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회색으로 바랜 원고지에서 세월을 읽을 수 없었다. 엊그제 필적을 남긴 것처럼 잉크의 흔적이 생생했다. 원고지는 반으로 접어 오른쪽 귀퉁이를 묶어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던 모양이다. 세로로 한 자 한 자 적어내려간 글씨에 잉크의 농담이 느껴졌다. 푸른 색 펜 글씨는 멋부려 구부린 흔적 없이 담담하고 단정했다. 펜으로 글자를 적으면서 약간 긴장한 듯도 싶었다. 시집을 출간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후, 스스로 필사해서 만든 시집이었으니까.   

글자와 글자 사이에 잠깐의 멈춤이 느껴진다. 원고지 속 사각의 칸에 한 글자씩 써 넣으면서 무던히도 호흡을 고르는 시인이 숨결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글자는, 한 편의 시가 되어 읽히기 전에 종이 위에 펜촉이 사각거리는 소리와 종이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한쪽 손바닥을 조용히 누른 채 글자를 채워가던 청년의 호흡으로 먼저 다가왔다. 나는 글자를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그 호흡을 따라간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일혼자 묻힌 언덕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게외다 …



이윽고 마침점


나도 격앙된 호흡을 길게 내쉬었다.  



작년 봄날의 일이다. 

시인 윤동주의 육필 원고가 모교인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기증되던 2013년 3월, 도서관 전시실에서 원고를 공개하는 전시회가 있었다. 나는 우연히도 연세대 교정을 지나다가 전시회를 알리는 현수막을 보았고 얼른 도서관을 찾았다. 평전이나 논문 속에서만 존재하던 육필 원고를 직접 볼 수 있는 귀중한 기회였다. 시인의 필체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도 잊지 못할 사건이다. 윤동주의 시는 내가 “책읽기를 참 좋아합니다.”라고 또랑또랑하게 발표하던 초등학교 시절부터 내 곁에 있었지만, 시인의 온기와 흔적이 담긴 원고지를 보는 순간, 시인은 그 이전과 다른 존재가 되었다. 그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원고 뭉치 속에서 그는 봄의 미풍처럼 머물렀고 불꽃처럼 타올랐다.





시인의 유족이 연세대에 기증한 시인의 소장품. 그가 사랑했던 시집과 문학책들이다. 




10대의 문학소년 시절부터 그토록 아끼며 읽었다던 정지용 시집과 한정으로 발간된 백석의 시집을 구할 길 없어 도서관에서 빌려 베껴쓰고 거듭 읽었다는 <사슴> 필사본도 한켠에 있었다. 시인은 이 자리에 없건만 시인이 소장했던 책들은 북간도 용정의 집에서 먼 시간을 건너 이곳까지 왔다. 시집 <사슴>에 대한 사연은 송우혜 작가의 ‘윤동주 평전’에서 읽고서 밑줄 그어두었던 부분이었다. 그런 책들을 눈으로 확인했을 때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윤동주의 학적부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학적부에는 ‘尹東柱’라는 이름은 붉은 색으로 지워진 채 ‘平沼東柱’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히라누마 도주'라는 그의 새로운 이름은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 위해 선택한 것이었다.

한참 동안 전시실에 머물다가 도록을 챙겨서 나왔다. 밖은 봄날 답지 않은 차가운 바람이 불었으나, 빛나는 햇살만큼은 참으로 아름답게 나를 감싸주었다. 어디론가로 바삐 걸어가는 신입생들의 발걸음이 참으로 경쾌했다. 대학 캠퍼스에서 번지는 따사로운 기운에 눈을 감고 어찌할 바 모른 채 잠시 머뭇거렸다. 나는 교문을 향해 가는 학생들과 반대로 옛 기숙사쪽으로 걸어갔다



 



연세대 교정의 윤동주 시비. 그의 아우인 고 윤일주 교수가 디자인했다.




2층 한켠을 윤동주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옛 기숙사. 그가 시를 쓰던 곳은

지붕 아래의 어느 작은 방이었으리라.




윤동주가 서울에 머물렀던 시기는 1938년부터 1941년까지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던 4년 정도이다. 그는 북간도 명동에서 1917년 12월 30일에 태어났고 평양 숭실중학교에서 잠깐 수학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명동과 용정에서 살았다. 서울의 대학시절을 마친 후에는 도쿄와 교토에서 짧은 유학 생활을 했다. 교토 동지사대학교에서 공부한 지 2년째 접어들 무렵, 사상범으로 체포된 그는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어 그곳에서 절명했다.

그의 흔적은 1917년에서 1945년 사이, 저 북간도에서 한반도를 지나 도쿄까지 오간다. 만 27년 2개월의 삶의 동선에 시대를 대입해본다. 그 시절 저 북간도에서, 바로 이 서울에서, 먼 일본땅에서 시인은 과연 무엇을 보고 어떤 일을 겪었을까? 왜 시인은 그토록 자주 참회를 했으며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끊임없이 시를 썼을까? 우리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기에 가장 빛나는 청춘을 맞이한 젊은 시인에게 서울이라는 도시는 조금의 위안이라도 선사했을까? 그는 어디에서 살았으며 어떤 동네를 걸었을까?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을까? 






옛 기숙사 내부에서 바라본 시비

 

     

 기념관으로 꾸며진 옛 기숙사의 한켠에 시인이 거쳐간 장소들이 나열되어 있다. 연세대의 옛 기숙사와 그가 유학했던 교토의 동지사대학, 그리고 투옥되어 절명한 후쿠오카 형무소. 형무소 건물은 없어졌지만 그 구조와 형태가 서대문형무소와 닮았다고 한다.



연세대의 옛 이름인 연희전문학교는 교사가 세워진 지역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창천리가 원래 주소지였다. 1917년에 작은 목조 교사로 시작된 학교는 1920년부터 25년까지 화려하게 변신했다. 학생들이 공부하고 머물렀던 석조건축물과 기숙사, 운동장, 테니스 코트가 지어져 제법 캠퍼스다운 면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백양로라 불리는 캠퍼스 내부를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올라가면 유럽풍으로 지어진 당당한 건축물이 잘 다져진 대지에 펼쳐져있는 구조였다. 

1928년 ‘조선과 건축’이라는 건축잡지에 소개된 바로는 “경의선 신촌역에 내리면 15분이면 도착한다. 교사는 녹음이 짙고 오래된 소나무로 둘러싸인 산에 위치하고 있다. 공기가 신선하여 자연공권에서 즐기는 감이 든다. 건축은 대지내 산간에서 채굴한 운모편암을 주요 석재로 하여 요소요소에 화강암을 넣은 순 석조인 본관, 학관, 이학관 및 기숙사로 구성되는데..”라고 설명하고 있다.



본관 좌측편 언덕 위에 기숙사가 있다. 지금은 재단관련 시설과 시인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옛 기숙사 앞에서 윤동주 시비를 만났다. 누군가 두고간 꽃다발이 보인다. 높다란 시비 앞에서 잠시 멈추어섰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읊을 수 있다는 서시가 시인의 필체로 새겨졌다. 아까 보았던 육필원고의 그것이다. 

화강석 시비는 시인의 동생인 윤일주의 작품이다. 아우의 초상이라는 시에 등장하는 바로 그 아우다. 시인보다 9살이나 어린 아우는 형의 죽음 이후, 혼자 서울로 내려와 형의 유품과 유작을 찾아다녔다. 북간도 용정에 살던 가족들은 광복후 월남하면서 시인이 아끼던 책들과 책상, 어릴 때 썼던 시와 편지 들을 가져왔다. 혼란한 시기에 모두 잃어버릴 처지에서도 비참하게 절명한 시인의 남은 흔적들을 품고 또 품었다. 연세대에 기증된 책과 원고들은 바로 그런 것들이다. 가족들이 죽을 위험에서도 절대 포기하거나 놓지 못했던 것들. 아우는 시인의 시를 묶어 유고집을 냈고 시인의 족적을 찾아 다녔다. 나는 그 아우의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잠시 생각했다.



시인의 시비 뒷쪽 언덕 위에 거무스름하게 세월을 머금은 옛 기숙사 건물이 보인다. 2층짜리 건물이지만 지붕 아래에 다락처럼 공간이 있었다고 한다. 지붕 아래 공간에 동주의 방이 있었다. 대학 기숙사에서의 생활은 어떠할까? 한창 젊은 청춘들이 집을 떠나 기숙사에서 머물면서 만들어내는 문화가 무척 궁금하다. 당시의 대학생들은 현재보다 훨씬 더 어른 대접을 받았고 실제로 더 성숙한 상태이기는 했으나 아무렴 공부만 했을까? 일탈의 즐거움도 느끼고 이성을 떠올리기도 하고 그러지 않았을까? 순수와 낭만을 오가던 이 시기는 빨리도 흘러 암흑으로 치닫는다. 

 

1940년부터는 한국어강좌가 일본학이라는 과목으로 바뀌고, 금서가 늘어났으며 도서관을 수색하여 책을 압수하는일도 생겨났다. 한인의 황국신민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말과 글은 허락되지 않은 언어였다. 시인은 시를 쓰지 못했고, 삶과 종교를 회의했다. 그러나 암흑 속에도 빛이 있듯이, 그 한줄기 빛처럼 평생에 이어질 우정을 나눈 문우 정병욱을 만났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면서 결국 출간하지 못한 채 종이에 눌러쓴 글씨로만 남은 시들을 깨끗하게 정서하여 문우에게 맡겼다. 그는 시인이 죽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한글로 씌어진 시들을 어렵게 보관하고 있다가 시인의 아우에게 주었고 194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한권의 책으로 출간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날 쉽게 씌어지지 못했던, 허락되지 않았던 말의 흔적을 본 것이다.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죄의식과 치욕을 견디던 청춘의 시간을 본 것이다. 

종이는 거무스름하게 변해 버렸지만 잉크의 흔적도 점점 옅여졌지만, 뭉개진 글자의 흔적 속에서도 빛나는 그 무엇을 본 것이다. 나는 그것이 시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을 돌이키고 돌이켜 스스로를 일깨우고 또 일깨우는 목소리. 말의 정신. 그 신성한 봄날에 나는 투명하게 빛나는 정신을 보았다. 수십년이 지나 그 정신은 쉽게 꺼지지 않을 횃불이 되었고 쉽게 사라지지 않는 공유된 감정이 되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시의 정신이 아닐까. 지금 우리는 시인이 필요한 시대, 시가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지난 해 봄날 보았던 그 빛나던 순간이 나는 지금도 그리워진다. 











