미가 넘치는 설치작품과 키네틱 아트를 이곳에서 본다면 참 좋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제프 쿤스가 베르사유 궁전에 설치했던 풍선 강아지도 떠오르는군요.  대단한 작가들이 정말 대단한 작품들을 우리나라에서 보기란 쉽지 않겠지만, 그냥 한번 상상해봅니다. 또한 우리나라의 젊은 예술가들이 그림으로, 사진으로, 조각으로, 대형 영상물이나 음악 공연으로 공간을 채워준다면 그것 또한 얼마나 멋진 일일까요? 버려진 공간이 예술을 뒷받침해주는 멋진 상호작용을 기대해봅니다.







 





창고의 일부분은 지역 업체가 임대하여 사용하고 있고, 또 부분적으로 김탁구 전시장으로 활용됩니다. 전시장 내부는 들여다보지 않았지만 마지막 창고에 청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인 서문제과의 빵과 우동을 맛볼 수 있습니다. 우동과 빵을 함께 먹는 재미난 풍경이 벌어졌지만 독특한 면발의 우동, 쫄깃하고 담백한 단팥빵은 역시 오래된 빵집다운 포스를 보이더군요. 가격도 저렴하고 빵도 맛있으니 한번쯤 경험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새롭게 활용중인 연초제조창의 희망적인 모습도 보고 두툼한 빵봉지도 들고 나오는 길. 집에 돌아가는 길이 뿌듯하게 느껴집니다.



청주 공예 비엔날레

일정- 2011. 9.21~10.30
주제- 유용지물
입장료- 3000원~10000원
위치- 충북 청주시 상당구 상당로 314번지(내덕2동 201-1)
문의 -
www.cheongjubiennale.or.kr / 043-277-2501~2

 








새건협(새건축사협의회 www.kai2002.org)에서 매달 서울의 골목을 돌아보는 답사 프로그램이 있어서 얼른 신청하고 다녀왔습니다. 개화기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시대별로 살펴보면서 도시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직접 들여다보는 답사입니다. 9월은 1930년대의 일본인 주거지였던 후암동과 갈월동 일대를 돌아보았습니다.





후암동은 남산 순환도로를 가기 위해 슬쩍 거쳐갔던 동네 정도로 알고 있었고, 갈월동 역시 제 생활 반경에서 멀리 있는 탓에 이름만 들어본 동네 정도였습니다. 잘 모르는 곳이죠. 골목과 언덕, 옛 집과 요즘 집, 재래시장과 100년 전에 만들어진 도로 등이 혼재해있어서 돌아보는 내내 흥미진진했습니다. 멀리서 보이는 남산서울타워만 안보인다면 과연 이곳이 서울일까? 의심을 가질 만한 풍경들을 많이 만났는데요. 



이곳이 오래되고 낙후된 동네구나, 라는 의미가 아니라, 군산, 강경, 나주, 대구 등지에서 보았던 일제강점기 시대의 거리의 풍경이 서울 한복판에서도 슬쩍 겹쳐지고 뚜렷하게 남아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후암동에서 발견한 다양한 형태의 건물들- 일본식 주택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건축물은 시대별로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디자인의 측면에서도 달라질 수 있고, 시공이나 재료의 측면에서도 새로운 것들이 개발되면서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사회구조나 문화가 달라지면서 건축의 형태가 변하는 일도 많지요.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전통적인 한옥은 개량한옥으로 바뀌었고, 서양식 주택, 일식주택, 문화주택 등등 다양하게 변화된 주택들이 서울을 채워갑니다. 한옥은 한인 사회의 주거로 계속 남아있지만 남대문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던 일본인 주거지에는 한옥과는 다른 일본식 주택, 개량식 주택이 등장했습니다. 





1925년에 세워진 경성역과 남산 조선신궁, 그리고 남쪽으로는 일본군영으로 둘러싼 지역이 답사로 돌아보았던 후암동, 갈월동 일대입니다. 이 동네의 중심이 되는 도로인 삼판통은 1904년 러일전쟁 이후에 생겨났는데 지금까지 남아있고, 이 도로를 중심으로 양쪽 언덕배기에 1920년대부터 일본인들의 주거지가 형성되었습니다.



특히 조선은행 사택이 이 지역에 있었는데, 최신 콘크리트 공법을 활용한 대규모 주택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당시 삼판소학교와 용산중학교 등 일본인 학생들을 위한 학교도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일본인 거주지는 향후 한남동, 청파동으로 이어졌으며, 강 건너 일본 민간업자들이 개발한 흑석동, 주택 영단등이 대규모로 개발했던 상도동, 대방동 등지까지 확대되어 영등포 지역으로 이어집니다.
이때 한인 거주지는 종로를 따라 동대문 바깥으로 계속 이어졌는데요. 일인과 한인의 거주지가 분리되면서 종로 북쪽 지역에는 한옥형 주택이 많고, 남쪽지역에는 개량형 주택이 많이 남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주택은 어떤 유형이 있는 지 알아볼까요?

1. 양식 주택- 2층의 벽돌 구조로 지어진 서양식 구조의 주택. 접객공간인 홀, 응접실, 식당, 오락실 등이 1층에 있고 침실이나 서재 등 사적 공간은 2층에 두었다. 내부 복도가 있는 겹집 형식을 가졌으며, 내부와 외부공간의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는 베란다, 벽난로나 라디에이터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개화기에 인천에 지어진 다수의 서양인 주택을 비롯하여 서울에는 옥인동 윤덕영 별장, 운현궁 양관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2. 한양 절충식 주택- 선교사들이 짓고 살았던 주택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 양식. 벽돌조의 서양식 내부공간과 한식 목구조 지붕과 기와, 온돌 등 전통식 방법이 절충된 주택이다. 대구 선교사 주택, 청주 선교사 주택 등.

3. 일본식 주택- 다다미가 깔린 방과 부엌, 욕실, 화장실로 구성되어 있다. 일본 본토에서 수입된 전통 일본식 가옥과 중복도를 놓고 접객공간을 주요하게 배치하며, 서양식 혹은 한옥의 요소를 빌어온 개량식 일본 가옥으로 나뉘어진다.

4. 개량 한옥(근대한옥)-전통적인 한옥과 달리 서양식 응접실이나 주방 등이 내부에서 연결되어 불편함을 줄인 형태. 사랑채와 건넌방이 복도로 연결되기도 하고, 욕실 변소 등이 내부에 설치되는 등 기존 한옥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현관이 등장하고 유리문이 사용되었다. 1930년대부터 60년대까지 한옥을 개량한 도시형 한옥도 등장했다.


5. 문화주택- 1920년대에 접객 위주의 생활에서 벗어나 가족의 생활을 중심으로 주거 공간을 형성하고, 좌식생활에서 입식생활로 전환하는 등 가족의 문화를 담는 형태로서 주택을 새롭게 정비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그 결과 서구적 외관의 2층 구조의 벽돌조, 수도설비와 온돌 등 시스템이 가미된 주택이 등장했다. 집을 지을 때 건축가가 주요 등장인물로 거론된 것도 이때부터다.


6. 공동주택-1930년대 후반, 병참기지화 정책 이후 도시로 대거 인구가 유입되어 주택 부족현상이 심화된다. 조선주택영단이 설립되어 대규모 단지를 개발하여 평형과 타입별로 정형화한 연립주택을 설치했다. 상도동, 문래동, 번대방동 등에 이러한 연립주택이 등장.








 

 



 

 




후암동을 돌아보면서 숨이 가빴습니다. 1920년대부터 역사의 굴곡진 면을 모두 간직한 듯, 다양한 시점과 사건을 반영한 건축물들은 연대를 따지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다채로운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도시가 생명을 가진 유기체처럼 활동한다는 것은 이런 것을 뜻하는 것이겠지요? 몇 십년 전에서 성장을 멈춘 것처럼 보이는 동네 풍경이지만 필요할 때마다 덧붙이고 새로 만들고 바꾸어 온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삶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도시는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이죠. 그 속에 사는 개개인이 자신의 뜻대로 만들어온 풍경의 총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는 몇 가지 1930년이라는 시간을 읽을 수 있는 몇 가지 단서를 발견했을 뿐입니다. 이곳은 온갖 시간대의 온갖 사건들이 만들어낸 온갖 풍경의 집합체. 그것이었습니다.



1920년대 초반 삼판동에 세워졌던 조선은행 사택 중 한채입니다. 콘크리트 구조의 건축물은 30년대에 활발하게 건축되었는데, 10년이나 일찍 신공법으로 세련되게 지어진 2층 건물이었죠.









복잡한 시간의 층위를 들락날락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깜짝감짝 놀랄 지경이었습니다.

지금이 아닌 먼 곳, 다른 시간대로 여행을 다녀온 듯, 나의 발걸음은 허공에 있었나봅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는 용산중학교 학생들과 시장보러 나온 동네 주민들과 길을 잃고 헤매는 답사팀이 한 덩어리가 되어 길을 따라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1930년대는 일본군영이 있었던, 그리고 지금은 미군이 차지하고 있는 용산의 언저리를 돌아나와 답사를 시작했던 서울역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길 위에서 살고 있는 것이죠. 답사를 지도하신 안창모 교수님의 말씀대로, 건축물은 그 흔적이 사라지거나 변하면서 이야기해줄 수 있는 부분이 줄어들 수 있지만, 길이란 것, 골목이란 것은, 오히려 그 어떤 것보다도 오래 남아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길, 도로, 골목은, 바로 몇 해 전에 도로계획으로 뻥 뚫어진 것일 수도 있지만, 도시가 급속도로 발전하던 100년 전에 만들어진 것도 있고, 조선시대 600년을 걸쳐 남아있는 것도 있습니다. 길을 따라 사람들의 삶이 이어집니다.


문득 길고긴 역사가 흘러가는 길 속에 내가 오도카니 서 있는 모습이 뚜렷해집니다. 내 삶도, 당신의 삶도, 도시 속의 길 그곳에 엮여 있는 까닭이겠지요. 우리도 그 길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뜻하겠지요.








더 읽어볼 책>


식민지 시대 경성의 변화과정과 계획은 <지배와 공간-식민지 도시 경성과 제국 일본/김백영/ 문학과 지성사>에 잘 나와있지만,
다소 볼륨이 부담된다. 가볍게 손에 쥐고 읽을 수 있는 책으로는 살림지식총서로 나온 <서울은 어떻게 계획되었는가/염복규/살림>도 있다.
근현대 주택을 유형별로 살펴볼 수 있는 책은 <한국의 주택, 그 유형과 변천사/임창복 / 돌배개>다. 근대사에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으며, 개인이 살고 있는 주택이기 때문에 내부를 관람할 수 없는 문화재 건축물들을 도면, 사진 등 사례별로 살펴볼 수 있다. 유형에는 속하지 않으나 도시 경성의 하층을 형성하던 주택형태로 토막집이 있다. 판자집의 식민지 버전이라 할 수 있다. 토막집, 문화주택의 허와 실 등 경성 주택문화의 이면을 볼 수 있는 책으로는 <경성리포트/ 예지숙, 최병택 / 시공사>가 있다.  








철암 탄광 지역도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이 될 수 있을까?





올해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서 관광객이 엄청나게 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지난 여름에 양동마을에 잠시 다녀왔는데, 이런 곳이 여태 남아있었나 싶을 정도로 색다르고 흥미로운 전통마을이었습니다. 물론,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인정받기 위해 새롭게 정비하는 등 많은 노력이 바탕이 되었지요. 창덕궁, 종묘, 수원화성, 조선왕릉, 경주 역사지구 등 우리 역사를 면면히 살펴볼 수 있는 문화유산들이 이미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기 위해서는 아래의 열 가지 기준에 대해 합당한 근거를 제시해야 합니다. 이것은 1972년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협약으로 규정된 내용인데요.

<문화유산 해당항목>

첫째,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둘째,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할 것.

셋째,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넷째,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다섯째,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 혹은 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일 것.

