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의 마당은 참으로 정갈했습니다. 누군가의 집에 초대를 받아 놀러갈 때, 이런 집을 만나게 되면 참 좋겠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일견 평범해보이는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80년의 세월을 간직한 한옥이 나타났습니다. 


댓돌이 신발을 벗고 대청에 올라앉으니 맞은편 담벼락으로 어여쁜 장식이 넘겨다보입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집을 가꾸었지요. 과하지 않게 취향을 담아서 장식하고 고치고 다듬고... 


이 장식들은 누구의 솜씨일까요? 


전통 산수화를 그린 아버지일까, 그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림을 그리거나 혹은 다른 일을 했던 아들의 솜씨일까, 얼마나 오래전부터 담을 장식해왔던 것일까요? 대답 없는 집을 한바퀴 돌아봅니다. 정갈하고 단정한 집. 마치 화선지에 검은 먹으로 그리는 수묵화처럼 조신하고 조용한 느낌이 집 안에서도 담뿍 묻어납니다.  














근대 전통화의 주요 인물인 청전 이상범 선생이 살았던 청전화옥과 그의 화실인 '청연산방'입니다. 누하동 조용한 골목 안쪽에 자리잡고 있지요. 요즘 서촌은 어딜가나 관광객과 산보객으로 들끓고 있지만 누하동 아랫골목은 다소 조용하니 다행입니다. 


화가는 특별하지 않은 우리 산하를 자주 그렸습니다. 검은 먹선으로 전통적인 필법을 정교하게 구사하여 우리 산수를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전통의 그늘을 고집스럽게 추구했던 청전의 길은 고요히 침하하는 것 같습니다. 


화가는 제자를 길러낸 산실인 화실을 영구 보전해줄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1972년에 타계했습니다. 화실 '청연산방'은 선생 가족이 살던 한옥과 또한 후에 가족들이 개축한 양옥집 사이에 있었습니다. 원래 작은 일본식 목조가옥이었는데, 양옥집을 증축하면서 화실도 그 안에 자리잡게 됩니다.   























2006년에 문화재청에서 발행한 기록화보고서는 한옥과 화가의 화실이 복원되기 전의 모습을 실측한 자료를 싣고 있습니다. 이 자료를 보면, 담이 있는 곳 앞에 방과 화장실이 증측되어 있음을 알 수 있어요. 



청전은 1971년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긴 글을 잡지<신동아>에 썼습니다. 그는 몰락하는 옛 왕조 말기에 태어나 식민지 시대와 해방, 전쟁을 모두 경험했습니다. 그 경험이 화가로 하여금 검은 점으로 환원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먹고 살기 위해 붓을 선택한 이야기, 때마침 당대 훌륭한 선생으로 불리던 안중식과 조석진 문하에서 사숙하며 스승의 필법을 닮기 위해 노력했던 나날들, 함께 배우던 동인들과 창덕궁 대전 벽화를 그리던 순간, 그리고 동아일보사에서 삽화 기자로 일하며 만난 주당들의 이야기는 마치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 즐겁습니다. 



1936년 8월 이상범은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하고서도 얼굴을 숙이고 있는 마라톤 선수 손기정의 가슴에 걸린 일장기를 지웁니다. 그 후로 동아일보는 신문을 발행하지 못하게 되고 관련자들은 모두 요주의 인물로 감시 당하게 됩니다. 청전은 몇 해 동안 붓을 멈춘 채로 있어야 했습니다. 외부활동을 끊고 집에 화숙을 차려서 그림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스승이 했던 대로 그림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을 제자로 삼아 그림에 정진합니다. 그 후로도 은신하며 조용히 살아온 화가는 글의 말미에서 “우리가 얼마나 훌륭한 친구들과 사위며 우리미술을 진작시켰는가”를 꼭 알려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나는 퍽 감동스러워 이 글을 여러 번 읽었습니다.  




















나는 화숙을 보전해달라는 유언을 남긴 화가를 떠올리며 그의 화실로 들어섭니다. 딱지처럼 조그마한 판화지에 그린 삽화들과 빨간 전각들을 들여다봅니다. 화가가 채 완성하지 못한 그림들, 소품들. 개인전을 한번도 열지 않았던 노화가의 의지를 읽어봅니다. 후대 화가들이 감동하며 이야기하는 그의 인품에 대해서도 생각해봅니다. 그의 그림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미술관에 다수 소장되어 있습니다.




아니,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청전의 붓이 허공에 잠시 멈추었던 시간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가 쓰지 않았으나 엄연한 사실들. 도려내고 싶은 시간으로. 청전은 신문사를 그만두고 칩거하는 동안, 고요히 자신으로만 향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청전은 1940년대 일제의 대동아공영을 찬동하는 그림을 그려 다수의 전람회에 출품했고 징병제를 옹호하는 삽화를 그렸습니다. 해방 직후 그는 부역한 댓가로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제외되었지만 미군정 치하에서 우익미술화단이 형성되자 다시금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국전작가와 국전 심사위원으로 추대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청전의 장남이자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동양화를 그린 화가인 이건영이 북한으로 간 사건은 다른 의미에서 화가에게 시련이었습니다. 친일 부역과 월북한 화가 아들. 화가는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나는 화가가 조용한 삶을 선택한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집을 끝까지 지켜달라는 마지막 부탁이 참으로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가 말하지 않은 것까지 더듬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을 통해 아직 명확히 규명되지 않고 잊히기에 급급한 시절을 확인하고 다시 회자되는 가능성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청전의 집은 한 인간의 복잡한 인생과 평가를 바라보는 곳입니다. 이런 장소가 중요한 것은, 우리 삶은 단 하나의 모습만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씌어진 것과 씌어지지 않은 것, 드러내고 싶은 것과 도려내고 싶은 것을 함께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많이 더 자주 우리의 근과거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 복잡하고 지난하고 치욕스런 순간들이 계속 덮이고 지워지고 잊힌다면 청전의 붓은 여전히 멈춰진 상태일 것입니다. 









교황이 서울에 오시기 직전에 명동성당에 다녀왔다. 그날 따라 유난히 화창한 하늘이 파랬다. 채도가 높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서있는 성당의 종탑이 더없이 경건해보였다. 

오랫만에 방문한 명동성당에서 몇 가지 변화가 보였다. 성당을 향해 올라가는 진입로가 획기적으로 바뀌었고 앞쪽에 별관도 열심히 지어지는 중이었다. 이런 공사들이 썩 좋아보이지 않았는데, 백년이 넘은 성당에 영향을 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지하 주차장을 파고 별관을 세우는 거대한 공사를 진행하는 까닭이다. 공사는 거의 마무리되고 있었다. 성당일대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붉은 벽돌을 썼다고는 하나 별관 건물은 명동 거리와 성당을 가로막은 벽돌로 된 거대한 벽처럼 보였다. 계단을 설치한 성당 진입로는 원래 명동 성당이 지어질 무렵의 형태를 따랐다고 한다. 예전에는 성당을 살짝 측면을 바라보고 올라갔다면 계단은 성당 입구로 직진하게 되어 있다. 거대한 종탑을 바라보고 걸어가는 길은 권위에 복종하는 걸음을 요구하는 것 같다. 성당은 속세와 담을 쌓고 하늘의 법만 따르는 중세의 그것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인가? 



계단을 올라와 성당 앞에 서니, 예전에 성탄전야 미사를 드리고 명동을 돌다 지칠때면 들어와서 쉬어가던 그때가 떠올랐다. 국내건 해외건, 답사를 할 때나 여행을 할 때 성당 덕을 많이 본다. 특히 무덥거나 추운 날은, 여행자를 위한 안락하고 고요한 쉼터가 된다. 그렇게 자주 내 발길이 성당에 닿았다. 나는 파리에 갈 때면 여정 중 가장 먼저 생제르맹 데프레 성당을 갔다. 1유로짜리 초를 피우고 여행을 무사히 마치게 해달라고 긴 기도를 올린다. 그 기도 덕분인지 여행은 무탈했고 감사하게도 즐겁고 행복했다. 성수를 찍어 성호를 긋고 어두운 회랑에서 밝디밝은 제단을 향해 무릎끓고 기도를 드리던 날들. 파이프오르간의 황홀한 음색을 들으며 내 영혼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던 날들. 


요즘 나는 세례명이 무색할 지경이지만, 미사의 기도보다 마음의 기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요즘이 더 종교가 간절해지는 시기가 아닐까,라고 생각해본다. 건물이 위로를 줄 수 있다면 이런 순간일 것이다. 미사가 아니나, 종교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한장씩 한장씩 벽돌을 쌓아 이 거대한 건물을 구축했다니 놀랍지 않은가. 나는 거대함을 즐기는 인간의 손이 참으로 위력적이라 느낀다. 이 벽돌들은 누가 어떻게 만들고 또 쌓았던 것일까? 조선은 벽돌건물의 역사가 거의 없다. 아니, 이 땅의 역사를 보건대, 벽돌 건물은 손에 꼽을 정도다. 


벽돌이 발달하지 못한 것을 몇 가지로 설명한다. 


빚고 구워야 하는 벽돌에 비해 화강석을 성형하는 역사가 훨씬 길었고 그 기술 또한 누적된 상태였으므로 점토를 성형하고 굽는 벽돌보다 돌을 사용하는 사례가 훨씬 많았을 것이라는 의견. 붉은 색을 불경한 색이라 여긴 당시 사람들의 마음 때문에 기피하게 되었고, 그러므로 우리는 검은 색인 전돌을 사용했다는 것. 벽돌이나 기와를 굽는 장인들을 천민 취급하고 관에서 관리대상으로 여겼기에 벽돌산업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정조는 벽돌로 거대한 수원화성을 지어 대단한 위용을 드러내는 기염을 토했으니, 우리 건축에서 벽돌이 가진 의미를 좀더 파헤쳐보아도 좋지 않을까?











명동성당 주변의 건물들도 모두 붉은 벽돌이다. 우측에 있어 측면만 간신히 보이는 건물은 명동성당보다 먼저 생겨난 사제관(현 사도회관)이다. 1890년에 축성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벽돌로 지은 근대식 건축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것으로 손꼽을 수 있는 건물이다. 후에 리모델링을 거쳤다고 한다. 사진에 바로 보이는 건물은 서울대교구청으로벽돌 아케이드에서 검은 수사복을 입은 수도사나 사제가 시간을 거슬러 불쑥 나올 것 같다. 




오늘, 명동성당에 오랜만에 방문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성모성화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전시가 열리는 살트르 바오로 수녀원 기념관은 늘 비밀스럽게 문을 닫고 있던 곳. 내부에는 명동성당만큼이나 오래된 건물들이 있고 차곡차곡 쌓인 시간이 고요하게 숨어있다. 








사람의 발길이 번잡하게 오가지 않아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온하게 잘 자란 꽃나무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억지로 꾸미지 않아서, 계절의 변화에 순응하며 맑게 반짝이는 자연의 모습이 그곳에서 생활하는 수녀님들의 모습과 같다고 느껴졌다. 


월전 정우성, 장발, 운보 김기창, 그리고 배운성 등 우리 화단의 주요작가들이 그린 성모와 예수, 그리고 성인들의 그림은 당시 사람들이 종교와 예술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 지를 알려주었다. 지극히 순수하고 아름다운 여인, 현명하고 다정하고 끊임없이 따스할 것 같은 그 품, 성모의 팔 안에서 당당하게 바라보는 어린 예수의 어엿한 자태. 곱고 정갈한 이미지들은 종교의 순수성을 더욱 강조하면서 우리 마음에 파고든다. 


우리 전통의 어머니상이 성모상과 오버랩되고 예수와 성모의 일생이 우리 전통식 풍경 속에 녹아든다. 다시 들여다보면 이들은 종교가 지역에 파고들기 위해 지역과 결합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동시에, 전통 도상이 가진 힘들을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던 1960년대의 그림들인 것이다... 


성화전시회는 촬영이 불가하여 1930년대에 지어진 건물의 내부를 그저 눈으로 마음으로 남길 수밖에 없었다. 명동성당은 성모에게 봉헌된 성당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명동의 노트르담. 아베 마리아.  

  












너무나 거대해서 한눈에 파악되지 않는 이 건물을 찬찬히 뜯어보면 이런 형태다. 전형적인 고딕 건축물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데, 전통고딕이라기보다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신고딕양식을 따른 형태로 본다. 1883년에 종현에 있는 윤정현의 집 부지를 조선교우 김 가밀로의 명의로 매입하여 한문서당을 운영했으며, 1887년에 성당을 짓기에 충분한 땅을 마련하고 코스트 신부가 종현의 정지작업을 시작했고, 1892년에 건축 공사를 시작했다고 나온다. 설계도면은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제공한 것으로 본다. 코스트 신부, 프와넬 신부 등은 파리외방전교회가 세운 초기 성당들- 약현성당, 용산신학교, 명동성당, 인천 답동성당, 전주 전동성당 등에서 그 이름을 다시 들을 수 있다. 



벽돌은 어떻게 수급했을까? 


인천 조계지에 19세기 말엽에 등장한 건축물은 대부분 벽돌을 수입해와서 건물을 지었다. 그것은 인천이 무역항으로서 상선이 자주 드나든다는 장점이 있고, 조계지 내부에서는 자국의 물건이 통용되는 일이 용이했기 때문에, 벽돌 공장을 짓고 기술자로 하여금 벽돌을 굽게 하는 것보다 훨씬 경제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사한 시기에 지어졌다고 하더라도 명동성당은 규모면에서 필요한 벽돌의 갯수가 압도적이다. 현지에서 생산되는 재료로 현지 인력이 현지의 자본으로 성당을 세우도록 요구했던 파리외방전교회의 입장도 있었고 또한 수입하는 비용을 충당하기 어려우므로 서울에서 직접 벽돌을 구워서 사용하게 되었다. 19세기에 늘어난 벽돌 건물의 수요에 따라 궐내에 지어지는 건축물 등에 수급하는 연와제조소가 세워졌고, 와서현이라 하여 현재의 신용산 일대에 벽돌과 기와 등을 제조하는 현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명동성당의 벽돌도 와서현의 어딘가에 가마를 세우고 구워냈으리라. 


이미 양관을 지어본 경험이 풍부한 한국기술자들도 있었을 터이지만 종교시설에 쉽게 나서기는 어려웠을 터이고 부족한 재원으로 어렵게 성당을 짓다보니 중국의 하급 노동자들과 기술자들을 불러다 건물을 축조했을 것이다. 이들은 청일전쟁으로 정세가 불안해지면 본국으로 돌아갔다가 전쟁이 끝난 뒤 다시 배에 실려 서울로 와서 일을 했다. 벽돌제조와 석공은 조선인들도 참여했다. 벽돌은 성분으로 보아 용산신학교와 성당을 지을 때 썼던 벽돌과 같은 장소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1898년 5월 29일 성령강림축일에 명동성당은 축성식을 했다. 참석자가 3천명을 넘어섰고 조선정부 대신과 고관, 양반들이 성당을 찾아와 사진을 남겼다. 








1890년에 성당축조에 앞서 주교관을 먼저 세웠다. 좌측 중앙의 2층짜리 양관이 주교관이다.  

아직 성당은 세워지지 않았다. 




성당이 점차 형태를 갖춰가고 있다. 종현의 남쪽에도 택지 개발이 되어 일본식 목조가옥과 조선 기와집과 초가집 등이 뒤섞여있다.  성당은 쉽사리 완공되지 않았는데, 천장이 무너져 인부가 다치는 사고가 생겨 건축가 사바친에게 구조 안전 진단을 요청하기도 했다. 



성당이 축성되었다. 초기에는 진입로를 계단으로 오른다. 현재 복원한 진입로의 모습이 이와 유사하다. 

성당을 짓는 중간에 코스트 신부가 장티푸스로 사망했고 뒤이어 프와넬 신부가 공사를 이었다. 




당시 명동의 모습은 이랬다. 당시에는 약현성당과 종현성당이 서로 바라보였다고 한다. 

언덕위의 성당은 프랑스 성당, 불국교회당 등으로 불렸다.  




성당 뒷편에 있는 바오로 수녀원은 1900년부터 하나씩 건물을 세웠다. 

성당 뒤쪽에서 남산에 이르는 지역이 개발되기 시작한다. 일본인들이 들어오다. 



1920년대의 명동성당. 명동의 남측이  훨씬 더 조밀해지고 집들도 높아진 모습이다. 





자료출처: 명동성당 실측 조사 보고서(2002, 문화재청) 





조홍석의 <근대 적벽돌 생산사에 관한 연구 (2010, 건축역사연구 제 19원 6호)>논문에는 벽돌생산자들의 현장을 흐릿하나마 더듬을 수 있다. 본격적으로 정부에서 벽돌건축을 산업화하는 시기는 1907년부터이다. 탁지부(건축및공사를 담당하는 부서)에서 마포에 호프만 가마를 설치한 연와 제조소를 두고 한강의 모래와 점토를 섞어서 벽돌을 만들었다. 이 장소는 상당히 오랫동안 용산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1945년도 지도에서도 벽돌공장의 위치가 정확히 명시되어있다. 이 위치는 지금 용산 미군 부대 내부에 있다. 아마 미군부대 안에는 오래된 벽돌 공장의 건물도 그대로 남아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이전과 이후, 이땅에는 일본인이 주도하고 한국민간이 뒤따라가는 벽돌산업이 크게 번성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벽돌건물에 대한 내구성에 의문을 제시한 콘크리트 업자들이 득세하기 전까지 이 땅의 건물은 벽돌이었다. 그리고, 점차 늘어나던 수요는 1939년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북한 지역을 산업지역으로 개발하면서 공장 등지를 많이 건설하게 된 까닭일까?



벽돌 건물 이야기를 좀 더 해보려고 한다. 벽돌건물은 보기 좋다. 그러나, 한때 붉은 벽돌 건물은 싸구려 다세대 주택에나 쓰이는 싼 집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했다. 동서고금의 벽돌 건물들을 재미있게 바라보는 방법을 찾아보고 벽돌 건물의 흥망성쇠도 알아보려고 한다. 이른바 <벽돌 품평회> 시작한다. 









낙원상가를 지나칠떄마다 시인 기형도가 생각난다. 




그가 종로3가의 파고다극장에서 숨진채 발견되기 전에  낙원상가 근처에서 누군가를 만나 저녁시간을 보냈다는 기록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살아서 마지막으로 밥을 먹은 곳이 낙원의 언저리다. 그 생각이 떠오르면 나는 낙원상가의 이름 때문인지 밥을 먹었다는 행위 때문인지 마음이 엉키어버린다. 지하차도처럼 컴컴한 도로 위에 세워진 낙원상가. 그곳은, 음악과 영화라는 두 가지 엔터테인먼트를 즐기려던 젊은이들의 성지와도 같은 장소였을 터인데, 지금은 다소 철지난 분위기를 풍긴다. 


반질반질 잘 닦인 색소폰과 매끈하게 잘 빠진 기타가 관객을 부른다. 나는 악기라는 신묘한 물건의 소리를 참 좋아하지만, 낙원상가의 악기들은 조금 쓸쓸해보인다. 그것은, 내가 이 거리에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오래전 영화를 상영하던 스크린의 기억이거나, 혹은 어둠을 뚫고 빛이 만들어내는 영상을 바라보는 행위 자체의 허무함에서 오는 감정일 것이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바라보던 그 두시간 동안 마치 밤하늘을 유영한 것처럼 나는 행복했거늘, 암막을 젖히고 환한 세상으로 나올 때, 아직 채 감정이 식지 않아 들뜬 마음과 이미 끝나버린 영화 앞에서의 허무함이 뒤섞인 채 환한 세상의 빛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요즘은 영화의 스토리를 즐기려고 영화를 보려는 마음보다, 깊이 몰두했다가 금세 깨져버리는 환타지의 허무함 때문에 영화관에 가는 것을 꺼리게 된다. 환상이나 즐거움은 허무한 감정과 같이 있어 소중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한 것인가. 


그 허무함을 이해하면서 기형도의 시를 읽는다. 그의 시 속에는 낙원이라는 단어가 한번도 등장하지 않지만서도, 빈집같은 사랑과 질투하는 마음과 서울에서 분노를 배워버린 한 사내의 절규와 포도밭과 공장 같은 단어에서 종로거리에 번듯하게 서있는 낙원의 중의적인 모습이 오버랩된다. 


기형도는 '그날'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나를 끌고 다녔던 몇 개의 길을 나는 영원히 추방한다. 내 생의 주도권은 이제 마음에서 육체로 넘어갔으니 지금부터 나는 길고도 오랜 여행을 떠날 것이다. 내가 지나치는 거리마다 낯선 기쁨과 전율은 가득차리니 어떠한 권태도 더이상 내 혀를 지배하면 안된다." 














인사동과 탑골공원 사이에 헐리우드 극장 간판이 기억에 선연한 낙원상가가 있다. 도로 위에 커다란 콘크리트 덩어리가 툭하고 떨어진 듯한 형태의 건물. 도로 위에 놓인 거대한 주상복합건물인 ‘낙원삘딍’은 1969년에 완공된 것이다. 오래전에 그 아래 도로를 지나가며 나는 서울은 몹시도 미로같은 곳이라고 중얼거렸다. 도로를 지나쳐가면 운현궁 앞으로 향하게 되고 옆으로 빠져나가면 인사동이나 탑골공원 뒤쪽 동네로 가게 된다. 그늘 깊은 자리에 내부로 통하는 문이 있다. 상가와 아파트로 가는 엘리베이터가 두 대 오르내리고 있다. 일년 365일 어두컴컴한 건물의 한쪽에 오래된 악기상점이 있고 지하에 있는 낙원시장으로 내려가는 진입로가 입을 벌리고 있다. 주차장처럼 보이는 그 안에 오래된 식료품가게와 정육점, 저렴한 가격에 끼니를 해결하는 국수집, 국밥집이 있다.