 





남편에게 건축가 김수근의 건물 중 특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 있는가 물어보았다. 그도 건축가다. 


"음, 세운상가?"

별로 고심하지도 않고 툭 대답을 던진다. 

"그건 왜지?"

"중고등학교 때는 종로에 나와서 놀았으니까. 그 거리가 너무 좋은 거지. 종각에서 청량리까지 걸어가고 그랬어."



나도 내가 살던 도시에서는 꽤나 걸어다니곤 했었지. 나의 기억과 그의 기억은 오버랩되는 지점이 있을까?



"세운상가는 말이야......좋은 거 팔던데지."

"좋은 거?"

"길 따라 걸어가다보면, 아저씨가 슬그머니 나와서 은근히 말하는거야. -좋은 거 있어요.하고. 그게 엄청 부끄럽고 그랬는데.."


그 좋은 것 때문에 종로5가 길모퉁이에서 세운상가 건물이 슬쩍 보일때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는 것이다. 십대들이 시대를, 금전을, 정신을 한 뭉텅이씩 저장잡혔던 장소가 바로 거기 세운상가였던 것이다. 











세운상가,하면 소설가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가 생각난다. 알전구 아래서 고개를 숙이고 그림자를 내려다보는 은교 양, 가동과 나동과 다동과 라동과 마동으로 구별되는 전자상가에서 접수와 심부름을 맡고 있는 그 은교 양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의 연인 무재 군은 트랜스를 만드는 공방의 견습공으로 일한다. 




"여러 달째 비어있는 가게가 여덟개 건너 하나씩이라 쇠락해가는 분위기를 감출수 없었지만 다섯 개 중 그나마 사람의 왕래가 많은 곳이었다. 일년 내내 그늘져 어둑어둑한 주차 공간을 향하고 있는 일청에서는 난로나 선풍기나 라디오 같은 소형가전을 팔았고, 이층부터 사층까지는 전자 기기에 사용되는 부품과 음향 기기와 빗자루며 대걸레 같은 생활용품을 파는 협소한 가게들이 장사가 될까 싶은 분위기로 어떻게든 장사를 이어가고 있었으며, 수리실이 문을 열어 두고 있는 오층에서는 다른 층보다는 조금 폐쇄적인 분위기로 창고며 보석 감정원이며 무선 연구실이며 무엇을 연구하는 지 알 수는 없지만 하여간 연구를 겸하며 도청을 하는 수상쩍은 사무실들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무거운 짐에 쓸리고 닳아 모서리가 뭉툭해진 계단을 내겨가고 있을 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황정은 소설 <백의 그림자> 중에서 




이런 분위기, 그곳에서 느낄 수 있다. 그곳에서 느껴지는 것은, 낡고 어둑하고 오래된 그것이 아니라, 조금 더 의문스럽고 미로같아서 그곳에 있다보면 마치 어둔 밤에 길 떠나는 피노키오가 된 기분이이었다. 그곳은 쇼핑몰처럼 흥청대지 않고 시장처럼 번잡하지 않았다. 그래도 엄연히 존재하는 어떤 거대한 존재같았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피노키오를 삼킨 것은 거대한 고래였던가? 피노키오는 그 뱃속에서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 제페토 아저씨를 다시 만났다. 그 속에서도 여전히 무언가를 조립하며 만들고 있었던 아저씨. 그러므로, 거대한 고래는 가나다라마로 나뉜 거대한 전자상가이며 그 어둔 뱃속에서 불을 밝히던 제페토 아저씨는 그 속에서 일하는 수많은 기술자들과도 같다. 미로같은 그 길을 따라 전체를 관통할 수 있었고 거대한 장소는 매번 무언가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고래의 거대한 몸이 죽음을 맞이하듯, 그렇게 침몰할 수도 있는 거였다.





"좋은 것"을 찾아서 세운상가로.




서울 도심지에 긴 빈터가 있었다. 1945년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치달을 때 일본 본토를 무차별 공격했던 미 공군 폭격기가 서울(경성)을 공격해올 때를 대비하여 모두 19개의 빈터를 만들었다. 이를 소개공지, 소개공대지라 한다. 소개공지를 만들기 위해 모여있던 집과 길, 상점을 모두 없애느라 분주했으나, 이렇게 비어있던 터는 도시 빈민들이 무허가 거주지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서류상으로는 택지도, 도로도 아닌 완벽하게 비어있는 땅이었으나, 현실에는 강제로 끊어진 도시의 혈맥이 오종종 모여든 하꼬방들로 연결되어 있었다. 


도심의 슬럼을 해소하고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려는 모종의 노력이 1960년대에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종묘 아래 종로3가- 청계천 3가-을지로 3가- 충무로 3가를 연결하는 길이 1킬로미터 폭 50미터의 소개공지는 서울의 도시계획의 성과를 보여주는 야심찬 프로젝트가 탄생하는 위치가 되었다. 1966년부터 1968년에 거대한 함선같은 육중한 주상복합 건물이 등장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세운상가다. 연건평 62,284평이며 2007개의 점포와 사무실, 177개의 호텔 객실, 851개의 아파트가 있었다. 총공사비는 44억이며, 서울시에서 구상하고 현대, 대림, 풍전, 신풍, 삼원, 삼풍건설회사가 참여했다. 


세운상가아파트를 구상한 이는 건축가 김수근이다. 얼마전 부도처리된 공간건축의 창립자이며, 얼마전에 아라리오갤러리 김창일 회장이 구입함으로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비극에서 벗어난 그 공간사옥을 설계한 인물이다. 



세운상가가 특별했던 이유는 압도적인 규모뿐만 아니라, 입체적이고 새로운 공간 기법을 투영했기 때문이다. 공중보행데크를 두어 차로와 보행로를 분리하여 입체적으로 주변과 연계하는 계획, 상업시설과 주거 시설 업무 기능을 분리하고 연결해주는 개방공간을 배치하는 계획, 채광과 환기를 위한 아트리움을 두는 것 등등 획기적인 아이디어들이 도입되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세운상가를 세운상가답게 했던 특별한 계획들은 시공단계에서 모두 배제되어, 반쪽짜리 완성품이 되었다.







서울학연구소 저, 마티에서 출판된 <청계천, 청계고가를 기억하며(2009)>를 살펴보면 거대한 세운상가를 좀더 입체적으로 볼 수 있다. 4개의 건물군이자 모두 8개의 상가로 구성되어 있는데, 때론 이 모든 상가를 통틀어 세운상가라 부르기도 하고, 앞의 두 상가만 세운상가라고 하기도 한다. 계획당시에는 가장 앞선 상가는 현대상가 아파트와 아세아 상가라고도 했었다. 불도저라 불리던 당시 김현옥 시장이 '세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세운상가 A.B.C.D 동이거나 가,나,다,라 동으로 불린다.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진양상가이고 가장 작은 곳은 대림청구상가다. 


 


세운상가가 한창 공사중이던 1967년 7월의 동아일보에는 이런 기사가 있다. 


서울시가 불량지구 개발사업의 하나로 민간투자 44억 원으로 세워지는 아파트는 앞으로 D지구에 들어설 22층짜리 국제관광호텔을 포함, A.B.C.D 4개 지구 1만 5천평 대지에 8층, 10층, 12층, 13층짜리 건물 9개가 차례로 열을 지어 내년 여름철까지 모두 들어서면 하루10만 여명의 시민이 이곳을 이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략)


서울의 상가경기 중심지는 그동안 종로, 명동, 소공동, 무교동의 순으로 이동을 거듭, 멀지 않아 이 상가 아파트 지역으로 옮겨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런 탓인지 동 상가의 임대료도 아주 높아 3평짜리 점포 1개에 70만원씩하며 이주위의 땅값은 작년의 5,6만원에서 15만원으로 뛰어올랐다. 

아파트의 구조는 1~4층이 점포, 5층 이상이 아파트로 되었으며 3층 양편에는 건물과 건물을 연결, 종로3가에서 대한극장 앞까지 고가 산책도로가 가설되며 5개의 공원, 21대의 엘리베이터, 주차장, 스팀, 교환전화시설을 갖추며 동건물 주민만을 위한 동사무소, 파출소, 은행, 우체국 및 국민학교 등 공공시설도 곧 들어서게 된다고. 





순차적으로 개장하게 되는 건물의 준공식에는 대통령 내외도 참석하여 물건을 구입했고, 더 목좋은 매장을 갖겠다고 상인들끼리 쟁탈전을 하기도 했으며, 분분별한 경품과 폭리 의혹 등이 이어졌다. 비싼 임대료, 지속적으로 오르는 보증금으로 철시가 이어졌다. 사업에 실패한 점주는 건물에서 투신했고,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한 이주민들은 여전히 분쟁하고 있었다. 설계에 문제가 있어 보완한다는 뉴스, 설계 문제로 재건축한다는 뉴스도 이어졌다. 세운상가가 다른 상가와 차별점을 가졌던 부분, 도시 내의 랜드마크로서 지역발전과 연계하기 위한 필수 조건인 자동차도로와 공중보도의 분리와 입체적인 연결은 물건너 갔다. 옥상정원은 조성하지 못해 썰렁한 시멘트 바닥이 드러났다. 초등학교도 인가를 받지 못했다. 아파트 입주자들이 서서히 빠져나간 자리를 사무공간이 채웠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던 상권의 부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좌절되었다. 서울시는 1970년대에 이르러 강남 개발에 착수했고, 명동에는 백화점거리가 조성되어 상권이 더욱 공고해졌다. 용산전자상가가 조성되기 시작하였으니, 세운상가의 주요 품목인 전자부문이 타격을 입었다. 거대한 함선은 좌초할 운명에 직면하고야 만다. 






남아있는 것들과 되살린 것들








청계천을 따라 세운상가를 찾아갔던 날, 좋은 것이 많아서 늘 두근거렸다는 그 앞에서 남편은 말이 없었다. 가장 앞에 있던 건물 한동이 세운초록띠 공원이라는 이름의 빈터가 되었기 떄문이다. 스산한 녹색들이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노래방기기 도매상들이 즐비한 까닭에 직교하는 길을 따라 건물 옆 도로를 걸어내려오는 내내 매장은 노래방 기기와 조명들로 가득했다. 상가마다 전자 컴퓨터 반도체 조명 인쇄 귀금속 등으로 분류되어 있다. 