여섯째,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자연유산 해당항목>
일곱째, 최상의 자연 현상이나 뛰어난 자연미와 미학적 중요성을 지닌 지역을 포함할 것

여덟째, 생명의 기록이나, 지형 발전상의 지질학적 주요 진행과정, 지형학이나 자연지리학적 측면의 중요 특징을 포함해 지구 역사상 주요단계를 입증하는 대표적 사례

아홉째, 육상, 민물, 해안 및 해양 생태계와 동·식물 군락의 진화 및 발전에 있어 생태학적, 생물학적 주요 진행 과정을 입증하는 대표적 사례일 것

열째, 과학이나 보존 관점에서 볼 때 보편적 가치가 탁월하고 현재 멸종 위기에 처한 종을 포함한 생물학적 다양성의 현장 보존을 위해 가장 중요하고 의미가 큰 자연 서식지를 포괄할 것.


참고- 유네스코 세계 유산 (한국의 유네스코 유산) 홈페이지 http://www.unesco.or.kr/heritage/



종묘의 경우, 세번째 항목에 해당하는 유적이고, 석굴암과 불국사는 첫번째 항목과 네번째 항목을 만족시키는 유적입니다. 유적의 특성에 따라 폐사지처럼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 폐허도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을 수가 있는데, 이렇듯, 각기 유산들의 근거를 찾아내어 문화유산의 가치를 분명하게 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경주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이죠.

양동마을과 하회마을도 목록에 추가되었습니다.





문화유산 외에도 기록유산, 자연유산 등의 파트가 있습니다.
합천 해인사 장경각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이 세계 기록유산으로 선정되어 있고,  제주도 화산섬과 용암동굴이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 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지요.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지역도 문화유산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렇듯 새로운 관점에서 문화유산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이를 면밀하게 보호, 관리할 수 있는 체계가 마련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해인사의 장경각. 천년을 바라보는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세계문화유산을 보전하는 국제 전문가 NGO이자 유네스코의 주요 자문위원인 이코모스(ICOMOS)에서 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데, 한국 위원회도 마땅히 마련되어 있습니다. 역사, 전통문화, 고고학, 지질학 등 다양한 분야의 대표 학자들이 이 연구회의 주요 인원입니다.


세계 문화 유산 잠정 목록의 발굴을 위한 포럼 현장




이코모스 코리아에서 <한국의 세계 유산 잠정 목록의 발굴>이라는 포럼이 열려서 지난 9월 8일에 다녀왔습니다.

과연 어떤 지역의 어떤 문화재가 그 물망에 올라와 있는지 궁금했기도 하거니와 이번 포럼에서는 근대문화유산에 대해서도 열려 있다 하여 어떤 관점으로 접근하는 지 궁금했습니다.


잠정목록이란 "앞으로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될 만하다고 판단되는 유산"인 것이죠.


현재, 공주 부여의 백제역사지구, 남한산성, 낙안읍성과 외암 마을 등이 문화유산으로, 우포습지와 서해안의 갯벌 등이 자연유산으로 잠정목록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언제든지 삭제와 첨삭이 가능하여 좀더 합리적으로 문화유산에 접근할 다른 기준이 마련된다면 언제든지 삭제와 추가가 가능합니다. 특히, 최근에는 개별 건축물이나 기념물이기보다는 자연과 역사, 문화가 유기적이고 다층적으로 연결된 복합유산이나 근현대사를 반영하는 문화유산에 집중되는 추세를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다양한 관점에서 우리 땅, 우리 역사를 되짚어 보는 일이 필수불가결하게 되었습니다. 논의에서는 조선시대 9개 서원울릉도, DMZ와 같은 장소들이 추가로 잠정목록에 오를 가능성이 높아보입니다.


그렇다면 근대문화유산 중에서는 어떤 분야의 건축물 혹은 지역이 잠정목록에 포함될 수 있을까요?


첫째, 전쟁 유적지입니다. 군사유산이라고도 하는데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우리 땅에 남게된 수많은 전쟁의 흔적들입니다. 때론 버젓한 온전한 건물로 남아있기도 하고, 때로는 폐허로 남아 아스라한 기억과 상처를 안겨주는 곳이지요. 

일제강점기의 군사유산은 제주도에 남아있는 태평양 전쟁 관련 유적이 대표적입니다. 제가 소개한 적 있는 제주 모슬포 알뜨르 비행장 유적을 비롯해서 지하 벙커, 고사포진지, 오름 내부에 있는 수많은 지하벙커 등이 남아있습니다. 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아름다운 섬 제주의 심장에 자리잡은 전쟁의 흔적이 장소의 아이러니를 보여주지요.

 

알뜨르 비행장의 비행기 격납고

모슬포 해안쪽에 있는 어뢰정 보관 동굴




그 외에도 진해 해군 기지 내부에 있는 방비대와 요항부 사령부 건물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유럽풍의 건축물이며 군사지인 까닭에 지금까지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지요. 물론, 군사기지인 까닭에 일반인은 절대 출입할 수 없는 장소라 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이 좋을 지 확신할 수 없는 곳입니다. 가덕도 등대 역시 부산, 진해와 긴밀한 군사지로 엮어있으며, 가덕도에 남아있는 일본군 포대와 막사들도 당시를 증언하는 장소입니다. 

가덕도 남단에서 남해안을 바라보고 서있는 가덕도 등대




한국전쟁 유적지로는 격전의 현장을 보여주는 철원 노동당사, 포천시에 있는 벙커 전적지, 민통선 내부에 있는 죽음의 다리 등이 있습니다. 민통선 내부에 있어 과거의 피폐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파주 구 장단면사무소, 철원 제일교회, 인민군 막사 등이 이에 포함될 것이며, 노근리 학살 현장인 쌍굴다리도 주요한 흔적이 될 것입니다. 


피난민의 생사를 갈랐던 노근리 쌍굴다리

미군의 양민학살을 증언하는 장소죠.







두번째는 산업유산입니다. 산업유산은 근대 이후 우리나라의 산업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던 공장, 창고 등을 통칭하는데, 건축재료나 형태는 단순하지만 규모가 크기 때문에 구조적인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 또 산업유산의 매력이지요. 옛날 공장이 예술가의 창작센터로 활용되거나 창고가 문화센터가 되는 일은 참으로 아름다운 변화라고 할 것입니다. 여러 번 소개한 바 있는 인천아트플랫폼도 인천 해안가의 창고들이 멋지게 거듭한 형태이고, 담배공장과 그 부속시설들도 대구, 청주, 제천 등지에 남아있어 그 변화가 주목됩니다. 

 

대한통운 창고가 문화공간으로-인천 아트 플랫폼

 

 

청주 연초제조창과 부속 창고들도 좋은 쓰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구 연초제조창의 거대한 모습.


제천의 엽연초 수납 취급소도 복원을 끝냈습니다.

목재 트러스가 쫙 펼쳐진 내부.




또다른 산업유산으로 들여다 보아야 할 곳이 태백의 철암역두선탄시설이라 불리는 탄광시설물입니다. 지금도 가동되는 이 낡은 탄광 시설물은 그 형태과 규모가 압도적일 뿐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우리 근현대사의 면면이나 산업의 역사 등 배우고 알아야 할 역사가 숱하게 흩뿌려져 있는 장소입니다. 


 

 

태백 탄광산업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는 이곳은 20여개 건물이 모두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탄광이 더 이상 가동되지 않는 날이 오면 탄광 박물관으로 사용되면 좋을 것입니다.




세번째는 근대교회유산입니다. 우리나라는 카톨릭이건, 개신교건, 성공회건 다른 나라와 달리 독창적인 형태로 받아들여졌고, 이들 종교가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건축형태와 예배형태가 나타났습니다. 한옥성당, 한옥교회가 대표적이지요. 또한 조선후기에는 천주교를 억압하여 수많은 순교자를 낳았기에 지금 이들 박해지들이 성지로 유명해지기도 했습니다. 한글로 정리한 성경과 송가집, 각종 문헌들도 많이 남아있고 연구가 활발한 분야입니다. 


 

 

강화도 성공회성당. 마치 사찰처럼 보이는 한옥성당입니다.

찬송가, 기도서 등 많은 자료들이 남아있고 연구도 활발하지요.






이코모스에서 제안하는 근대문화유산은 이 정도입니다. 이러한 논의를 지켜보면서 아직은 근대문화유산의 잠정목록은 조금 요원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교 유적이야 각 종교단체에서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보호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전쟁유적과 산업유적의 경우, 국민적인 관심이 얼마나 될까요? 

또한 이들 유적지와 문화재를 되살리는데 얼마만큼의 진정성을 확보하고 있을까요? 제대로 복원하고 있는지, 복원에 대한 연구가 얼마나 진정성있게 진행되는지 살펴본다면 부끄럽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근대문화유산.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 왜 남겨야 하는지 판단기준도 없을 뿐더러, 그 판단에 참여하는 전문가 집단도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허물어지고 사라져가는 것을 왜 보호해야 하는지, 우리 역사의 오점 또한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문화재 관련 단체에서 우리에게 어떤 해답도 주지 않습니다. 소통이 없습니다. 잠정 목록으로 등록하기에 앞서 이들 문화유산을 널리 알리고 많이 보러가게 하고 교육하는 일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는 문화유산이 어떻게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문화재 분야에서도 이제 좀더 적극적으로 소통하면서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교육에 앞장서 주시면 좋겠습니다. 콘텐츠만 교육하는 게 아니라, 문화재에 대한 태도도 교육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라고 유홍준 선생이 말씀하셨지요.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또 다른 것이 보인다 했습니다. 알고 사랑하게 되면 이 땅에 남아있는 것들을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KTX 신 서울역사가 생겨난 후 옛 서울역사는 오랫동안 문을 닫고 먼지투성이로 있었던가 봅니다. 몇 해전부터 복원공사가 시작되더니 큰 건물에 걸맞지 않게 벌써 복원을 끝내고 공개되었습니다. 저는 2009년 1월에 폐허가 된 서울역사를 돌아보았는데,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거칠게 드러난 벽돌과 천장, 침침한 조명, 1980년대 관공서같은 초록색 카펫, 원래의 것인지 오랜 세월을 거치며 붙어있던 것들인지 정체를 알 수 없지만 폐허나 다름없는 거대한 건물의 내장을 훑으며 그래도 부패하지 않은 생명력을 느꼈습니다.


건축물은 죽지 않고, 큰 기둥부터 작은 돌조각까지, 조악한 스텐레스 손잡이에서 부스러진 벽의 흔적까지 역사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어둑해진 바깥으로 인해 더욱 어두워진 옛 서울역사를 돌아보며 왠지 모를 흥분감으로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습니다. 도대체 이 건물에는 얼마나한 이야기가 담겨있는 것일까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추억의 발자취를 남겼을까요? 그 중에는 아마도 내 것도 몇 가지는 될 것입니다.



처음 서울에 도착한 날, 한강철교를 건너 서울찬가를 들으며 도착한 서울역.


텔레비전에서 보던 것과 똑같은 서울역사의 모습이 눈에 칼날같이 박히던 1996년 겨울.
낯선 밤공기가 싫어 지하에서 곧장 플랫폼으로 들어가던 1999년.
건축잡지 기자 시절, 지방 출장을 가던 건축가 정기용씨와 3층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인터뷰하던 1999년.
프랑스 유학시절 애용하던 TGV와 KTX가 너무도 똑같아(똑같을 수밖에) 신기했던 2006년.
그리고, 오래된 건물의 기억을 찾아 그 장소와 오롯이 다시 만났던 2010년.
그 정도만 되새겨 볼랍니다. 서울역에 대한 기억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다양할 테니까요.






서울역사는 1922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25년에 완공되었습니다.
벽돌구조로 짓고 외부는 돌과 벽돌을 섞어서 고풍스러운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서울역하면 청동을 입힌 중앙의 돔이지요. 중앙 출입구가 돌출되어 웅장하게 보이고, 양 옆으로 길쭉하게 공간이 형성되어 있는데, 유럽의 어느 역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화려합니다. 그만큼 상징적인 의미가 담긴 건물이라는 뜻이겠지요. 파리 오르세미술관도 산업혁명기에 지어진 오르세 철도역을 예술공간으로 바꾼 것이지요.  옛 서울역사를 보니 오르세 미술관이 괜시리 오버랩됩니다. 사실 건축물 설계는 스위스 루체른 역사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해요. 설계자가 루체른 역의 디자인을 많이 참조한 듯합니다.