예전부터 음악한다 하는 사람들은 악기상이 몰려있는 낙원상가 주변을 성지처럼 여겼던 모양이다. 동네 언니 오빠라면 기타 정도를 칠 줄 알던 시절에는 꽤나 잘 나갔을 게다. 악기 대신 노래방이 성업하던 시절에는 침체되었다가, 밴드활동이 늘어난 요즘은 그런대로 생명력을 되찾고 있다.













헐리우드 극장은 헐리우드 클래식이라 하여 흘러간 고전 영화를 저렴한 가격에 볼 수 있는 노인전용상영관으로 바뀌었다. 그 옆에는 특별한 프로그램으로 특별한 영화광들을 불러들이는 시네마테크 전용관인 서울아트시네마가 있다. 두 영화관의 출입구가 있는 상가 4층 야외 공간에는 “지난 주에 벤허를 봤는데, 참 좋더군. 그래서 한번 더 보려고 왔어.”라고 말하는 어르신들과 켄 로치의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대학생들이 한 공간에서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그 어디에서도 섞일 가능성이 없는 두 연령대가 한 곳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것이 낙원상가 4층의 풍경이다.


그들은 모두 헐리우드 키드였을 지도 모른다. 나도 어린시절의 많은 부분을 영화에 빚졌다. 대학에서도 영화 동아리에 몸담고서 특별한 영화들을 보는 즐거움을 만끽하곤 했다. 그 즈음 시네마테크협의회가 막 추진되었고 영화는 많은 기회를 주는 산업이 되려던 참이었다. 나도 선배들이 해온 길을 따라 영화의 수혜를 누릴 것이라 기대했었으나 20년이 지난 후, 나는 영화관을 거의 찾지 않는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 극장을 찾지 않는 이유는 영화를 잊었기 때문이었다. 판타지가 사라진 현실에서 영화라는 아름다운 스토리는 자본과 3D 기술로 아무리 치장하더라도 지나가버린 아름다운 시절을 되살리려는 듯한 슬픈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불꺼진 영화관을 나설 때의 아득한 기분. 흥분이 짜릿한 만큼 허탈함은 깊다. 



 


 



중정에는 거대한 벽처럼 아파트가 솟아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낙원상가 주변을 다녔으나 아파트가 있다는 것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층수를 헤아리다가 그만둔다.



1968년 7월 15일에 개관한 낙원상가아파트는 그 전해에 종로 탑골공원 주변의 판자촌 시장을 현대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청계천 주변에 세워진 거대한 세운상가와 함께 추진된 주상복합 건물. 모두 16층의 아파트와 4층짜리 현대적인 상점을 목표로 완공된 낙원상가는 40미터로 확장한 도로 위에 세워졌다. 어수룩한 장터에 불과했던 낙원동 일대의 지가는 1년 사이 두배 이상 크게 뛰었다. 낙원동에 사는 사람들은 진정 낙원에 있는 듯했을 것이다. 넓은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와 도로주변으로 솟아오르는 타워들. 16층이라는 초고층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도시가 끝없이 엔진을 가동하며 부글부글 끓고 있는 용광로처럼 보였을 것이다.










지나버린 후에야 찾아오게 된다. 잃은 후에야 그리워한다. 놓친 후에야 깨닫는다. 



탑골 공원 북쪽의 길을 따라 걷다보면 여관촌과 쪽방촌 그리고 한옥지구가 등장한다. 재개발을 맞은 익선동 한옥지구는 절반 정도 파괴되었고 절반 정도는 여전히 꽃을 가꾸고 골목을 청소하며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떠나보내는 것도, 남아있는 것을 보는 것도 힘겨운 검은 구멍같은 서울의 중심. 기형도의 시집 <입속의 검은 잎>에서 읽었던 구절이 생각나는 그 길의 모퉁이. 흔적만 남은 낙원이 여기 있다.



 “세상은 온통 크레졸 냄새로 자리잡는다. 누가 떠나든 죽든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있으라.”

















‘아회도’는 18세기부터 


등장한 그림의 한 종류로 문인들의 사적인 모임을 그린 그림을 통칭하는 말이다. 내가 아회도라는 그림을 알게 된 것은 원서동에 있는 춘곡 고희동 가옥에서였다. 고희동이 그린 ‘아회도’의 모사본을 보고서 참 유쾌하다 싶었고 그림에 얽힌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고희동의 '아회도'는 솔직담백한 필치로 재치있게 그려낸 모임 풍경이다. 몇 순배의 술이 돌고 모임의 흥취가 무르익을 무렵 먹으로 가볍게 그린 듯하다. 그림 속에는 여섯 명의 남자들이 서로 둘러 앉아 음식을 즐기고 있다. 그 주변으로 전등, 책, 벼루, 종이 등이 흩어져있다.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매화가 심어진 화분이 놓여 분위기를 돋운다. 어여쁜 꽃나무를 완상하는 일은 시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 그때 한 인물이 그릇을 들고 들어온다. 인물을 세밀하게 그리지 않았으나 얼굴이나 몸집의 특징이 살아있다. 얼굴이 둥글며 콧수염이 양쪽으로 난 인물은 고희동 자신을 표현한 것이고, 그 옆에 짧은 머리에 콧수염이 있는 인물은 육당 최남선, 그 옆은 위창 오세창이다. 모임의 친구들이 그토록 좋았던지 볼수록 다정한 정취가 배어나온다.



춘곡의 집은 1910년대 말부터 여러 문인들이 드나드는 사랑방 역할을 했는데, 그 중에는 지속적인 여러 모임이 생겨났다. 특히 최남선, 오세창 등과 나이와 입지를 뛰어넘는 교류를 했던 것으로도 잘 알려져있다. 시서화에 능했고 고미술품을 수집하고 완상하는 취미가 있던 그들이므로 정기적으로 모임을 열어 흥과 미를 나누었다. 모임의 내용을 일지로 적고 각자 시를 짓고 또 글을 써서 '시축'을 남기기도 했다. 특히, 자주 어울리던 일곱명의 명사들은 각자의 집을 돌면서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짓고 미술품을 감상하는 시회를 자주 열었다. 시회 후에는 조촐한 문집으로 그날의 결과물을 펴냈다.   


조선후기 어느 문인은 자신의 아회를 ‘날씨가 좋은 날에 모여 술은 세 순배를 넘지 않으며 안주는 세 가지를 넘지 않는 대신, 차와 책은 마음껏 마시고 읽으며 흥이 나는 대로 시를 읊는 모임’이라고 했다. 어쩌다 모여서 절제없이 마시고 즐기는 모임이 아니라 지켜야할 나름의 기준과 규칙을 갖추어 참석자에게 절제와 정성의 마음가짐을 요구했던 것이다. 조촐한 규약은 유쾌한 아회를 위한 필요충분조건이었다. 여흥을 즐길 때도 품위를 갖추었고, 은둔하면서도 심미의 활동을 접지 않았다. 미적인 것이 생활이 되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고희동의 아회도는 ‘일기회’라는 모임의 회합을 그린 것이다. 모임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한가지씩 음식을 들고왔다고 하여 그렇게 불렸다. 춘곡의 사랑방 풍경이 그림과 같았으리라. 어깨를 맞대로 앉은 사람들이 매화분을 완상한 후, 술과 음식으로 흥을 돋우고 차를 마시며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모습들. 그들은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술을 마셨을까, 어떤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는가, 지금 저 그림에서는.



 





















춘곡 고희동의 집이 



창덕궁 서편 돌담길을 따라 올라간 위쪽 마을에 자리잡고 있다. 고희동이 누구인가. 우리나라 최초로 그림 유학을 떠나 서양화의 기법을 배워온 예술가다. 서화협회를 조직하고 전람회를 개최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중앙고보, 휘문고보에서 미술을 가르치며 제자들을 길러냈던 인물이다.


고희동은 1918년에 원동이라 불리던 이 동네에 자신의 집을 지었다. 안채와 바깥채가 ‘ㄱ’자 모양이었다가, 나중에 화실이 있는 사랑채를 증축하여 약간 꺾인 듯한 ‘ㄷ’자 모양의 집이 되었다. 집은 약간 경사진 언덕에 살짝 기댄듯 서있는데, 담 너머로 보면 창덕궁의 돌담 안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와 사철나무 등이 무성하게 푸른 빛을 흘린다. 너른 마당 안에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집을 지키는 수문장마냥 든든하게 집을 내려다본다. 마당에서 보면 단단한 바깥채의 외면만 바라보일 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안쪽에는 내밀한 공간들이 오밀조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집 구조가 독특하. 현관으로 들어가면 긴 복도가 좌우의 공간으로 연결되고 복도의 유리문 너머로 또 하나의 마당이 숨어있는 것이 보인다. 현관의 왼쪽에는 방과 부엌 등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공간이 있고, 오른쪽에는 화실과 사랑방이 있어 기능적으로 잘 나뉘어 있다. 부엌과 안방은 실내 계단을 두어개 디디고 올라서야 한다. 경사지에 앉힌 집이기도 하지만, 계단 덕분에 자연스럽게 안채와 바깥채가 나뉜다. 하지만 이 집에는 대청마루는 없다. 이런 점이 전통한옥과는 다른 분위기를 준다. 오히려 방을 이어주는 복도로 인해 일본식 주택같은 느낌도 있다.  


무엇보다, 이 집의 중심공간인 사랑방과 화실을 구경하는 게 먼저다. 화실은 크고 넓은 창이 있어 서양식 거실의 느낌을 준다면, 사랑방은 좁은 문살과 작은 규모로 보아 단연 한옥의 느낌 그대로다. 화실에서는 큰 그림을 그렸을 테고, 사랑방에서는 붓을 먹에 찍어 작은 그림을 그렸을 게다. 구불구불한 복도 너머로 묵향도 느껴지고 유화물감의 진한 냄새도 풍겨났을 터이다. 이 집에 머물렀을 향기를 떠올려 본다. 춘곡의 자손에게는 테레빈유나 먹의 냄새처럼, 그림에서 나는 냄새들로 유년의 기억이 채워져 있지 않을까?


본래 서양화를 배웠고 ‘부채를 든 자화상’에서 풍기는 빛과 어둠의 흔적들이 여실히 그의 배움을 증명하고 있지만, 춘곡은 오랫동안 누려왔던 전통의 품격으로 되돌아 사군자와 산수로 방향을 틀었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멀찍어 떨어져 시서화로 도피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림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보이기도 하고 깊은 숲 속으로 숨어들수도 있는 그런 곳이었다. 1940년에야 비로소 고희동의 첫 개인전람회가 부민관에서 열렸는데, 이때에 유화뿐만 아니라 동양의 전통적인 사생과 정서를 담은 그림들이 많았던 이유도 그것이다.




















지정된 휴일 외에는 



구나 춘곡의 집에 들어가 구경하고 고희동이라는 화가의 삶을 감상할 수 있다. 옛 문인들은 매화를 완상했다고 하는데, 나는 옛집을 완상하는 취미를 갖고 있다. 쓰다듬으며 촉감을 느끼고 오래 묵은 재료들이 한꺼번에 풍기는 냄새를 즐겨 흡입한다. 빛이 바랬거나 금이 가고 뒤틀린 지점은 오래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런 틈에서 건물은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깊에 빠져서 완상하기에 춘곡의 집은 그리 좋은 대상은 아니다. 복원의 절차를 거치면서 공간의 구조 외에는 많은 부분이 훼손되어 원형을 잃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말, 춘곡은 삼대가 함께 살아온 이 집을 떠나 제기동의 양식집으로 거처를 옮겼고, 소유주가 바뀌면서 여러차례 수리를 거쳤다. 1995년에 안채와 사랑채가 옛 형태로 복원되었으나 2005년에는 한샘이 주차공간으로 쓰기 위해 이 집을 매입하여 건물 일부를 철거하기도 했다. 이 집의 멸실을 막으려는 지역문화단체들이 활발히 나섰고, 이윽고 종로구청이 매입하여 복원이라는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실측조사에서도 사라진 옛 흔적을 찾아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기록을 찾아 대조하는 과정도 충분하지 못했다. 결국 집의 기단과 창, 담장과 대문은 춘곡 선생이 살던 시절과 확연히 달라졌으며, 벽지와 조명 등의 디테일한 부분에서도 다시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 많다.
















 


 

이 집의 가장 아름다운 곳은 



복도다. 화가가 직접 설계했다는 이 집의, 마치 달팽이처럼 꺾인 복도에 들어서면 나는 1920년의 어느 날에 초대된 것 같다. 시간이 미끄덩하게 늘어나서 어딘가 모호한 그림 앞으로 데려다 놓을 것 같은 기대감이 생긴다. 나도 음식이 담긴 접시를 가져와야 옳을 텐데, 그 당시에는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제육보쌈이나 잡채, 궁중떡볶이 같은 거라면 서로의 입맛에 맞는 음식이 되련가? 먹고 마신 후에는 맑은 육수의 냉면으로 입가심을 하면 되련가?



나는 상상만으로 꾸며놓은 서양식 화실을 지나 마당으로 나가는 문앞에서 서성거렸다가, 반대편으로 계단을 올라가 열리지 않는 문의 문고리를 잡아당겨도 보았다. 대청은 없지만 마루바닥을 깔아놓은 안채의 부엌에 놓인 의자에 앉으면 집이 또다른 모양으로 보인다. 


그렇게 오래 복도를 걷다가 앞 마당으로 나와서 키 큰 은행나무 아래에 선다. 나무 아래 서면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많은 것들이 보인다. ‘최초의 서양화가’라는 서술 외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어느 화가가 즐겼던 인생의 많은 순간들을 더듬어본다. 화가와 내가 서로 만날 만한 지점은 많지 않지만, 나는 불혹을 앞둔 화가가 시회를 열어 글을 짓고 감상을 나누었던 그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해보았다. 


그런 운명같은 시간을 그냥 스쳐보내면 안된다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붉은 장미 넝쿨. 


아마도 오늘은 골목에 드리웠던 붉은 넝쿨장미의 꽃잎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오래된 담과 보도에 길게 늘어진 꽃들의 그림자로 그 흔적을 남기게 될 것 같습니다. 대전 소제동의 이른바 '관사촌'의 골목길을 조심조심 지나가던 발걸음, 조용히 바라보던 사람들의 모습들. 그 위로 드리워진 붉은 장미들. 


오오세 루미꼬 씨와 대전 답사를 했던 것이 딱 일년 전이었습니다. 일년만에 루미꼬 씨가 일본인 지인들과 진행하는  답사를 쫓아 대전에 다시 왔습니다. 이미 한번 닿았던 길은 익숙한 그림자를 만들었고, 무뚝뚝하게 서있는 비늘판벽 건물도 그리 어둡지 않아 보입니다. 오늘은, 그때는 들어가보지 못했던 건물의 내부도 들여다보고, 복잡하기만 했던 소제동 골목길도 인솔자를 따라 우리동네처럼 걸어가볼 것입니다.  

  


루미꼬 씨와 가끔 함께 답사를 가곤합니다. 함께 걷는 그 길에는 많은 부분 공감하고 또 어떤 부분은 의아해하며 미묘한 차이점을 발견합니다. 같거나 다름을 이야기하는 시간이 참 좋습니다. 소제동을 걸으러 간 작년을 떠올리며 루미꼬 씨는 그날도 덩굴에서 장미가 그토록 화사했노라고 이야기합니다. 나는 바짝 긴장해서인지 장미는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후텁지근했던 날씨와 시원하게 들이켰던 맥주, 만났던 사람들, 걸었던 길은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붉은 덩굴장미. 덩굴장미가 그토록 붉었습니다. 그날도, 오늘도.


기록은 기억보다 길다,고 하니, 오늘을 열심히 기록해두어야겠습니다. 루미꼬 씨와 다섯 명의 일본인 친구들이 함께 한 답사. 그들은 대전의 길과 건물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기록했습니다. 서로 걸음을 도와가며 온종일의 일정을 지친 기색 없이 함께 했습니다. 한국문화를 좋아한다는 이토 마사히코 씨는 한국에서 생활한지 벌써 20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대전의 곳곳을 촘촘하게도 기록하고 있노라고 루미꼬상이 덧붙입니다. 본인의 고향인 큐슈쪽에 남아있는 한국의 흔적들을 조사하고 싶다는 토모오카 유키 씨, 한국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글을 쓰지만 정작 본업은 웹 디자이너인 마치노 다카히로 씨, 그리고 미쯔오카 에츠코  씨, 천안에서 혼자 오신 후지사와 아츠시 씨. 하는 일은 다르지만 한국의 속살을 보고 싶은 마음으로 모였습니다. 우석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이토 씨는 대전 근대문화유산 연구자들과 함께 하는 게 어색하지 않을 뿐더러, 자료도 나누고 문서도 해석하는 등 서로 돕는 사이였습니다. 



소제동은 "대전 근대 아카이브스 포럼"의 이희준 선생의 안내로 다녔습니다. 


작년 루미꼬 씨와 둘이서 골목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둘이서 머리 맞대고 자료를 읽어가던 때가 떠오릅니다. 의문을 갖고 서로 질문하고 추리하고 상상하던 시간. 그 시간이 있어서였는지 오늘 그 길은 조금 달라보였습니다. 연구자는 우리의 궁금증을 훌쩍 앞서가며 관사촌의 지리적 변화와 건물 하나하나의 변화의 추이를 이야기해주며 과거의 시간으로 안내합니다. 



이내 골목 속에 우리 모두가 그림자처럼 스며듭니다. 시간을 조금 거슬러 가봅니다. 

소제동은 충분히 그런 곳이었습니다. 
















소제동은 철도 관사촌이 넓게 퍼져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아름다운 호수였다고 전해지는 소제호가 매립되고 주택지로 건설된 땅이 이곳입니다. 

이 지역은 늘 큰 물이 범람하는 지역이었고 물난리를 예방하기 위해 치수사업을 하면서 강줄기의 흐름이 바뀌고 새로운 천이 생겨났습니다. 그것이 대동천입니다. 그 주변에 경부선 철도 건설과 철도 운영을 위해 이주해온 일본인들이 살았던 동네입니다. 이 동네는 철도관사촌입니다. 조사된 바로는 주로 7~8등급의 관사촌이며 드물게 6등급도 있다고 합니다. 이 정도 등급의 관사는 하나의 건물에 두 세대가 대칭으로 구성되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후 변화된 모습을 보면 각 세대가 따로 집을 수리하고 변화시켜가면서 한 채의 집이지만 양쪽이 서로 다른 변화를 보여줍니다. 놀랍게도 많은 수의 집이 큰 변화없이 보수만 하면서 살아왔다고 합니다. 원래 관사촌은 담장이 없었으나 이 집들이 적산으로 취급되어 개인에게 불하되면서 담을 올렸고 담과 담사이에 적당한 골목이 생겼습니다. 5~60년에 이르는 이 골목은 소제동의 역사와 같습니다. 이제는 대전 그 어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꼬불꼬불한 골목길이 존재하는 보석같은 동네가 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지난번 포스팅을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http://sweet-workroom.khan.kr/38)












우리는 왜 골목을 좋아할까요? 오래된 동네, 소위 달동네라는 지역을 굳이 찾아가는 이유는 오래된 동네를 거닐때 가장 즐거운 점이 바로 골목입니다. 약간 굽어있고 약간 경사도 있고 길도 조금 울퉁불퉁하고 적당히 좁은 그 길을 따라 대문이 이어지는 것. 때로는 막다른 곳에 이르기도 하고 때론 큰 길로 이어지기도 하는 길들. 이 길들은 왜 우리를 이토록 사로잡는 것일까요? 



처음 관사촌에 생겨날 무렵, 국유지 터에 담도 없이 집이 있었을 때는 골목도 없었을 겁니다. 그때 집과 집 사이의 공간은 서양식으로 말하자면 court이고 우리식으로는 마당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즉, 담이 없다면 골목은 형성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너무 높다란 담도 골목의 분위기를 방해합니다. 주변의 시선으로부터 집 안을 슬쩍 가려주는 정도로 정원수의 잎사귀가 바깥에서도 적당히 보이는 것이 담의 조건입니다. 


골목의 폭은 두사람이 느슨하게 나란히 걸을 정도면 충분합니다. 자동차는 골목의 조건에 들어가지 않아야 마땅합니다.  사람의 몸과 키, 사람의 시선의 높이, 사람의 걸음, 팔 넓이.. 이런 것들이 척도가 된 길이 골목입니다. 도로가 차를 척도로 삼았다면 골목은 사람을 척도로 삼은 것이죠. 


때로는 꺾여있고 때로는 비스듬히 호를 그리기도 하고 때로는 막다른 길 끝으로 담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집과 집이 서로의 경계를 의식하면서 생겨난 무작위의 담벼락. 휴먼스케일과 무작위의 것들이 만들어낸 집과 집의 틈은 고정되지 않은 풍경을 보여주며 미적 상상력을 이끌어냅니다. 낭만적인 한편, 기괴할 수도 있는 수많은 상상력이 골목에서 탄생합니다. 