아파트쪽도 올라가보았다. 깨끗하게 잘 정돈된 공간은 아트리움의 빛과 복도의 그늘이 미묘하게 교차하고 있었다. 규모는 크지 않았고 주거보다는 대부분이 사무실로 보였다. 내부는 잘 순환되고 길찾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기능적으로 공간을 풀어냈으나 아트리움의 규모가 작아서 기대했던 만큼 환한 공간이 되지는 못했다. 


세운상가가 다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2006년, 전 서울시장이 상가 일대를 철거하고 녹지대로 만든다는 계획을 발표하면서다. 소개공지로 한때 거대한 비어있는 땅이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계획안이다. 수익도 불분명하고 효과도 장담할 수 없는 세운상가 철거안은, 첫번째 건물을 하나 없앤 후에야, 리모델링하는 것으로 계획이 수정되었다. 


나는 도시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철거사업에 부정적인 입장이다. 자생적인 흐름을 모두 잘라내는 거대한 손은 사라져야 한다. 그는 왜 세운상가에 눈독을 들였을까? 엄청난 돈을 들여서 거대한 녹지를 만들겠다는 말도 안되는 제안을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눈에 보이는 이익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이지 않은가. 










대림상가 옥상에 서보고서야 알았다. 그 이유를. 










서울을 거쳐간 온갖 시대가 뒤섞여 적당한 시점에서 멈춰버린 풍경이 그곳에 있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거대한 상가가 아니라, 자잘하게 뿌리박은 넓고도 촘촘한 동네였구나. 

여길 모두 쓸어서 초고층 오피스 단지로 개발하려고 했던 거구나. 


인위적으로 세운 거대한 상가 옆에는 자생적으로 뻗어나간 장사기계공구상가를 비롯해서, 마치 장기와 혈관과 신경처럼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 받으며 꿈틀거려온 동네가 미로처럼 뻗어있다. 이곳에는 심지어 100년전 골목이 그대로 살아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주택이 틀림없는 몇몇 집들은 기묘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염연한 풍경 앞에서 입을 벌리고 크게 웃었다. 





















을지로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늘 마주치는 건물이지만 한국은행 본관이 화폐박물관으로서 공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복잡한 도심 한복판의 소음과 밀도와는 떨어져 과거로 쑥 빨려들어온 것 같은 그런 시간 속에 머물게 된다는 것도. 



사실, 박물관 전시물이 아주 재미있게 꾸며진 것은 아니다. 내부는 답답하고 위압적인 느낌도 있다. 쉼터에서 다정함을 읽기도 어렵고 기념품가게의 물건이 그렇게 다양하지도 않다. 나 역시도 자주 방문하는 장소는 아니다. 



얼마전, 을지로 일대를 돌아다니다가 이 건물 내부로 들어가게 되었고, 시간 여유가 있었던 까닭에 1,2층을 두루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잔잔한 빛이 새어드는 모퉁이 계단에서 유렵 어느 성채 안에서나 봄직한 나선형 계단을 발견했다. 



이렇게 예쁜 계단이 이곳에 숨겨져있었다니.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단을 꼽으라고 한다면 순위에 들 수도 있겠다. 은은한 조명과 바깥에서 스며드는 햇살이 기분좋게 계단에 스며들고 있었다. 계단의 아랫쪽 1층에는 앉아 쉴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있다. 비록 멋없는 사무의자긴 하지만. 




철을 접고 용접하여 만든 계단은 또한 주철로 모양낸 버팀대로 지지된다. 둥글게 휘어지도록 촘촘하게 용접한 계단은 틀림없이 그 시대에는 자랑거리였으리라. 화강석을 아낌없이 쓰고 원통형 돔 기둥이 사방에 놓여 마치 중세풍의 성곽처럼 위풍당당한 건물이었으니 내부의 장식들도 그에 어울릴만큼 화려하고 육중하고 고전적인 서양의 양식 그대로였을 것이다.


이곳만큼은 1910년대 건물이 처음 생겨났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거라고 짐작되었다. 






















이 크고 웅장한 은행의 시작이 자주적인 우리 금융이 아니라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머지 않은 광교에 대한천일은행 건물인 '광통관'- 현재는 우리은행으로 사용중이다-이 우리 금융사의 초반에 등장하여 다소 아쉬움을 덜어준다. 광통관은 다음에 다시 한번 이야기나누기로 하고. 



한국은행 본관의 건립 연도는 1912년이다. 제일은행 본점(1933), 신세계백화점(1930), 한국전력 남대문로 지점(1920)  등 을지로 일대의 근대건축물 중에는 가장 앞선 연대이다. 공사 착공은 1907년의 일이니 공사기간에 4년 이상이 걸린 셈이다. 


김정동 교수의 글에 따르면, 츨근콘크리트조에 석조를 입힌 것으로, 일본 건축계의 거장인 다쓰노 긴코가 설계했고 공사는 그의 제자인 나카무라 요시헤이가 했다. 건축 형태는 일본의 은행들이 모델로 삼고있는 영국의 잉글랜드은행 본점과 벨기에 국립은행 본점 등을 참고로 했다. 종탑처럼 둥근 돔을 건물의 모퉁이마다 세웠는데, 그 위치가 위에서 보았던 회전형 계단이 있는 곳이다. 외부의 근사한 석재들은 창신동 채석장에서 가져온 것들이고 벽돌은 관립연와제조소의 것이며 총 411만3천5백매가 사용되었다. 철골은 미국 카네기사의 것이며, 셔터와 창틀은 영국 헨리 호프 사 제품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공들여 치장한 건물의 뒷 배경에는 제국주의 시대의 첨예한 이권 다툼이 있었다. 


이른바 '고문정치'라 불리던 시기가 있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화하기 위해 고문들을 정치에 깊숙이 개입시켰던 시기다.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으로 등장한 '메가다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郎)'는 재정과 금융을 일제에 종속시킬 목적으로 화폐개혁을 시행하고, 일본제일은행을 대한제국의 중앙은행으로 만들기 위한 법안에 착수한다. 


일본 본토에서 조선의 중앙은행에 알맞는 기관을 두고, 제일은행이 그 역할을 해야하는가, 새로운 은행을 설립할 것인가를 놓고 논란이 있었다 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독자적인 식민지배를 위해서는 새로운 기관으로서 한국은행 설립을 지지했고 1909년 대한제국의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설립되었다. 대한제국의 은행이라는 의미로 한국은행이다. 이 은행은 그 동안 일본제일은행이 해온 여러 권한과 역할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한일병합 이후 한국은행은 조선은행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법령도 바뀌었다.  



1907년부터 공사가 시작된 이 건물은, 처음에는 일본제일은행 경성총지점이었다가 한국은행이 되었으며, 공사가 끝난 후에는 조선은행으로 또다시 이름이 바뀐 것이다.


그것은 이름만 바뀐 것은 아닐 터이다. 이름 뒤에는 한 나라의 운명이 스려져 가는 동안, 돈과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울던 시절이 숨어있다. 






2001년에 건물을 복원하고 화폐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나는 그동안 궁금했던 할머니의 지폐를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무수하게 바뀐 화폐들은, 단순히 돈의 가치를 판단하는 수단만은 아니었다. 권력집단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것이며, 나라가 크게 성장할수도 인플레이션으로 폭삭 망해버릴 수도 있는 상황을 분명하게 전달한다. 화폐는 돈의 가치를 넘어서고 은행은 이 모든 이권들이 오가는 현장을 침묵하고 은폐하고 증언하고 또 만천하에 드러내는 장소다. 





내부 계단에서 발견한 꺽임 장식. 정확한 명칭이 있을 텐데..






한국은행 본관 모형. 뒷모습이 거울에 비춰졌다.























모던뽀이 박태준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는  구보가 하루종일 경성의 중심지를 기웃거리며 탄식하고 냉소하고 사색하고 대화하는 소설이다. 구보씨의 산책이 본격적인 궤도로 진입하는 즈음에 이런 장면이 펼쳐진다. 


"조선은행 앞에서 구보는 전차를 내려, 장곡천정으로 향한다. 생각에 피로한 그는 이제 마땅히 다방에 들러 한 잔의 홍차를 즐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문장이 이어진다. 


"벰베르크 실로 찐 보일 치마. 삼 원 육십 전. 하여튼 팔 원 사십 전이 있으면, 그 소녀는 완전히 행복일 수 있었다. 그러나, 구보는, 그 결코 크지 못한 욕망이 이루어졌음을 듣지 못했다. 

구보는, 자기는, 대체, 얼마를 가져야 행복일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1934년, 조선은행 주변에는 넘치는 백화점과 은행과 상점과 식당과 카페로 가득차 있었을 것이다. 글을 써서 푼돈을 버는 구보 씨는 돈이 넘쳐나는 이 거리에서, 욕망해봐야 소용 없는 것들과 욕망할수조차 없는 것들과  그럼에도 욕망할수밖에 없는 것들 사이에서 냉소와 침울의 시선을 던진다. 그보다 30년, 메가다와 이토가 가져간 이 나라의 가치는 돈으로 헤아릴 수 있을까? 한 세대가 지난 후 구보와 이상처럼 침울한 고학력 룸펜들이 유령처럼 떠돌던 그 거리를 나도 걷는다. 



그런데, 지금부터 한 세대 전에는 무슨 일이 있었길래, 지금 이토록 우울한 잉여계급들이 속출하는가,라는 의문을 던지며 나는 한잔의 홍차를 마시러 카페로 향하는 구보씨의 환영을 따라 은행에서 빠져나와 소공로를 따라 걸어갔다.



 















시장을 사랑했던 작가, 박경리 



박경리 선생의 소설 <시장과 전장>에는 전쟁이 한창이라 물자가 부족한 가운데서도 시장은 끊임없이 열렸다 닫히며 삶의 애환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전장과 시장은 따로 있으면서도 함께이고, 죽음과 삶이 교차하는 지점입니다. 꾸역꾸역 피난 보따리에 싸온 물건들을 가지고 나와 파는 주부들과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에도 먹을 것을 어찌어찌 구해오는 억척어멈들과 미군이 남기고 버린 물건, 미처 피난 보따리에 들어가지 못한 채 어수선하게 버려진 물건들을 꿰매고 붙여서 담요, 이불, 바지, 양말로 재가공한 희한한 물건들이 등장합니다.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서라면 가릴 것이 없지요. 고픈 배를 부여잡고 장터에 가면 꿀꿀이죽이란 것이 끓고 있지요. 