건물의 설계자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는데, 일본인 '쓰가모토 야스시'로 추정합니다. 그의 소장하던 물건 중에 서울역사의 초기 설계도가 발견되었다고 하는군요. 당시 이름은 경성역이었죠. 경성역이라는 명칭은 그 전에 없던 것으로 경인선과 경부선의 종점은 남대문정거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도의 북쪽과 철도가 연결되면서 만주까지 이어지게 되니 북쪽으로 가는 출발점이나 다름없던 남대문 정거장의 이름도 선명하게 고쳐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죠. 건물이 웅장한 만큼 그에 어울리는 이름이 필요했을 테니까요. 그리하여 경성역이라는 이름으로 1925년부터 문을 열게 된 바로 이곳.

옛날 신문기사 한번 볼까요?

장래에 이루어질 대경성의 문호가 될 남대문뎡거장은 방금신축공사를 계속하는 중인대 그뎡거장의 일홈도새로곳친다는 의론이 잇셧든 바 드뒤여래년일월일일부터 경성역이라고 곳치게되얏는데 따라서 승차원도 곳처야할터이나 새로히인쇄가 끗나기까지는 당분간묵으것을 그대로 쓰기로되얏다 (중략) 뎡거장 간판은 일본말영국말아라사말까지분명하게 쓸터이라더라 (1922128일 동아일보)







옛 사진과 비교 한번 해볼까요? 출입구의 웅장함을 보여주는 캐노피가 좀 달라보이네요. 사진상으로는 유리인지 주철인지 모르겠지만, 복원 후 모습으로는 현재 사용되는 유리공법으로 시공한 것이 좀 어색해보입니다. 자세히 보여드리기는 어려우니 현장을 방문하시면 한번 꼼꼼히 들여다보시지요.





중앙홀


 

 



중앙홀은 2층까지 막히지 않고 뻥뚤려 있어 시선이 시원합니다. 내부를 보니 (한번도 가보지는 않았지만) 영화에서 가끔 보았던 뉴욕의 중앙역 이미지가 슬쩍 떠오르는군요. 높고 넓은 대합실에는 시계가 걸려있고 시간마다 출착하는 기차들의 정보판이 휘리릭 돌아가면서 알려주고.
중앙홀 양 옆으로는 매표소가 있고 다시 홀 왼쪽으로는 1,2등 대합실과 귀빈실, 역장실로 가는 문이 보이며 오른쪽으로는 3등 대합실이 연결됩니다. 대합실은 중앙홀을 거치지 않고 바깥에서 곧장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중앙홀에 보이는 작품은 현재 전시중인 <카운트다운>이라는 미술 프로젝트의 작품들입니다. 중앙돔 아래는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했는데, 원래 작품은 한국전쟁때 사라졌고 다른 것으로 대체하다가 이번 복원에 새롭게 스테인드 글라스로 제작했다고 합니다.

기사를 찾아보니 이런 내용이 있네요.

경성역 구내식당서 삐-루 판매개시

경성역 중앙홈대합실안의 간이식당에서는 치운겨울동안 삐-루를 팔지안튼바 드디어 봄도되고하엿으므로 십일부터 소소족키한잔 삼십칠전의생삐루를 취급하기로 되엇다. 대륙간선의 긴 기차여행의 도중 정거시간에 한잔을 마실수가 잇게되엇다


 생맥주 한잔 들이키며 기차를 기다렸던 사람들, 열차가 정차할 동안 잠시 한잔 들이키며 목을 축였던 사람들의 모습이 상상이 가는군요. 겨울엔 추워서 못팔았지만 봄이 오니 춘풍처럼 술내음도 남실남실 경성역 안을 채웠을 것 같습니다.





1,2등 대합실



 

 



요즘으로 치자면 특실손님과 일반실 손님의 대합실을 구분했던 셈이죠. 이곳은 1,2등 좌석을 애용하던 사람들이 기차를 기다리던 대합실입니다. 1920년대는 여행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기찻길이 뚫려 어디든 마음먹은 곳을 쉽게 갈 수 있게 된 데다가 관광이 붐을 일으켜 전국의 사람들이 경성, 평양, 경주,인천, 금강산을 찾아 떠났다고 합니다.

1,2등 대합실 중앙에는 사각 기둥이 있는데, 원형은 저렇게 장식적이지 않더군요. 아마 후대에 보수하면서 새롭게 등장한 장식이 아닌가 싶습니다. 벽에도 타일로 소소하게 장식이 되어 있고, 바로 옆에는 부인대합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남녀가 내외하던 관습이 여전히 내려오던 시절이라 부부가 같이 기차를 타더라도 대합실을 따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2009년 구 서울역사 방문시 찍었던 사진입니다. 이랬던 장소가 위처럼 바뀐 것이죠.



 


플랫폼으로 가는 길






대합실에서 기다리다가 기차가 도착하면 플랫폼으로 곧장 나갔던 것이죠.
계단을 통해서 아래로 내려가서 철로변의 기차를 타는 것이죠. 향후 이곳으로도 기차를 타고 내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오디오가이드에 나오던데 정말 그렇게 될까요? 옛날 사람들이 탔던 것과 똑같이 해보는 것.  좀 재미있을 것 같죠? 복원한 후 완전히 격리된 공간이 아니라 계속 철도와 관련된 장소로 사용된다면 더없이 좋을 듯합니다.

 

 


옛날 역사에서 기차를 타던 시절이 기억나시는지? 그때는 이렇게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고 양측으로 에스컬레이터도 있었지요. 1980년대에 역사를 크게 리노베이션했는데, 현재는 사용하지 않지만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도록 계단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예전에 서부역과 연결되던 길고 큰 서울역의 흔적인 셈이죠.



 이것은 1930년대 기차의 내부입니다. 식당칸이 호화롭기 그지 없네요.

 

 


 


귀빈실과 귀빈실 전실

 

 






귀빈실의 내부입니다. VIP 고객 전용라운지라고 하겠죠. 당시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벽난로가 지금도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당시 모습은 어땠을까요? 멋진 의자와 소파, 화려한 대리석 테이블이 안락함을 강조하고, 마호가니 책장에는 화려한 장정의 책도 몇 권 꽂혀있고 그랬을까요? 24시간 대기중인 전용 집사가 잘 우려진 홍차를 서빙하거나 알맞게 구워진 스테이크 식사를 준비하기도 했겠지요.

귀빈실은 왕실과 총독부 산하의 임원들, 외국의 각료와 기자단 등을 위한 장소였으며 일본에서 장기간 머물렀던 영친왕 부처가 먼길을 기차를 타고 올 때 그들을 맞이하던 공간이기도 합니다.



미국기자단북행

아미리가기자단일행은 거십이일오후칠시사십분귀경한산리총독과경성역귀빈실에서회견하고오후팔시발봉천에직행하얏더라 (1929년 614일 동아일보)


사년만에 조선으로 이왕전하작일착어

사년만에 조선땅을 밟으신 이왕, 동비 양전하께서는 일일 오후 오시착특급열차로 연로에 밭가는 농부를 감개깊이 보시며 경성역에 안착하시어 직시 자동차로 창덕궁에 듭시엇다. (중략) 전하께서는 역귀빈실에서 침임관이상의 사알이 잇엇다. (후략) (1933년 42일 동아일보)




귀빈실은 항일거사를 일으키는 독립운동가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폭탄을 투척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십일월십팔일오전칠시사십오분에 동경으로부터 가족을 동반하고 돌아오는 우원총독을 암살하려 폭탄을 가지고 경성역에 모이어 귀빈실을 잔뜩 노리고 잇엇으나 새벽안개가 자욱하야 잘보이지안흐므로 귀빈실까지 가자니 경게가심하야 다시 물러서서 세브란스근처로나와 좀더 좁은 길목근처에서 총독의 자동차를 노리고 잇엇으나
당시 총독의 가족일행은 병자가 잇어 정거장내의 칭게를 올라오안고 플래트폼에서 자동차로직접 철도우편국옆 소하물출입구로 나와 어느틈엔가 가버렷으므로 총독암살게획의제일착에 실패를 하엿다. (1936818일 동아일보)




 

이것은 2009년 복원전의 귀빈실입니다.
대리석 벽난로는 그대로지만 천장이 지금과는 달랐죠.





귀빈실 VIP를 수행하던 수행원들이 머물던 귀빈실 전실입니다.귀빈실 못지 않게 장식적이죠. 문을 열면 바로 귀빈실과 연결됩니다. 귀빈실 앞에는 역장실이 있습니다. 이는 역장이 귀빈을 직접 모신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입니다.
장식은 별로 없지만 기하학적인 묘미가 느껴집니다.

 




 


2층 대식당(그릴)


 

 



2층 대식당은 많은 사람들이 고대하던 장소일 겁니다. 저도 이 장소가 어떻게 본래의 모습을 찾을 지 너무나 궁금했거든요. 옛날 자료라곤 흑백 사진 한장 밖에 없어서 당시 모습과 백퍼센트 비교해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이곳은 대식당, 혹은 경성역 그릴로 불렸는데 당시 서양식 식당이 거의 없던 경성에서 프랑스식 요리를 선보이던 곳이라고 합니다. 후에 인근에 들어선 호텔들(철도호텔 등)에서 서양식 식당을 운영했지만 경성역 식당의 명성은 대단했다고 합니다. 은그릇과 은촛대로 화려하게 세팅되어 있었으며 경성 젊은이들의 핫 플레이스였습니다. 이곳에서 쓰던 테이블은 철도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상도 경성역 식당과 티룸 이야기를 자주합니다. 유행에 민감했던 젊고 예민한 (그리고 폐병환자인) 시인에게 이곳은 어떤 영감을 주었을까요?


마호가니빛 가구는 준비된 음식이 나오던 곳입니다. 깔끔한 제복을 입은 웨이터들이 음식을 날랐겠지요. 가구 뒤는 음식을 준비하던 전실이며 주방은 지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리된 요리가 운반되던 엘리베이터도 남아있습니다.



 

2009년 1월 답사 당시의 2층 대식당의 모습입니다. 그날 이곳을 보고 충격 많이 받았죠.
무엇보다 저 화려한 샹들리에가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인지요?





 


소식당







대식당 오른쪽으로 문을 나서면 통로가 나오는데, 이곳을 예전에는 식당으로 사용했다고 해요. 테이블을 놓고 라운지처럼 활용했던 것이죠. 식당 손님들은 중앙홀을 내려다보면서 와인 한잔 기울이기도 했겠죠. 어둠이 내리면 분위기가 더욱 멋지게 바뀌었을 것만 같습니다. 





복원전시실


 



 

2층 대식당 앞쪽에 복원전시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훨씬 규모가 더 크리라고 생각했는데, 자투리 장소를 활용해서 만들었더군요. 예전 이발관과 화장실이었다고 합니다. 이발관이었던 곳은 유리를 부착했던 흔적도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드러난 벽체를 통해서 서울역사의 속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샹들리에는 요즘 기성품으로 모두 교체한 모양입니다. 예스럽지 않고 투박하죠. 화려한 것들은 화려한 대로, 거친것은 거친대로 보여주면 좋을 텐데, 아쉽습니다. 각종 돌, 장식, 철물 등 다양한 재료도 보입니다. 서울역사의 역사에 대한 간단한 영상자료도 있습니다만, 친절한 전시실은 아닙니다. 쪼그리고 앉아서 보느라 힘들었거든요.


 

 

 

벽체의 일부에서 걸음을 멈췄습니다. 타일 안에 시멘트벽돌, 그 안에 목재, 또 그안에 시멘트, 또 그안에 벽돌......건물의 벽은 그야말로 시간이 압축된 흔적입니다. 수십년에 걸쳐 한겹씩 한겹씩 입혀놓았던 것들을 하나씩 떼어내고 못쓰게 된 것을 다시 만들어넣는 참 고되고도 지난한 작업이 건축의 복원입니다. 서로 무관한 켜도 보이고 서로 깊이 연결된 켜도 보입니다. 그것들의 이야기를 짜맞추고 이어주고 매끄럽게 해주는 것. 그것이 건축역사가의 역할이겠지요. 때로는 건축물의 겉모습보다 보이지 않는 속을 들여다보는 게 훨씬 흥미진진하기도 합니다.