그것을 시적 상상력이라 해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골목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본다면 그것은 상상이 아니라, 염연히 존재했던 기억입니다. 나는 떠올립니다. 그 담에 낙서를 하고, 그 담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그 골목에서 돌맞추기(시마치기)와 고무줄뛰기를 하던 기억. 그 골목과 담에 의자와 평상을 붙여두고 사람들이 모여앉아 이야기를 나눴지요. 가을이면 빨간 고추가 햇볕에 잘 말라가고, 겨울이면 눈사람도 하나쯤 세워져있던 그 골목.  땅과 하늘이 조각보처럼 보이던 순간들도 기억이 납니다. 그 골목은 다 어디로 가버린 걸까요? 


그 밤에 가로등 아래에서는 옆집 언니 오빠가 서성거리는 모습을 들키기도 하고, 누가 바래다주고 얼른 뒤돌아가기도 하고.. 그랬던 순간들. 골목이 좋은 건, 그런 이야기들 때문이겠지요. 철지난 느와르 영화에서나 보게 되는 오래된 골목길이, 지금도 누군가에게는 현재의 삶의 공간으로서 그런 기억들을 만들어주고 있겠지요. 








한지붕 두 가족의 극렬한 대비. 하나의 지붕 아래 앞엣집은 옛모습이 거의 변하지 않은데 비해 

그 옆집은 슬라브 양옥과 유사한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많은 집들이 두 세대가 각기 다른 모양의 집을 하고 있지만 이 집이 유난히 대비되는 풍경을 보여주더군요. 



공기창 아래에 번호가 붙여져 있습니다. 제 53호와 같은 글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관사들도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됩니다. 이 집은 다소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데, 

20년대 이전에 지어진 것은 비늘판벽을 하고 있고 30년대의 집은 

시멘트로 마감되어 있습니다. 화장실 동선도 변화가 있습니다.

대부분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북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지붕을 보수할 때도 두 집이 다릅니다. 상황에 따라 오랫동안 변화해온 흔적들이 

남아있는 집들. 




창에서 무엇이 보일까요? 나는 금세 쪽창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앉아 

바깥을 보는 상상을 합니다. 이 골목길의 집들의 지붕선이 옹기종기 

어울려있는 것이 보이겠지요. 길을 따라 사람들이 시냇물처럼 흐르는 것도 보이겠지요. 

 



나무전봇대가 그대로 남아있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이희준 선생은 이 나무전봇대도 

문화재급이라고 강력하게 의견을 피력합니다. 





집은 도로가 나거나 다른 집이 생겨나는 통에 하나가 헐려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남은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관사 내부로 들어가보았습니다. 좁고 낮은 문으로 들어서면 부엌이 있고 두개의 방이 나옵니다. 

그리고 허리를 펴지 못하는 낮은 다락도 있습니다. 80% 비례로 축소한 듯한 

작은 공간에 서니 왠지 거인 걸리버가 된 것 같은 기분도 듭니다. 

게다가 저는 보통의 여인들보다 키가 훨씬 큰 편이기도 하고요. 

  





대동천을 살펴봅니다. 대동천 너머 동네에 송시열 고택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다음에는 그곳에 꼭 가보아야겠습니다. 







소제동 골목에서 한참을 헤맸습니다. 낯선 시간으로 훌쩍 들어가 정신없이 걷다가 나왔는데,  두 시간이 지났을 뿐입니다. 왠지 시간의 축이 흔들린 듯한 요상한 시공 속에 있었나 생각해봅니다. 골목을 걸었던 사람들과 골목에서 만났던 대전 사람들과 골목에 각인된 듯한 소제동 거주민들과 그곳을 화사하게 물들였던 나무의 푸르디푸른 잎사귀와 장미의 붉은 꽃잎들. 


인간이란 서로 다르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서로의 행동반경이 다른 이유로 비껴가기만 했던 사람들이 골목에서 만납니다. 



그래서 골목이 좋은가 봅니다. 


















오딧세우스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모진 여행을 계속했다. 이.타.카. 그곳으로 돌아가는 길이 너무나 험난했지만 영웅의 모험담이 그러하듯, 신비롭고 고통스러우며, 아름답고, 심란한 일들로 가득했다. 고향에는 그의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가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이타카에 도착한 오딧세우스는 어찌되었던가. 홀몸으로 지내는 동안 호시탐탐 아내를 넘보던 사내들을 죽이고 자신의 자리를 되찾은 그는, 어떻게 다음 인생을 살았던가. 모험에서 돌아온 영웅은 노쇠한 늙은이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영웅은 여행지로 떠나거나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 그 여정 속에 있어야 영웅으로 인정된다. 목표 지점에 이른 자에게는 그 후 찾아오는 권태로움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가 더 큰 난제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인생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지점이기도 하다. 









조각가 권진규의 아틀리에를 찾으면 '귀향'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서는 영웅이므로, 그의 아틀리에를 귀향한 영웅의 이타카,라 불러도 될 것이다. 권진규는 1948년 일본에서 공부하던 형이 폐렴으로 몸져 눕자 형을 찾아 밀항했고 다음해 형이 죽은 뒤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몇 해전부터 일본에서 조각을 배울 거라고 말한 대로 무사시노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조각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배우고 또 배우는 시기, 새로운 형태를 만들고 또 만들던 시기. 그때 권진규는 모험을 떠난 영웅 같았다. 빈속에 커피 한잔과 클래식 음악으로 끼니를 대신하더라도 기꺼이 참아낼 수 있었던 것은, 가난하였기에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그 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모험의 여정에 있었기 때문이다. 영웅에게 응당 있어야 할 조력자들이 그에게도 있었다. 사랑하던 여인 도모, 그리고 학교 이사장인 다나카 세이지. 도모는 닥치는 대로 일하며 그가 조각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왔다. 졸업하고서도 번듯한 작업실을 갖지 못해 학교를 드나들며 작품활동을 하는 것을 보고 학교 이사장이었던 다나카 세이지가 작품을 구입하여 돈을 보태주었다. 그렇게 그는 조금씩 조금씩 자신의 작품을 만들고 전시회를 했다. 번데기에서 탈피하여 나비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그는 1958년에 귀국을 결심한다. 부친이 작고한 후 홀로된 모친이 건강이 나빠지자 아들을 불렀다.형을 대신하여 가족의 부양을 책임져야 할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에 있는 10년 동안 그의 곁에 있었던 아내 도모를 그대로 두고 그는 이타카로 돌아왔다. 귀향한 영웅을 기다리는 것은 암흑같은 고단한 현실이었다. 그의 이타카는 깊은 동굴같았고, 오딧세우스처럼 그를 기다리는 아내와 아들도 없었다. 가장의 의무와 예술가의 자유 사이의 균열. 돌아온 자가 보듬어야 할 운명이었다. 돌아온 자는 떠나지 않은 자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없다. 다른 세상을 보아버린 사람은, 그 강을 건넜던 사람은 다시는 그 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없다. 모르는 채로, 하지 않았던 것처럼, 살아갈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그 지점에서 정서적, 정신적 균열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 균열을 메우기 위해서 그는 동굴같은 아틀리에에서 밤이면 밤마다 천년 전 세상을 향해 날아갔을지도 모른다. 태고적 무한의 힘이 난무하는 세계, 영적인 세계, 내면의 세계, 죽음의 세계, 우주라는 빛의 세계로.  그는 과거 황금의 제국을 노니는 거센 목덜미의 야생마였다가,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두 아이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로마를 세울 그 시절, 건국의 영웅을 키운, 거대한 유방을 가진 늑대이기도 했고,  두눈이 튀어나올 듯 신체의 압력을 발산하는 고양이였다가, 팽팽한 근육과 힘줄에 가벼운 살갗이 뒤흔들릴 정도로 크고 강력한 신체를 가진 고대의 영웅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고요하게 속세를 바라보는 불상이 되기도 하고, 

남자이기도 하고 여자이기도 한 오묘한 얼굴이기도 했다.  


 


















조각가 권진규의 아틀리에를 오랜만에 찾았다. 5월 4일, 조각가의 기일을 맞아 아틀리에를 개방한다는 소식을 들었던 까닭이다. 못보던 부조가 설치되어 있다. 정릉 여동생의 집에 설치되어 있던 것인데, 원작은 삼성미술관에서 보유하고 있고 복제품이 이 집을 장식하고 있다. 올해는 조각가의 여동생인 권경숙 여사가 내셔널트러스트에 아틀리에를 기증 절차를 시작한지가 10년된 해라고 한다. 그 동안, 살림집이었던 한옥은 구가건축의 조정구 건축가가 보수하여 현대 예술가의 레지던시 공간으로 사용하고, 아틀리에는 온전히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방문객을 맞이해왔다



그가 귀국한 후 가족과 거처를 꾸렸던 집이다. 층고가 높은 아틀리에를 권진규는 직접 지었다. 바깥에 큰 조각을 구워내는 가마도 만들었다. 실내에도 샘플 작업이나 난방을 위한 작은 가마와 우물도 있었다. 흙을 빚고 구워낼 때 필요한 것들이 있었다. 그는 수많은 작품을 만들었던 이곳에서 1973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흔적을 가족들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마는 작품으로 먼저 권진규를 접했던 많은 사람들은 예술가의 숨결이 깃든 이 장소가 마냥 소중하게 느껴진다. 살아있을 당시에는 높이 평가받지 못했던 그의 작품들은, 보편적인 감정을 진중하게 다루고 있는 단독의 물질로서 유수의 미술관 컬렉션으로 보호되고 있다. 


그의 이타카는 어떤 모습인가. 그의 균열된 삶이 봉합되었던 이 어두운 공간에 들어선다


극도의 불안과 극도의 떨림, 극도의 피로와 극도의 집중. 

고요하기만 한 공간에서 나는 온갖 소음을 듣는다. 불과 물의, 물질의 거친 만남을. 

     오롯한 예술로서만 그 장소를 만난다. 


조금 오랫동안 그 집에 머물렀다. 책을 보고 작품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예전에는 적요로운 표정의 인물상에 마음을 빼앗겼는데, 지금은 온갖 세포가 바짝 압축되고 온갖 내적 기운이 껍질을 뚫고 나올 정도로 팽팽한 동물상에 시선이 갔다. 조각가의 메마른 육체와 조금 대비된다는 생각을 했다가 얼른 그 생각을 지웠다. 조각가가 몰두한 내적 에너지는 그의 육체와 아무런 관련이 없을 것이다. 더불어 그의 죽음과도 관련이 없을 것이다. 그의 조각은, 여전히 격앙된 몸짓 그대로, 영원히 팽팽한 긴장 그대로 생명의 극단적 형태를 보여준다. 생명이란 무엇일까. 그렇게 마치 죽기 직전이라는 듯 최고조로 끓어올린 힘들은 무엇인가. 


















여전히 바다속에 매몰된 생명들을 떠올리고 그들을 위해서도 묵념했다. 생명과 죽음의 경계에 대해서도 묵념했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예술에 대해서도 묵념을 올렸고, 찬연히 빛나던 햇빛이 검은 구름에 금세 사라지는 세상을 향해서도 묵념했다. 세상에 대해 어찌할 바 모르고 몸둘 바를 모르고 허둥지둥하던 내가 그곳에서 말없이 앉아있으며 많은 감정과 만났고 많은 감정을 덜어냈다. 오늘의 추모는, 불운하고 완벽했던 예술가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불운 앞에서 어찌할바 모르는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당신을 위한 것이었고, 나를 위한 것이다. 


 

 






















돈암동은 십년도 더 오래전에 신혼을 살던 곳이다. 오랜만에 그 동네를 거닐면서 나는 동네의 기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다시 깨달았다. 일년도 채 살지 않았던 그 동네에서 걷고 먹고 마시고 사고 웃고 말하고 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나는 어릴 때처럼 일요일마다 동네 목욕탕을 갔고, 성신여대 앞 만화가게에 갔고 미고 케이크를 먹고 태극당을 갔고 지하철을 탔고 비디오를 빌려보았고 성당에 갔다. 햇살이 따뜻하던 날도 있었고 빗줄기에 몸을 흠뻑 적신날도 있었고 발이 꽁꽁 얼어붙은 날도 있었다. 체형보정속옷을 사고 유행하던 리바이스 진을 사입던 가게들도 생각났다. 그 기억들로 동선동과 돈암동을 돌아다니는 내내 극도로 행복해졌다. 그떄와 사뭇 달라진 건물들이 즐비해도 괜찮았다. 그때 나는 서울이 조금 더 좋아졌다. 


길을 거닐다가 박완서 선생이 여러 차례 글 속에 표현한 돈암동 안감내에 이르렀다. 신안탕, 신아탕이라 불리던 목욕탕이 있던 골목이었다. 동네 아낙들이 모여서 목욕탕에서 흘러나온 따뜻한 물로 빨래를 했다는 그 천은 공원처럼 정비되어 있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아르데코풍 외관을 한 목욕탕이 있던 자리는 이제 버스 주차장으로 바뀌어있었다. 박완서 선생이 아셨다면 서운해하셨을까? 다만 신안탕의 이름을 딴 여관이 남아있다. 그 앞을 지나는데 천사의 날개가 벽에 그려져있는 것이 보였다. 천사의 날개. 지금 내가 딛고 있는 땅에 대한 어떤 은유인 것 같다. 


한줌의 위로같은, 그림. 


















서른을 통과한지 십년이 



지났습니다. 하루하루 점점 더 서른살과 멀어지고 있습니다. 요즘은, 서른이라는 나이가 무언가를 이루기엔 어렵고 심리적으로도 어른이 되려면 멀었다고 울부짖는 나이라고 하지만, 내가 이십대였을 때는 서른은 인생에서 한 시대를 접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나이로 알았습니다. 원하는 목표를 향해서 정진하되, 어느 정도 그 가닥을 잡은 나이, 그래서 모험은 조금 밀쳐두고 끈기 있게 밀어부치는 나이라고 말이지요. 




실제, 서른을 통과하던 시점에서 그런 단단함과 의지가 내게 있었는지 확답할 수 없었습니다. 시대가 변한 까닭인지, 뚜렷한 목표라던가 의지가 다가와주지 않았습니다. 



나보다 앞선 세대에게는 아마도 그것이 가능했던가 봅니다. 그 시대만 하더라도 서른 즈음에 인생의 빛나는 성공을 이룬 자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글을쓰고 예술을 하는 사람들, 사업을 일으키고 정치 권력에 가까이 간 사람들, 그들은 얼굴에 주름 하나 없는 나이에 참 훌륭한 일들을 많이 해냈습니다. 그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앞서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젊은 세대들이고, 그 시대적 흐름을 현명하게 잘 포착한 젊은이들이 뭔가를 이룰 기회가 많았던 것은 아닐까요? 거칠지만 새로운 목소리를 기성세대 혹은 동세대들이 서로 인정하고 긍정적인 기폭제로서 꽃피웠기 때문일까요? 



한편에서는, 식민과 전쟁의 책임을 기성세대에 물으며 젊은 세대들이 공격적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갔다고도 하고, 과거를 부정하는 데서 현재를 일으키는 동력을 얻었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어쨋건 그들은 새로운 흐름에 적극적으로 몸을 실었고 기회를 쟁취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중에 건축가 김중업이라는 사람, 그도 서른 즈음에 참으로 많은 것을 이룬 청년이었습니다. 전후 복구 시기인만큼 건축가를 필요로 하는 일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건국대 도서관, 부산대 본관, 서강대 본관이 차례로 지어졌고, 명보극장, 신공덕 원자력 연구소, 남산 드라마센터, 이화산업 공장 그리고 주한 프랑스 대사관이  그의 삼십대를 화려하게 장식했습니다. 최고 학부를 가르치는 교수였고, 유네스코 세계예술가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했으며 르 꼬르뷔제 사무실에서 수년간 일하기도 했지요. 



그의 사십대라고 빛나지 않았을까요? 성공회회관, 제주대 본관, 단단한 언어가 감지되는 개인주택과 별장, 서산부인과, 부산 UN 묘지, 삼일빌딩이 줄이어 세워집니다. 그는  김수근과 함께 시대의 양대산맥을 이루는 건축가로 부상했습니다. 



하지만 시대의 바람은 그를 



내몰았습니다. 추방 난민으로 프랑스에서 살다가 8년만에 귀국이 허락된 비운을 겪고, 다시 돌아와  부산 민주공원의 충혼탑, 올림픽공원 조형물 등을 완공하고 기독교 100주년을 기념한 민족대성전 등을 설계했습니다. 건축가는 참 질기게 사회에 결합되었습니다. 추방령을 내린 조국을 등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돌아와 이 땅에 애도와 기도와 비상의 건물을 설계했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그의 건축은 더러 사라지기도 했고 더러 남겨지기도 했습니다. 오랫동안 어떻게 쓰일 것인가 논의되던 김중업의 건물 하나가 얼마전 건축가에게 헌정된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안양예술공원 내에 있는 김중업박물관이 그것입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건축가에게 헌정된 박물관이 생겨났는데, 그것이 수많은 제자를 배출하고 도처에 그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김수근이 아니라, 김중업이라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서른 일곱, 젊은 그가 설계한 유유산업 공장. 


안양천변 너른 부지에서 50년에 가까운 역사를 만들어준 한 제약회사의 공장과 연구시설은 설계자에게 헌정된 공간이자 예술과 공공이,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안양에 갈 이유가 하나 더 생겼습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건축 아카이브와 연구실도 생겨났으면 좋겠습니다.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가 벌써 


6회를 맞이했습니다. 첫회때가 떠오릅니다. 작품들은 신선했고 두고두고 활용되면서 안양유원지를 뜨겁게 했지요. 그 후 안양 시내로 확대되어 예술가들의 흥미로운 작품들이 도시 곳곳에 생겨나는 것을 목격했고 '알바로 시자'라는 굴지의 건축가가 지은 안양 파빌리온과 '비토 아콘치'의 숲위를 덮는 터널이 하나씩 하나씩 생겨났습니다. 올해는 김중업박물관이 개관하여 프로젝트에 힘이 실리게 되었습니다. 안양문화재단이 야심차게 추진하는 APAP 프로젝트, 계속 지켜보고 싶습니다. 














유유산업은 1940년대부터 시작된 



제약회사입니다. 안양에는 공장과 연구시설이 지어졌습니다. 1959년에 공장이 가동되고 50여년간 이어오다 공장이 옮겨간 후, 부지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오랫동안 이야기되어 왔습니다. 이 프로젝트에 대해 처음 들었던 것이 거의 12년 전의 일이니, 그 동안 많은 협의와 계획이 오갔겠지요. 


김중업이 설계한 4개동을 남기고 리노베이션했습니다. 문제는 유유산업 터가 오래전 통일신라 시대의 사찰인 안양사가 있었던 터이며 여전히 발굴할 여지가 많다는 점입니다. 이 절터에서 안양이라는 지명이 생겨났기에 무시할 수 없는 유적지인 것이지요. 때문에 산업유산과 사찰이라는 고대유적지, 그리고 현재의 예술공원이라는 세 개의 시간축을 어떤 식으로 조화롭게 풀어내는가가 관건이었습니다. 



현재, 김중업 박물관은 세 개의 큰 건물에 


각각 예술센터, 김중업 전시관, 안양사지 전시관 등의 프로그램이 삽입되어 있고, 그외의 공간과 중앙의 넓은 터를 각각의 공간이 서로 연결되는 완충공간으로 이어져있습니다.  



각각의 공간에서 안양의 스토리를 보는 것도 흥미롭지만 김중업이라는 건축가의 공간을 감상하는 재미가 좋습니다. 입구의 X자 조형물은 르 코르뷔제의 모듈러(인체비례도)를 응용한 듯한 느낌을 줍니다. 김중업 아카이브는 그의 건축세계를 충실하게 보여주는 모형, 도면, 다양한 자료들이 있습니다. 공간은 작지만 단단하고 안정감을 줍니다. 따뜻하고 밝고 구석구석 세심하게 손댄 흔적들이 마음을 흐뭇하게 합니다. 



경비아저씨들도 이 건물은 남길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남겼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더군요. 


그럼 이제 건물을 보러 갈까요? 









1. 어울마당 _ 창고와 공장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와 연계하여 전시물이 설치된 예술센터로 사용됩니다. 

중앙에 빛이 들어오는 부분, 황동 느낌의 핸드레일이 보기 좋습니다. 

안양의 현재를 담은 다양한 전시물들을 소소하게 즐기며 공간을 유람할 수 있더군요. 

문은 새롭게 달았지만 문 손잡이는 옛것을 그대로 썼더군요. 




























2. 안양사지 전시관- 보일러실 


고대유적지 전시관의 딱딱한 분위기를 인터랙티브한 전시가공물로 소개하는 부분이 재미있습니다. 

유유산업 지에서 발굴과정을 소개하는 부분도 꽤 재미있더군요. 

공공예술프로젝트 작품이 야외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배영환 작가의 오벨리스크와 후지코 나카야+더블 네거티브스 아키텍처 팀이 작업한 '무'라는 안개작품이 있는데, 간헐적으로 안개가 형성되는 이 작품을 아이들이 참 좋아하더군요. 











2. 김중업관 _ 공장및 사무실

건축가 김중업의 기증자료와 그의 건축세계를 살펴보는 전시관입니다. 외부계단이며, 길다란 케노피가 눈에 띕니다. 


기증품들을 적절히 배치하여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문이 아주 낮아 기분이 묘합니다. 