박경리 선생은 전쟁이 끝나고 10여년이 흐른 후, <파시>와 <시장과 전장> 등 전쟁 체험을 바탕으로 한 두 편 소설을 내놓습니다. 생생한 묘사와 감정들은 체험이 아니면 불가능한 서술이었겠지요. 문장들을 읽으며 그 시절에 성큼 가까이 갔었습니다. 선생은 시장을 참으로 빛나는 눈으로 바라보았구나, 시장에서 들끓는 애환에도 깊은 시선을 주었구나. 싶었습니다. 그것은 박완서 선생이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에서 서술한 풍경과 유사하면서도 태도가 다소 달랐습니다. 박완서 선생은 치졸한 인간세태를 목격하는 곳으로 시장을 서술했지요. 




 



<시장과 전장>에 나오는 시장이 과연 어느 곳일까, 궁금하여 장소를 파악해보았는데, 남대문 시장과 용산 시장 등 몇 개의 지명을 알아냈습니다. 시장 분위기를 보여주기는 충분하지만 장소에 대한 묘사는 많지 않았지요. 그때의 시장 분위기를 그저 상상으로 떠올려볼 뿐입니다. 한창 전쟁 중이던 시절에도 시장은 지금처럼 북적였던 거군요. 그랬군요. 모든 것이 깡그리 사라지는 그 순간에도 돈을 버는 사람이 있고 승승장구하는 사람이 있고 화려한 생활을 그대로 유지했던 사람도 있었으므로. 


역사의 행간을 문학이 채워주지요. 역사의 현장을 경험한 자들은 기록을 남겨야할 의무가 있는거죠. 

지금 우리는 어떠할까요. 지금 우리는 역사의 어떤 지점에 있는 걸까요? 




머리를 빗고 지영은 옷을 갈아입는다. 자리에 누워 있는 윤 씨가 

"어딜 갈라카노?"

하고 묻는다.

"시장에."

"시장?"

"남대문시장에 한번 가볼래요. 여름옷도 다 버리고 와서..."

윤씨는 알는 소리를 내며 일어나 앉는다.

"다리도 끊어졌는데 어짜 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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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룻터에는 한 사람 두 사람 모여들어 건너편 강가에 손님을 풀고 돌아오는 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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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서빙고, 잠실 쪽의 들판과 숲이 아지랑이에 흔들린다. 강 하류 마포 쪽은 햇빛을 ㄱ받아 강물이 보석처럼 번득번득 빛났다.

"노인장, 톡톡히 수지를 맞추시는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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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다 죽을 판인데 살 판 난 사람도 더러 있지. 고무신 장수, 비누 장수, 성냥 장수... 어쨋던 장바닥에 곡식이나 나돌아야 할텐데, 농사꾼들이 약사어 쌀을 내놔야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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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사람의 물결 속으로 지영이 휩쓸려 들어간다. 시장에는 골목골목에 상품이 그득히 쌓여있었다. 의류, 이상용품, 화장품, 신발 모두 옛날과 같이, 다만 식료품 앞에 사람들이 많이 무여들었으나 물건이 가난하다. 붉은 지폐가 벌써 나돌고 몸빼 입은 장사꾼 아주머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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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은 물건도 안사고 사람들에게 떠밀리며 가다가 그릇점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싸구려 음식점, 상품이 가난한 식료품 앞에만 사람이 모인다. 그릇점 앞은 바삐 그냥 지나간다. 지영은 푸른 케이스 속에 든 커피 세트를 슬며시 만져본다. 

" 거 좋은 겁니다. 리치몬드 제품이죠. 잘해드릴테니 사가십시오."

"요즘에도 그릇이 팔려요?"

주인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저... 미제 홈세트를 안사시겠어요?"

젊은 부인이 보따리를 들고 가게 앞에서 묻는다. 주인은 손을 저으며

"온종일 팔러오는 사람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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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연방 옷가지를 싼 보따리가 시장으로 들어온다. 해방 직푸의 시장터처럼 헌옷 장수들이 길을 메운다. 시골로 곡식 하러 가는 장사꾼들이 그것을 흥정한다. 

떡장수, 메밀묵 장수, 국수 장수, 활기에 넘치고 가지가지 소리가 있는 시장, 페르시아 시장이 아니고 전쟁이 밟고 지난간 장터에도 음악은 있다. 장난감 파는 가게에 인민군들이 서있고 그들이 돌아갈 때 누이와 동생, 아들과 딸들에게 선물할 장난감을 고르고 있지 않은가. 

지나간 골목을 또 돌고 또 돌고 몇 번을 그러다가 지영은 아무것도 못사고 거리로 나왔다


                                                  -박경리, <시장과 전장>, 나남출판, 1999, p. 231~236






남대문 시장과 동대문 시장


보통 전통의 상권이라고 하면, 조선시대부터 있어왔던 시전, 즉 종로를 이야기하곤 하지요. 그런데, 남대문 시장과 동대문시장은 과연 언제부터 존재했을 지 다소 궁금해졌습니다. <서울의 시장(박원숙/서울시사편찬위원회, 2007>이라는 책을 훑어보고서 다소 궁금했던 것들을 해소할 수 있었지요. 




조선 후기, 철패와 이현이라는 시장이 자생적으로 생겨났습니다. 일종의 난전입니다. 철패는 남대문가, 이현은 동대문가에 생겼지요. 아무래도 외부의 물건들이 드나드는 성곽의 큰 문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시장을 열고는 했나봅니다. 선혜청은 지방에서 올라오는 공물들을 출납하는 창고를 두고 남창이라 했는데, 북창은 삼청동, 용산에는 별창 등을 두었다고 하네요. 

대한제국기, 남대문로와 종로 일대를 정비하는 대규모 도로 정비사업이 시행되었습니다. 남대문 주위의 시장을 선혜청 안으로 이전해서 선혜청 동대청에 이어진 곳간과 마당을 시장터로 활용하게 함으로써 공식적인 공간을 형성하게 됩니다. 당시 주소지는 '한성부 서서 양생방 창동'으로 나와있습니다. 이 시장을 '남문안장' '신창안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해요. 




그럼 동대문 시장의 시작은 어떠했을까요? 

1898년에 서대문-청량리-동대문 거리에 전차건설 공사가 시작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구들이 늘어나면서 그들이 막 지은 집들이 종로거리를 침범하고 그 길가에 시장이 형성된 이현시장은 위생도 좋지 않고 사건사고가 많았지요. 전차공사는 이 주택들을 싹 정리하고 제대로 시장이 정착되는 과정이 어어집니다. 

이현시장에서 포목상으로 큰 성공을 거둔 박승직은 1905년 화폐정리로 상인들이 피해를 입게 되자, 자본력 있는 상인들과 뜻을 모아 '광장주식회사'를 설립합니다. 종로5가 청계천 북편 광장시장이 바로 그곳입니다. 남대문시장이 여러 상인들이 모여들어 다소 어수선하게 시장이 형성된 것에 비해 광장시장은 처음부터 주식회사의 형태이자 상인조합의 형태로 시작되었습니다. 상인조합은 너른 터를 만들고 조합원으로 가입만 하면 누구나 장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광장시장, 하면 먹고 마시는 장터가 번쩍, 떠오르지만, 실제 시장은 포목이 중심이 되었지요. 



그 당시 시장의 품목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포목이었습니다. 백화점의 옛 이름인 '오복점'도 포목을 판매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듯이 말이죠. 옷감을 끊어다가 옷을 지어입는 것이 그 당시 풍속이었으니, 포목점이라고 하면 지금의 패션몰과 유사한 어감이었을 겁니다. 지금도 광장시장은 포목부가 크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물론, 동대문 상가나 각종 의류상가들이 만연해있는 지역이라 다소 왜소해보이긴 합니다만, 광장시장의 포목부는 왠지 전통적인 느낌이 물씬 납니다. 그 시절 어머니들처럼 쪽진 머리를 하고 단정한 한복 자락을 여미고 서있는 여인네를 보는 것 같아요. 





                                                               




일제 강점기 시장은 어떻게 변화했을까요?  

남대문 시장의 경우, 그 터 자체가 정부 소유의 것이라 총독부 소관이 되었고 총독부에서는 이 대지를 일본계 중앙물산에 헐값에 팔았습니다. 이 와중에 내쫓기게 된 상인들은 결사적으로 반대하면서 상인연합회를 결성하게 되지요. 일제 패망 후에는 같은 이유로 남대문 시장이 적산으로 분류되어 정부 재산으로서 불하될 처지에 놓이는 바람에 상인들은 또다시 쫓겨날 상황이 되지요. 다시금 저항하고 항의하여 상황을 되돌려놓습니다. 

남대문 시장은 전쟁으로 초토화가 됩니다. 252개의 점포 중 성한 것이 하나도 없는 가운데, 상인들이 피란간 사이에 100여개의 노점들이 시장을 형성하고 있었지요.  위에 인용한 시장과 전장의 남대문 시장은 바로 이 상태였지요. 그 시절에는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물건들이 아니면 절대적으로 물자가 부족했기에, 불법으로 밀수품, 사치품, 미군부대 군수품들을 거래하는 곳이라 하여 '도깨비시장' '양키시장' 등으로 불렸지요. 지금도 미국 생필품을 파는 가게들이 꽤나 많이 있지요. 




동대문 시장은 조금 달랐습니다. 부유한 한국인 상인들로 구성된 주주들이 튼튼하게 자리잡고 있었던 덕분에, 오히려 자립적 독립적 노선을 취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시절에도 동대문 시장에는 한국인 상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지요. 패망 후에도 안정적으로 시장을 이끌어나갔지만, 전쟁 때는 모든 것이 불탔습니다. 천막을 치고 임시영업을 하던 동대문시장은 청계천으로 세력을 넓혀갑니다. 


그때, 청계천변에 월남한 피난민이 주축이 된 시장이 형성됩니다. 바로 평화시장입니다. 이들은 창신동에 자리를 잡고 봉제공장을 세우지요. 이들과 공생하고 또 경쟁하면서 동대문시장은 1970년대 동대문시장, 광장시장, 동대문종합상가로 나뉘게 됩니다. 청계천 남쪽에는 평화시장, 동화시장, 신평화시장이 생겨납니다. 












광장시장, 여기 살아있음


광장시장을 통과하여 종로 3가 방향으로 나오면서 아케이드로 덮인 건물과 건물들이 참으로 오래된 건물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건물의 역사보다 더 오래된 시장의 역사도 조금 더듬어 보았습니다. 시장은 늘 현재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광장시장을 보면서 조금 안심해도 될 것 같습니다. 우리 삶의 모습에는 이렇듯 시간의 적층이 남아있을 테니까요. 