 


다시 중앙홀을 지나 건물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1925년에서 2011년으로 순식간에 타임슬립했습니다. 당시 경성역이었던 옛 서울역사.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떠올려 봅니다. 열차가 탈선하여 다치고 사망한 사람들, 갑자기 양수가 터져 역사안에서 아기를 낳은 여인, 폭탄을 숨겨온 독립투사, 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에 기차에 몸을 던진 남녀들, 하릴없이 티룸에서 죽치고 있던 이상과 대합실에서 식민지 지식인의 비애를 씹던 구보씨, 은식기를 찰랑이며 서양식 음식을 맛보던 문화 향유자들, 일본 유학을 떠나는 젊은이들, 그리고 원치않은 전쟁을 위해 목숨을 버리러 가던 꽃같은 청춘들.



칙칙거리며 가뿐 숨을 쉬던 기관차가 출발한 후 남은 자들의 부끄러운 상실감을 그 앞에서 느껴봅니다.


참, 이제 옛 서울역사를 <문화역 서울 284>라고 부른다죠?
저는 그냥 옛 서울역사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야 누구든 알아들을 수 있으니까요.

지금 이곳에는 현대작가들의 작품이 설치되어 있고 주말에는 인디밴드의 공연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소가 너무나 독특하고 그 성격이 강해서 작품들이 빛이 나지 않더군요. 내년 초에 정식으로 개관을 한다고 하니 무엇을 더 보여줄 지 기대해보려고 합니다.

















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뒷받침하며 식민지 조선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던 금융기관들이다.


조선은행은 중앙은행으로 선은(鮮銀)이라고 불렸다. 중앙은행은 화폐를 조달하고 전체 금융을 관할하는 역할을 하지만 조선은행의 경우 일본은행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면서 일반 상업은행의 업무도 겸하면서 조선의 자금을 흡수했다.

식산은행은 대한제국기에 세워진 여러 농공은행들을 합병하여 1918년에 설립된 기관이다. 농공은행은 산업현장의 자금을 융통하는 업무를 하지만 식산은행은 조선 농토의 쌀산업에 깊숙이 관여하며 산미증식계획의 자금 지원을 담당했다. 중일전쟁 이후로는 채권을 발행하고 국민들로부터 저축을 강요하여 조선의 자금을 흡수한 후 일본의 전쟁수행자금으로 제공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이른바 '동척'이라 불리는 이 회사는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흡수하기 위한 국책회사였다. 일본인 지주들이 조선에서 대농장을 굴리며 엄청난 쌀을 생산하여 자국으로 유입시킬 수 있었던 뒷 배경에 바로 동척이 있었다. 동척은 그 어떤 일본 농장보다 더 많은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고 조선을 넘어 만주, 타이완, 남양군도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이들은 대한독립을 꿈꾸는 투사들에게는 폭탄을 던지며 조선땅에서 몰아내고 싶어했던 식민지 지배의 원흉이었지만, 샐러리맨을 꿈꾸던 반도 젊은이들에게 꿈의 직장이기도 했다. 이렇듯 역사는 많은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대구의 포정동 서문로길은 서울로 치자면 을지로다. 조선은행, 식산은행을 비롯해서 많은 은행과 금융권들이 밀집해있었고, 더불어 경찰서와 우체국, 도서관등이 자리잡고 있던 식민지 사업의 중심지였다. 당시 사진을 보면 경성 뺨칠만큼 화려한 서양식 건물이 줄줄이 세워져있었으며 그 주변으로 백화점이며 상점이며 겹겹이 일본인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원래 이곳은 경상감영이 있어 500년간 이어진 대구 행정의 중심지였으며 그 바통을 이어받아 근대 식민 도시의 중심지로 변화했다. 서문로의 옛 이름은 본정도로. 이름만 봐도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알 수 있다. 

우체국과 조선은행, 도서관은 이미 자리를 뜬 지 오래다. 고급 백화점이 있던 자리는 성인카바레와 선술집으로 바뀌었다. 멀지 않은 위치에 있는 동성로가 문화와 상업의 중심지다. 백화점, 영화관, 쇼핑거리, 먹자골목은 모두 그쪽에 포진해 있다. 업무시설조차 슬금슬금 빠져나간 서문로는 조용하기만 하다. 대책없이 넓은 빈터가 주차장으로 사용될 정도니까.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은 경찰서와 식산은행 정도랄까. 몇 해전까지 대구은행으로 사용되던 식산은행 건물은 현재 근대시기 대구의 역사를 보여주는 근대역사관으로 그 내용을 바꾸었다



 





무엇보다 식산은행의 건물은 예사롭지 않다. 직사각형으로 단순한 외형을 가졌지만 겉에서 봐도 탄탄하게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벽돌형 타일은 어찌나 단단해보이는지 흠집 하나 찾아내기 어렵다. 견고하고 권위적인 건물, 은행이 가져야할 필수요소를 고루 갖추었다. 높고 긴 창과 돌출된 현관 주변, 긴 지붕선을 따라 약간의 장식을 한 부분이 있다. 같은 색 타일로 통일감있게 연결한 장식이 과하지 않고 세련된 분위기를 준다. 오랫동안 대구 시민들의 기억을 함께 한 건물은 역사 속으로 다시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중이다. 건물의 탄생연도는 1931년. 그 전에 세워졌다면 르네상스 양식이니 하며 외형 자체가 화려했을 텐데, 1930년대부터는 국제주의 모더니즘의 바람이 극동까지 불어와 건물들은 대부분 장식성을 잃고 좀 만만해진다.
2009년 취재를 위해 내려왔을 때에는 개관 전이었기 때문에 내부를 볼 수가 없었다. 어떤 장소로 바뀔 지 기대를 많이 했던 터라, 올해 초 개관 소식을 들은 후 얼른 달려가보고픈 마음을 참아가며 기다렸다. 


인천, 목포, 부산의 근대역사관을 둘러보고서 근대역사관이라는 전시관을 꾸미고 운영하는 일이 다른 어떤 박물관, 미술관보다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근대 시기는 길지 않았고, 전쟁이 터졌고, 개발시기를 거치며 많은 것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자료도 많지 않고 눈으로 볼 수 있는 문화재들도 다른 시대에 비하면 많지 않을 뿐더러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파괴되는 경우가 많다.

부족한 자료로 전시관을 꾸려내려는 역사적 가치가 미비한 자료들을 확대 재생산할 수밖에 없다. 스토리텔링형 체험공간이라는 요즘 트렌드를 반영하기 위해 애니메이션, 드라마, 3D 등 멀티미디어 전시물을 많이 세운다. 어린이를 위한 전시가 되어 버리거나 한번 보면 다시 오지 않게 되는, 답답한 전시공간이 되고만다.


요즘 많이들 생기는 체험형 전시공간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하지만 문화재급 건축물에 만들어지는 전시장이라면 좀 달랐으면 좋겠다. 자주 들러보고 공간에서 옛날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장치들을 꼭 넣어주었으면 좋겠다. 전시물 관련해서는 정말 신중했으면 좋겠다.



인천개항박물관의 경우 (예전 포스팅 참고- 옛날 은행을 보러갔다 http://sweet-workroom.khan.kr/8 + http://sweet-workroom.khan.kr/9) 전시물은 많지 않지만 하나하나 집중할 수 있게 디스플레이를 한 점이 좋았다. 사진, 물건(유물), 자료 등을 적절히 섞어 전시했고, 제작, 관리, 유지에 비용이 많이 드는 멀티미디어 전시물은 역사적 서술이 필요한 부분만 담당했다.

부산근대역사관의 전시는 재미있었다. 많이 사라져버린 옛 풍경을 알려주기 위해 패널작업도 신경썼으며 개항장 주변을 모형으로 만들어 멀티미디어와 연동한 점도 돋보였다. 교육적인 효과가 클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도서관이 있다는 점이 새로웠다. 미술관, 박물관 중에 도서관을 보유하고 있는 곳은 극히 드물다. 자료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그 시절 역사가 더 궁금한 사람들을 위해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다는 점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대구 근대역사관은 어떨까? 




우선 복사본 엽서로 구경하는 대구의 옛 금융기관의 모습을 보자. 아래 좌가 식산은행이다.






옛 은행 건물들의 공통점은 1층 층고가 무척 높다는 점이다. 한국은행 본점 화폐박물관으로 사용중인 옛 조선은행 경성지점 내부도 깜짝 놀랄 만큼 높다. 내부에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탁 트이고 높은 공간감에 휘둘리는 느낌이 든다. 겉은 단정한 모양새지만 내부의 기둥은 그리스식 기둥을 흉내내듯 장식했으며 천장 몰딩도 화려하다. 대규모 은행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안타깝게도 바깥과 연결된 그 어떤 빛도 내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물론 바깥에서 보이는 문으로도 출입이 불가능하다. 주출입구의 현관이 어떤 모양새일지 궁금했는데, 복원은 되어 있으나 패널 전시물로 겹겹히 잘 가려놓았다. 내부는 무척 어둡다. 촬영된 사진은 내부를 자세히 보여드리기 위해 모두 밝게 보정한 것이다. 실제 관람할 때는 훨씬 어두웠다. 조도는 낮고 조명은 붉다.





서측에 면한 출입구의 모습이다. 남측면보다 넓은 서측면이 정면 파사드라는 점을 보면 아마 옛날에는 이곳을 주출입구로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패널 전시물로 굳이 가려놓았고, 역사관 출입구는 건물의 북측 파사드 왼쪽 구석에 새로 만들었다. 아마 경상감영공원과 동선을 연결하고 역사관 출입구 앞에 광장을 놓기 위해서였으리라 짐작되었다.

창문을 모두 막은 것은 멀티미디어 전시물을 좀더 잘 보도록 하기 위함이었을까?  전시장이라면 관례적으로 빛을 차단해야 한다는 지극히 상투적인 관습을 고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박물관, 미술관에서 자연광에 민감한 이유는 유물 자체가 광원으로 인해 손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대부분 전시물이 인쇄 패널이거나 멀티미디어 구성물이며 몇 가지 주요 전시물만 실제 자료였다는 점을 본다면 빛을 피해야 할 그 어떤 이유도 없어보인다. 실제 유물 자료들은 따로 빛을 피할 수 있도록 장치를 만들어주면 된다. 실제로 내부가 너무 어두워 전시물을 읽는 데 피로감이 많이 느껴지기도 했다.

여러 가지를 참고하고서라도 주출입구와 창을 철저하게 봉쇄한 점은 이 장소가 가진 건물 본래의 장점을 많이 잃어버렸다. 건물이 가진 아름다움과 특징이 전시 설계에는 왜 전혀 반영되지 않는 것인지 아쉬울 따름이다.



위의 현관문 바깥의 모습. 주출입구의 외부다. 양쪽으로 길쭉한 창도 모두 닫혀있다.






은행의 옛 모습. 천장 장식이며 출입구 현관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인다.





옛날에는 출입구로 들어서면 꽉 막힌 벽이 나왔던 모양이다. 이전에는 고객의 공간과 업무공간이 철저히 분리되어 있고 자연스런 소통같은 것은 없어던 모양이다.




그 벽의 흔적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부분적으로 최근까지 이어져온 듯하다. 전시장으로 꾸미면서 벽을 모두 철거하고 그 흔적을 조금씩 남겨놓았다.








내부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장소가 이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곳인 금고다. 육중한 금고문은 언제나 위압적인 느낌이 든다. 내부에는 식산은행 시절 사용했던 화폐, 당시의 열쇠, 채권, 문서 등 금융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대구의 정치, 산업, 문화, 예술에 대한 간략한 설명들이 구석구석에 이어진다.