당시 뉴스 아카이브에서 추출한 음성자료, 영상자료들은 오래된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옵니다. 











































승승장구하던 김중업은 1970년대 초


몇 가지 정부의 주택 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씁니다. 특히, 광주대단지에 대한 강한 비판이었죠. 그것으로 그는 추락하기 시작합니다. 그 전까지 성북동과 장충동에 자택과 사무실, 아틀리에를 두고 활발하게 활동하던 그는 국세청 세무조사로 엄청난 세금을 물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고 삼일빌딩의 설계비도 거의 받지 못하는 상황에 이릅니다. 그는 추방됩니다. 여권도 없이 국외로 쫓겨난 그는 난민으로 프랑스에 정착합니다. 



그 지점에서 잠시 발을 멈춥니다. 창신동-백사마을- 아파트인생에 이어 김중업 박물관에서도 광주대단지가 또 등장하는군요. 그곳은 단지 철거민들의 집단이주촌인 것만은  아닌 모양입니다. 김중업은 그곳을 왜 그리고 어떻게 비판했을까요?  


 광주대단지는 도대체 무엇인가요?








  
















아파트에 다들 살고 계신가요? 저는 분명 어렸을 적엔 마당있는 단층집에서 살았는데,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아파트로 옮겨왔습니다. 지금은 베드타운으로 형성된 신도시의 대단지 아파트의 고층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사이엔가, 다들 아파트에 삽니다. 년수와 평수가 다를 뿐, 비슷비슷한 구조의 집입니다. 어쩌다 보니 여기에 있습니다. 누군가는 전략적으로, 누군가는 늘 그래왔다는 듯, 누군가는 피눈물을 흘리며 아파트를 보금자리로 살아갑니다. 


앞으로는 예술가나 문인들의 생가나 아틀리에를 찾아갈 때, 복잡한 골목을 통하지 않고,  00 아파트 0동 0호로 가게 되지는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러므로 집보다는 다른 장소, 이를테면 세컨드하우스나 아틀리에, 작업실과 같은 개성있고 은밀한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은 사람들도 많아질거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아파트 인생>이라는 전시는 서울의 아파트 변천사를 꽤 흥미롭게 다루고 있습니다. 어쩌다보니 살게 된 아파트에서의 인생이 국가정책의 변화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생활, 문화, 가전제품 등 산업 등 모든 것이 맞물려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파트가 본격적으로 도시에 침투한 것이 1960년대라고 하니, 50여년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우리의 인생은 아파트라는 공간에 맞춰서 성형되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지금 곳곳에서 발생하는 사회문제들이 50년 전 계획된 아파트에서 생겨났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강풀의 만화 <아파트>가 꽤 으스스한 호러물이었다고 기억되는데, <아파트 인생>은 전시회로 울렸다 웃겼다 눈을 번쩍 뜨게 했다 합니다. 아파트에 사는 당신, 꼭 한번 가서 관람해보기를 권합니다. 





서울의 아파트 개발정책에서 지금은 전설이 되어버린 다양한 아파트들, 투기열풍과 아파트 디자인, 재개발과 철거.....인생의 여러 고비처럼 전시관을 넘나들면서 몇 가지 흥미로운 장면들을 발견했습니다. 








1. 아파트 분양 추첨






요즘도 아파트 분양 추첨할 때 경찰관이 참여하여 엄정하게 진행한다는 이야기를 듣곤 하는데, 눈을 가리고 해당 관계자가 번호를 뽑거나 분양대기자들이 추첨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동과 호수에도 민감한 만큼 그 방법이 엄정하지 않다면 곤란하겠지요. 예전에는 손톱만한 은행씨앗에 번호를 적어 그것을 추첨하는 데 썼다고 합니다. 은행이라니요. 처음엔 어이없게 생각되었지만, 합리적인 방법을 찾다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됩니다. 지금의 추첨방식에 의문이 없는지도 궁금해지네요.  









2.초기 아파트 디자인 




1961년 지어진 마포아파트





금화아파트



단순하지만 디자인 요소가 분명한 아파트.


콘크리트로 장식없이 만든 미니멀한 디자인의 놀이터.


아파트 단지 디자인이 꽤 멋집니다.1960-70년대 우리는 아파트를 짓는 기술 수준이 꽤 높았다고 합니다.

1961년에 등장한 마포아파트는 단지 계획이 최초로 실시된 것으로 의미가 높은 건물입니다. Y형 아파트가 당당한 자신감을 보여주는 이 아파트는 대한주택공사에서 추진했고 임대가 아닌 분양 방식으로 제안하여 아파트 문화의 미래를 열어간 사례라고 합니다.  단지 안에는 공원, 녹지, 운동장이 있었고 정부에서 야심차게 추진한 이 아파트가 초기에는 큰 인기가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점차 아파트는 서구문화를 보여주는 건축물로 인식되면서 선망의 집으로 자리바꿈을 했고, 영화에서도 아파트가 자주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어린 시절, 아파트에 살던 친구가 부러웠던 때는 놀이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놀이터는 그야말로 환상의 세계였습니다. 작은 단독주택에 살던 나는 다리 건너 다른 동네의 아파트 안의 놀이터까지 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네와 뺑뺑이를 타면서 보았던 하늘은 높고 크고 파랬지요. 재미있고 신나던 시간을 들라면 어린 시절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던 기억이라 할 수 있겠지요. 요즘 아이들은 아파트 놀이터에 모래가 깔려있었나, 고무블럭이 깔려있었나를 가지고 세대차이를 논한다고 합니다. 마당이란 건 경험해본 적이 없는 아파트 키드들 사이에서도 미묘한 변화에 따라 자신의 경험을 차별화하는 모양입니다. 


 


 









3. 주택복권 




어렸을 적 주말마다 주택복권 맞춰보는 게 정해진 일과였던 것 같습니다. 결국은 꽝이지만 추첨시간에는 두근거리며 숫자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그 때 주택복권은 내집에 대한 희망과 일주일에 한번 느끼는 스릴, 모험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지금도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번씩 로또 복권을 사고 추첨시간을 기다립니다. 



내 집갖기가 우리 부모 세대들의 목표였습니다. 부모의 삶을 돌이켜보면, 열심히 일하고 회사가 성장하고, 자식들이 커가면서 집의 규모를 조금씩 늘리고, 소박하고 작은 가구에서 화려하고 큰 가구를 들여놓는 등, 나이가 들수록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상승하는 것을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부모가 얻은 만큼의 만족도를 얻지 못하고 있으며, 지금의 2,30대에게 세상은 부모가 물려준 것으로 사는 것이 되어버렸지요. 


얼마전 트위터에서 이런 농담을 보았습니다. "엄마가 딸에게 말하길, "너도 커서 꼭 너같은 딸 낳아서 키워봐라"라고 했는데, 나 닮은 딸은 지금 엄마한테 가서 자라고 있다."  부모의 손길이 없이는 경제적 자립도, 육아도, 학업도 불가능한 시대인데다, 우리는 이 복권에 기대를 걸만큼 꿈이 있지도 않습니다. 







4. 아파트 인테리어 






아파트가 한창 보급되면서 집꾸미기에 관심이 집중되어 인테리어잡지들이 속속 인기를 얻게 되었다고 하지요. 초창기 아파트는 아궁이와 창호지가 붙은 여닫이 문이 있는 구조를 취했다가 점차 입식 생활, 간편한 생활에 적합한 구조로 바뀌었습니다. 1959년에 세워진 종암아파트는 수세식 변기가 설치되었고 70년대에 싱크대가 부엌에 들어왔습니다. 



가구와 가전제품의 종류와 크기도 아파트라는 집의 구조, 평형과 긴밀히 연결되게 됩니다. 예전에 사용했던 가전과 가구들은 지금과 비교하면 턱없이 작지요. 아파트 평형을 넓혀가며 식구수도 늘고 가구와 가전도 점점 커지고 그런 흐름이었죠. 



그런데, 요즘은 1인가구,2인가구도 많아서 큰 평형의 집도, 큰 가전도 필요없는 추세로 가게 되는데도 가전제품의 크기는 줄어들 줄을 모릅니다. 일단 커진 것은 줄어들기가 어려운 법이죠. 생활공간도 대단지 아파트타운이 되다보니, 자가용과 대형 마트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터넷 쇼핑과 택배가 늘어났습니다. 도시의 구조, 건축의 형태, 산업 등이 연쇄적으로 변화합니다. 아파트가 만든 변화들은 사회전반으로 퍼져나가고 그렇게 고착화된 구조들로 인해 아파트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5.광주 대단지 















철거와 이주 문제는, 대단지 개발을 할때면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등장합니다. 구호와 현수막과 망가진 집들로 도시의 폐허가 생겨날 때 한쪽에서는 그 폐허 위에 태어날 황금빛 초고층 아파트를 꿈꿉니다. 


전쟁 전후 지어진 판잣집, 재건시대에 부족한 물자로 엉성하게 지어진 불량주택, 도시 빈민들의 무허가 거처 등은 도시의 골칫거리였습니다. 특히나 부족한 주거를 해결하기 위해 택지개발과 아파트 단지 계획을 1960년대부터 시작했는데, 이때 도심부를 장악하고 있던 빈민촌이나 불량주택지들은 철거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69년부터 철거민들은 단계적으로 경기도 광주의 이주촌으로 옮겨갔습니다. 20여평의 땅을 불하받았으나 도로도 상하수도도 없는 무방비의 도시였습니다. 그들은 쓰레기차에 실려서 이주했고 겨우 블록집이나 천막집이 집으로 주어졌습니다. 먹고살 방법도 없었습니다. 인간다운 생활을 하게 해달라고 집단 시위를 벌입니다. 광주대단지는 후에 성남시로 이어집니다. 


광주대단지에 대해 처음 들은 것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창신동> 전시에서였습니다. 철거민의 대단지 이주라는 희대의 사건이 왠지 생경하게 느껴져 오랫동안 되뇌이곤 했습니다. 그에 대한 구체적인 사진과 내용이 이번 <아파트 인생>전시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아파트가 주거문화의 부분을 넘어서 경제적, 사회적인, 정치적인 부분과도 긴밀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건 우리 삶이, 우리 스스로는 자립적이고 자존적이라고 믿고 있겠지만, 사실은 이 사회에 깊이 존속되어 있고 사회 구조를 바꾸는 힘, 혹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라는 틀을 재점검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얼마전 친한 디자이너와 만나서 타이포그래피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다가 알게 된 것이있는데, 한글 글꼴개발자이며 안상수체의 장본인이 안상수선생이 이상체를 디자인했다는 겁니다. 날개의 작가인 이상의 천재성에 매료되어 그에게 헌정하는 서체를 개발해 '이상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요.   


이상의 시에서 착안되었다는 글꼴을 보니, 글자가 초성, 중성, 종성의 총합이 아니라, 모음과 자음의 음가 하나하나가 의미와 형태를 가진 존재인것 같습니다. 무수한 의미의 총합, 무수한 형태의 총합이 한편의 시이며, 한마디의 말이 되는 것이지요. 단단한 의미 덩어리는 당돌하고 당당합니다. 태연자약하고 방약무인합니다. 이상이 시로서 전달하려던 행동과 의미들이 지금 이 글꼴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이 서체로 "오감도"나 "날개"를 읽으면 어떨까? 내가 좋아하는 봉별기를 읽으면 어떨까?

"13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오,"

라던가,

"날자, 날자, 날자꾸나,"

라던가,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굽이굽이 뜨내기 세상 그늘진 심정에 불질러 버려라..." 

금홍의 노랫소리 같은 것을, 이상체로 읽으면 더 슬프고 더 우습고 더 기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촌의 어느 길목에 이상의 집이 있습니다.몇달간의 공사를 끝내고 새로 문을 연 이상의 집에는 집의 얼굴이 되는 도로변 정면 입구에 이상체로 적힌 "이상의 집"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글자로 이상의 시가 적혀있다면 글꼴의 느낌과 이상이라는 의미가 결합하여 상승효과를 만들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의 시는 공간 내에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새로 문을 연 '이상의 집'은 이상이라는 기이한 인물의 예술가적 기질을 좀더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컨대, 기생 금홍과 제비다방을 차린 사연뿐만 아니라, 그림을 그리고 도안을 만들던 시각예술가로서의 이상의 자료를 중심으로 이야기합니다.

 

경성고공 출신으로 총독부 기사로 일하면서 탐독했던 <조선과건축>의 표지 도안을 다양하게 그렸고, 오감도를 연재할 무렵, 친구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삽화를 그리기도 했지요. 이상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여서, 나이많은 친구이자 화가인 구본웅과도 곧잘 어울려 그림을 그렸습니다. 구본웅이 그린 홀쭉하고 수척한 얼굴에 파이프를 물고 있는 <우인의 초상>은 바로 친구 이상을 그린 것이라고 하지요. 이상의 집에서는 문학으로서만 존재했던 이상이라는 인물을 실제하는 어떤 존재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가 그린 그림, 그의 사진, 그런 것들이 미약하나마, 요절한 예술가를 더듬게 해줍니다. 


그런 한편, 이상의 초현실적인 시들은 당시 사람들은 물론 21세기 인간들까지도 혼란하게 만듭니다. 저돌적이고 파괴적인 에너지, 완전히 새로운 글쓰기, 삶이 소설이었던 문제적 인물. 그래서 가장 권위있고 대중적인 문학상이 '이상'이라는 이름을 품고 있는 것 아닐지요. 


저는 박태원의 만년필이 그려진 이상의 삽화 엽서를 하나 샀습니다. 

그래픽 디자이너인 친구는 역시나 타이포그래피를 재미있게 응용한 도안 엽서를 구입하더군요. 
















이상의 집은 그동안 분명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 집은 여러가지 사연이 많았습니다. 154-10번지는 이상의 백부의 집이 있었던 곳입니다. 필지는 훨씬 컸고 집도 그만큼 넓었지요.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에게서 태어난 첫째 아들 김해경은,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들어갑니다. 그 시절에는 그런 일이 흔했지요. 어렸을 적부터 모든 학창시절을 이 집에서 보내게 됩니다. 폐결핵에 걸려 총독부를 그만두고 백천으로 요양을 가면서 금홍을 알게 되고 이후 금홍과 청진동에 제비다방을 차리게 되어 집을 나가게 되지요. 그러므로 이 집은 양자로 입양된 후부터 금홍과 살림을 차리기 전까지 스무해를 살았던 곳이 됩니다. 스무해 동안 김해경은 엘리트 청년이었고, 그 스무해 이후부터는 이상이라는 이름의 기괴한 예술가로 살았습니다. 그 전환점은 무엇일까요? 


이상이라는 이름은 고등학교 졸업앨범에도 표기되어 있다고 합니다. 구보 박태원처럼 저널리스트다운 에세이로 자신의 옛일을 꼬박꼬박 적어두었다면 모를까, 이상의 학창시절은 뻥 뚫린 구멍 같습니다. 



이상이 머물렀던 집이라 하여 문화재 지정예고에 이르렀으나, 검토한 결과 이 집은 백부가 가산을 처분한 후 필지가 나뉜 뒤에 생겨난 집임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므로 이상 김해경은 이 집에서 기거한 사실이 없는 셈이지요. 문화재 지정은 취소되었고, 이 시설을 관리하는 아름지기 측에서는 한옥을 없앤 후 새로운 이상기념관을 지으려했습니다. 하지만 오래된 한옥의 정취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항의와 건의가 있었습니다. 의견을 조율하는 지난하고 답답한 기간이 지나고 나서야, 건물을 없애지 않고 이상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가닥이 잡히게 되었습니다. 




몇 달간의 공사가 끝난 후 새로 문을 연 이상의 집은, 조금 다른 느낌입니다. 


우선, ㄱ자형 건물은 그대로 자리잡고 있지만 벽을 틀어내어 하나의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고, 뒤쪽에 있던 한옥의 한부분은 불법 층축된 부분이라 하여 철거되었습니다. 한옥이 있던 자리에는 좁고 긴 하얀색의 공간이 투입되었습니다. 내부에 검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두운 내부에 영상물이 흘러나옵니다. 계단을 올라가면 지붕 너머로 멀리 서촌의 곳곳이 내려다보입니다. 한옥의 원래 벽은 털어내고 투명한 유리를 끼워 모든 장소들이 겹쳐지고 투명하게 보이도록 했습니다. 원래의 부재들을 최대한 쓰기 위해 추춧돌과 지지대를 곳곳에 썼지만 그리 어색하지 않습니다. 옛 재료와 새 재료가 적절히 섞여서 몹시도 모던한 느낌을 줍니다. 


옛집이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습니다. 공간이 가진 고즈넉함이나 자잘한 공간과 벽이 주는 느낌들은 없어졌습니다. 하얀색의 콘크리트 구조물을 두고 건축가는 '이상에게 헌정한 공간'이라고 했습니다. 이곳은 이상의 내면을 엿보는 것 외에는 다른 기능이 없습니다(일층부분은 화장실로 사용되긴 하지만요) 이상이 살았던 쪽방의 어두컴컴함, 좁은 계단이 만드는 분위기, 탁트인 외부와 만날 때의 통쾌함 등을 전달합니다. 


그러므로, 원래 집이었던 곳은 관람자들이 쉬었다 가거나 행사를 치르는 용도로 사용하고, 이상이라는 우리의 주인공을 위한 공간은 모던하지만 색채가 드러나지 않도록 새로 만들었습니다. 이 한옥과는 특별한 인연이 없었던 이상을 위해서 가상의 공간, 제의적인 공간, 기념의 공간을 새로 투입한 것이지요. 













온통 유리로 둘러싼 건물은 길과 마을과 사람의 움직임이 서로 통과하고 반영합니다. 새로운 공간은 나름의 재미가 있습니다. 이제 이곳에서 이상이라는 인물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이, 다채로운 행사들이, 재기발랄하고 기발한 생각들이 많이 오가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자와 테이블 구조가 좀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각진 의자와 테이블이 마치 카페처럼 놓여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게 하는데, 이 구조에서 벗어나서 원형 테이블과 소파, 높낮이가 다른 스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으며 기발한 디자인의 가구들, 다양하게 섞을 수 있는 책선반 등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집의 구조뿐만 아니라, 가구의 컨셉도 관람자의 행동을 제한하고 또 유발할 수 있습니다. 모르는 누군가도 서로 눈빛을 마주칠 수 있고 자유롭게 공간을 거닐 수 있으며, 또한 자유로운 발상의 예술문화행사들이 마구마구 벌어지는 재미난 공간이 된다면 좋지 않을까요? 


이상이라면 반듯하게 놓인 무난한 의자를 마구 흐트러놓고 싶은 충동이 일지 않았을까요? 




납작하고 하얗고 작은 공간, 아이들 의자마냥 낮은 의자들이 놓였다던  다료 제비.

한면이 유리로 되어 지나가는 여인들의 종아리를 훔쳐볼 수 있엇다는 끽다점 제비. 


종로 귀퉁이에 조용히 앉았다 날아가버린 그 제비는 또 어디선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겠지요. 인생의 결정적 순간을 경험한 후, 작은 공간을 위안 삼아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도모하고 글을 쓰고 무언가를 만들고 작지만 의미있게 소통하고 모여서 노래를 하고 시절을 수상히 여기며 사는 사람들이 모두 제비 다방의 후예들이 아닐까요?  
























1925년 을축년은 대홍수가 일어난 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7월부터 9월까지 네 차례의 폭우로 서울은 물바다가 되었습니다. 강가의 마을이 물에 잠겼고, 육지였던 곳이 섬이 되는가하면, 한강의 북쪽에 붙어있던 잠실은 갑자기 생겨난 지천으로 인해 뚝 잘려져 물로 둘러싼 섬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도상의 큰 변화는 실제 사람들의 삶에는 청천벽력이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집이 물에 잠기고 쓸려나갔으며 한강철교의 교각은 무너지기 직전이었습니다. 교량이 무너지고 철로가 제맘대로 쓸려나갔지요.  죽은 자들도 넘쳐났습니다.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퍼부은 빗줄기로 전국에서 647명이 죽고, 6300여 호의 집이 유실되고 17000여호의 집이 무너졌습니다. 침수된 집은 46만호가 넘었고 논과 밭의 침수피해도 컸습니다. 총 피해액은 1억 300만원으로 집계되었고 이는 그 해 총독부 일년 예산의 58%에 해당하는 비용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을축년대홍수는 '최대의 물난리'를 표현하는 특별한 명칭으로 오랫동안 사용되었습니다.


 










1925년 7월 11일과 12일 사이 중부지방을 통과한 태풍으로 황해도 이남 지역에 300~500mm의 비가 쏟아져 강들이 범람했고, 그 물이 채 빠져나가기도 전에 7월 16~18일까지 두번째 태풍이 임진강 유역에 상륙하면서 최대 650mm의 비를 쏟아부었습니다. 임진강과 한강이 대범람하여 사상최대의 기록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영등포, 용산의 제방이 넘쳐, 그렇잖아도 도도하게 흐르던 한강이 더욱 넓고 망망해졌습니다. 동부이촌동, 뚝섬, 송파, 잠실, 신천, 풍납리 등이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은 지역이었습니다. 


위의 지도는 <경성부수해도>는 서울에 가장 심각한 피해를 준 두번째 홍수 이후 수해로 인한 지형의 변화를 보여주는 지도입니다. 파란색으로 색칠된 한강물이 도시 깊숙한 곳까지 침범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강물이 남영동 일대까지 덮쳐 용산역 일대가 모두 잠긴 걸로 나타나고 있고, 마포 일대도 물에 잠겼지요. 