번쩍거리는 쇼핑몰에, 거대한 백화점에 밀려 점차 쇠락해가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시장에서 느낄 수 있는 새로움, 생생함, 즐거움 같은 것은 백화점이나 쇼핑몰의 그것보다 훨씬 더 농후합니다. 
















한끼 든든히 먹기에 3,4천원이면 충분합니다. 회를 곁들여 소주 한잔 할 수 있는 곳도 있고 2-30년 전과 마찬가지로 코티분과 바셀린과 알록달록 수입과자가 잔뜩 쌓인 곳도 있지요. 소위, 마약김밥과 빈대떡집은 늘 문전성시를 이루며 시장의 참맛을 느끼게 해줍니다. 


촤악, 반죽을 뿌리는 소리, 지글거리는 기름 소리, 고소한 냄새, 사람들을 부르는 목소리, 푸짐하게 담고서 한 주먹 더 얹어주는 인심이 더해집니다. 오가는 천원짜리, 만원짜리. 뜨겁고 진득한 물과 불의 기운, 사람의 숨소리와 목소리가 있는 이 곳. 



시장은, 여기 살아있습니다. 












인천 중구청 앞 해안동 일대에는 오래돈 붉은 창고 건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래전, 인천항이 개항장이었을 때, 배로 드나드는 물건들을 보관하던 창고였지요. 지금도 그 창고들은 남아서, 창고나 가내수공업 공장으로 쓰거나 비어있거나 심지어 나이트클럽이나 카페로 바뀌기도 했습니다. 


그 중 개항기의 문화재 건물과 1930~40년대의 창고들과 인근 주택, 새로운 건축물 등 13개 동의 인천아트 플랫폼은 인천 해안동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되었지요. 예술인 마을이자 스트리트 아트의 현장인 이 장소는 오래된 조계지의 역사와 개항장의 환영, 그리고 지금의 차이나타운과 더불어, 새로운 도시 풍경의 하나로 자리잡았습니다. 


인천 아트 플랫폼 바로 옆에 두 개의 창고 건물을 리노베이션하여 바로 얼마전 9월 27일에 한국 근대문학관으로 재탄생했습니다. 






저는 오래된 창고 건물을 꽤 좋아합니다. 허공에 담긴 쓸쓸하고 서늘한 공기가 느껴지는 공간감도 좋고, 낡았지만 기능적으로는 전혀 문제 없이 단단한 재료가 주는 그늘도 참 아름답습니다. 군더더기 없이 딱 떨어지는 건물의 형태도 그러하고, 무엇으로도 쓰일 수 있는 투명한 장소라는 점에서 건물의 미래를 상상하게 됩니다. 어떤 것들이 이 공간을 채울까? 어떤 인물, 어떤 냄새, 어떤 빛이 이 장소들을 빛낼까? 기대하게 되는 거죠.   


기대를 갖고서 골목을 따라 걸어갑니다. 언덕의 등고선은 촘촘하여 골목은 가파르게 이어집니다.

늘 차이나타운과 옛 개항장을 걸을 때면 천천히 느긋하게 걷게 됩니다. 그것만으로, 점차 변모되고 새로 생겨나 덧붙여지고 수많은 현수막이 건물을 덮고 있어도 이 장소를 좋아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골목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그림들은 그늘진 사진전을 소개하는 포스터여도 좋습니다. 

그 골목에는 집집마다 유난히 '복(福)'이라는 글자가 대문에 많이들 붙어있습니다. 
















그 골목 어귀에, 수년 전 처음 보았을 때도 빈집이었던 그 집이 지금도 빈 채로 담쟁이에 뒤덮여 있습니다. 담쟁이는 빈 집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곤 하지요. 숨막힐 듯 건물을 뒤덮고는, 음모자처럼 숨을 죽이고 있습니다. 겨울이 되면 이파리가 모두 떨어진다는 걸 알고 있지요. 참으로 오랫동안 건물은 봄여름이면 푸른 담쟁이로 덮였다가, 가을 겨울이면 남김없이 털어내고 빈 몸으로 서있곤 했습니다. 









인천아트플랫폼이 슬슬 눈에 보일 즈음, 대불호텔 터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과거 대불호텔의 유구를 발견하여 터를 정리해두었더군요. 건물의 복도와 벽의 흔적인가 봅니다. 매년 우리가 살아가는 대지의 높이가 몇 센티미터씩 높아진다고 하더군요. 땅 속에는 깊이에 따라 과거의 흔적이 나온다고 하니, 삶이 좀 놀랍게 느껴집니다. 과거의 삶 위에 적층된 현재의 삶. 과거의 삶이 버젓이 지켜보는 현재의 삶. 그런 걸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나는 더이상 외롭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과거의 존재들과 나와 미래의 존재들이 시간과 공간의 켜를 사이에 두고 어깨를 맞대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 들어요. 








옛 건물을 보면, 쓸쓸함이 느껴집니다. 과거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혹은 잊어버리고 싶을 만큼 슬프더라도, 그늘진 틈, 얼룩진 틈, 틈 사이에서 살짝 외로움을 느낍니다. 저는, 여행이란 쓸쓸함과 외로움을 발견하고 더 촘촘하게 느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옛 건물을 돌아보는 여행을 할 때마다 그런 묘한 기분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므로 혼자 옛 길을 걷고, 옛 건물을 보는 일은, 여행의 본질에 더욱 가까워지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틈을 보고 오소소, 소름이 돋는 기분을 느끼고, 과거를 상상하고 미래를 상상해보는 그런 시간. 



그런 순간입니다. 













이윽고, 근대문학관에 도착했습니다. 두 채의 창고 건물은 외형을 남기고, 옆에 건물을 덧새워서, 공간을 연결했군요. 점차 붉게 변하는 내후성 철판으로 마감했습니다. 아마도 벽돌건물과 색상과 형태, 규모를 거의 유사하게 한 것 같죠. 내후성 철판은 벽돌과도 잘어울리고 콘크리트와도 조화롭지요. 붉은 갈색은 참 독특한 색이죠. 무겁고 진중하면서도 성깔있고 지속적이며 아주 유혹적이면서도 오랜 시간이 지날수록 더 단단해질 것 같은 그런 색. 저는 붉은 벽돌을 좋아합니다. 








건물 안에 들어가 봅니다. 그동안 건물이 어떤 식의 변화를 거쳐서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었는지 간단한 이미지로 소개하고 있군요. 







건물은 아트플랫폼 전시관과 유사하게 변화시켰습니다. 중앙은 층고를 시원하게 개방하고  벽쪽을 따라서는 2층의 갤러리를 두어 전시를 두 가지로 쪼갤 수 있었지요. 건물의 뒷부분에는 사진처럼 공간을 덧붙여서 필요한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1층에는 근대문학과 관련한 간단한 이슈들을 소개하고 소장하고 있는 원본 저작들을 전시하고. 2층에는 인천과 관련된 문학을 따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근대문학관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갖고는 있지만, 우리 문학을 총망라하는 그런 장소는 아닙니다. 인천 개항장 풍경에 관심이 있어 인천에 들른 사람들이라면 편안하고 즐겁게 둘러볼만한 정도였어요. 많은 정보를 전달하는 곳이라기보다는, 문학의 풍경을 엿볼 수 있는 그런 장소였습니다. 


전시물만 열심히 읽고 따라다니지 말고 공간 속을 거닐면 꽤 기분이 좋아집니다. 1930년대의 다방 모습을 재현한 벽화도 있고(한켠에 구본웅이 그린 이상의 초상화도 있고 모던 걸들이 커피와 홍차를 즐기는 한편, 신문기자로 보이는 안경쓴 청년이 집필하는 모습도 볼 수 있지요.) 염상섭의 만세전에 등장하는 장소들을 슬라이드로 구성하여 들여다볼 수 있는 전시물도 꽤 흐뭇합니다. 나는 2층, 추리소설 부분에서 마치 조그마한 연극무대처럼 만들어놓은 전시물을 한참 보았습니다. 소소한 아이디어로 재미있게 꾸며놓은 것들이 많아서 작지만 둘러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가장 아름다웠던 것은 문학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옛 책들이었습니다. 


1930~40년대 책인데도 참으로 깨끗하게 보관된 책들을 보면 놀라울 따름입니다.  1947년에 나온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바람과 별과 시>가 전시대 안에 있었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눌러찍은 제목을 보면서, 그 책을 쓰다듬어보고, 그책을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그 종이를 만져보고 그 활자를 조용히 눌러보고 싶었습니다. 그 기분을 이해한 것인지, 옛 책을 복사 제본하여 만져보고 읽어볼 수 있도는 카피본을 몇 권 만들어두었더군요. 


저 작고 앙증맞은 책들을 손에 쥐어보며, 오래된 책이 가진 그 느낌 그대로는 아니었지만, 잔잔한 감동이 느껴졌습니다. 아, 그 시절에는 이렇게 작은 책을, 이토록 소중하게 간직하며 살았겠지요. 북간도에 살던 소년 윤동주는 백석의 시집 <사슴>이 나왔을 때, 한정본으로 출간한 그 시집을 갖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서 도서관에서 빌려서 꼼꼼하게 필사해서 간직했다고 하지요. 


나도 너무 소중했던 소설, 문장, 이야기들을 노트에 옮겨적고 읊고 친구에게 이야기하고, 좋다고 함께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문학의 한조각을 씹고 삼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 나는 그때, 문학이 전해준 소중한 느낌들을 되새기며 또 그런 사랑스런 기분에 젖어들려고 합니다. 



옛날 책들은 활자를 하나하나 찍어눌러서 인쇄를 했지요. 그래서, 책에는 움푹 눌러찍은 흔적도 있고, 종이도 지금보다 가슬가슬하고, 조판도 손으로 하여 글자가 비뚤거리기도 하고 그렇죠. 그 작은 활자가 보기에 나쁘지 않습니다. 그렇게 인쇄한 책들을 보면, 책은 정보를 담는 작은 상자가 아니라, 온기가 담긴 좋은 물건 같습니다. 아름답고 소중한 물건 말입니다. 