예상치 못했던 유물을 만났다. 1927년 10월 독립을 꿈꾸던 젊은 청년 장진홍은 조선은행, 동척, 식산은행, 경찰서, 형무소 등 대구의 주요시설물을 폭파하는 거사를 단행했다. 그는 중국까지 가서 폭약제조를 배웠고 거대한 시설물을 단숨에 날려버릴 수 있도록 치밀하게 계획을 짰다. 그가 첫 목표로 잡았던 곳은 조선은행. 은행 내부로 폭탄을 반입하는 데 성공했으나 은행간부가 이를 눈치채고 폭발직전에 건물 밖으로 던졌다. 폭발은 바깥에서 일어났다. 폭발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전선이 모두 끊어지고 유리창이 깨졌다. 하지만 금고도 은행도 은행장도 살아남았다. 그는 6개월을 숨어살았지만 결국 투옥되었고 옥중에서 자결했다. 장진홍 선생이 남긴 옥중서신과 책들이 전시되어 있다. 내용을 모두 읽어낼 수는 없었지만, 글씨가 곱고 힘이 느꼈졌다. 글쓴이의 성품이 느껴졌다고 할까.





대구이기에 만나볼 수 있는 자료들이 반갑다. 전통적인 상업도시이자 당시에도 번영한 도시였던 대구. 거부와 갑부가 많았고 멋쟁이도 많았다. 상업이 발달한 만큼 상점가에서 뿌린 명함도 다양하다. 옛날 광고가 가득한 대구 지도도 재미있다. 정종이름인 월계관이 눈에 팍 들어온다.



커다란 모니터로 페이지를 넘기며 대구 옛 건물을 살펴보는 전시물, 대구와 관련된 인물들을 다룬 전시물도 있다.





전시장 내부 전시물 중에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바로 이것. 버스 내부처럼 꾸며진 어두운 방 안에서 스크린을 보며 1930년대 대구 거리를 달려보는 것이다. 부영버스 안내양의 구수한 대구 사투리로 안내를 들으며(상단의 소녀) 부영버스의 노선대로 길을 달리면서 도로변을 장식했던 건물들을 입체 그래픽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그 시절을 겪어보지 못한 우리로서 당시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80년의 역사 동안 수없이 변해버린 거리와 건물들 틈으로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또 다른 시간이 중첩되어 있음을 느꼈다. 켜켜이 채워진 시간들. 그 역사들.


이 건물이 없었다면 우리는 무슨 수로 그 시절을 회고할 수 있겠는가?





대구근대역사관(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

위치-대구시 중구 포정동 33번지
문화재 유형-대구시 유형문화재 제 49호
관람시간-09:00~19:00(4월~9월) /09:00~18:00(11월~3월) 월요일 휴관
관람료- 무료
홈페이지-http://artcenter.daegu.go.kr/dmhm/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역을 찾아가는 길.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왜 기차도 가지 않는 작은 역을 찾아 힘들여 차를 몰고 가는가? 살기바쁜 세상에, 또릿또릿 정신 차리지 않으면 금세 뒤쳐져버리는 무한경쟁의 사회에서 숨막히는 줄도 모르고 살다가도, 한번쯤, 아무런 이유없이, 내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장소에 가고싶을 때가 있다. 그런 날, 떠난다. 그런 때는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잔잔하게 스며드는 안도감에 숨을 깊게 내쉬곤 한다.
 
빽빽한 고층건물과 빌딩보다 더 시야를 어지럽히는 고층 아파트의 밀도가 서서히 옅여지고 그 대신 산등성이의 윤곽이 서서히 시야를 채운다. 그리고 점차 눈 속에 가득 박혀드는 숲의 초록색들, 이파리 하나하나에도 각기 다른 색과 밀도를 갖고 있는 갖가지 초록색을 음미하면서 나는, 어느 새 도시인의 치열함을 잊어버린다. 도시를 떠나 자연 속에 파묻혀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마음을 어지럽히기까지 한다.




내 삶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장소.에 나는 간다. 그곳에서 나와 아무런 관련없이 사는 사람들을 본다. 나라면 절대 선택하지 않을 구태의연한 모양의 집도 있고,내가 세상에서 한번도 보지 못한 유려한 빛깔의 꽃과 나무도 있다. 아무런 역할도 없이 버려진 건물도 있고, 버려진 자동차도 있다. 도시에서는 흉물스런 쓰레기가 될법한 것들이 그 마을의 자연스러운 풍경이 된다.

어쩌면 낡아서 폐기해버린 많은 것들이 그냥 그대로 남아도 괜찮은 존재들은 아니었을까.






가은역. 기차가 다니지 않는 폐선된 간이역이다.  간이역은 문이 닫힌 채 뽀얀 먼지가 두껍게 쌓였고 길게 이어진 단선 철로는 끝이 매섭게 잘려져 두툼한 콘크리트 덩어리에 막혔다. 가은역의 맞은 편 산비탈에는 문경탄광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산업화 시대 문경을 비롯해서 경북의 산업을 좌지우지했던 은성탄광이 있던 자리다. 가은역의 역사는 은성탄광과 깊은 연관이 있다.

문경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부터 탄광이 개발되기 시작했고, 1938년 은성무연탄광을 비롯해서 모두 38개의 탄광이 형성되어 있던 탄광지역이다. 그 중에서 은성광업소는 세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규모가 컸던 곳이다. 도시는 유려한 산과 산 사이에 오밀조밀하게 펼쳐진 평지를 중심으로 길게 뻗어있으며 내륙 산지의 소도시로 보기에 규모가 상당히 크다. 현재는 문경시의 인구가 8만명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한창 문경지역이 호황을 누릴 때는 15만명의 사람들이 북적거렸고, 1980년대에는 탄광에 종사하는 사람의 수만도 7천여명에 이르렀다.

가은역이 개통된 것은 1955년. 당시의 이름은 은성보통역이다. 1959년에 가은역으로 이름을 고쳐달았다. 그날 이후 기차역은 은성탄광에서 채취한 검은 탄들과 수많은 부산물들, 그리고 그만큼의 사람들을 실어날랐다. 번성하던 탄광마을은 석탄산업의 비중이 줄어들면서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당연한 수순처럼 탄광이 문을 닫고 사람들이 떠났다. 1995년에 은성광업소가 문을 닫자 가은역은 여객업무를 폐지한 한적한 간이역으로 바뀌었고, 2004년에는 가은선을 폐쇄하면서 기차역도 문을 닫았다. 산업구조의 변화는 소도시의 인구를 둘쭉날쭉하게 만들고 결국 도시의 성격을 바꿔버렸다.

지금은 한나절을 기웃거려도 가은역을 보러 온 젊은 관광객 두엇을 제외하면 길가는 사람 한명 만나기 어렵다. 2,3킬로미터 너머에 있는 레일바이크(철도자전거) 탑승장만 현지인, 관광객 할 것 없이 웅성거린다.










 


가은역은 그동안 보았던 간이역보다 규모가 큰 편이다. 원래 건물의 사무실 부분을 계속 증축하여 공간을 넓혀간 흔적이 보인다. 목조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형태나 규모가 안정적이다. 철도역사는 대형 역사를 제외하면 거의 비슷한 평면을 담고 있다. 역사는 철로와 나란한 방향으로 직사각형의 공간으로 만들어진다. 지붕은 지붕면이 철도면과 나란하게 맞배형태로 얹히고 왼쪽부분에 박공지붕을 얹어 지붕이 다소 돌출된 공간이 형성된다.

내부는 크게 대합실과 역무실로 구분되고, 역무실은 매표소와 사무실로 나뉘어진다. 철도 이용객은 대합실 입구로 들어와 표를 구입하고 기차가 오기를 기다린다. 기차가 도착하면 반대편 철로방향으로 열린 문을 통해 플랫폼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대도시 역사의 경우 형태가 좀더 화려하고 재료도 벽돌이나 콘크리트를 활용하지만, 간이역사는 노란색의 목조판벽에 슬레이트 지붕을 주로 사용한다. 일제강점기에 정착된 철도역사의 디자인은 누가 건물을 짓는가, 어떤 의도로 짓는가에 따라 내 외부에 약간의 변화가 생겨났을 뿐, 형태나 컨셉트 상에는 큰 변화없이 유사하게 진행되었다.

박공지붕이 얹힌 사각형 공간은 일제강점기의 소규모 관공서에 흔히 사용되던 형태다. 철도역사는 20세기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생겨난 공간이었기 때문에 처음 철도역사가 지어질 당시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시설물이었다. 철도역사에 관공서 건물의 형태를 투영한 것은 기차역이 교통수단의 개념이 아니라, 관공서 건물처럼 권위와 위엄을 갖고 있으며 공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세워졌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이 권위의식에 억눌리며 들어섰을 철도역사가 거꾸로 현재 우리에게는 과거 사람들이 살았을 자그마한 집이나 시골마을의 회합소처럼 느껴진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세월은 과거 사람들의 가슴을 억눌렀던 심리를 모두 덧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이제 보드라운 향수에 젖어 과거를 들여다본다.

가은역의 내부는 문이 잠겨서 들어가보지 못했지만 넓은 창 덕분에 속을 구경할 수 있었다. 목조 좌석이며 수납장이 남아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문을 열면 쌓인 먼지가 풀썩 흐르며 오래된 이야기를 훑어낼 것만 같다.  30여년 전 이곳에는 오랜만에 큰 도시로 나갈 채비를 마친 사람들이 기차를 기다리는 모습, 매표소 안에서 두런두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역무원들의 모습이 일상처럼 펼쳐졌을 것이다. 문밖으로 걸어나온 한 사내는 담배 한 대 꺼내물면서 고운 여자를 생각할지도 모르고, 또 어떤 아이는 아버지가 품에서 꺼내올 따뜻한 빵 한쪽을 기대하며 하루종일 기차역을 맴돌며 혼자놀기를 했을지도 모르고. 

 

 






기차가 서지 않는 기차역은 한 때, 사람 사는 살림집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때 내부에 변화가 생겼다고 하는데, 정확히 어떤 부분인지 들여다 보는 것만으로는 알아내기 어렵다. 가은역의 매력은 넓은 격자창이다. 지금은 세월의 힘으로 이가 맞지 않고 비뚤어졌지만 창의 온화함으로 공간이 더 아늑해진다.


이름도 예쁜 가은역이다. 나를 둘러싼 도시의 풍경을 벗어나기 위해 달려온 거리만큼, 간이역 하나가 주는 기쁨은 컸다. 자동차로 왕릉강변길과 가은로, 은성로를 달려보았다. 산으로 둘러싸인 소도시의 풍경이 아담하기 그지없다. 골짜기에는 맑은 물이 겹겹이 흐른다. 촉촉한 공기가 물 위로 차분하게 흐른다. 조령산맥의 한 자락,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가는 관문이었던 문경새재 옛길을 간직한 도시는 그 길목에서 오가는 사람을 맞는다. 그 가장자리로 관광열차가 달린다면 꽤나 볼만하겠다. 다음번에는 KTX처럼 빠른 열차가 아니라, 덜컹덜컹 소리도 내고 역마다 한참 서있기도 하는, 느릿한 기차를 타고 온다면 좋겠다. 지금은 구경하기도 힘든 비둘기호같은 기차 말이다.







가은역 철로 너머에 역사를 내려다보는 나무가 두 그루 서있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가. 도시의 역사를 내려다보던 나무가 아니던가.





좀 더 알아보기>>

 
이제 더 없이 친근해진 등록문화재 동판. 문경 가은역은 제304호로 지정되어 있다.

가은역 가는 길>
주소-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왕능리 536번지

문경 석탄박물관>
은성탄광의 현장은 문경 석탄박물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선탁박물관은 가은역에서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산등성이에 있다. 석탄박물관 주변에 사극 촬영장이 있어 함께 관람하기도 한다.
주소-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왕릉길 112번지 문의-054-571-2475
홈페이지- http://www.coal.go.kr/


더 읽어볼 책>

 

한국의 간이역/ 임석재 저

간이역을 건축사적 관점으로 풀어냈다. 일제강점기 미곡 수탈을 위한 역사가 있는가하면,
산간, 해안 지역에 어울리도록 만든 표준화된 간이역도 있다.
건축적 배경을 살펴보면 간이역을 보존해야할 필요성과 중요성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염전의 모습을 처음 본 것은 <엄마없는 하늘 아래>라는 영화 속에서였습니다. 내 나이 대여섯살 쯤 되었을까? 아마도 영화 속 주인공 아이와 비슷한 또래였겠죠. 영화 보며 눈물콧물 흘리던 순간조차도 지는 햇살을 등지고 물레방아를 돌리며 물을 끌어올리던 영화 속 아빠의 뒷모습이 안타까워 보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염전은 끝없는 노동의 현장이자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터전처럼 여겨지기도 했었죠.