이 큰 비로 인해서 강변의 모습이 많이 달라지게 됩니다. 우선 마을 하나가 통째로 쓸려나간 잠실은 주민이 다른 마을로 이주했으며 땅이었다가 섬이 됩니다. 제방을 쌓기 위해 산들이 깎여나갔습니다. 대홍수로 풍립리 마을일대의 토사가 쓸려나가면서 옛 백제 토기가 무수히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이로서 풍납토성의 연혁이 한성백제시대임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을축년 대홍수가 일어나기 전에도 한강이 범람하여 홍수가 난 사례는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1920년에도 용산일대가 물에 잠겨 고립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에 민간에서 수재의연금을 모금하는 일도 생겼다고 하지요. 1924년 한강에는 수위 관측소가 세워졌습니다. 마포대교와 원효대교 중간지점의 한강 둔치에 세워진 용산수위관측소는 한강변에는 최초로 세워진 것이라고 합니다. 1925년 1월에 정식으로 관측을 시작하고 1977년에 폐쇄되었으므로, 을축년 대홍수는 이 관측소에서 실시된 첫 홍수 관측이자 최악의 관측이 된 셈입니다. 








수위관측소는 일정한 프로토타입으로 지어졌는데요. 등대나 급수탑과 마찬가지로 전국적으로 유사한 모양입니다. 탑신과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상단부 시설이고 콘크리트나 돌, 벽돌 등을 이용합니다. 얼마전 소개한 법기 수원지 수위관측소도 유사한 모양을 하고 있지요. (http://sweet-workroom.khan.kr/59) 


탑신 뒤쪽에는 수위를 확인하는 수치표가 그려져있습니다. 탑신 내부에 물이 들어오는 파이프가 있고 물에 뜨는 부자를 설치해서 수위를 알 수 있도록 했다고 합니다. 이런 방식이 당시에는 꽤 첨단이었나 봅니다. 외부의 눈금표시가 있는 수치계는 오차를 알기 위해 육안으로 측정하는 보조장비라고 합니다. 옛 용산 수위관측소는 서울시 기념물 제18호이지요. 








원효대교 주변에서 바라본 한강의 풍경입니다. 한달쯤 전에 찍은 사진이라 다소 황폐한 모습이지만 강주변의 도로를 따라 조깅을 하고 자전거를 타는 시민들이 많이 보입니다. 자전거로 달리다보면 한강 둔치가 지역마다 조금씩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요. 특히, 원효대교 인근 지역은 주변의 높은 건물들을 제외하면 마치 소래포구 같은 한적한 들판을 떠올리게 합니다.  













원효대교 북단 교차로 아래에는 예부터 지천이 흘렀던 수로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욱천이라 불렸고 그 이전에는 만초천이었다고 합니다. 제법 긴 하천은 이미 오래전에 복개되어 최종 수로만이 남아있습니다. 영화 '괴물'에서 등장한 장소라서 좀 눈에 익다,싶기도 할 겁니다. 이 하천은 지금도 욱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그 앞에는 욱천교라는 다리가 있습니다. 일제식 지명에 대한 문제 제기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앞에는 이런 표지판도 서있지요. 



이제 시선을 돌려 강의 북쪽이 아니라, 강의 남쪽을 바라봅니다. 그 다리 아래에서 보이는 조각난 강남의 풍경은 반듯한 고층건물의 스카이라인입니다. 눈 앞에 보이는 바로는 충분히 가깝지만, 생활 방식과 생각을 두동강 낼 정도로 한강의 위력은 지금도 강력합니다. 오래전 두려워하고 극복하려던 한강은 이제 이점을 취하는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느 날 좋은 날, 걸어서 강을 건너보리라 생각해봅니다. 그때의 강은 또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겠지요. 
















천사마을이 아니라 백사마을이었습니다. 



중계본동 산104번지 일대에 앉혀진 마을이라 104마을이라 부른다고 하지요. 중계본동이라 하면 서울의 북동쪽 끝에 있습니다. 뒤쪽으로는 불암산으로 경계지어지고, 앞쪽 멀리서는 도봉산과 북한산이 보입니다. 집에서 조명하는 경치로 보자면, 서울의 어느곳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경사지에 층층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은 백사마을은 1967년 철거민의 집단이주촌으로 형성된 지역입니다. 

그동안, 군사제한구역,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있다가, 2000년이 되면서부터 이지역의 개발이 논의되었고, 작년부터 건축가 집단에서 기존과 다른 개발을 목표로 백사마을 재생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아마 올 하반기부터는 계획이 완료되어 어떤식으로든 마을이 달라지게 됩니다. 



백사마을을 다녀왔습니다. 








예상보다 큰 규모에 깜짝 놀랐습니다. 노원역에서 버스를 타고 종점에 이르러 가장 오른쪽 골목으로 걷기 시작해서 골목마다 오르락내리락 해보았습니다. 마을은 이미 이주가 시작되어 비어있는 소위 '공가'도 많았고 허물어진 집들도 꽤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연령대는 다양했습니다. 아이들도 종종 보였고요. 낯선 사람들에게 거칠게 대하는 그런 분들은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소박하게 살아온 사람들 특유의 분위기가 마을 전체에 감돌았습니다. 


그날, 봄날씨가 완연했습니다. 꽃도 피고, 연초록 잎사귀가 살포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차갑게 얼어붙어있지 않을까, 걱정하며 골목을 걸었는데, 오히려 그 폭발적인 생명감에 안도와 위로를 많이 받았습니다. 백사마을은 어쪄면 천사마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건 아마 답사가 끝날 때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툭툭 꽃망울이 터지는 봄이 마을 구석구석을 환하게 물들이는것을 보고나서 말이지요.  

 













판자촌. 철거민. 이주촌. 대기업 건설회사. 아파트 개발. 



이런 것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지요. 그동안 우리는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노후된 동네들이 비참하게 철거되는 것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 속에 살았던 시간과 묵혔던 기억들마저도 건축폐기물이 되어버린 적도 종종 있을 겁니다. 그것들은 버려 마땅한 쓰레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닫곤 하지요. 



무허가 판자집의 존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올라갑니다. 193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난 인구로 서울(경성)은 그야말로 집없는 빈민자들이 도시의 한켜를 이루고 있었지요. 광복후부터 월남민들의 이주, 전쟁 이후 피란민들의 이동 등 인구의 대이동이 있었고 196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개발계획으로 서울 경기로 일자리를 찾아 보여든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당시 주택 보급율은 50%가 채 되지 않았다고 하네요. 이들은 허가되지 않은 땅에 소위 판자집을 짓고 삽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나왕 판자와 깡통 재료들로 집을 지었던 것이죠. 무허가 정착지에 형성된 불량주택들은 현저동 일대의 구릉사면, 노고산동, 신공덕동, 효창동, 후암동, 한남동, 장충동 약수동, 신당동, 옥수동, 금호동, 응봉동, 행당동, 창신동, 숭인동, 동숭동, 돈암동, 미아리, 답십리, 전동농, 이문동, 휘경동, 수유리, 흑석동, 노량진의 곳곳에, 도심지나 도심으로 접근하기 좋은 자리에 생겨났습니다.  택지개발과 도시 개발을 하면서 철거해야할 불량주택들이었습니다. 


서울시에서는 불량주택 대책을 네 가지로 진행했습니다. 

1. 집단이주정착지 조성, 2. 불량주택 개선사업, 3.철거 후 시민아파트 건립 4. 광주 대규모 단지로 이주.



이와 관련해서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전시중인 <아파트 인생>이라는 전시를 관람해보길 권합니다. 광주 이주촌에 대해 늘 궁금했었는데, 정보를 얻을 수 있었어요. 우리의 마을이 어떻게 변해왔으며 아파트 또한 어떤 식으로 변화해왔는지 보입니다. 






















백사마을은 청계천이 복개되고(복원이 아닌) 청계고가도로가 건설될 때,  천변에 살던 사람들과 영등포, 용산, 안암동 일대에서 온 철거민들의 집단 이주촌으로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지역이 조성되던 1967년 경에 이미 수유지구, 망원지구 창동지구 등이 대규모 택지구역으로 개발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보다 훨씬 먼곳인 불암산 자락 구릉지가 선정되었다고 하는군요. 


이들에게는 임야지 8평과 블록 200장, 소형텐트 1개를 지급받았다고 합니다. 상하수도나 도로는 전혀 없었으며, 도로, 치안, 위생 등 도시안전망이 전혀 없는 장소였습니다. 시영버스와 공동우물만 있을 뿐이었따고 합니다. 블록으로 대충 지은 집에 겨우 지붕을 얹고 살던 당시에서 수십년이 지난 지금, 집들은 서로 합치고 남은 땅에 집을 지으면서 20평 정도로 집들이 커졌고 지붕도 집집마다 달라졌으며 개량된 양옥집도 들어오는 등 다양한 집들이 생겨났습니다. 번듯한 2층집도 있고 오래되었지만 마당이 잘 조성된 집도 생겨난 것입니다. 


주변까지 고층 아파트가 들어왔음에도 백사마을은 계속 개발에서 소외되어 왔습니다. 개발제한구역이기 때문이지요. 이제야 다른 개발을 하겠다며 도시재생 분야에서 믿음직한 건축가들이 투입되었는데, 거주민들에게 그것이 너무 늦은 일이 아니었기를 바라게 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사는 동네에서는 예술가가 되는 것 같습니다. 밋밋한 블록 벽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시멘트 벽돌을 사이사이에 넣어 모양을 내는가하면, 기단이 되는 석재가 없으므로 시멘트 포대 째로 쌓아 덩어리를 만들었습니다.세월이 흘러 시벤트 포대 자루는 사라져버리고 단단한 시멘트만 남았습니다. 









벽돌로 틀을 잡은 건물 안에 기와지붕이 있는 희한한 집을 발견했습니다. 재활용된 집이군요.




옛 나무대문을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환기구도 기능적으로 만들어져있습니다. 백사마을의 현관 앞에는 자그마한 문이 달린 창고같은 장소를 발견하게 됩니다. 연탄을 보관하는 곳일까요? 열어보지는 못했습니다. 






골목길이 자유롭습니다. 건물과 건물의 틈,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틈들이 사람 길이 되고 물길이 됩니다.  





집집마다 연탄난방을 합니다. 마을 입구에 연탄을 보급하는 장소가 있는데, 봉사활동하러 온 사람들이 지게에 연탄을 짊어지고 날라주기도 한답니다. 












점점 봄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여러 예술가들이 마을의 한쪽 귀퉁이 골목에 벽화를 그려놓았습니다. 백사마을이 어감이 좋지 않다고 하늘마을로 개칭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합니다. 때문에 하늘색으로 담을 칠해놓은 집들이 꽤 많습니다. 






그 길에서 아빠와 딸아이를 만났습니다. 답사팀의 K선생님이 이야기를 던지며 카메라를 드니, 아이는 부끄러운 듯 숨다가 아빠 다리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밉니다. 그래도 깔깔 웃으며 여지없이 따사로운 봄을 터트립니다. 

 









점점 푸르러지는 길, 나무들은 주인 없이도 자라납니다. 

봄은 부르지 않아도 자기 자리를 찾아듭니다. 












봄 기운에 마음이 풀려버립니다. 오늘은 건축가와 여행자의 모입입니다. 특히 백사마을의 중심부를 계획하는 건축팀의 L은 오늘 답사가 몹시 인상적인 모양입니다. 길과 꽃나무의 포근함, 경사에 찬찬히 기댄 집들, 작지만 생활에서 나온 디자인 요소들, 이런 것들이 계획안에 포함되면 좋겠습니다. 



마을은 골목과 필지와 경사는 남겨 저층의 집들을 계단형식으로 짓는 구역이 있고, 왼쪽 뒷편의 공간은 20층 규모의 임대아파트가 올라갑니다. 

마스터 플래너인 승효상 선생은 아파트도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겠다고 강력하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백사마을을 이루었던 오래된 집들은 모두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 또한 수십년을 지나오면서 불량한 재료로 지어진 위험한 주택이기 때문이지요. 


문화유산 지킴이를 하는 C는 말합니다. "골목과 필지를 남긴다고 해도 집을 모두 없애고 거주민을 뒤쪽의 임대아파트로 보내면 그것이 재생인가?"라고요. 이제 거주민이 힘겹게 살아온 마을은 외지 사람들이 몰려와 자기 삶을 꾸미겠지요. 



사진찍는 여행가인 K는 계절마다 달라지는 이 마을의 생동감을 이야기합니다. 골목은 걷기 좋고 경사를 오를 때마다 다른 풍경이 펼쳐져 압도되곤 합니다. 마을에는 누대도 있습니다. 폐자재를 모아 만든 쉼터이지요. 그곳에 앉으면 도봉산과 북한산의 기암괴석이 참으로 아름답게 보입니다. 이 풍경은 이제 누가 보게 될까요? 














마을은 올 가을까지 계획을 완료하고 올해 말,내년부터는 개발에 들어갈 것입니다. 아마도 백사마을은 마지막 봄을 맞이한 것일수도 있습니다. 


나는 백사마을에서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보지 못한 아름다운 목련나무를 보았습니다. 살구나무와 홍매화가 터지듯 꽃이 맺힌 걸 보았습니다. 개나리가 지붕위에 무성하게 덩굴진 것을 보았습니다. 주인이 버리고 간 집을 감싸주는 푸른 나무들을 보았습니다. 마치 마지막 봄인 걸 알고 있는듯, 힘껏 봄을 밀어내고 있었습니다. 이 나무들을 내년 봄에는 볼 수 없을 겁니다. 




백사마을의 마지막 봄을 보았습니다. 


















근대문화유산 답사란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지닌 특정한 건물을 보는 일일수도 있고, 어떤 역사적 사건이 벌어진 장소를 말하기도 하고, 또, 조망할 필요가 있는 인물들이 머물던 장소를 가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길을 지나다가 우연히 아주 오래되고 기묘한 형태의 이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건물을, 그야말로 우연히 발견하고서, 도대체 저건 무엇이며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을까,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나에게는 그런 호기심이 문화유산 답사의 시작이 아닐까 싶습니다. 알고 싶어서 시작하게 된 답사는 어느 순간, 이번엔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바뀝니다. 










다섯번째 용산답사는 구용산으로 분류된 지역으로 '원효로 일대'를 돌아보았습니다. 



보통 용산이라고 하면, 용산역의 동쪽 넓은 지역을 연상하게 되는데, 원래 용산은 한강변에 있는 산의 이름이었습니다. 높지는 않으나 한강이 내려다보여 경치가 좋은 곳이었지요. 철도가 생겨나 용산역 동측이 신용산으로 개발되면서 어떨결에 원래의 용산지역은 구용산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지금 용산신학교와 용산성당이 용산의 원터가 어디쯤인지 짐작하게 해주는 이름이라고 하지요. 



'원효로'라 이름붙여진 이유에도 여러가지가 있는데, 통일신라시대에 원효대사가 당나라를 갈 때, 서울을 지나갔다는 기록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에 기반하여 (효창공원에 원효대사의 동상이 참 뜸금없이 서있는 이유지요.) 효창원의 의미를 부여하여 결정된 이름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왠지, 원효대사의 이야기가 좀 허무맹랑하게 들려서, 아마도, 이 지역의 일본식 이름인 '원정'과 '효창원'의 만남으로 '원효로'가 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성의없는 결정 같기도 합니다. 제강점기 동명을 개정할 때 대부분의 동명이 특별히 옛 지명을 되살리곤 했는데, 원효로는 불분명한 지점에 있습니다.  







'용산'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용산신학교와 예수성심성당을 찾아가보았습니다. 

성당은 1902년에 세웠고 명동성당을 세운 코스트 신부의 주도로 세워졌습니다. 성당은 아주 크지도 아주 작지도 않습니다. 규모는 아담하지만 층고가 높아서 종교적인 경건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신학교는 1892넌에 세워졌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라 하는군요. 신학교는 혜화동으로 옮겨가고 건물에는 <성심기념관>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습니다. 수녀원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붉은 벽돌은 묘한 느낌을 줍니다. 시간을 가늠하기기 어려우면서도 흙이 주는 안정감이 있지요. 우리 전통 건축에도 널리 사용되지 않았으나 벽돌의 전통이 있긴 합니다. 언제부터 붉은 벽돌 건물이 생겨났는지, 왜 벽돌집이 널리 사용되지 않았는지, 궁금해집니다. 












성당내부로 들어가봅니다. 마루바닥이 잘 닦여서 기분좋은 느낌을 줍니다. 볕도 환하게 들어 평온하고 느낌을 줍니다. 출입문에는 특별한 의미가 담긴 상징들이 그려져있습니다.


IX JUNII MDCCCXCIX / XIV APRILIS MCM I I 라는 글자가 보입니다. 로마자로 적힌 연도숫자이겠지요. 이 수수께끼를 풀어보자면 (M=1000 D=500 C=100 L=50 X=10 V=5)  1899년 6월 9일과  1911년 4월 14일 두개나 나옵니다. 앞엣것은 용산신학교의 개교일이고 뒤엣것은 교구가 분리된 날이라고 합니다. 김대건 신부와 관련된 날짜와 성인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상징이 있습니다.수수께기의 상징들은 모종의 메시지같습니다. 어느 집단들만 공유하는 명백한 글자들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비밀스런 수수께기가 되기도 하지요. 

 


예수성심성당과 수도원은 성심여중고와 함께 있습니다. 누군가, 카톨릭계 학교답게 규율이 엄격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정말 그러한지 궁금합니다. 












학교를 나와 원효로 사거리로 향하는 골목에서 일식 목조가옥을 만났습니다. 주택은 아니고 회사 건물로 사용되는 모양입니다. 내부는 어떤 구조일까요? 시간이 멈춘 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건물의 변화를 계속 지켜보고 싶습니다.  














서로 각기 다른 매스와 재료, 색의 건물이 겹쳐지는 거리를 걸어봅니다. 












원효로 일대를 다니면서 우연히 발견한 건물들입니다.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야만 가치있는 건 아닙니다. 독특한 경관을, 도시의 특징과 흐름을 보여주는 모든 건물들이 가치가 있습니다. 디자인이 훌륭하건, 건축적으로 가치가 있건, 그것과 전혀 무관하건, 모든 건물들이 도시를 이루는 요소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똑같은 것에 지루함을 느끼고 자그마한 차이에 유쾌함을 느낍니다. 


나는 그 차이를 유심히 바라봅니다. 미세한 차이, 그 미세한 틈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원효로에서 꽤 공들여서 세심하게 지은 건물을 보았습니다. 어떻게든 보수하고 쓸 수 있는 건물인데, 지금은 모두 비었습니다. 과연 건물주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요? 이 건물은 어떻게 될까요? 1년후, 혹은 10년 후, 이 자리는 어떻게 변화될까요?   건물 하나하나의 변화 과정이 도시에 대한 시민들의 의식수준일 것입니다.


 우리사회는 역사가 오래된 건물도 마구 허물고 새 건물 짓기를 아주 좋아하지요. 그 자리에는 때론 거대한 우주모선 같은 것들이 들어오기도 하고, 감각도 없고 어떠한 문화적 고려도 없는 싸구려 임대건물이 세워지기도 하고 다른 나라 다른 도시의 어느 거리에 있는 건물을 그대로 가져온 듯한 것도 생겨납니다. 저는 싸구려 재료로 싸구려 임대건물이 들어오는 게 가장 한심스럽고 슬픈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미 있는 것을 건축주의 직권으로 없앤다면 그 자리에 그만큼 의미있는 것을 만들 의무가 있는 것 아닐까요? 그런 변화가 이 사회와 시민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니까요. 








 



 



















                 


용산 답사 네번째, 오늘은 삼각지입니다. 삼각지 전철역과 한강로를 따라 걸었습니다. 1972년에 지어진 삼각아파트와 그쪽의 경성전기회사의 창고 건물 외에도 일제 강점기 것으로 보이는 건물들을 발견했습니다. 비어있어 궁금증을 자아내는 건물도 있고 지금은 어떤 용도로 사용하는지 파악하기 어려워 궁금한 건물도 있습니다. 


삼각지라는 지명의 연원은 정확하게 설명되지 않는데, 한강과 서울역, 이태원으로 향하는 세갈래길을 뜻하며, 경부선 철로가 건설된 후 생겨난 이름으로 보고 있습니다. 삼각지 바로 아래에 삼각맨션이 들어와있지요. 삼각맨션 뒤에 역시 삼각형의 부지가 있고 오래된 창고 건물들이 여러 채 있습니다. 과연 어떤 용도의 건물인가 싶은데, 옛 지도에는 이 지역으로 전차철로가 들어가며 '일한와사00'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 운영하던 가스회사였습니다. 이 창고부지는 어떻게 사용될까요? 




































한강로쪽으로 내려오면 이런 건물을 만나게 됩니다. 


1926년에 완공된 간조 경성지점 사옥인데, 건물 내부에 건축연도와 시공사의 이름이 새겨진 패널이 있습니다. 지금도 꽤나 웅장한 모양새로 적당한 장식이 아름답게 남아있는데요.  입구 오른쪽에서부터 건물의 뒷면까지는 보수한 흔적으로 벽돌타일 위에 보강하고 드라이비트를 칠했습니다. 위의 사진은 <용산구 문화재>라는 책자에 실린 것으로 <조선과건축>이라는 일제강점기 건축전문잡지가 원 출처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조선과건축>은 일본어로 발간되던 잡지이며 조선에 지어진 최신 건축물들을 소개하던 잡지였습니다. 간조라는 회사는 압록강 철교와 한강 인도교를 시공한 철도회사라고 합니다. 이렇듯 용산에는 일본 기업체나 건설회사들이 지점을 설립하는 주요 장소였습니다.   