지금의 책은 좀 많이 크고, 아낌없이 종이를 쓰고, 아낌없이 수많은 작가들의 글을 읽고 그 향기를 즐기면서도 한 권 한 권의 소중함을 덜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내가 향유할 수 있는 글, 이야기의 그림자를 좀 더 소중하게 대하기로 했습니다. 푹 이야기에 빠져들면서,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수많은 작가들에게 감사하다고 외치고 싶었습니다. 













































국내에도 벽화 프로젝트가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어, 

내가 본 최고의 벽화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벽화의 도시하면 프랑스 리옹을 뺴놓을 수 없다. 




리옹에서 2년 반의 시간을 보냈는데, 알면 알수록 매력있는 도시였다. 손강과 론 강 두개가 흐르는 반도 형의 지형을 가진 리옹은 강을 넘을 수록 시대가 과거로 흐른다. 론강을 경계로 현대와 산업시대가 나뉘고, 손강 넘어로는 바로크와 르네상스, 고대시대의 건축물들이 켜켜이 자리잡아 역사의 층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중세시대부터 비단산업과 은행업, 포도주 산업, 출판 산업 등으로 프랑스 중심도시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기차의 도착>을 찍고 상영한 뤼미에르 형제, <어린왕자>를 쓴 생텍쥐베리, 내로라하는 셰프인 폴 보퀴즈와 같은 문화 인물, 올림픽 리요네와 같은 스포츠 스타들도 리옹을 본거지로 한다. 12월 8일마다 열리는 빛축제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아름다운 축제이며, 리옹 아트 비엔날레, 보졸레 누보 행사 등도 거르지 않고 열린다. 렌조 피아노가 지은 현대미술관과 장 누벨이 지은 오페라 등 현대의 것들이 옛것 가운데 스며들어 빛나고 있기도 하다. 


도시를 구성하는 산업과 문화의 씨줄과 날줄이 참으로 촘촘한 곳이다. 

 



그 중에서도 벽화는 리옹의 현재를 알리는 흥미로운 프로젝트다. 




리옹은 벽화의 도시라고 할만큼 도시 곳곳에 거대한 그림들이 자리하고 있다. 오래된 건물의 빈 벽에 그려진 벽화들은 리옹에서 펼쳐진 다양한 역사적 이슈들과 리옹이 배출한 다채로운 인물들이 그려진다. 이 정도면 딱히 별다를 것 없다 여겨질 수 있지만, 리옹의 벽화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그것은 건축물과 건물이 자리잡은 도시의 구조를 잘 이해하고 접근했기 떄문이다. 그 중에도 그림인지 실제인지 착시효과를 주는 '트롱프-뢰유(trompe-l'eoil)'로 그려진 벽화들이 흥미롭다.  물론, 벽화를 찾아 리옹 곳곳을 여행하는 사람들도 있다.  


유럽지역은 우리나라와 달리 건물과 건물 사이를 떼지않고 벽을 연결하여 짓다. 그러므로 건물의 옆면은 건물이 들어설 것을 예상하고 장식이나 창 없이 밋밋하게 마무리한다. 때론 표면이 건물이 뚝 잘려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다 그 옆에 오랫동안 건물이 지어지지 않으면 밋밋한 표면이 그대로 돌출되어 흉하게 드러나는 경우도 생긴다. 이런 벽이 그림의 캔버스가 된다. 



천만다행으로 지자체의 캐릭터나 기업의 광고판, 혹은 캐치프레이즈 같은 것은 절대 넣지 않는다. 후원하는 업체가 있다해도 두드러지지 않도록 브랜드명을 재치있게 삽입하여 전체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다. 건축의 고유한 양식을 잘 반영하여 건물의 연속처럼 보이게 하는 한편, 유머와 위트를 가미하여 벽화를 완성한다. 






오래된 건축물이 많은 구도심 지역은 물론이거니와 신도시에 새워진 콘크리트 아파트의 벽면에도 벽화를 위한 좋은 캔버스가 된다. 리옹 전역에는 이렇게 그려진 벽화가 수십 종이 있는데 이 작업을 맡아 하는 전문가 그룹이 있으니 바로 '시테 크레아씨옹(cite creation)'이다. 

프랑스 리옹에는 이들이 그린 가장 큰 벽화가 있는데, 크루아 후스(Croix-Rousse)지역의 1200 m2의 벽면에 그려졌다. 중세부터 실크산업으로 유명했던 크루아 후스 지역을 상징하는 다양한 스토리를 담은 이 벽화는 1987년에 처음 그려진 후 여러 차례 새로 그려졌는데, 올 4월에 세번째  작품이 등장했다.  






2013년 4월에 공개된 크루아 후스의 벽화. 착시 효과를 두어 건물과 계단이 겹쳐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벽화다.  



거대한 만큼 정교한 작업이다. 새로운 벽화에는 비보잉하는 스트리트 댄서들, 

아기를 유모차에 태운 젊은 부부, 담쟁이 덩굴 등 활력있는 현재의 모습이 담겼다. 

 




내가 리옹에 있을 때 본 그림은 이랬다. 원래는 빈벽이었는데, 건물 앞으로 도로가 생겨나면서 

건물을 지을 수 없게 되었고, 흉하게 남은 빈벽에 거대한 벽화를 그리게 된 것이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선보이면서 그들의 인터뷰한 내용을 보고서 이들이 생겨난 배경을 알게 되었다. 

프랑스 미술계에는 보자르(beaux-arts)라고 하여 순수예술을 추구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1970년대 미술계는 대부분이 추상과 미니멀리즘으로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미술 현상에 지루함을 느낀 몇 명이 모여 재미있고 실제 생활 속으로 침투할 수 있는 예술을 꿈꾸며 벽화 작업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리옹의 벽화에서 중요한 점은 도시와 공존하는예술에 대한 고민들이다. 그저 하나의 장식이 아니라, 도시인에게 잔잔한 즐거움을 주며, 생동감있게 하면서도 도시민들에게 자부심을 주는 요소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건축과 도시의 프레임 안에서 조화롭게 이루어내고 있다. 리옹의 벽화와 우리 벽화마을과는 태생이 다르며 실행주체도 다르지만, 공간에 그림을 그려서 도시의 형태에 영향을 준다는 점은 같다. 도시의 역사, 도시의 건축, 도시의 구조와 결합된 예술적인 그림을 우리 벽화마을에서도 보게 되기를 바란다.  






리옹의 대표적인 벽화 몇 점을 소개한다. 

도시의 정체성을 보여주고 문화도시로서의 자부심을 높일 수 있는 주제를 표현한다. 

중요한 점은 건축적인 요소와 연결하여 건물의 일부로 느낄 수 있도록 한다는 것. 

건축과 조형, 예술과 아이디어에 깊은 이해를 갖고 있는 전문가들이 참여하기에 가능하다. 



책의 도시, 영화의 도시, 미식의 도시, 축구의 도시, 은행과 비단 산업의 도시임을 부각할 뿐만 아니라, 

생텍쥐베리, 토니 가르니에를 비롯, 생존인물들까지 리옹을 빛낸 스타들을 벽에 담는다. 






1. 리옹은 책의 도시이자 영화의 도시다. 중세 시대부터 책을 출판했던 리옹의 이력은 특별하다. 당시는 대학도시들만이 출판업이 융성했는데, 리옹은 상업도시로서 책의 거래뿐만 아니라 책의 출판까지도 진행했던 도시다.  


2. 시네마토그라피의 창시자인 뤼미에르 형제도 리옹에서 연구와 활동을 펼쳤다. 세계영화사에 기록된 첫 실사영화인 <기차의 탄생>이 바로 리옹에서 촬영된 것이다. 리옹은 이것을 기념하여 리옹종합대학에 뤼미에르라는 이름을 붙였고, 영화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벽화로 남겼다.   







리옹 사람들의 벽화(fresque des Lyonnais) 손(Saone)강변에 있는 건물 벽에 그려진 벽화 속에는 리옹이 배출한 유명인물들이 가득하다. 중세시대 성녀, 수도자, 철학자 등을 비롯해서, 사교계의 꽃이라 불렸던 레카미에 부인, 생텍쥐베리와 어린왕자도 찾아볼 수 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면서 시대가 점점 지금과 가까워진다. 



가장 아랫층에는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는 인물들로 채워져있다. 올림픽 리요네라는 축구클럽은 프랑스 리그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하는 등, 리옹을 축구의 도시로 알렸고, 최고의 셰프로 불리는 폴 보퀴즈는 리옹을 미식의 도시로 만들었다. 




벽화와 실제가 구분되지 않는다. 벽화는 자연스럽게 생활 속에 침투하여 도시를 좀더 활력있고 예술적으로 만들다. 








신도시의 공공 아파트 벽면도 거대한 캔버스가 된다. 

19세기~20세기를 살았던 건축가 토니 가르니에를 기념하는 다양한 벽화들이 그려져있는 이곳은

토니가르니에 도시 박물관(le musee urban Tony Garnier).






그가 살았던 시대의 모습, 그 시절의 건축물, 도시 풍경, 다양한 조형적인 이미지들이 벽을 채우고 있다.

모두 25개의 벽화가 그려져있다. 




가장 좌측의 이미지는 토니 가르니에가 설계한 대규모 가축시장이며 이 장소는 지금도 문화재로 남아서,

대형 콘서트가 열리는 공연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모든 사진은 cite de la creation(www.cite-creation.fr)에서 가져왔습니다. 


















나이들었다고 말하기에도, 아직 청춘이라고 하기에도 뭣하지만, 나 역시 옛날 좋았던 걸 종종 떠올리게 되는 요즘이다. 추억을 팔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좋았던 것을 자꾸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나는 부산이라는 도시에서 80년대 사춘기를 보내고 90년대 청춘들 틈에서 살았다.  그때 내가 주말을 보내던 곳은, 서면과 광안리, 부산대학교 앞. 이런 곳이었다. 어릴 때부터 곳곳을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었던가 보다. 나는 동네마다 내가 좋아하는 풍경, 거리, 장소... 그런 것들을 리스트업해두고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쇼핑의 중심가는 서면이었는데, 태화쇼핑, 동보서적, 서면 뒷골목 떡볶이거리, 미니몰같은 여자애들의 놀이터, '스크린' 등등의 영화잡지와 '르네상스'같은 만화 잡지를 살 수 있는 헌책방과 대한극장이 있었다. 

부산대학교 앞은 지금도 시끌시끌한 쇼핑 플레이스가 아닌가 싶은데, 학교 다니면서 술을 엄청나게 마셔댔던 기억과 그 길고긴 대학시절 동안 공부를 대충대충 했던 기억이 지금도 나를 부끄럽게 한다. 어둑한 분위기에 근사한 음악이 흘러나오던 카페 H.R은 내가 좋아했던 곳. 