요즘은 상황이 달라졌어요. 미네랄이 풍부한 천일염의 가치가 높아지고 있는데다, 그 유명한 프랑스 게랑드 꽃소금에 버금가는 천일염이 생산되는 몇 안되는 지역으로 우리 천일염전이 부각되면서 매스컴도 많이 탔습니다. 그런가하면 작년에는 소금창고의 슬레이트 지붕에서 석면이 나왔다며 소금 먹기를 거부하지 않나, 올해엔 일본 지진과 원전 소동으로 너도나도 소금을 가마니로 사들여서 소금 파동도 일어났었지요. 한해 한해 소금에 대한 사건사고가 생겨나니 천일염 하시는 분들의 마음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닐 듯합니다.


시어머님은 소금을 서너푸대 미리 사놓으셨다가 3년 정도 묵히며 간수를 뺀 후 투명하고 하얗게 정돈된 소금을 사용하십니다. 늘 신안증도의 천일염이죠.
신안증도의 천일염전, 거대한 소금밭인 태평염전에 다녀왔습니다.


문화재청에서 주관하는 공무원 워크숍이 문화재 활용에 대한 재고라는 주제로, 태평염전과 소금 박물관이 있는 신안증도에서 열렸습니다. 저와 남편은 그 행사에 초청되어 근대문화유산에 대해 강의를 하러 갔었습니다. 신안증도는 우리나라에 7개밖에 없다는 슬로우 시티 중 하나이기에 더욱 유명해진 곳이죠. 고요한 시간을 누리려는 관광객들도 많은 곳이고요.


그곳에는 시간이 참으로 천천히 가는 것 같았습니다. 자동차 엔진소리가 죄송스러울 정도로 조용했지요. 자글자글 햇살이 녹아드는 언덕과 들판에서는 양파 수확이 한창이었습니다. 슬로우~슬로우~ 해야되는데 서울까지 돌아갈 길이 바쁘더군요.  동남아 해안이 부럽지 않다는 우전해안은 들여다보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태평염전과 소금박물관은 꼼꼼히 보고 왔습니다.



구글어스에서 찾아본 태평염전. 격자로 짜여진 넓은 판처럼 생겼다.


 

문화재청 소개자료에서 가져온 사진입니다. 염전 참 넓군요.




태평염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염전입니다. 증도 사이의 갯벌을 막아 간척한 땅을 염전으로 만든 것인데, 해마다 15,000톤의 천일염이 생산된다고 합니다. 이 정도의 규모라면 국내 생산량의 5%에 해당되는 양이라네요.



우리나라의 전통 제염 방식으로는 바닷물을 끓여 소량의 소금을 얻는 전오법을 활용했습니다. 하지만 소금을 얻는 과정이 쉽지 않아서 소금은 귀한 산물로 여겨져왔지요. 우리가 보통 염전에서 보게 되는 천일제염법은 순수한 햇빛과 바람으로 해수를 증발시킨 후 농축하여 소금 결정을 얻어내는 방법을 말합니다. 이는 을사조약 이후 1907년부터 일본인에 의해 시작된 방법입니다. 


초창기에는 경기도 주안 일대를 소금밭을 만들어 천일제염법으로 소금을 생산했고 이후 소래, 군자, 광양만, 연백 등 서해안 일대에 7천정보(1정보는 1천평)의 염전을 나라에서 독점적으로 운영했습니다. 소래포구에 가시면 지금도 염전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죠. 광복 후에는 민간업자들도 염전을 운영하게 되었으며 염전의 규모도 훌쩍 늘어나게 됩니다. 1960년대에는 공급과잉으로 염전의 규모가 축소되었고 1990년대만 해도 가격경쟁력이 좋지 않아 천일염전이 점차 사라지는 추세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천일염의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소금은 암염이 60%이며 천일염, 정제염으로 구분되는데, 호주, 멕시코, 이탈리아 등지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천일염은 석회질 토양에서 오랫동안 건조하여 생성된 소금이라고 합니다. 이런 소금은 염도도 높고 암염과 다를바없지요. 하지만 우리나라의 천일염은 갯벌에서 매일매일 채취하기 때문에 염도는 80~85% 정도이며 짠맛과 단맛 등 미네랄의 맛이 골고루 섞여있습니다. 유명한(그리고 비싼) 프랑스 게랑드 소금보다 미네랄이 함량이 높다는 거죠.


또한 고급 소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천일염 중에서도 토판염의 인기가 꾸준히 상승하고 있습니다. 토판염은 갯벌 위에 흙을 고르고 다져서 그 위에서 천일염을 만드는 것이랍니다. 해마다 흙을 갈고 고르는 수고로움이 이루말할 수가 없다고 하는군요. 그래서 토판염을 생산하는 는 염전에서는 소금 장인이라는 명칭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2~3년 동안 간수를 빼고 숙성한 토판염 소금은 가격도 꽤 되더군요.











태평염전은 1953년 피난민들의 정착하고 생활하도록 돕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피난민들의 생활은 하루하루 힘겨웠겠지만 현실에 적응하는 것으로 삶을 이어갔을 겁니다. 전쟁의 공포,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된 것으로 안도하며 살아갔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소금밭은 67개로 구성되고 각각 소금창고가 딸려있습니다. 3킬로미터에 달하는 염전에 쭉 늘어선 나무 창고들이 보는 것만으로도 장관을 이룹니다.
새벽이나 이른 아침 염전 부근의 물가를 거닐면 촉촉한 물안개가 피어오를 것 같습니다. 한낮의 햇살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보였지만 새벽이나 저녁시간에는 그윽하고 한가로운 염전의 또다른 모습을 보여줄 것 같습니다. 그때 사람들도 수고로운 땀의 현장의 틈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는 않았을까요?


붉은 빛을 띠는 염생식물들도 이곳의 풍경을 색다르게 연출하는 존재들입니다. 염생식물이란 염도가 있는 땅에서도 잘자라는 식물들이죠. 계절에 따라 일곱가지 빛깔을 낸다는 칠면초, 붉은 줄기에 붉은 꽃이 달린 해홍나물, 국화꽃같은 갯개미취 등이 옹졸옹졸 솟아있습니다.








소금창고를 자세히 볼까요? 서해안의 염전 일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입니다. 소금창고는 희한하게도 벽이 반듯하게 세워지지 않고 약간 기울어져있습니다. 그 이유는 내부에 보관하는 소금 때문입니다. 소금을 가마니에 넣어서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소금 결정 그 자체로 쌓아두는데, 그렇게 때문에 소금의 무게가 벽체를 밀어내는 힘을 갖게 됩니다. 이 힘을 견디기 위해 벽을 비스듬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목재가 검게 보이는 것은 방수처리용 콜타르를 칠했기 때문이지요. 내부는 목재 그대로의 색상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소금이 수십년을 닿아도 썩지 않는다고 하지요.



목재창고 내부는 들여다보지 못했지만, 자료에 따르면 바닥의 경우 갯벌흙을 그대로 쓰거나 송판을 깔기도 합니다. 갯벌흙은 소금의 간수가 스며들어 마치 콘크리트처럼 단단해진다고 해요. 참 신기한 현상입니다. 그래서 갯벌위에 흙을 고르고 다진 후에 소금을 만드는 토판염도 가능한가 봅니다.




석조로 지어진 유일한 소금 창고. 돌 조각을 그냥 쌓지 않고 율동감있는 패턴을 형성한 게 재밌죠.

벽체를 지지하는 또다른 돌 기둥. 마치 고딕석조 성당을 지지하던 플라잉 버트러스의 기능이 아닐까?

도마뱀 무늬가 나름 귀엽네요.

깔끔한 문화재 안내판. 요즘 안내판은 이렇게 디자인이 모두 바뀌었죠?

 



소금박물관은 원래 소금창고로 사용되던 건물을 개조한 것입니다. 보통의 소금창고는 위에서 보는 것처럼 목조로 지어졌는데, 이 건물은 독특하게도 석조로 세워졌어요. 인근 지역의 산을 발파해서 거기서 나온 큼직한 돌을 쌓고 시멘트를 바른 건물 벽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염전이 조성되던 1953년에 인부들이 직접 만든 소금창고인데요. 소금밭에서 레일을 깔아 채취한 소금을 이곳까지 운반하여 보관했습니다. 북한지역은 어떤 지 알 수 없지만 남한 지역에는 유일하게 석조로 만들어진 소금창고라는 점도 특징이지요.


소금 창고의 규모는 991.74m2이며 보통의 목조 소금창고보다는 훨씬 큰 규모입니다. 역시 소금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벽을 돌로 괴었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석조창고는 1980년대부터 목조창고가 세워진 후 쓸모가 없어졌지요. 원래 두 채가 나란히 있었는데, 한 채를 허물로 한 채는 소금박물관으로 용도를 바꿔서 활용하고 있습니다.




소금 박물관 천장의 트러스 구조. 닥트와 전등 선들로 인해 잘 보이지 않지만요.

전시장 내부 모습입니다.

우측편에는 바닥 아래에 태평염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모형이 있습니다. 어두워서 잘 안보였습니다.

 

 

 


소금박물관의 내부 모습입니다. 정보가 잘 정리된 전시시설이 아니라서 아쉬운 점이 많았습니다. 태평염전을 보여주는 전시물도 있고 소금을 활용한 예술작품도 있고 소금을 사용한 역사적 사례도 있긴 한데, 구성이 복작복작해서 대체 뭘 봐야할 지 알 수 없더군요. 건물이 가진 멋진 부분들을 잘 보여주고, 다소 고전적이더라도 간단하게 자료들을 정리해두는 게 더 좋지 않나 합니다. 요즘 멀티미디어 전시 혹은 체험 전시를 너무 강조해서 어느 문화재를 구경하더라도 초등학생을 위한 시설같다는 느낌을 자주 받게 됩니다. 한번 가보면 더 가볼 필요없는 전시장이 아니라, 늘 음미하고 다시 되새겨볼 수 있는 "자료실"로서 이런 공간이 활용되면 좋겠습니다. 날도 더운데, 앉아서 쉴 휴게 시설이라도 있다면 얼마나 좋았겠나 싶었군요.


 

 

 

 

소금박물관은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입니다. 등록문화재에는 반드시 이 동판이 붙어있습니다. 동판의 형태는 동그랗기도 하고 네모진 것도 있습니다. 근대문화유산은 '등록문화재'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 많습니다. 문화재 건물을 들여다볼 때 이런 문장이 붙어있는 지 한번 살펴보시는 것도 좋겠죠?







 

태평염전
전라남도 신안군 증도면 증동리 1931번지 외
등록문화재 제 360호(2007년 지정)

소금박물관
등록문화재 제 361호





 




서산부인과는 한국현대건축계의 투톱 중 하나인 김중업의 작품입니다. 건축가들은 건축물을 곧잘 작품이라고 부르니까 놀라지 마시길.





오늘은 일본인 오오세 루미꼬 상과 함께 한 서울답사 이야기를 들려드릴까합니다. 루미꼬 상과의 인연은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습니다. 제가 쓴 <청춘남녀, 백년 전 세상을 탐하다>를 흥미롭게 읽었다며 연락을 해온 일본인 여자. 메일로 연락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당황했었어요. 독자분들 중에 일본인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거든요.

한국의 근대문화유산, 그것도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시기의 건물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으니 당시 일본과 한국의 관계를 생각해보자면 길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반목될 만한 구석이 많으니까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물결 속에서 혼란을 겪던 시기, 건축물도 그런 점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그런 점이 식민지였던 우리에게는 치욕과 분노, 제국주의 입장이었던 사람들에게는 또다른 혼란으로 다가올 가능성이 많지요.


우리가 근대문화유산을 돌아보아야 하는 것은, 그것도 역사라는 점입니다. 한줄기 툭하고 잘라내서 다른 뿌리에 이식하면 꽃이 피는 접붙이기는 역사에서는 통용되지 않습니다. 치욕과 분노,라는 감정을 한꺼풀 걷어내고 당시 우리나라의 풍경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펼쳐보고 싶었습니다. 어쨋건, 세상은 돌아가고 새로운 문물은 밀려들어오고, 사람들은 더불어 살아가던 시기이니까요. 백년 전 이 땅에는 21세기인 지금 못지 않게 수많은 국적의 외국인들이(일본인뿐만 아니라) 정복욕과 종교적 헌신과 일확천금의 기회를 가슴에 품고 살고 있었습니다.