너른 부지에 신경써서 지은 주택 건물도 발견했습니다. 이 건물에는 어떤 사람이 살았을까요? 부지도 넓고 건물 규모도 크며, 현재는 건물 바로 옆에 창고가 있어 무역회사나 회사의 창고와 사무실 겸 주택으로 사용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건물 뒤쪽에도 부속건물들이 있어서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상당히 넓은 부지의 주택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일본식 단층 건물로 보이는데요. 정원이 넓어져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려웠어요. 재미있는 것은 이 주택 뒤에는 2층짜리 양식건물이 덧붙여져있다는 것이지요. 상업용도의 건물과 주거가 연결된 건물이겠지요. 지금도 그렇게 사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삼각지에서 경부선철로쪽으로 향하다보면 일제강점기 상가 주택들이 여전히 남아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중 한 건물은 재미있게도 햄버거 가게로 운영되고 있는데요. 2층 내부에 목조 천장을 훤히 열어서 오래된 집의 냄새를 여실히 풍깁니다. 작은 집이지만, 이런 장소가 얼마나 재미있고 소중한지요. 오래된 집들을 보면서 한번 들어가서 내부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데, 그런 욕망을 충족해준 곳입니다. 








이 건물은 규모도 크고 장식도 훌륭하여 특별한 용도로 지어진 건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게다가 출입구를 알려주는 표지석이 있으니 주요 사옥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철도부지 주변인데다 고가도로가 지나고 있어 개발에서 제외된 지역이겠지요. 시대를 짐작하게 하는 오래된 집들을 바라봅니다. 곧 어떤 식으로든 재개발이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고가를 건너 철로를 지나갑니다. 경부선 철도의 서쪽으로 건너옵니다. 동네명은 문배동인데, 문배산이 있어서 생겨난 이름입니다. 지금 보고 있는 지역은 용산공설시장이 처음 생겼던 장소인데요. 이후, 공장시설이나 그 배후 시설들이 자리잡은 곳입니다. 지금은 창고건물과 식당 등이 있습니다. 









남쪽으로 걸어내려오면 오리온 제과 공장이있습니다. 박공지붕과 벽돌 건물의 자태가 예사롭지 않지요? 

모리나가 공장이라고 용산 거주하시는 분이 알려주셨습니다. 여전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건물들을 보면, 과연 어떤 이유로 생겨나와 지금까지 살아남아있는지 인터뷰를 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그러고보면 민중생활사를 연구하는 분들이 연로하신 분들의 구술사를 남기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됩니다. 


우리에게는 가치가 높아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남아있기 떄문에 가치가 높은 것이니까요.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 가치를 지켜나가야하는 것이니까요. 










당고개 순교성지를 지나갑니다. 


신계동 아파트 단지안에 있는 이 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10여명의 순교자들을 기리는 장소입니다. 최근 서소문 순교성지를 공원화하는 사업이 공표되었던데, 서소문과 새남터에 이어 세번째로 많은 순교자가 나온 곳입니다. 신계동 아래로 내려오면 개발과 비개발 사이에서 신음하는 지역이 등장하다가 용산 역 주변 상권지역과 연결됩니다.



한적한 골목길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어쩌면 우리 어렸을적 자주 마주쳤던 골목길이 아닐까요? 

집 밖에 내놓은 의자들이 정다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누구나 빛나는 하루를 살고 있겠지요. 

이들의 삶이 더이상 위협받지 않았으면 싶습니다. 

  















남영동을 돌아보면서 1호선 남영역을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전철역 플랫폼의 동쪽편에는 예사롭지 않은 검은벽돌 건물이 서있습니다. 마치 묘비석처럼 특징없이 거대하게 서있는 건물 덩어리. 이곳이 남영동 대공분실이라고 일행이 말해주었습니다. 대.공.분.실. 이 말을 듣는 순간, 오싹한 한기가 배어나옵니다. 


왠지, 과거 속에 사라져버렸을 것만 같은 건물이 눈앞에, 그것도 거의 매일 타고 다니는 1호선 전철 인근에 있다는 것은,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대공분실의 조사실에서 고문을 당하며 죽었거나 죽음을 가까이 겪었거나 죽음을 넘어선 사람들 이야기를 너무나 오랫동안 들어왔습니다. 그 남영동 대공분실이 이렇게 우리 가까이에 현재진행형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오싹하도록 생생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건물은 속을 보여주지 않는 묵직한 어둠을 품고 서있습니다. 대공분실이 더 이상 대공분실의 기능을 하지 않으며, 문제의 장소인 조사실은 심지어 누구나 관람하고 그 역사에 대해 질문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우리가 과거사에 대해 이토록 오픈된 자세를 가지고 있다니요. 악명 높았던 대공분실은, 2005년부터 경찰청 인권센터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1976년 치안본부의 대공분실로 지어진 이 건물은 건축가 김수근의 설계로 지어졌습니다. 과연 건축가가 이 건물에서 자행될 일을 알고 설계를 한 것인가, 그렇다면 건축가의 윤리는 어떤 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부분이 건축계에서 시끄러웠던 적이 있지요. '남영동 1985'라는 영화가 개봉된 후, 대공분실이 다시 한번 수면 위로 떠올랐고 묻혀있던 김수근의 건물도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건축가는 고인이 되었고 건축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여전히 침묵하는 가운데, 건물은 여전히 불편한 존재로 남아있습니다. 



건축가 김수근은 벽돌로 조형물을 만들 듯이 시적인 분위기를 부여하는 건축물을 많이 남겼습니다. 대학로의 붉은 벽돌 건축물을 보면, 빛과 그림자가 아름다운 선과 면을 이루며 마음에 파문을 던집니다. 건축이 말을 거는 것 같고, 시를 읊는 것 같지요. 붉은 벽돌 외에도 공간사옥에서 볼 수 있듯이 검은 벽돌로 지은 건축물도 있습니다. 이 건물을 처음 봤을 때에도, 벽돌이 쌓아올린 면면이나 비례감, 창이 주는 율동감 등이 좋게 다가왔습니다. 막 지은 건물은 아닌거죠. 이름난 건축가가 조심스럽게 쌓아올린 작품의 하나라고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건물에 가까이 갈수록, 상층부의 검은 벽돌이 조금 다른 느낌입니다. 알고보니, 원래 건물은 5층으로 지어졌는데, 후에 2개층을 더 올려서 7층으로 증축했습니다. 그렇지만 조사의 용무는 5층에서 계속 진행했나 봅니다. 건물은 대공분실이라는 업무 특성상, '해양연구소'라는 간판을 단 채 위장했다고 합니다. 두꺼운 철문, 철조망으로 둘러싼 담도 여전히 그대로였습니다. 그대로 두어 과거사를 이야기하려는 것이겠지요. 내부는 리모델링이 되었지만, 현장을 보여주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1976년 10월 2일 건물의 준공. 

관리실, 옆에 있는 두 별관 건물, 조경, 뒤쪽에 테니스 코트까지 함께 계획되었다고 합니다. 






       




인권센터로 사용중인 본관과 아동, 여성, 장애인 경찰지원센터로 사용되는 별관을 연결하는 부분. 

벽과 기둥, 통과하는 문 등이 지루하지 않게 구성되었고 다양한 틈새 공간을 촘촘히 배치해두었습니다. 

마치 골목을 걷는 것처 다양한 느낌의 장소를 거쳐가게 됩니다. 직원들의 야외 휴게시설이겠지요. 

 



외부로 보여지는 벽은 단순한 벽면처럼 구성했지만 내부의 벽 하나는 요철을 두어 지루하지 않게 했네요. 

이공간의 내부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군요. 



1호선 철로와 바짝 붙어있습니다. 빈번하게 지나가는 전철의 소음이 꽤 귀에 거슬립니다. 




크고 작은 창이 리듬감을 줍니다. 문제의 좁고 길쭉한 창이 계속 공격 대상이 됩니다. 

조사실의 창이 바로 좁고 긴 형태인데, 피조사인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혹은, 피조사인에게 

불편함을 주도록 의도적으로 설계되었다는 거죠.  







정면에는 큰 창이 있고 번듯한 출입구가 있는 반면, 피조사인을 끌고 올 때 

철조망 담쪽의 작은 문으로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문제의 원형계단입니다. 5층까지 계속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발견됩니다. 

1층에 전시된 사진에는 콘크리트로 된 계단이 보입니다. 그런데, 1층에는 철제계단이군요. 

어떻게 된 것일까요? 






콘크리트로 된 계단 공사 장면이 보입니다. 계단 옆의 사진은 1976년 공사 당시 모습입니다. 






관람자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갑니다. 당시 피조사인은 눈을 가린 채 차에 실려와 뒷문으로 들어오고, 원형계단이나 그 옆에 있는 3인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왔다고 합니다. 조사실 복도는 마치 감옥같은 구조입니다. 리모델링한 후인지 보통의 아파트처럼 보이기도 하네요. 어둠침침한 복도는 무척 불길하게 보입니다. 문에 달린 작은 렌즈는 안에서 바깥을 보는 게 아니라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게 되어있다고 합니다. 피조사자들을 감시하는 수단이었지요. 







(도면출처: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9432.html)


문제의 도면입니다. 하지만 도면 작성 연도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정면도를 보면 1983년 증축된 도면인데, 

평면도는 언제 것인지 사진상으로는 파악이 어렵습니다. 어쨋건, 조사실이라고 쓴 부분은 정확히 보이네요. 

조사실에는 욕조와 변기 세면대, 침대의 위치 등이 자세히 그려져있습니다. 원형계단, 그리고 두개의 분리된 엘리베이터가 있습니다. 이렇게 상세한 도면을 보니, 김수근은 건물 설계자로서 윤리적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 건물에서 일어난 일들을 알고 난후 김수근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 이후, 아무런 코멘트도 남기지 않았던 걸까요? 


김수근은 대공분실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대외적으로 알려지기 직전인 1986년에 사망했습니다. 





(사진출처: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8454)

콘크리트로 된 원형계단입니다. 안창모 교수님이 2005년 답사한 내용에 이 사진이 실려있습니다. 

5층의 계단부분은 문이 잠겨있어서 인권센터측 안내자와 함께 있었지만 확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남영동 대공분실이 바깥으로 알려진 계기가 된 것이 박종철의 죽음이라고 합니다. 

이 사건에 대한 자료들이 4층 추모실을 채우고 있습니다. 






작은 욕조와 움직이지 않게 박아둔 책상과 의자, 주황색 타일을 보니 가슴이 답답하게 압박감이 느껴집니다. 다른 방은 모두 시설이 철거되고 리모델링 되어있는데, 이 곳은 그대로 남겨두었다고 합니다. 이 방은 9호실로 박종철이 고문을 당하다 죽은 장소입니다. 1987년의 일입니다. 고 김근태 의원이 고문을 당했던 14호실은 좀 큰 방이었습니다. 내부는 리모델링되었지만,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붙여 놓은 흡음판과 검은 유리로 된 카메라 등이 눈에 띄었습니다. 


역한 공포와 말을 얼어붙게 만드는 폭력이 내 몸을 덮치는 것만 같습니다. 1987년부터 88년까지 관련 기사들을 읽으면서 괴로움은 더 커졌습니다. 고문기술자라는 사람들의 잔혹한 폭력 언어로 쓸수가 없군요. 




안내를 맡아준 경찰청 홍보 담당자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곳의 목적은 조사를 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조사를 할 때, 밀폐된 시설에서 하지 않습니다. 이 건물의 조사실은 구조로 보면, 조사가 아니라 구금시설입니다. 형이 확정된 사람을 구금하는 시설이죠. 서대문형무소처럼요. 조사를 진행하는 장소의 구조가 구금시설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그 자체가 인권 유린입니다."


그러므로, 이 조사실은 존재만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현재, 대공분실은 보안분실로 이름을 바꿨고, 남영동이 아니라 다른 장소로 옮겨갔습니다. 

이 장소에 경찰인권위원회가 들어온 것은 2005년 노무현대통령 재임하의 일입니다. 불편한 과거사를 공개하며 현재와 화해를 시도하는 공간이 되었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때의 사건에 개입된 소위 고문경찰관들은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추모하고 애도하는 일만으로 가슴이 답답했던 것은, 근절되지 않았으며 처벌되지 않았으며 지금도 여전히 국가권력으로부터 시민의 인권이 침해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요즘 용산을 걷고 있습니다. 지도를 보면서 몇 군데 표식을 해보았습니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철길을 따라서 형성된 지역들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삼각지와 용산역주변에서 한강변까지 걸어볼 예정이며, 몇 군데의 장소들은 추가답사하여 블로그에 소개하려고 합니다. 






두번째로 답사를 했던 곳은, 남영동입니다. 지도에서 숙대입구역과 남영역 사이에 있는 사각형 격자모양의 필지들을 돌아보았습니다. 1910년대부터 40년대까지의 지도들을 놓고 비교해보았는데요. 이 지역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지점은 1930년대부터입니다. 하지만 용산지역만을 따로 떼어만든 용산시가도(1927년 제작)를 보면 남영동 지역의 필지가 이미 형성되어 있고, 공설시장이라는 단어도 분명히 적혀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역은 1920년대에 이미 형성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도1. 1927년에 제작된 용산시가지도. 공설시장이라는 글자가 보입니다.





지도 2. 1929년 제작된 경성시가전도에는 이렇게 필지 구획만 나와있어요. 

아마도 용산시가지도가 더 정확하게 지역을 표시하고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지도 3. 1933년에 제작된 경성정밀지도에는 지번까지 부여되어 빼곡히 채워진 모습입니다.

지도 해상도가 뛰어나지 않아서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긴 어렵습니다. 






지도 4. 남영동의 당시 지명은 연병정이었습니다. 좌측하단에 공설시장이라는 글자가 보입니다. 

<경성부도로공사일람도, 1935년 제작, 부분>





남영동이라는 지명은 광복 후에 등장하는 지명인데, 일제강점기에는 연병정이라고 불렸습니다. 일본군영과 바로 맞닿은 지역이므로 그와 이어진 지명이겠지요. 조선시대에도 군 주둔지가 있었고 군영지의 영문이 있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자료는 파악하기 어렵다고 하는군요. 여기서 남영동이라는 지명이 나왔다고 합니다. 

용산에 남아있다는 옛 시장을 찾아가려고 검색하다보니 옛 필지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있어서 어쩌면 옛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게 되었지요. 그곳이 남영동이었습니다. 









실제로 지도의 그곳에는 오래된 시장이 있었습니다. 마치 숨바꼭질을 하듯이 간판들로 몸을 가리고서 이웃집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아케이드로 형성된 시장 내부는 상점이 마주보며 일렬로 서있습니다. 너무 오래된 시장이라서인지, 이미 일대에 시장을 이용할 만한 수요층이 그다지 많지 않은 이유인지, 상점은 문을 닫은 곳이 많았습니다. 아케이드 지붕을 떠받치는 구조물들은 꽤 오래된 이곳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이곳은 용산시가지도에 표시된 바로 그 시장일 것입니다. 그동안 수차례 개수하고 보수하며 지금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지도를 자세히 보니 남영동 좌측 하단에도 공설시장이라는 지역이 표기가 되어 있습니다. 이 두 시장은 어떤 관계였을까요?







 시장 내부로 들어가 두리번거립니다. 지금은 좀체로 볼 수 없는 천장 구조물을 올려다보고, 창과 창 틈으로 어느 정도 빛이 들어오나 살펴봅니다. 상점들은 모두 샷시문이 달려있습니다. 






2층에도 방이 있는 걸로 보아 아케이드 양쪽 옆에도 분명 공간이 있겠지요. 그 방은 어느정도의 규모일까요? 어둡게 닫혀진 창 안에는 아마도 창고로 사용하는 이층방이 있겠지요. 양쪽 출입구의 문은 양문경첩으로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도 열 수 있고 뒤로도 열 수 있는 것으로, 보기 드문 형태라고 하는군요. 인근 상점에서 일하는 분께 물어보니 문이 오래되어 거의 작동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시장은 남영 아케이드라는 간판을 달고 서있습니다. 


<서울의 시장>이라는 책에 따르면, 용산 지역에는 군영을 비롯하여 일본인 사회가 거대하게 형성되어 있어서 그들의 생활을 뒷받침하는 시장이 꽤 크게 형성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수산시장을 비롯하여, 일본인들을 위한 먹거리와 살거리를 제공하는 일본 시장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서울의 큰 시장이었던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이 크게 자리잡고 있을 때였고 공설시장도 여러 곳 등장했습니다. 



용산의 공설시장은 1920년부터 신문에 등장합니다. 동아일보를 살펴보면, 1920년 8월에 용산의 '경정'에 공설시장을 설치하고 9월 20일부터 시장을 연다는 기사가 실려있습니다. 경정은 지도4에서 공설시장이라 적혀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듬해에 이 시장은 위치가 좋지 않아 다른 곳으로 옮겨갈 예정이며, 1922년에는 건너편 연병장 인근에 가옥들이 늘어나면서 시장의 수요가 높아졌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중에 원정2정목(원효로 2가)에 사설 시장이 들어섰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이윽고 공설시장도 문을 열었습니다. 



그동안 공사를 진행중이든 룡산연병장에 새로 설치한 경성부의 공설시장은 일전에 공사가준공되야 금십이일오후 세시부터 개상식을 거행하고즉시물품을판매할터이라더라. 

<1922년 10월12일 동아일보>



하지만, 화재로 시장이 불타버렸고 약 백여평 규모의 시장을 부랴부랴 재건하여 1923년 12월에 다시 개점을 하게 됩니다. 다시금 용산 시장의 건물 이야기가 등장하는 시점은 1937년인데요. 2만3천여원을 들여 "용산공설일용품시장"을 개축했다는 기사입니다. 공설시장이 품목별로 시탄소채시장과 일용품시장 두 가지로 나뉘어진 모양입니다. 


흥미롭게도 신문에서 서울시내 공설시장에서 매달 판매한 액수를 공표하여 시장을 이용하는 정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1920년대에 세워진 공설시장은 명치정, 화원정, 용산, 종로 등 네 곳이며, 이는 점차 늘어나게 됩니다. 시장은 화재가 잦아 소방시설을 갖추고 다양한 사업을 시행할 수 있도록 공설시장법안이 시행되게 되는데, 1924년 동아일보에는 이러한 법안이나 각종 사회사업비, 공원조성비 등이 조선인의 삶과는 완전히 별개의 것이었다고 토로하는 기사나 실려있습니다. 


경비비는 작년 본뎡 애정뎡 등의 화재로 인하야 소방긔관을 충실히하라는 일반의 여론이 만흠을 따라 부당국에서도 다소간 충실히 시설할 필요를 늣기고 작년보다 삼만여원을 증가하게 된 것인데, 자동차 몃개를 느리고 소방긔구를 더갓추고 소방수몃명을 더늘이고 아울러그들의(거의 일인)대우를 올려주는것가튼것은 별로 문뎨가 아니나 이가치 충실히하는 소방대들이 어느곳에잇는가 상비소방대는 남대문밧게 경성소방대는 영락뎡에 룡산소방대는 룡산에 잇어 황금뎡큰길을 이북으로한 소위 북부에는 비번소방수 일인이잇슬 출장소한개 설비치 아니하얏스니 까닭은 알수업스나 엇지하얏든지 현재의 소방대와 북부와는 거리가먼것만콤북부와는 등한한처디인즉 이십여만원의 경비는 누구의생명재산을보호할 밋천인가


사회사업의뎨일항이 일용품 공설시장인데 긔설된 공설시장중에서 명치뎡 공설시장 화원뎡 공설시장 룡산공설시장은 그이름과가치 조선인과는 하등의관계가업슬뿐만 아니라 간신히 하나만 잇든 공로공설시장도 무슨까닭인지는 모르나 부에서 방임주의를 쓴지 오래이며 더욱 최근에 이르러 사월일일부터 시행하는 공설시장규뎡에 "종로시장은 제외하고...."라는 문구가씨엿슴을 보아이제로부터 이곳은 경성부와 영영 관계가업서지는 모양인즉 조선인은 공설시장으로하야 부의 덕택을 바든 일도 업고 밧는일도 업스며 그 다음부영주택 중 한강통 삼판통에 잇는 열세평짜리 마흔채는 일본인 주택이오 봉래뎡과 훈련원에 잇는 세평짜리 여든여럽채는 조선인 헛간인데 긔왕은 고사하고 금년에 계상된 삼천여원의 경비도 "다다미"를 밧꾸어놋는다는 것을 보아 조선인 헛간에 관한 비용은 아니즉 이것도 조선인은 모르는 돈이며 도시개량비 이만여원도 연구조사의 경비로 봉급 소모비 등인대 "무슨도시""누구의 서울"을 만들려고 연구와조사를 하는지는 모르나....


(하략)


(1924년 3월 24일 동아일보)






위의 기사를 읽다보면 조선인 거주촌을 '소위 북부'라고 표현한 부분 (그곳에는 소방시설도 변변치 않았고)이 눈에 띕니다. 지금 살펴본 용산시장은 일본인 거주자들을 위한 시장이었지요. 당시에도 요즘처럼  "무슨 도시" "누구의 서울"같은 구호가 있었던 것일까요? 도시 개발을 위한 캠페인을 벌였던 것일까요? 