그리고 그때는 해운대가 아니라 광안리로 몰렸다. 세련된 젊음의 거리였다. 근사한 로바다야끼나 해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비치 비키니' 같은 남국의 장식이 있는 통유리 카페가 등장했고, 뒷골목에는 규모가 작고 예쁜 아파트들이 있었다. 그 길을 걷다보면 고급스런 주단가게, 가구가게, 자동차 숍 등이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친구와 바다와 가장 가깝다고 자랑하던 맥도날드에서 초코 선데이를 먹으면서 바다를 보는 게 제일 좋았다. 



그런 장소들이 좋았다. 걸으며 보던 풍경,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몇 번이고 같은 길을 걷던 그 날들이 좋았다.  



신기하게도 그런 기억들은, 장소와 더불어 오랫동안 각인된다. 안타깝게도 내가 언급한 장소들 중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다. 세월은 도시의 랜드마크를 모조리 갈아치웠다. 도시란 참으로 비정하지 않은가!그러니, 자조적으로 말하자면, 새로 짓는 건물들은, 도시에서 랜드마크가 되겠다는 생각 자체를 버려야할 것이다. 인간처럼 건물도 언제 사라져버릴 지 모르니까. 







그런 도시에서, '부산데파트'가 이렇게 오래 남아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부산데파트는 아주 오래전부터 봐왔던 건물이다. 중앙동에서 남포동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주로 보게 되는 건물인데, 로터리 앞에서 우회전할때, 오른쪽 편에 보이던 거대한 건물이다. 건물 표면에 부산데파트라는 글자가 써져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데파트라는 말도 낯설고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의 자태도 꽤 위압적이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이야 훨씬 더 거대한 건물이 부산 곳곳에 들어섰지만, (해운대의 수많은 초고층 건축물의 금빛 찬란한 모습을 떠올려보라.) 부산 데파트라는 구조물은 여전히 꽤 거대한 건물 축에 속하리라. 

부산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건물의 위치를 정확히 알만큼 대표성을 가진 건물이긴 하지만, 정확히 이 건물의 용도가 무엇인지, 들어가본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존재하지만 생활 속에 들어온 적 없는 건물이랄까. 




아랫쪽은 상가, 위쪽에 아파트가 있는 주상복합의 형태라고 했다. 건물의 연대도 한세대를 넘어섰다. 오랫동안 익숙했던 그 집에 처음으로 발을 디뎌보았다. 


 



정식 명칭은 '부산멘션빌딩'이다. 주소지는 중구 동광동 1가 1번지다. 1번지는 언제나 상징성이 있는 건물이 세워지기 마련이다. 부산 데파트를 두고, 부산의 최초의 주상복합 쇼핑센터라고 한다. '데파트'라는 명칭은 '디파트먼트 스토어'에서 파생된 일본식 명칭이다. 원래 동광동 공설시장이 있었는데, 이를 통합정비하여 쇼핑센터를 짓기로 하고 1968년 5월 25일 공사를 시작했다. 사업을 주도한 곳은 상공회의소였는데, 당시에는 이렇게 거대한 쇼핑센터를 운영할 여력이 있는 민간회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1969년 11월 15일에는 상가부분이 완성되어 부산데파트를 개장했고, 1971년에는 상층부의 주거부분까지 공사를 완료했다. 부지만 해도 910평, 지하 4층에서 지상 4층까지 상가와 사무실로, 그 위의 3개층은 아파트로 만들어졌다. 아파트는 중정을 두고 세면으로 둘러진 형태다.  




<공사 현장을 보여주는 사진은 찾을 수 있었지만 건물의 설계자나 도면은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아쉽다. 천천히 찾아서 보충하고자 한다.>




동광동 공설시장을 통합하여 고층 상가를 짓는 공사가 시작된다. 직각삼각형 모양의 대지에 딱 맞게 건물이 올라간다.  





동광동 1가 1번지의 맞은편에는 옛 부산시청이 있었다. 시청은 연제구로 옮겨갔고, 

그 자리에는 롯데백화점 광복점이 들어섰다. 지하 4층까지 파내려가는 공사가 시작된 현장.



(좌) 완성된 모습의 부산 데파트. 지상 7층 중 상부 3층은 아파트를 포함하고 있다. 

(우) 중앙동을 대표하는 도로주변에 당당하게 들어선 부산데파트 





이른바 광복동과 남포동을 이르는 광포동 쇼핑센터의 중심이 되기에 이 건물이 다소 초입에 위치한 까닭인지, 너른 상권에 회전이 빠르고 저렴한 물건들을 쏟아내는 국제시장이나 서면 상권에 밀린 까닭인지, 부산 데파트는 주로 외국인을 대상으로한 기념품을 판매하는 장소로만 알려졌다. 

지금도 상점의 물품 품목은, 인삼이나 전통 민예품과 같은 관광 기념품이 주를 이루고, 지하 식당가도 내부 상인을 위한 장소로만 보였다. 변화가 빠른 상권을 장악하기에 거대한 몸집 만큼이나 민첩하지 못하고, 몇 년 전에는 바로 맞은편에 롯데백화점까지 들어와버렸다. 



그렇다면 아파트는 어떤 모습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을까?













아파트로 올라가는 길을 찾아 상가 안팎을 헤매다, 결국 바깥으로 나와서 한바퀴 돌고 나서야 엘리베이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니, 그늘진 어둠 바깥으로 환한 햇살이 비친다. 소음하나 없이 조용한 아파트를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오래된 집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삼각형 모양의 중정은 빨래도 널고 사람들이 모이기도 하는 장소인 것 같지만, 실제 어떻게 사용하는 지는 알 수가 없다. 


중정에서는 도시의 소음을 잊은 듯, 세월도 잊은 듯,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건물에 요즘 타지 사람들이 많이들 온다고 한다. 최동훈 감독의 <도둑들> 촬영 이후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많아졌단다. 그날도 내가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며 지나가니, 어디 찾냐고 물어보던 상인들이 "서울사람들인가배."하면서 신경을 거두고 자신들의 일로 되돌아갔다. 아파트를 구경하고 싶다고 했더니 수줍게 길을 알려주던 입주자도 있었고 집 자랑을 하시는 분도 계셨다. 건물이 단단하단다. 못을 박는 것도 힘들 정도로 건물이 단단하단다. 


"돌과 시멘트를 좋은 걸로 써서 그렇지." 


바깥의 소란함이 차단된 아늑한 중심. 그곳에서 조용히 담담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계단을 따라 옥상으로 올라가면 아파트 전체를 통과하여 조망할 수 있다. 집집마다 이어진 파이프들이 마치 건물의 혈관처럼 보인다. 그 길 끝에는 누구나 앉아 쉬어갈 수 있는 낡은 의자가 있다. 시골마을이나 소도시, 혹은 오래된 골목이면 흔히 집 밖에 의자 하나쯤 내어놓고 서로간에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바깥 구경을 하기도 한다. 바깥에 내어놓은 낡은 의자는 그런 정겨움의 상징물이다. 



맞은 편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는 이 의자에 앉아서 바다를 너르게 볼 수 있었을 텐데. 바다 건너편 섬에서 밤이면 불이 켜지는 풍경도 볼 수 있었을 것이고. 영도대교가 개통되던 날, 다리를 위를 빼곡히 채웠던 사람들 무리, 맞은 편에 있던 유서깊은 부산시청이 내부로 옮겨가고 남아있던 건물이 허물어지는 것도 이 자리에서는 또렷하게 보였을 것이다. 






해안은 지금도 흙으로 메워지고, 거대한 건물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모여든다. 롯데백화점 뒤켠에는 롯데가 수십년에 걸쳐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100층이 넘는 초고층 건물을 지어올리느라 여전히 공사중이다. 부산이 개항했을 때는 지금 이곳조차도 바닷물이 찰방이는 곳이었다. 부산 시청을 마주보며 변화의 중심에 있던 건물은, 한세대에 걸친 개발의 역사 이후, 퇴락한 채, 새로운 개발의 현장의 목격자로 자리바꿈하였다. 



동광동 1가 1번지는 아마 앞으로도 상징적인 지점으로서 남아있을 것이다. 

시대의 목격자로, 도시의 목격자로서. 









프랑스어 중에 ‘플라뇌르(Flaneur)’라는 말이 있는데, 만보객이나 산책가라는 뜻으로 번역되곤 한다. 보들레르가 도시인의 특성 중 하나로 들었던 것이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관찰자라는 점인데, 이는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우리말로 딱 어울리는 단어를 찾기가 신통치 않은데, 만보객은 조금 예스럽게 들리고, 산책가는 다소 이지적으로 들리므로, 철학가나 문학평론가에게 적합할 만한 표현같다.



 

그렇다면 ‘노닐다’는 어떨까? 


턱을 치켜들고 눈을 내리깔며 유유자적하니 이리기웃 저리기웃하는 한량이나, 바스락거리는 고운 치마를 입고 물에 뜬 유등처럼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는 애기씨가 연상된다. 한창 도시화가 진행중이던 파리의 플라뇌르는 경이롭게 변모하는 도시 풍경을 사뭇 비판적으로 보았을지는 모르겠으나, 노닐다는 분명 지그시 바라보며 해학적인 통찰을 얻어내는 유쾌한 관람자의 시선이 담겨있다.



나는 오래된 건물에서 노니는 것을 즐긴다. 기웃거리고, 귀를 기울이고, 만져보고, 냄새 맡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 19세기 파리 사람들처럼, 나는 낯선 장소와 거리를 내 시대의 그것처럼 노닐어본다. 때론 시간의 답을 듣기도 하고, 때론 무위의 평온함을 느끼기도 하고, 때론 태고적부터 어어져온 것만 같은 깊은 통찰을 얻기도 한다. 


오래된 건물을 볼 때 늘 치열할 필요는 없을 거다. 우리는 삶의, 또 건축의 아름다움을 보러 그곳에 가지 않던가. 그리고 사라짐의 아름다움, 폐허의 아름다움을 덤으로 발견하기도 하고 말이다. 



개관한 지 두어달 되었나,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에 있는 삼례문화예술촌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나는 날카로운 매의 눈으로 구석구석을 쏘아보며 신기한 것들을 찾아내는 탐험가였고, 오래된 것이 어쩔 수 없이 풍기는 먼지를 이해하는 나이든 할머니 같기도 했고, 이러저리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이곳저곳 기웃거리느라 정신없는 세살짜리 꼬마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모아놓은 종합선물세트 같은 곳이었다. 