루미꼬 상은 아시아 지역의 근대건축물에 관심이 많았으며 특히 1920년부터 1950년까지의 소화시기의 건축물에 관심이 많다고 합니다. 일본은 전통문화를 보존하는 시스템, 문화유산정책 등이 우리나라에 비해 잘 조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시기의 건축물들이 많이 헐려나가고 있답니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사람들과 함께 소셜네트워크 카페를 만들어 아시아 곳곳의 근대문화유산,특히 일본의 영향을 받은 건물들을 찾아보는 중이랍니다. 그 대상들은 어찌보면 제국주의의 색채가 담겨있을 수밖에 없는 건물들이지만 일본인으로서 그런 건물들을 찾아보는 것도 또한 역사의 단면단면을 알아가고 복원해가는 방법이겠지요.



다행히 루미꼬 상이 한국어에 능해서 일본어라고는 '오겡끼데스까'와 '스고이'밖에 모르는 저와도 의사소통이 가능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녀의 활동을 과연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하나, 고민도 많이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근대문화유산을 찾아 상하이, 베트남, 요코하마, 나가사키 등지를 돌아봐야겠다고 결심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녀는 단지 그 시기의 건물, 그 시기의 문화를 좋아하고 또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관점을 벗어놓고 옛 건물을 찾아다니며 '스고이'를 외칠수있는 동종업계 종사자로서 한번 만나기로 했습니다.


기회는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습니다. 원래 3월에 도쿄에서 만날 것을 계획했으나 일본 동부 지진으로 인해 계획이 무산되고 몇 달 후 6월에 그녀가 서울을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만나고보니 루미꼬 님은 한국인 남편 사이에 두 아들을 둔 제 또래의 여성이었습니다. 처음 보자마자 저와 비슷한 나이의,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조신하게 인사를 나누고 곧장 서울 답사를 떠났습니다. 짧은 일정에 아이 둘을 둔 주부인 그녀, 겨우 하루를 혼자 여행할 시간이 났다며 그 시간을 서울 근대 건축 답사에 투자하다니, 참으로 그 열정이 놀랍습니다. 




 

1시- 대학로 어느 까페에서 루미꼬 상과 만나다. 루미꼬 상은 오전에 청계천문화관에서 <경성 1930> 전시를 보고 동선동 권진규 아틀리에를 다녀온 후였다. 냉면을 먹기로 하고 택시로 을지로 4가 우래옥으로 향했다. 냉면 가격이 1만 2천원. 작년에 비해 3천원이나 뛰어서 깜짝 놀랐다. 점심을 하면서 간단히 자기소개 및 관심분야를 공유했다. 아이폰을 대학로 카페에 두고 온 것을 기억해낸 루미꼬 상, 다시 대학로로 갔다.

2시-답사 시작. 혜화에서 지하철로 이동. 4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 3번 출구로 빠져나오니 바로 앞에 서산부인과가 나타났다.







서산부인과 


오늘 답사하게 될 장소들은 루미꼬 상이 정했습니다. 그녀는 2003년에 서울에서 3년간 살면서 후암동, 삼각지, 충정로 등지의 옛 건물과 거리들을 답사한 후 서울을 소개하는 웹사이트에 취재내용을 게재하기도 했답니다. 우연히 거리를 걷다가 만난 오래된 건물. 건물에 새겨진 마름모꼴의 장식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해요. 무늬는 일본 소화시대 집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식인데, 그것을 서울의 낯선 거리의 건물에서 발견할 수 있다니. 그런 작은 계기가 서울의 오래된 거리를 거닐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서산부인과는 김중업이라는 걸출한 건축가의 작품입니다. 김중업은 세계건축계의 거장으로 알려진 르 꼬르뷔제의 건축연구소에서 건축 실무를 닦았으며, 아시아 끝의 작은 나라에 르 꼬르뷔제의 건축 언어를 이식했던 중요한 인물입니다. 제 모교인 부산대 인문관, 건국대 도서관, 프랑스대사관 등을 설계했지요. 둥글둥글한 유기적인 형태의 흰색 콘크리트 건물은 당시 지어지던 다른 건물들과 분위기가 많이 다르죠.


이 건물의 평면도를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어이쿠야. 완전 남성의 생식기 모양이더군요. 그것도 생생하게. 김중업 선생 알고 보니 유머가 대단하신 분인것 같아요. 건축가인 남편 얘기로는 자궁의 모양을 형상화한 건물이라고 '책'에서 배웠답니다. 어쨋건 19금 급 건물은 병원과 살림집이 함께 있는 파격적인 형태를 가졌는데, 이후 여러 상업시설들이 들어오면서 산부인과로서 기능을 잃었습니다. 지금은 간판을 모두 떼고 내부도 깨끗하게 리노베이션 중이었는데, 과연 어떤 건물로 사용될지 궁금했습니다.



 


 

2시 40분-  도보로 장충단길 공동주택으로 이동. 가는 길에 한국건축계의 투톱의 다른 인물 김수근의 경동교회를 지나갔다. 교회 옥상이 멋지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들었다.








장충단길 공동주택

장충단길 공동주택은 지번으로 찾는다면 길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여러 건물이 한자리에 빽빽하게 들어차있었습니다. 다행히 미리 찾아둔 자료사진으로 건물 확인 작업을 거쳤기에 찾아낼 수 있었지요. 근대문화유산이라고 보기에 공동주택은 살아오면서 많은 첨삭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집이 갖고 있는 고유의 뼈대는 옛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거주자들의 생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라 조심스럽게 몇 컷을 담아보았습니다.

장충동은 지금도 근대 시기에 지어진 가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지역입니다. 이 장소가 가진 역사성도 풍부하지만 광복과 전쟁 후 재건시대라 불리던 대한민국 산업화시기에 모여든 사람들로 북적이던 곳이라고 합니다. 공동주택은 1955년 경 무허가로 지어졌다가 1968년에 사용승인이 난 건물로서 50여년 동안 지역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하네요.





3시 30분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5호선 전철로 이동-> 충정로역 9번 출구 충정아파트 도착. 루미꼬 상은 예전에 이 일대를 답사하면서도 이 건물의 존재를 몰랐다며 새삼 흥분했다. 우리는 다 낡은 아파트를 두고 신기한듯 사진을 찍었다.








촬영 중인 루미꼬 상. 사진이 마음에 드는지?

햇살이 들어오는 곳에는 어김없이 화분이 가득!





충정아파트(유림아파트, 토요타아파트)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라고 알려진 충정아파트는 자그마치 1935년대에 지어진 건물입니다. 4층 짜리 집합주거가 처음 세워졌을 때 사람들의 놀라움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당시는 문화주택 열풍이 불어서 샐러리맨들이라면 너도나도 집 한채 가져보는 꿈을 꾸던 시기였지만 세로로 높이 쌓인 집을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있었을까요?

당시 서울에는 일본회사의 간부들을 위한 관사가 다수 지어졌는데, 이들 관사가 후에 아파트라는 고층 집합 주거를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미쿠니 아파트가 등장한 후에 관사가 아닌 임대주거의 형태로 유림아파트가 지어졌다고 합니다. 도요타라는 건축가가 지었다고 해서 도요타 아파트라 불리기도 했던 모양인데, 현재는 충정아파트라는 이름입니다. 주로 일본인들이 임대해서 살았고, 개인생활이 가능하며 최신 설비를 갖췄다고 해서 젊은 중산층에서 선호했다고 하는군요.

충정아파트는 세 동의 건물이 중정을 둘러싸고 모여있는 듯한 형태이며 중앙에는 급수탑이 높게 세워져있습니다. 지금은 세월을 실감할 만큼 노후되었지만 사람들이 사는 곳답게 어느 곳이나 햇살이 들어오는 곳에는 화분이 가득했습니다. 한국전쟁 후에 1층을 올려 지금은 5층 아파트인데, 불법으로 올린 5층때문에 지금도 거주자들의 갈등이 있는 모양입니다. 




 

4시 택시로 이동. 송월동 서울기상 관측소. 정문에서 올라가는 길이 거의 등산 수준이었다. 루미꼬 상은 이 건물이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서울 기상 관측소(구 경성측후소)

경성측후소라 불렸던 서울기상관측소. 기상청 관련 시설은 보라매공원으로 이전했지만, 그래도 서울 기상 관측소는 서울날씨의 기준이 되는 장소입니다. 관측소 앞 잔디밭에 심어진 진달래꽃이 피어야 서울에서 진달래가 피었다 하고 이곳에서 눈이 포착되어야 서울에 눈이 온다고 공식 발표한다는 말이죠. 우리나라에 근대적 기상업무가 시작된 것은 1904년부터입니다. 기상업무는 주변 여러 나라와 기상 정보를 공유한다는 의미이며 이는 곧 세계와 소통한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즉, 세계와 같은 기준의 시간대로 움직인다는 의미지요. 초창기 기상청에서 정오를 알리는 오포를 쏘고 오보라는 사이렌을 울렸던 것을 보면 기상업무는 근대적 시간 관념과 무척 연관이 깊습니다.


경성측후소는 1907년 업무를 시작했으며 건물은 1933년에 이 장소로 축후소가 옮겨지면서 신축되었습니다. 콘크리트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벽돌건물입니다. 건물을 둘러보니 흰색 도료가 떨어져 나가 내부 구조물이 드러난 부분이 있었는데, 검은색 벽돌이었어요. 벽돌은 붉은 색만 있는 게 아니랍니다. 벽돌 사이즈가 요즘 것보다 크고 독특해보였습니다. 근대시기에는 벽돌 건물이 무척 많이 생겨났는데, 벽돌의 사이즈나 종류가 무척 다양합니다. 벽돌 생산의 역사를 살펴보면 건축물의 연대와 스토리가 다채롭게 드러나지 않을까요?





5시- 도보로 정동길을 걸었다. 개화기 공관이 밀집해있던 정동길은 지금도 걷기 좋고 분위기 좋은 거리다. 러시아공사관 터에 남은 탑신을 살펴보았다. 정동극장 뒷편 중명전은 폐관시간이어서 외관만 구경했고, 덕수궁이 8시까지 개관이어서 덕수궁 내부로 들어가 정관헌을 살펴보았다.





러시아 공사관이 있던 자리에는 탑신만 남아있습니다. 아관파천의 현장인 러시아공관은 한국전쟁 때 폐허가 되었지요.



지난 해 개관한 중명전도 구경했습니다.





정동 산책- 러시아 공사관, 중명전, 덕수궁 내 정관헌

시간이 아슬아슬하다 했는데 이동시간이 짧아서인지 정동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정동은 대한제국기의 서방의 공사관들이 밀집해있던 장소입니다. 아관파천으로 잘알려진 러시아 공사관 터. 한국전쟁으로 건물은 파괴되었지만 탑신 하나만 남아있습니다. 공사관터는 파고라가 놓여진 공원으로 변신했더군요. 거닐기에 좋았습니다. 신아신문사 건물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명패가 붙어있었습니다. 이 건물을 지나칠 때마다 예사롭지 않아 보였는데 지금이라도 건물의 가치를 알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중명전과 정관헌도 둘러보았습니다. 루미꼬 상은 정관헌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고, 우리는 정관헌 옆쪽 한적한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고종이 커피를 무척 즐겼다는 사실, 손탁 호텔을 운영하던 손탁 여사가 커피 시중을 들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역관 김홍륙이 고종이 마실 커피에 아편을 타서 독살 기도를 했다는 이야기 등을 풀어놓았습니다. 요즘에도 정관헌에서 커피를 마시며 명사를 초청, 이야기를 들어보는 행사가 가끔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지요.  시민들에게 공개된 공원같은 서울의 궁궐이 무척 인상적이었던가 봅니다. 도쿄는 궁궐 건물이 일년에 한번 정도 개방된다고 해요.