 






시장을 지나 격자형 골목을 따라 걸어갑니다. 이 지역은 미군부대(옛 일본군영을 그대로 이어받았죠)와 바짝 붙어있어서 개발이 제한된 지역입니다. 때문에, 높은 건물들도 지을 수 없고, 옛날 집들도 찾아볼 수 있지요. 길을 따라 가면 새로 지어진 빌라들 사이로 옛 집들이 슬그머니 몸을 들어냅니다. 


가장 남쪽 구역에는 집들이 서로 마주보고 같은 형태로 지어진 것들이 보입니다. 용산 일대에는 각종 은행 사택, 총독부 직원들의 숙소, 철도관사 등 관사촌과 사택들이 다수 있었습니다. 이곳도 어떤 기관의 관사촌이 여태 남아있는 것일까요? 개발이 어려운 곳이었으니, 광복 후 개발업자가 지은 민간주택단지라 보기는 어려울 듯하고요. 이런 저런 짐작과 기대를 하면서 골목을 걸어봅니다. 




이렇게 좁은 골목이 있군요. 당시에는 사람이 지나다니는 골목이었겠지요. 
































미군부대 바로 옆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것은, 부대찌개와 스테이크를 파는 식당들입니다. 백반을 팔 것만 같은 식당에서 T본 스테이크를 대표 메뉴로 하고 있네요. 왠지 들어가서 한 스테이크 하고 싶은 집이에요. 
















지도에 "선은사택"이라고 적힌 부분까지 가보았습니다. '조선은행'을 '선은'이라고 불렀지요. 지도의 그 장소는, 3년전 답사팀을 따라 가보았던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그때도 일대는 빌라촌으로 바뀌었고, 사택 중에서도 꽤 규모가 큰 콘크리트 슬라브의 집 한채가 남아있었지요. 





(2011년 9월 촬영. http://sweet-workroom.khan.kr/24)





하지만, 그 집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그 일대를 둘러보아도 높다란 빌라들만이 가득하더군요. 겨우 한 채 남은 그 집도 역사 속으로 사라진 다음이었습니다. 주변의 높은 건물을 찾아 옥상에 올라가 일대를 내려다보았습니다. 하늘에서는 옛 집들이 조금씩 보였습니다. 시간이 뒤섞인 자취를 그대로 노출한 채 도시는 점점 변화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멀리서, 남산타워가 보입니다. 


혹시, 

남산타워도 사라질 날이 올까요? 































얼마전, 어떤 모임에서 근대문화유산을 둘러보고 쓴 책인 <청춘남녀, 백년 전 세상을 탐하다>에 대한 이야기를 할 자리가 있었습니다. 한두 문장으로 근대문화유산 기행을 하게 된 배경과 의미 등을 이야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더군요. 그러고서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내가 백년 전 건물을 보고 백년 전 이야기를 수집하는 이유는, 그 시절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러므로 잘 알고 싶어서라는 거였습니다. 그 시대를 알기 위한 노력보다는  지우고 없애는 데 익숙한 지금을 돌이켜보고, 시대를 연결하는 지점들을 기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남기는 글과 사진들이 기록물로서 좀더 가치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2010년대의 길 위에서 도시를, 어떤 흔적을 바라보는 시선의 하나로서. 







오늘은 용산으로 갑니다. 





용산은 참으로 복잡한 맥락을 가진 지역입니다. 근대시기, 철도로 인해 새로 이주해온 일본인들을 수용하면서 세를 키우기 시작한 용산은 일본군영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해방후 일군영은 미군부대로 고스란히 이어졌지요. 해방 후 월남한 사람들이 자리잡은 해방촌, 지금은 자취를 감춘 집창촌, 다문화지역인 이태원, 곳곳에 고개를 쳐드는 재개발 바람과 최근 와해되고만 용산 국제업무지구 등등... 어쩌면 서울에서 가장 복잡한 맥락을 가진 곳이 용산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예전에 후암동, 갈월동, 해방촌 일대는 걸어본 적 있지만 좀더 철도와 가까운 지역들을 탐색하면서 옛 흔적이 남아있는 것은 없나,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서너 차례 신용산과 구용산을 넘나들며 걸어보게 될 것 같습니다. 



구용산과 신용산이라는 지명이 실제 사용된 것은 꽤 오래전부터라고 합니다. 전철역에만 붙은 편의상 지명인줄 알았는데, 1920년대 지도에서 용산역을 기점으로 서측편은 구용산으로 동측편은 신용산으로 표기하고 있더군요. 옛 지도들을 들춰보면 재미난 것을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흐릿한 능선이었던 곳이 점차 도로가 되고 필지가 되면서 건물이 세워지는 과정을 지도를 통해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학교는 꽤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새로 생긴 도로와 옛 도로 사이의 관계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저는 지도를 무척 좋아합니다. 지도는 비교해서 볼 수록 재미있습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봐야할지 까마득할때 지도를 펼쳐봅니다. 그러면 가봐야할 장소들이 점차  뚜렷해집니다. 


 

1940년 제작된 대경성명세도의 구용산 부분입니다. 





같은 지역이구요. 1945년 미군이 제작한 경성지도입니다.  



지도를 보니 눈에 들어오는 게 있습니다. 철도 관사라고 표시된 지점입니다. 위의 지도는 부분만 캡쳐한 것인데, 전체지도를 보면 용산역 우측 하단에 철도관사촌 필지가 크게 작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효창공원 근처에도 철도관사촌이 생겨났는데, 지도로 보아 1930년대 이후의 일로 추정됩니다. 능을 옮기고 효창원 넓은 부지가 개발되면서 격자형 필지가 생겨났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관사들은 등급에 따라 규모와 형태가 어느 정도 정해져있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기록할만한 사례들이 지방에는 조금씩 남아있습니다. 용산은 어떨까요? 뭔가 남아있는 게 있을까요? 



두번째로 가보고 싶은 곳은, 불교 자제원으로 표기가 된 곳입니다. 1948년 12월 이곳에서 화가 나혜석은 행려병자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합니다. 꽃처럼 어여쁘고 귀했던 여자의 말로는 더없이 처참했습니다. 그녀가 왜 용산 자제원에 있었는지 그 누구도 알수 없으며 왜 거기까지 흘러왔는지 추적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곳이 그녀의 마지막 거처였을 뿐입니다. 한번 가보고 싶었습니다. 지금 그곳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남영역에서 숙대 방향으로 올라가다가 효창공원쪽으로 꺾어집니다. 이 동네가 청파동입니다. 청파동이라고 하니, 최승자 시인의 "청파동을 기억하는가"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겨울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 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





빈 들판을 서성이는 말을 잃은 짐승처럼 시는 처절하고 거칠고 직설적으로 사랑의 폐허를 말합니다.  청파동 골목길을 돌아 마주친 몇몇의 집 풍경들이 시어들과 묘하게 어울립니다. 그러니까, 오래된 집, 사람이 살지 않는 집, 폐허가 된 집, 온기를 잃은 집 들 앞에서, 사랑의 폐허를 보는 것과 같은 감정들을 느끼듯이요. 갈길 잃은 골목 어귀에서 마주친 집 앞에서 시어들이 날아듭니다.  














효창공원을 지나 일대를 한바퀴 돌면서 우리는 점차 관사촌과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빌라촌으로 바뀌어버려 필지의 흔적만 남아있는 거리에서 초창기의 모습을 파악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다만, 필지가 크고 넓어 상당히 큰 관사들이 자리잡았겠구나, 하는 것만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모퉁이 앞에서 만난 건물 한 채. 당시의 구조를 짐작해볼 수 있는 유일한 집을 발견했습니다. 맞은 편 높은 건물에 올라가서 내려다보고서야 집의 형태가 어느 정도 눈에 들어옵니다. 즐거운 수확을 했다 싶습니다. 건축학자는 아니지만, 이 집은 일제강점기 근대건축물 중에서도 어느 정도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건축물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내부도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아쉬워하며 골목을 돌아나옵니다. 










원효로도로 주변의 집들은 여전히 복잡한 시절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본식 연립주택들이 꽤 많이 보입니다. 촘촘히 어깨를 맞댄 집들이 무수히 넘어온 세월이 참 길어보입니다. 멀리서 초고층 건축물이 하늘을 가릴 듯 서있는가하면, 1960년대, 70년대, 80년대에 유행했던 양식의 건축물들도 틈틈이 넘나듭니다. 좁은 경사 골목을 따라 오르내리다가 길을 잃을 뻔합니다. 오래된 골목들도 그대로입니다. 낡은 곳을 나름의 방식으로 덧대고 옷을 갈아입히며 마치 집과 사람이 동반자처럼 함께 살아온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윽고, 불교 자제원이라는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지도에서도 꽤 번듯한 건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그 자리에 지금은 용산경찰서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일대에 일제강점기 일본식 사찰이 상당히 많았고, 그 중 하나에서 운영하던 시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병원은 전염병 환자 등 격리 수용이 필요한 환자들을 위한 병원으로 쓰이기도 했고, 행려병자들을 거두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서울시립병원의 하나가 되었다가, 병원이 이전하면서 용산경찰서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용산원정 일뎡목십이번디 일본인의 경영하는 불교자제원에서는 이전부터 시내각처에서 의지가지가 업시 류리개걸하는 행려병자들을 수용하야 여러가지로 구제하여왓슴으로 지금도 약 오륙명 가량이 그 병원안에잇다는데....(하략)"

1926년 1월 9일 동아일보 




이곳에서 한 여인이 죽었습니다. 그녀,  5척 3촌의 신장을 가진 정상신체의 여인이 흐트러진 머리에 남루하고 낡은 옷을 입고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시립자혜원에서 병사했다는 것입니다. 최초의 여류화가, 구미만유를 다녀온 세상 부러울 것 없던 여인이 쓸쓸하게 떠난 곳입니다. 


나혜석의 죽음을 말해주는 것은, 공보처에서 발행한 관보의 내용입니다. 1949년 3월 14일자 관보에 본적, 주소가 미상이며 나혜석이라는 이름을 가진 53세 여인이 단기 4281년(서기 1948년) 12월 10일 하오 8시 30분에 사망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기록 사이에 존재하는 사람의 흔적을 짚어보려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시간 위에 얹어진 인간의 향기를 더듬어보려고 해도 마음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언젠가, 그녀가 머물렀던 서울의 장소들을 좀더 쓸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굴다리는 상당히 높았다. 경부선 철도선이 지나는 다리다. '영동', '횡간'이라는 지명은 KTX가 등장하기 전, 무궁화호, 새마을 호를 타던 시절에 자주 들었다. 경상도를 넘어 충청도로 진입했을 때 등장하는 지명이다. 다리 아래에 서있은지 십여분 되었을까? 다리 위 철길로 기차가 우당탕거리며 지나간다. 철로 아래 다리에 날카로운 소리와 묵직한 진동이 이리저리 튄다. 나는 기차에 탄 것 마냥 휘청거린다. 오래된 다리가 와르르 무너지지 않을까 겁이 난다. 하지만, 곧 소리는 멀어지고 다시 고요함이 찾아온다. 근처에는 사람사는 곳도 눈에 띄지 않고 그저 너른 벌판과 야산이 있을 뿐이다. 차나 사람이 빈번하게 드나드는 지점은 아닌듯하다. 




통로가 두 개가 있어 쌍굴다리다. 하나는 하천이 흘러가고 한쪽은 도로다.  쌍굴다리에서 죽어간 사람들 이야기에 관심있는 사람들 몇몇이 차를 멈추고 굴다리를 왔다갔다 한다. 굴다리 주변에는 온통 총탄 파편이 튄 자국과 그것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표시해둔 자국들로 가득하다. 동그라미도 있고 세모꼴도 있는데, 두 개가 어떤 차이인지 알 수는 없다. 들은 이야기로는 굴 내부에도 총탄의 흔적들이 가득했으나 보수공사로 메워버렸다고 한다. 굳이 흉한 자국을 그냥 둘 까닭이 있겠는가, 잊어야 할 일을 자꾸 들추어낼 필요가 있겠는가, 그런 말들은 지금도 유효하다. 자꾸 덮어두자고, 감추어두자고 한다. 




노근리.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제 진부한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차례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이해불가능한 죽음과 학대와 테러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으니말이다. 60년 전에 일어났던 동족상잔의 전쟁, 그 전쟁을 수행하던 외국의 군인들이 피난을 가던 사람들을 향해 총을 갈겨댔다거나, 저항하지도 못한채 죽어쓰러진 자들이 수백에 달한다거나, 위장간첩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군인들은 상부의 사격 명령에 따랐다거나, B-29 전투기가 우선 공격하여 수백미터 상공에서 포탄을 떨어트렸다던가, 한날 한시에 죽은 사람들이 많아 그 지역 사람들은 죄다 제사일이 고날고날이라던가, 참다참다 미국에 진상조사를 요청했다가 증거불충분과 시효만료로 거부당했다던가, 이윽고 비공개 문서들이 공개되어 한국전쟁에 대한 미군의 입장을 재점검하게 되었다거나, 한반도 상황에 무지했던 군인들이 캠핑을 오듯 전쟁 수행을 하다가 여러 차례 전멸했다는 기록과 민간인을 공격한 기록들이 공개되었다거나, 한국전쟁이 공산주의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정의를 찾고자했던 전쟁이 아니라 소련의 힘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전략적 전쟁이었다는 이야기들이 이제 다 한세월 지나간 이야기처럼 들린다는 거다.




그러므로, 나는, 노근리에서, 그 허탈하고 끔찍하고 숱한 죽음 앞에서,


지금 역시 도처에 놓인 죽음들과 유린된 인권 앞에서 진정 애도하고 성찰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싶다. 괜찮다는 등 할수있다는 등의 사탕발림으로 토닥거리며 다시금 죽음같은 긴 행렬에 줄을 세우는 값싼 힐링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성을 되찾을 수 있도록 길고 아프게 울어야할 때라고 말하고 싶다. 



노근리 사건을 집중적으로 조사 보도하여 결국 진상조사와 미국의 가해사실 인정까지 이끌어냈던 저널리스트들이 가졌던 기자정신, 기자의 사명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기자정신이 무엇인지, 언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전혀 고민하지 않고 권력과 수구와 관행에 빌붙어 히히낙낙하는 자들을 경계해야한다고 말하고싶다.



과거사진상조사를 시행하는 단체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와 같은 단체들-이 국가가 저지른 테러에 희생당한 개인의 비극이 묻히지 않도록 어떤 일들을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싶다. 그들은 보도연맹으로 죽어간 사람들, 한국군과 미군들이 오인폭격하여 죽음으로 몰고간 사건들, 그저 전쟁의광기에 미친 군인들이 유린하고 초토화시킨 마을을 이야기한다. 전쟁직후 유가족들이 얼마나 거세게 국가를 상대로 투쟁했는지, 그러나 혼란한 틈을 타 정권이 바뀌며 또 어떻게 그들의요구가 침묵으로 바뀌었는지, 왜 지금도 빨갱이라는 말로 금을 긋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그토록 오랫동안 국가폭력을 당하면서도 그것이 폭력인줄도 몰랐던 사람들, 시절들이 있었으므로, 이제는 눈을 뜨자고, 잠을 깨지고 말이다. 










겨울 노근리에서, 나는  악몽을 꾸고 깨어난 아침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1950년 8월 7일 남쪽으로 내려가는 피난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고지고 손붙잡고 끌며 하염없이 내려가는 길이 북한 인민군들이 대전을 함락하러 목전에 와있다는 것도 모른채  노근리에 있었다고 생각해보자. 미군들의눈빛이 불안했다고 느꼈지만 파란눈의 사람들은 그냥 그런가보다 했을 것이다. 그들이 갑자기 사람들을 철길 위로 몰았을 때는 빠른길로 안내하는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윽고, B-29전투기가 보이고 기관총 사격과 폭격으로 눈앞이 하얀 연기로 가득했을 때에도 꿈만 같았을 것이다. 눈을 감고 길을 달렸을 것이고, 눈을 뜨고 보니 굴다리 안이었을 것이다. 



굴다리 앞에 서본다. 한겨울의 칼바람이 굴다리 속에서 소용돌이친다. 하지만 내 눈앞에는 그날이 펼쳐진다. 습하고 무더운 삼복더위의 한낮, 다치고 찟긴 사람들이 아우성대는 굴다리. 그때 사람들은 모두 짐승이 되어있었다. 총든 군인들은 먹이를 지키려 으르렁거리는 승냥이였다. 오도가도 못한 닭장 안의 짐승처럼 수백명의 사람들이 겹을 이루며 굴다리에 목숨줄 붙들듯 숨어들었다. 굴다리 안에는 숨을 데도 없다. 누군가가 총알받이가 되어준 덕분에 누군가의 목숨이 붙어있을 뿐. 치료해주었다가 총을 쏘아대는 이상한 군인과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비이성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우는 아이를 억지로 물 속에 집어넣은 아비는, 팔다리가 떨어진 채 죽은 가족의 시신을 바라보아야하는 남은 자들은,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어 죽은자들이 흘린 피가 그득한 냇물을 억지로 삼키던 그 여름의 노근리 사람들은 얼마나 울어야했을까. 





그렇게 일주일이 갔다. 대전이 함락되고 미24사단이 퇴각하면서 쌍굴다리 사람들은 버려졌다. 절반은 죽었고 나머지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애써 추스린 사람들은 고작 백여명. 얼마나 울어야 그 여름의 더위와 살이 썩는 냄새와 더러운 물을 잊을 수 있을까. 얼마나 지나야 그 죽음을 말할 수 있었을까, 얼마나 지나야 그 굴다리 앞에 설 수 있었을까.


















노근리 쌍굴다리는 등록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노근리 평화공원이라 불러야할 것이다. 기념관과 널따란 공원이 외딴 마을인 철로 주변을 채우고 있다. 2년 전 여름에 쌍굴다리를 처음 방문했을 때, 평화공원은 한창 지어지던 중이었다. 기념공원은 조용히 완성되어 조용히 개관했다. 미군의 양만학살이라는 민감하고 복잡한 사안들 때문이었을까. 잊혀진 이야기였기 때문일까.


한 겨울 해거름에 방문한 노근리는 그저 쓸쓸했다. 기념관인 건물과 조각공원, 위령탑 등이 있고, 건너편 너른 부지에는 조잡한 포토존이 자리잡고 있었다. 수십년동안 반복해온 이미지들로 가득한 고답적인 조각들도, 십수년 전 다니엘 리베스킨트라는 건축가가 베를린 유태인박물관이라는 걸출한 체험형 건축공간을 만든 이후로 생겨난 아류 같은 박물관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쟁 유적>이라는 공간들은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곁에 있어야 옳은지 논의한 바도 없으며, 수십년 동안 되풀이해온 이미지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재생산되는 것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근거도 문제의식도 없는 것 같다. 



나는 이곳이 추모의 공간이면 더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허허벌판의 너른 부지가 아니라 촘촘하게 크고작은 나무가 심어진 숲이되길, 따뜻하고 참한 숲이 자라나 참혹한 죽음의 현장을 영원한 삶으로 기념해주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스웨덴 어느 곳의 숲으로 자연스레 이어진 시민묘지처럼 삶과 죽음이 함께 있고 함께 치유받을 수 있는 장소가 된다면 좋겠다고. 


















전시실을 둘러보았다. 노근리 사건이 어떻게 생겨난 것이며, 당시 긴박했던 전쟁상황에 대한 기록도 있다. 민간인임을 알았다고 말하는 미군 병사의 인터뷰나, 죽은자 중에 유난히 정씨가 많은 것이 눈에 띄었다. 처음 이 사건을 세계에 알린 저널리스트의 사건 취재수첩도 놓여있다. 미국에 대한 해명 요구와 철회, 재조사와 재조사. 지난한 싸움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여전히 쌍굴다리에는 "노근리 사건 현장"이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진행중인 싸움들이 떠올랐다. 그렇다. 아직 우리는 추모할 준비도, 기념할 준비도 되어있지 않다. 우리는 다만 그 현장에 있을 뿐이다.  



















설연휴를 맞아 남쪽으로 가족들을 보러갔습니다. 오랫동안 부산에 살았던 부모님은 몇 해전부터 양산 천성산 아래 신도시로 이사했고 큰동생 부부도 부모님댁에서 멀지 않은 정관신도시(여긴 부산광역시에 속해있다고 하는군요.)로 옮겨왔지요. 부산의 오래된 곳들을 그리워하면서도 우리 가족 역시 살던 데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그렇게 옮겨다니는구나, 싶습니다. 온가족이 모였으니 금정산에 올라가 산바람도 쐬고 산성막걸리도 한잔 마시자 했는데, 날이 우중충하니 비소식이 있더군요. 동생 내외가 양산 근처에  한적하게 거닐만한 곳이 있다고 하여 가보기로 했습니다. 


"70년만에 개방하는" 숲이 있는 수원지라고 하더군요. 


숲을 거닐 생각에 따라나섰습니다. 신양산에서 구양산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 가다가 들녘 사이로 난 도로를 따라 잠시 올라가니 '법기리'라는 지명이 보입니다. 도로 끝에 막힌 담이 있는데 이곳이 수원지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멀리서도 거뭇거뭇한 큰 나무들이 보입니다. 이곳이 '법기 수원지'입니다.


들어가자마자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습니다. 숲의구조가 몹시 이상한 탓이지요.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삼나무와 편백나무와 벚나무 숲인데, 그 위로 깎아지른 높은 언덕이 있습니다. 언덕은 잔디를 심어두긴 했지만 그 높이가 몹시 인위적으로 보였어요. 오른쪽에 석재로 쌓은 통로와 문이 있습니다. 이곳은 1920년대에 세운 댐이었어요. 부산의 물부족 해결을 위해 부산에서 한참 떨어진 양산 어귀에 수원지를 조성한 것입니다. 