6시 30분 택시로 효자동으로 이동. 보안여관을 살펴보았다. 오늘 답사는 여기까지. 길모퉁이에 있는 음식맛좋은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반죽을 직접해서 파스타를 만드는 멋진 장소였다. 파스타가 맛나서 디저트까지 먹을 수밖에 없었고, 우리의 이야기도 꽤나 길어졌다.






통의동 보안여관


보안여관은 루미꼬상과 함께 둘러보고 싶어서 제가 추천한 장소입니다. 1920년대 여관 건물로 쓰였던 2층짜리 주택인데, 중앙에 복도가 있고 양쪽에 방이 놓여있지요. 통의동 보안여관은 지금은 여관이 아니라, 예술가들이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로 사용되고 있어요. 안타깝게도 답사일에 전시가 끝나 작품 철거 작업이 진행중이어서 내부를 둘러보지 못했습니다.

통의동, 효자동 라인에 기묘한 옛 집이 무척 많고 카페나 갤러리로 활용되고 있어서 둘러보면 좋을 만한 장소이지요. 이 지역과 더불어 건너편 통인동, 청운동 등의 지역을 경복궁 서편에 있다 하여 서촌이라고 부르는데, 기회가 된다면 꼭 서촌 지역의 근대문화재들을 한번 소개해보고 싶습니다.


하루 답사로 서울을 모두 구경하기는 어렵지만 궁궐에서 관공서 건물, 집합주거, 현대 건축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건물을 둘러보았습니다. 이런 장소들을 함께 걷고 건물 속에서 감회를 나누었지만, 그 길에서 우리가 정작 나눈 이야기들은 우리 자신의 꿈, 하고 싶은 일, 그리고 어느 나라나 크게 다르지 않는 기혼여성으로서의 삶(약간 고달픈)이었던 것 같습니다.

건축물은 삶과 떼어놓을 수 없듯, 우리가 지금 탐하고 찾아다니는 옛 건물들도 현재 우리 삶과 결부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겠지요. 우리는 이들 옛 건물을 보면서 우리 삶을 보고 현재의 시간 속에서 옛 이야기를 찾아봅니다. 그러고 보면 삶이란 것은, 시간을 초월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찾아가보려면>>

서산부인과
서울시 중구 신당1동 13번지

장충단길 공동주택
서울시 중구 장충동1가 47번지 외

충정아파트
위치-서울시 서대문구 충정로 3가 250번지

서울 기상 관측소
위치- 서울시 종로구 송월동 1번지 / 문의- 02-736-1919

러시아 공사관
위치-서울시 중구 정동 15-1번지
사적 253호

중명전-정관헌
위치- 서울시 중구 정동 1-11번지 덕수궁
사적 제 124호


더 읽어볼 책>>


대한민국 아파트 발굴사/ 장림종, 박진희 저
우리나라 주거의 대표작 아파트.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싶다면 이책을!















 

영천 임고초등학교. 멋지지 않나요? 숲과 함께 하는, 작지만 오래된 학교입니다.




학교의 입구입니다. 굳게 닫힌 교문도 없고 담도 없지만 쭉쭉 뻗은 나무를 친구삼아 등교하는 길, 꽤 괜찮을 것 같네요.





나는 초등학교 때 전학을 두번이나 했다. 그때는 초등학교라는 이름도 아니었던 시절, 즉 국민학교 시절이었다. 부산 장전국민학교에 입학하여 잠시 후 구서국민학교로, 다시 졸업할 때 되어서 수영국민학교로 옮겨갔다. 얼마전 티비를 보니 야구선수 이대호가 수영국민학교 출신이란다. 그래서 '급' 반가움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있다. 30년가까이 오래된 기억이긴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몇 가지 선명한 기억이 떠오른다.


흰색 콘크리트, 혹은 살구색 콘크리트로 지어진 학교 교사와 넓은 운동장. 아마 그 운동장을 지금본다면 피식 웃음이 날 정도로 작아 보이겠지. 급식용 우유가 배달되던 1층 창고의 비릿하고 콤콤한 냄새, 운동회날 학년 매스게임을 하던 기억도 있고, 전교 조회가 끝나고 열 맞춰 교실로 들어오다가 딴 반 킹카 남자애를 나란히 서게 되어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던 기억. 그때는 나란히 서있기만 해도 부끄러웠다.
그리고 학교를 둘러싸고 있던 푸른 숲. 그리고 눈이 오던 날, 강아지처럼 손을 흔들며 운동장으로 달려나갔던 기억도 있다. 어쨋건 나는 그때 여덟살, 열살, 그리고 열두살, 그런 시절이었으니 기억들이 참 올망졸망하고 풋풋하다.




얼마전 경북 영천에 있는 임고초등학교에 갔다. 작년엔가 드라마 '조은지 패밀리'에 등장한 학교가 너무 근사해서 검색하고 보니 바로 이곳이었다. 학교가 눈부셨던 것은 바로 나무와 숲 때문이었다. 저토록 크게 나무가 자라는 학교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은 참 좋겠다, 라는 약간의 부러움도 있었다.


학교는 작고 아담했다. 학교 교사보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세월을 잊은 듯한 거대한 나무와 숲이었다. 하늘 끝까지 솟은 플라타너스, 그리고 아름드리 나무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곳에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골학교다운 순진함과 깊은 숲에 들어온듯한 청량함이 학교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학교 너머로 빽빽한 아파트가 보이는 신도시와도 달랐고 학교 앞만 나서면 위험스럽게 달리는 내 주변의 학교들과도 달랐다.


학교에서 숨을 쉬었다. 요즘 학교에서 깊은 숨을 쉴 수 있는 경우가 과연 얼마나 있던가? 도시에서 묻혀온 먼지들을 탈탈 털며 폐 구석구석에 남아있을 오염된 공기를 모두 뱉어냈다. 숲이 좋으니 학교가 더 좋아보였다. 임고초등학교 주변의 숲은 2003년에 대한민국 아름다운 숲 대상을 차지했다고 한다.



숲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물과 공기가 순환되는 지구과학이야기, 곤충과 식물이 자라고 죽는 생물 이야기, 숲 속의 정령에 대한 신화와 문학 이야기 등 숲속에서 놀면서 아이들이 배우는 것은 단순히 학교 교실에서 배우는 것보다 훨씬 폭넓고 창의적이지 않을까? 요즘 '통섭'이라는 말이 등장했던데, 통섭형 인간을 위해서라면 숲이 필요하다.


지방의 소읍 뿐만이 아니라 도시에서도, 나아가 서울에서도 필요하다. 도시에 아무리 더해도 넘치지 않는 것이 숲이다. 숲은 도시의 허파라고 하지 않는가? 도시의 규모가 커지고 도심이 많아질수록 숲의 규모도 늘어나야 한다. 우리는 맑은 공기를 흡입할 권리가 있는 시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숲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놀 수 있는 건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건물로 가까이 가보았다. 보수공사중인듯 비계가 설치되어 있다.



2층 규모의 아담한 교사. 그 앞에는 독서상이 자리잡고 있다. 세종대왕상도 모자상도 아닌 독서하는 남매의 조각상이 좀더 살가워보인다.




학급은 각학년에 1개반밖에 없다. 학교 교사 뒷편에 또다른 교사를 하나 더 지어 필요한 시설물로 활용하고 있다.





임고초등학교는 1924년에 4년제 학교인 임고공립보통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했다.  1938년에는 임고심상소학교로 이름이 변경되었다가 1941년 국민학교로, 다시 1996년에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우리나라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공립초등학교들은 대부분 이렇게 학교 이름의 변화를 겪었다. 이름이 바뀐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나라에서 근대적인 형태의 초등교육이 시작된 것은 1890년대 말의 일이었다. 을사조약 이후에 통감부가 들어오면서 한번 변화를 겪었고 1910년부터 시작된 일제강점기에는 총독부가 교육의 주체가 되어 식민지화 교육을 시작했다. 1911년부터 1945년까지 3차에 걸친 조선교육령이 발표되어 학제가 바뀌었고 교육의 목표도 조정되었다.

보통학교라는 명칭은 1911년부터 사용되었는데, 초등교육기관이 보통학교, 중등교육기관이 고등보통학교와 여자고등보통학교라 불렸다. 일본학생들을 위한 교육기관은 이름이 달랐다. 소학교, 중학교, 고등여학교다. 이것이 1938년에 발표된 3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한국과 일본 학생들을 통합하면서 학교 이름이 모두 심상소학교로 바뀌게 된다. 조일 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했으나 이를 통해 조선인 교육기관의 장을 모두 일본인으로 교체되었고 조선인들은 황국신민으로서 병역의 의무를 지게 되었던 것이다. 소학교의 이름 속에는 이런 의미가 있었다. 

이 조치는 태평양전쟁이 심화되는 1940년이 되면서 학교 수업이 단축되고 학교명칭도 국민학교로 바뀐다. 국민학교는 어찌된 일인지 광복 후에도 개칭되지 않고 오랫동안 초등교육시설을 대표해오다가 1
996년에 초등학교로 개칭하게 된 것이다.

 
학교 건물의 역사를 보면 임고초등학교가 지어질 당시인 1924년이 중요한 갈림길이 된다. 예전 건축방식인 목조형 혹은 벽돌조의 건물에서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기능적인 형태로 바뀌게 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아래는 임고초등학교와 같은 시기에 건립된 인천 창영초등학교의 모습이다. 벽돌조로 지어진 이 학교는 중앙 출입구에 장식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는데다 박공지붕을 얹어서 유럽의 어느 사립학교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즉, 인천의 건축양식은 여전히 벽돌조를 추구하고 있지만 임고 지역은 총독부의 지침대로 국제주의적 양식으로 세워지게 된 것이다. 벽돌과 철근콘크리트는 1939년까지 함께 쓰이다가 1940년대에는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모두 바뀌게 된다.




 
















아름드리 플라타너스의 규모가 압도적이다. 수백년은 되어야 이렇게 자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자료를 찾아보니 고작 백년도 되지 않은 나무란다. 학교가 지어질 무렵, 열 그루의 플라타너스를 함께 심었고 지금 그 중에서 일곱 그루가 남아있다. 플라타너스의 특성이 다른 나무들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속도로 생장속도가 빠르다는 점, 그리고 공기 정화 작용에 있어서도 타의추종을 불허한다는 점이다. 임고초등학교가 세워진 터가 물좋고 공기좋은 곳이라서인지 나무는 더할 나위없이 쑥쑥 자랐다.

플라타너스의 다른 종이 우리나라에서도 자생하는데 버즘나무라 불린다. 양버즘나무라 명명된 거대한 플라타너스는 벚나무, 회양목과 더불어 일제시대에 들여온 가로수들이었다고 한다. 임고초등학교의 플라타너스는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다. 촉촉하고 시원한 기운이 학교와 운동장을 감싸고 있다. 나무가 내려다보는 가운데, 아이들이 편을 나눠 축구경기를 시작했고 한쪽편에에서는 도시락을 싸서 피크닉을 나온 몇몇 가족들도 있었다. 



정글짐. 오랜만에 정글짐을 보니 몸이 근질근질하다. 초등학생 때 나는 날렵하게도 철골 사이를 누비며 정글짐을 오르락 내리락 했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그런 놀이기구다. 옛 생각에 덥석 정글짐에 올라갔다가 균형을 잃고 떨어질 뻔했다. 시간이 참 많이 흐른 것인가.


1970년대에는 학생수가 1200명에 달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한 학년당 한개 반 밖에 운영되지 않는다. 학교 교사 왼쪽에는 병설 유치원이 있어서 나이어린 아이들도 교정에서 마음껏 놀 수가 있다. 유치원 원생과 학교 학생을 모두 합해도 70명 남짓이다. 학생 수가 줄어들면 학교는 사라질 지도 모르지만, 왠지 이 교정에서는 그런 걱정조차 들지 않는다. 숲과 나무, 길과 바람, 학교에 포함된 모든 생명들이 다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아서인가, 마음이 달콤해진다.


홈페이지에서 임고초등학교 상징을 찾아보니 교화는 장미, 교목은 은행나무다. 플라타너스야, 미안해. 지금은 플라타너스에 가려져 있지만 아마도 가을이 되면 노란색으로 물든 은행나무가 도처에서 빛을 발하지 않을까.

 


영천 임고초등학교

위치- 경북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638번지
http://www.imgo.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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