옹벽같은 언덕을 올라가려면 120여개의 계단을 밟고 가야합니다. 절로 한숨이 푹 쉬어지는 등반 후에 넓디넓은 물이 우리를 반깁니다. 산으로 둘러싼 호수같은 물은 지하 어딘가에 매설해놓은 수도관을 통해 지금도 부산으로 흘러갑니다. 얼마나 큰 파이프가 그 속에 깔려있는 걸까요? 물 아래 어디쯤일지 가늠되지 않습니다. 



수원지의 물도 많이 줄어있음이 확연히 느껴졌습니다. 2013년 부산은 가뭄으로 피로한 한해였습니다. 여름내내 빗방울이 거의 떨어지지 않아 땅도 들도 사람도 목이 탔습니다. 지금도 그 피로가 여전합니다. 축축해야할 숲길에서 가슬가슬한 기운이 느껴지고 잔디는 말랐으므로, 물은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제 할일을 다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반기는 숲길은 여전히 조성중입니다. 안내문에는 편백나무, 히말라야 시다, 벚나무, 추자나무, 은행나무, 반송, 감나무 등 7종 총 644그루의 나무가 촘촘히 심어져있다고 합니다. 길 따라 심어진 키큰 히말라야 삼나무를 따라 걷다보면 그 틈으로 촘촘히 메워진 편백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편백의 향이 많이 느껴지지 않은 건 여전히 가뭄이 끝나지 않은 까닭이겠지요.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건 벚나무인 것 같습니다. 


반송은 댐 위쪽에 모두 일곱그루가 심어져있습니다. 허리가 꺾인 채 낮게 가지를 펼친 반송의 자태가 꽤 근사합니다. 나무 모양만 보아도 척척 수종을 알아맞춘다면 좋을텐데요. 나무를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어떤 나무들인지 구분하지 못합니다. 조만간 꽃과 나무를 좀 배워보렵니다. 배우고 알아갈 때 애정이 더깊어지는 법이니까요.







<1927년 12월 20일 동아일보 기사 중>



수원지 까닭에 법기리 전멸?


부산부에서는 공업비 이백오십만원을 투하여 사개년 게획으로 부산 상수도 확장을 하는데 그 수원지는 양산군 동면 법기리 하경사산구이라하며 시공식은 거월에 동래 제이 수원지 안 범어사에서 거행하엿스며 차 상수원지 공사는 내년초부터 시작하게 되는데 이 법기 수원지의 집수면적은 '이백칠십만오천 평'이요 저수하부지 면적은 '십일만삼천삼백여 평'이라 하며 면적 중에 경작면적 '칠만팔천여 평'이 함입된다는데 법기리 중상부락은 전멸지경에 함아엿으며 그 상하부락 전 인구 백삼십육호 중에서 차함멸되는 경지의 소작인은 구십호에 달하여 그 인구가 삼백여명이나 된다 한다. 원래 차 부락은 산중협곡지로 경지가 최귀하며 산곡에 처하야잇는 까닭에 하부락 혹은 경작지와는 전연상격하야 잇스며 농경작면적이 백여정보에 불과하는 터임으로 금번 부산 상수원지가 됨을 따라 각 리민은 경작지 태반이 업서지는 동시에 삼백인구는 그 활로를 실하야버리게 된다더라.







우 수원지 공사 착수에 당하야 부산부에서 그 토지매수와 이민의 양해를 구코저 양산군을 통하야 해함입지주 및  동 소작인 사십여인을 거 십칠일 하오 일시에 양산군읍 보통학교에 초집하고 부산부윤의 부산상수도 확장공사의 설명과 기사의 설계과정이 유한 후 양산군수와 경찰서장의 희망과 주의가 잇슨 후 지주와 주민의 희망진술을 하고 지주급 주민 중에서 토지가격 및 소작인구제에 대한 교섭위원으로 구인을 선거하야 금후교섭을 하기로하엿다는데 부산부에서는 토지가격에 대하야는 상당한 대가를 변상하겠다 하나 활로를 실한 소작인에 대한 구제에 대하야서는 하등설명이 업슴으로 삼백여 인구의 금후 생사양로는 실로 막연하게 되어 잇는데 교섭위원과 군당국의 노력 여하에 따라 그 문제는 엇더케 낙착될 것인지 모든 해결은 금후에 남겨두고 마럿다더라.  (하략)





















옛 기사에는 식수로 사용하는 물이 아니라, 공업용수로 제공되는 물이라고 하는군요. 경지는 댐이 되고 주변의 산지는 함양림으로 경작될거라는 내용도 있습니다. 법기 주민들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하는군요. "생활터전도 경작지도 없이 이곳에서 무슨수로 살아가나, 만주나 간도로 갈수도 없는 마당에...."



댐의 총길이는 260미터에 달하고 댐의 옹벽은 21미터입니다. 공사는 1932년까지 5년에 걸쳐 진행되었지요. 완공후부터 2011년까지 금단의 공간이었습니다. 몇 번 예외는 있었다고 하네요. 1960년대에 대통령이 이 수원지에서 낚시를 즐겼다는 기록은 안내판에 실려있고 2002년 월드컵 기간에 일본 황족의 방문하여 숲을 즐겼다고요. 지금은 보호림 내부로 들어가는 것만 제외하면 누구나 숲과 물을 즐길 수 있습니다.











석재를 쌓아올리고 문을 만들어놓은 곳은 취수터널입니다. 취수터널 위 석판에는 "生(원정윤군생)" 이라는 글귀가 새겨져있습니다. 발원지가 맑고 깨끗하면 모두를 살린다는 뜻이겠지요. 글자의 왼쪽에는 子爵 齋藤實 (자작 재등실)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사이토 마코토는 1919년에 조선총독으로 임명된 자였지요  1927년에 총독직을 사임하고 추밀원 고문이 되었다가 1929년~1931년에 다시 조선총독으로 부임합니다. 댐이 조성될 당시 총독이었던 그가 내린 글귀입니다.

 

가까이가면 마치 석빙고의 입구처럼 찬바람이 불고, 물 냄새인지 한 기운이 코로 스며듭니다. 긴 터널이 끝도 없이 뻗어있습니다. 댐 안에 있는 수위관측소도 유사한 시점에 지어졌을 겁니다. 하늘색 페인트는 썩 아름답지 않지만 돔은 꽤 재미난 모양새를 하고있습니다. 마치 클로슈 모자처럼 가장자리가 날렵하게 꺾인 것이 공들여 제작한 것 같아요. 











70년 전에 만들어진 수원지는 있는 듯 없는 듯 듯 제 자리에 오랫동안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역사의 한조각을 품고서 우리 삶의 작은 부분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멀리 광양, 섬진강 가의 


작은 목조주택 앞에 섰다. 집을 찾아가는 길은 네비게이션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강가는 한적한 마을이었고 드문드문 횟집들이 보였다. 완만한 곡선의 길을 따라 차를 몰고 천천히 두리번 거렸다. 물은 천천히 흘러서 바다로 향하고 있다. 약간 서쪽으로 기운 햇살이 금세 저물것만 같은 시간, 아직 도착하지 않은 봄을 속절없이 기다리는 추운 3월의 첫째날이었다. 



이윽고 집을 찾았다. 집 앞에 놓은 문화재청의 표식이 우리를 불렀다. 집은 비어있었고, 동네는 조용했다. 빈 집이 등록문화재가 되면서 윤동주 사건을 기록하고 보여주는 장소로 바뀌었다. 문이 닫혀있어서 창밖에서 망연히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저기쯤 원고가 보존되어있던 마루인가 보다, 저기가 사람들이 드나들던 문이고 안쪽이 살림집인가 보다, 서로 중얼거렸다. 



이 집은 시인의 문우인 정병욱의 본가다. 그는 윤동주가 정서한 육필원고를 받아든 두번째 인물이다. 세 권의 원고뭉치는 난리 중에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되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이 문우의 집에 한권이 보관되어 있었다. 윤동주의 시집이 세상으로 나오게 된 결정적 원고들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시인이 일본으로 떠나고 정병욱은 징병으로 전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원고를 소중히 간직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당시는 공출로 쑥대밭이 되는 날이 많았지만, 그 어머니는 아들이 맡기고 간 문서들을 귀하게 숨겼다. 사실 그 어머니는 원고가 무엇인지 몰랐을 것이다. 전장으로 떠난 아들이 유언처럼 간곡히 부탁한 것이라, 그 마음이 서러워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 꼭꼭 숨겨둔 것일게다.



그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을 때, 보자기에 쌓여 마루널 아래에 숨겨져있던 원고도 세상으로 나왔다. 그리고, 시인의 행적을, 시인이 남기고 간 흔적들을 찾아헤매는 시인의 동생에게 전달되었다. 세상에서 사라질 뻔했던 시들은 이윽고 출간되어 수십년간 수많은 청년들의 말 속에서 숨쉬고 살았다. 












예전 사진에는 


나무집 바로 앞으로 강물이 흐른다. 지금은 넓은 도로가 생겨나 물이 좀더 멀리 있다.



아쉬운 마음에 두리번거리다가 옆쪽 임시대문을 밀어보니 그예 슥,하고 열린다. 집은 커다란 창고가 딸린 'ㄱ'자 형이고 도로변에 상점용도의 건물이 붙어있다. 사람이 살지 않은지 오래되었을까? 집은 그들이 떠난 그날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다. 어느 시점에서 시간이 딱, 멎어버린 옛집. 우리는 이런 집들을 많이 보아왔다. 



유리문을 열고 상점쪽으로 들어가본다. 무엇을 팔던 가겟집일까? 



집을 설명하는 말중에 양조장 건축이라는 단어가 언뜻 보인다. 그렇다면 커다란 창고는 술도가였던 것일까? 쉽게 술을 제조하지 못했을 텐데, 어떤 일들을 했을까? 이 창고는 원래부터 있던 것일까? 후에 증축된 걸까?

빈 집은 아무런 설명을 해주지 않고서 시간의 한 단면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 시간의 단면 속으로 들어가야 옳다. 















원고가 숨겨져있던 곳은 


마루널 아래다. 마루판자를 두 개 정도 빼면 그 속에 물건을 숨길만한 공간이 어둡게 보인다. 공출당하지 않으려고 소중한 물건, 일용할 양식들을 이곳에 넣어두었을 것이다. 원고뭉치도 그 틈에 숨겨졌을 것이다. 



정병욱에게는 어린 여동생이 있었다. 조선어가 폐지된 후 학교를 다녔던 여동생은 한글을 읽지 못했다. 원고 뭉치를 들여다보아도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 글자가 한글이라는 것은 알았을까? 한글로 적힌 글자를 읽지 못했을 때 그녀는 조금 의문을 갖지 않았을까? 우리에게도 언어가 있었다는 것을, 그것을 배우지 못하게 하는 이상한 체제를. 아니면 그 글자가 뭔가 운명적인 만남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한글로 씌여진 시.라는 것을 몰랐던 그 소녀는, 

훗날 시인의 동생과 결혼해서 가족을 이루었다.




바다로 향하는 섬진강 끝자락의 물길이 유유히 흐른다. 시간은 그렇게 끊이지 않으며 비통한 죽음 앞에서 느끼는 애잔한 감정 위에 회복과 기념과 기록과 희망의 메시지를 던진다. 아이가 자라고, 그들의 아이가 또 자라서 상처를 덮는다. 나는 '회복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머릿속에 떠올린다. 사람들의 삶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미래가 찾아오는 한 우리는 회복할 수 있다. 











육필원고는 이러한 


모양새였다. 원고지를 반으로 접어 오른편에서 묶으면 앞뒤로 마치 책처럼 읽을 수 있게 제본된다. 글자를 몰랐던 소녀와 달리, 나는 글자 한자 한자가 모여서 시가 되고 노래가 되어 강처럼 흐르는 것을 보았다. 나는 회복하는 만큼 해결해야할 숙제들이 우리 세대에게 남겨진 것을 또 보았다. 식민지 청년의 비애와 죄의식도 고스란히 60년이 지난 지금 시를 바라보는 우리에게 전해진다. 시대의 빈곤도, 역사의 요철도 60년을 건너뛰어 우리에게로 왔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그저 덮어온 한 덩어리의 역사. 



그것이 자꾸 보인다. 시를 읽으니, 우리가 잊고 있던,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우리가 배우지 않았던, 어두운 역사가 보인다. 이 시대에 시인이 필요한 이유가 그것을 일깨우기 위해서가 아닌가.


 


















교토의 동지사대학은 윤동주의 모교다. 투옥되기 전까지 윤동주는 문학을 배우며 이 기독교계 대학교에 다녔다. 1995년 시비가 세워진 후, 교토를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이 시인을 기억하며 이 시비 앞을 서성인다. 누군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필사한 액자를 가져다놓았고, 누군가는 방명록이 다할 때마다 새로운 노트를 가져다놓는다. 방명록은 비에 젖기도 하고, 눈과 바람에 찢기기도 했다. 글자는 뭉쳐지고, 종이는 젖어서 떼어지지 않을지라도, 수많은 사람들의 글자가 적혀진 노트는 보통의 방명록이 아니라, 작은 시들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시인의 시비를 찾았던 10월 말도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10월부터 새로 쓰기 시작한 방명록은 젖어가고 있었다. 누군가, 비닐을 씌워두었지만, 금새 찢어질 것 같아 나는 가방 안에서 낡은 비닐을 꺼내 그 위에 덧씌워놓았다.









2013년 3월 윤동주 시인의 육필원고를 본 후, 나는 내내 이 시인이 머물렀던 장소를 찾아가보고픈 생각이 컸다. 서울의 몇몇 장소들과 멀리 섬진강 근처의 어느 작은 집에도 들렀다. 일본 교토에도 머물렀다. 동지사대학의 시비 앞에서는, 그저 아무것도 적지 못해 한참 앉아있다가 딱 두줄의 메모만 남기고 돌아나왔다. 나혜석과 정지용이, 윤동주와 그의 사촌이자 문우이자 동지였던 송몽규가 거닐며 시를 읊고 그림을 그린 카모가와 강도 걸어보았다. 몇백년 된 나무집에서 풍기는 음침한 냄새들을 맡으며 그 시절의 젊은이들을 그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느 장소도 회색의 원고지에 메마른 잉크로 쓰여진 시인의 글자만큼 생생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 어느 장소도 시인이 아꼈던 그래서 낡고 닳은 책들만큼 사랑스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인을 품어준 도시와 집들을 미약하게나마 더듬어보고싶었다. 시인이 숭배했던 수많은 시인의 이름을 옮기며 나 또한 열렬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쓰다만 원고들을 조금 더 채워보고자 한다. 





 尹東柱를 줄을 그은 뒤 平沼東柱라고 새로 쓰여있던 연희전문학교 학적부. 그 학적부에서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보기로 한다. 1942년 1월 29일에 윤동주는 히라누마 도주라는 일본식 이름이 적힌 창씨개명계를 연희전문학교에 제출했다. 졸업후 일본으로 유학을 가려면 이름을 바꿔야했던 것이다.  석자에서 넉자로 바뀐 그 이름이 그토록 부끄러웠던 이유로, 시인은 '참회록'이란 시를 그 즈음에 남겼다. 송우혜 선생의 윤동주 평전에는 시인이 <참회록>을 쓴 종이의 여백에 낙서처럼 이런 글자들이 남아있다고 썼다. "시인의 고백, 창씨개명, 힘, 생, 생존, 생활, 문학, 시란? 비애 금지."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얼골이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참회록> 중에서





그가 먼 곳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유학을 떠나기로 한 데에는 사촌인 송몽규의 영향이 클 것이다. 송몽규는 시인의 행보와 거의 유사한 삶을 살았으며 생몰연도가 일치한다. 용정 가족들과 떨어져 서울과 일본으로 갈 때에도, 그리고 사상범으로 붙잡혀 실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갇혔을 때에도 서로의 그림자처럼 함께였다. 둘은 함께 교토제국대학 입학시험을 치렀고, 송몽규는 합격했으나 윤동주는 실패하였으므로 동경의 입교대학에 다시 시험을 치르고 입학했다. 한학기 머문 후에는 교토 동지사대학으로 옮겼고 두 사람의 사상적, 학문적 교류는 계속되었다. 







동지사대학을 찾았던 작년 10월말. 학교 곳곳에서 금목서가 고옥한 향기를 뿜었다. 노란꽃들이 자잘하게 매달린 푸르른 나무들은 고풍스런 빨간벽돌 건물을 한층 생동감있게 했다. 진한 꽃향은 가을을 향하는 길목이라 더 매혹적이었다. 어쩌면 나는 동지사 대학 하면 교정을 가득채웠던 금목서의 향기를 먼저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20세 전후의 학생들이 몸도 가볍게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곳곳에는 학회와 세미나를 알리는 안내포스터가 가득했는데, 군데군데 한글로 된 것들도 있었다. 



















1875년에 세워진 학교답게 오래된 건물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작지만 단정한 교사와 크고 육중한 채플이 교차되는 평평한 길은 은근한 소란만이 가득했다. 평일 오전 시간이었는데, 학교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도 꽤 보였다. 천천히 거닐다보니 문학부 건물 옆에 윤동주 시비를 발견했다. 



1942년 10월 1일부터  시인은 동지사대학의 문학부 문화학과 영어영문학 전공 학생으로 학교를 다녔고 영문학사, 영문학연습, 영작문, 신문학 등의 수업을 들었다. 시인이 집은 다나카 타카하라초 27번지 다케다 아파트에 있었다. 시로카와(백천)과 카모카와(압천) 두 강 사이의 동네다. 그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통학했다. 거리는 아주 먼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제국대학이 곧바로 이어져 학풍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훌륭한 산책로가 아니었을까 싶다. 더구나 그의 집에서 머지 않은 곳에 몽규의 집이 있었다. 둘은 자주 함께였을 것이다. 



나혜석이 그렸고 정지용이 읊었던 카모카와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나는 강변을 따라 조금 걸어보았다. 넓고 잔잔한 물가는 여름이면 사람들의 휴식처가 된다고 했다. 누군가는 카모카와는 밤에 보는 게 더 좋다고도 했다. 나는 아무 감흥없이 물을 보고 다리를 건넜다가 다시 건너왔다. 어떤 까닭에서인지 교토에서는 어느 것도 온전히 감흥에 젖어들 수가 없었다. 다만 금목서의 향기가 나를 불렀다. 혹시 시인의 글 언저리에도 금목서의 향이 깃들지 않았을까. 





1942년은 진주만 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해다. 군국주의는 거세게 날뛰어 그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옥죄었다. 사상의 압박이 거세졌고 조선어로 된 것들이 사라져갔다. 누구나 전쟁의 희생자가 될 수 있었고 실제로 그러했다. 열정적이며 창백한 지사인 송몽규는 요시찰인이었고 온화하고 조용한 시인이나 집안 좋고 두뇌가 뛰어난 조선인 학생들과의 회합은 전쟁 중인 경찰에게는 좋은 사냥감이었다. 1943년 7월 윤동주는 송몽규와 함께 사상 탄압을 주임무로 하는 특고경찰에 체포되어 취조를 받았다. 취조과정에서 시인은 그동안 자신이 쓴 시와 글들을 일본어로 옮겨야했다. 단 한편도 일본어로 시를 쓰지 않았던 시인이 자신의 글을 일본어로 옮긴다. 그는 재판에서 2년형을 언도받고 교토를 떠나 후쿠오카의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후에 발견된 취조문서와 판결문은 조선독립과 자국의 문화부흥을 위해 어떻게 활동할지를 조밀하게 의논했음을 보여주었다.





그가 선고받은 날은 1944년 4월 1일, 맑은 봄날이었다. 시인이 교토를 떠나던 날, 벚꽃이 진창으로 피었을까, 얼음장처럼 암담했던 카모가와가 맑은 노랫소리를 내며 흘러갔을까, 학생들은 새로운 학기를 시작하며 소란스런 젊음을 내뿜지 않았을까, 강가의 다리에서 예술학교 학생들이 사생을 하지는 않았을까, 아마도 검은 차에 실려 눈을 가린 채 그들은 죽음의 형무소로 가게 되었던 것일까, 거대한 주목 같은 오래된 도시를 떠나며 그들은 이 도시의 묵은 내를 폐속 깊이 심어두지는 않았을까, 귓가에 들리는 온갖 달콤한 일본말들이 상냥했을까, 그들은 죽음을 예감했을까. 떠나면서 이 도시가 그리웠을까? 







이 도시는 작은 시비로서 그렇게 떠났던 자들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윤동주 시비 옆에 세워진 정지용 시비를 들여다보았다. 시비에 새겨진 카모카와(압천)이라는 시는 윤동주가 걸작이라고 표현했을 만큼 좋아한 시다. 그리고 1930년대에 동지사대학에 유학했으며 또한 윤동주가 그토록 숭배하던 시인이었다. 그는 1947년에 경향신문에 "쉽게 씌어진 시"를 소개했고, 그 다음해 뜻을 모은 사람들이 윤동주의 유고시집을 출간할 때 서문을 적었다. 정지용의 시비는 2005년에 세워졌다.


압천 십리 ㅅ 벌에 

해는 저믈어... 저믈어...

날이 날마다 님 보내기 

목이 자졌다..... 여울 물소리...........



여울 물소리에 묻는다. 십리벌에 묻는다. 

그 시절은 왜 그렇게 가혹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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