책, 커피, 미술, 목공, 

그리고 오래된 창고. 


더 바랄게 없다.









건물마다 건축재료가 조금씩 다르다. 붉은 벽돌을 드러낸 것이 있는가 하면,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진 것도 있고 철판으로 덧댄 것도 있다. 창고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넓은 광장이 형성되어 행사를 치르기에도 좋다.






여름이 다가오기 전, 전주에 사시는 형님이 전화를 주셨다. 사시는 곳 근처에 양곡창고를 개조하여 예술촌이 생겼는데, 꽤 볼만하다는 말씀이었다.


요즘 지역재생을 위한 예술촌이 얼마나 많은가. 근대건축물을 테마로 박제된 민속촌으로 만들어놓은 곳도 많고, 공연히 돈만 들이고 볼 것 없는 전시공간도 도처에 있다. 그렇고 그런, 많고 많은 예술촌에 피로함을 느끼고 있었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장소가 내내 마음에 걸려 여름의 끝자락에서 전주로 향했다. 


어렵사리 방문한 셈이지만, 기대와 만족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삼례는 전주와 멀지 않은 곳으로, 지금도 농업이 주를 이루는 지역이다. 양곡창고는 삼례역 바로 인근에 있다. 삼례역은 1914년에 개통하여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일제강점기 미곡 수탈의 현장이라는 기억을 안고 있으나 후에 농협이 소유하고 활용해왔다. 모두 7동의 창고와 1채의 일식 건물이 이 장소에 남아있는데, 창고는 컨템포러리 아트 갤러리, 디자인 뮤지엄, 목공소, 책 박물관, 북아트 공방, 갤러리 카페 및 커피 공방으로 운영되고 예술촌 초입에 위치한 일식건물은 인포메이션 센터로 사용된다. 



기분 좋게도, 오래된 건축물의 분위기는 그대로 유지하고 적절한 선에서 새로운 컨텐츠를 유입했다. 갤러리든, 카페든 다른 관람시설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특징을 내세운다.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분위기라고 할까? 



건물마다 세월의 흔적들이 곳곳에 보인다. 창고의 문에 수놓은 듯한 농협의 엠블렘과 외벽에 적혀있는 구호들은 내게도 낯설지 않다. 페인트 붓으로 쓴 것들도 눈에 띈다. 구역을 표시한 것, 어떤 용도의 건물인지를 적어놓은 것 등 건물과 건물을 사용한 사람들의 활동을 기록한 흔적들이다.



이곳에 없는 것이 있다. 비용이 높을 뿐 그 효용성에서 언제나 의문을 갖고 있던 멀티미디어 전시물이 없고, 딱히 다른 곳과 다를 바 없는 역사관이 없다. 내부의 벽을 가리고 넓고 높은 공간을 쪼개는 흰색의 가림벽이 없다. 그래서, 창고 건물의 장점이라 할 수 있는 높고 넓은 공간을 시원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각 공간이 공방을 운영할 계획이라는 점도 매력적이다. 멤버십을 유지할 수 있는 공방 활동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드나들게 하는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멋지게 복원된 근대문화재가 컨텐츠가 부실하여 결국 한번 왔던 사람들은 더 이상 찾지 않는 장소가 되어버린 것을 종종 보았다. 그럴 때마다, 지속가능한 컨텐츠,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드나들고 오래도록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컨텐츠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느꼈다. 

목공소와 북아트 공방은 이미 공방을 시작했고, 카페는 로스팅을 배우는 커피 공방을 준비중이다. 아직은, 신선하고 때묻지 않은 느낌이 있다. 전주 한옥마을이 고즈넉한 한옥의 분위기를 즐긴다기보다 엄청난 관광객이 드나드는 관광지가 되어버려 다소 아쉬움이 있었는데, 넉넉하면서도 문화적인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보완적인 장소를 만난 것이다. 




서로 소통하면서도 고유의 특성을 지켜가는 각각의 공간들. 어떤 점이 각기 다른 분야가 한자리에 모이도록 한 것일까 궁금하다. 흥미롭게도, 삼례문화예술촌은 "삼삼예예미미 협동조합"이 위탁을 받아 운영하고 있다. 요즘 협동조합의 가능성에 대해 여러 차원에서 논의가 나오고 있는데, 다소 생소한 예술협동조합의 출현이 무척 반갑고 또 그들의 활동이 기대된다. 



갤러리 카페의 음악 선곡은 일품이다. 하지만 메뉴는 좀더 보충되어야 할 것이다.







  

인포메이션 센터에 붙은 이런 포스터를 보았다. 액토건축에서 진행하는 집짓기 프로젝트다. 철암,인제, 서천 등의 시골마을의 폐가들을 건축학교 학생들과 함께 새로운 공간으로 바꾸는 작업인 것 같다. 올해는 삼례다. 



길을 따라 나오면서 집짓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몇몇 집들을 보았다. 지방의 작고 바스라져가는 집들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활동하고 있었구나. 이제 삼례는 이야기거리가 많은 지역이 될 것 같다. 














삼례문화예술촌 곳곳에서 찾은 옛 활동의 흔적들. 건물 내부의 빗살무늬 목재는 미곡을 저장할 때 벽과 간격을 두기 위해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이런 구조적인 요소들을 남겨두고 공간만 활용하여 컨텐츠를 삽입했다. 










오래된 역, 그 중에서도 간이역을 지나다니다 보면 요상하게 생긴 콘크리트 건물을 가끔 보게 될 터이다. 증기기관차가 다니던 무렵에 사용했던 급수탑이다. 증기기관차는 말 그대로 증기를 이용해야 하므로 역마다 물을 공급받아야 했다. 그래서 일종의 물탱크를 기차 선로 주변에 두고 그때그때 보충했던 것이다. 


증기기관차가 사라진 후에는 급수탑도 제 할 일을 잃었다. 열차가 수없이 교차하는 대도시의 역사에는 급수탑이 일찌감치 자취를 감췄지만 기차가 느슨하게 다니는 작은 역이나 폐역 등지에는 여전히 남아있다. 철도 산업과 관련된 중요한 자료라 하여 대부분의 급수탑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중앙선 화본역에 도착했다. 


군위 화본역을 두고 가장 운치있는 간이역이라고 했던가? 서울 청량리역에서 경주까지를 이어주는 중앙선 열차가 하루에 서너 차례 정차하는 것 외에는 한적하기만 한 곳이다. 


간이역을 보러 관광객들이 꽤나 들른다. 아담한 역사를 뒤로 하고 철길 건너편에 키가 큰 급수탑이 있다. 


멀찍이서도 급수탑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규모가 큰 건조물이다. 급수탑 주변으로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는 장소를 만들었다. 한여름 뜨거운 햇살에도 아랑곳없이 아이들이 땀흘리며 뛰어다니고 아이들의 부모나 친지로 보이는 어른들은 급수탑이 만드는 길고 넓은 그림자 주변에 모여서 한줄기 바람을 느끼며 왁자지껄이다. 역사에서는 '무궁화호'가 곧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고, 잠시 후 열차가 들어오고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증기기관차라면 엄청난 소음을 뿌렸겠지만 지금의 열차는 드나드는 소리조차도 소음이라고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조용히 정차하고 조용히 출발한다. 기차가 버스보다 조용하다. 










화본역 급수탑이 특별한 이유는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기 떄문이다. 외관이 거의 그대로 남아있는데 다른 급수탑과 달리 문화재 지정이 되지 않았다. 다만 주요철도문화재라는 안내판이 붙어있을 뿐이다. 급수탑 내부에는 하단부에 나무 패널이 깔려있어 앉아서 감상할 수 있었다. 조명 시설도 있는 것으로 보아 저녁시간에도 급수탑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두께가 서로 다른 철구조물로 된 두 개의 파이프가 꼭대기까지 연결되어 있고 바깥으로는 중간에서 잘린 사다리가 있는 급수탑. 


급수탑의 원리는 어떻게 될까? 





급수탑 앞에는 물을 저장하던 저수조 시설이 남아있는데, 그 안에 급수탑의 급수 원리를 그림으로 설명해두고 있어서 궁금증이 쉽게 풀렸다. 두 개의 파이프는 입수와 배수를 관장하는 파이프이며, 낙차를 이용해서 급수탑의 물을 증기기관차로 옮길 수 있다. 급수탑 상부에 철로 된 막음 장치가 있거나 물탱크를 삽입하는 형태여야 옳은데, 그에 대한 설명은 없다. 급수탑이 이렇게 높다란 구조물이어야 하는 이유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기차역의 급수탑이 모두 이런 모양새일까? 문화재로 지정된 여러 급수탑을 찾아보면 모양새가 다른 듯 닮았다. 연대에 따라 장식적이기도 하고 재료가 달라지기는 하지만, 급수의 원리는 유사하기 때문에, 급수탑 외에도 저수조와 기계실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 일치한다. 


중앙선이 1941년에 개통했으므로 중앙선 일대에 남아있는 급수탑은 모두 유사한 형태를 갖고 있으며 철근콘크리트로 된 최신 기술을 활용했다. 높다란 타워형에 상부를 돌출시킨 형태, 환기구가 마치 동물의 귀처럼 솟아있는 형태 등이 유사하다.  










(좌)원주역 급수탑. (등록문화재 제138호)강원도 원주시 소재. 꼭대기에 환기창 4개 있으며 1940년대 급수탑의 전형적 구조.

(중)도계역 급수탑.(등록문화재 제 46호) 강원도 삼척시 소재. 다른 급수탑보다 높이가 낮은데, 그 대신 지대가 높아서 수압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한다.

(우)연산역 급수탑. (등록문화재 제 48호) 충남 논산시 연산면 소재. 남아있는 급수탑 중 가장 연대가 오래된 것. 석재를 사용한 점이 특징.


(좌)추풍령역 급수탑(등록문화재 제 47호). 충북 영동군 소재. 현존하는 급수탑 중 유일하게 사각형 평면을 가지고 있다.

(중)삼랑진역 급수탑.(등록문화재 제 51호). 경남 밀양시 소재. 1923년 건립. 철근콘크리트 구조이면서 상부에 석조모양의 장식을 했다.

(우)구 학다리역 급수탑.(등록문화재 제 63호) 전남 함평군 소재. 1921년 건립되었다. 석조 원형탑의 형태.


(사진 출처-문화재청 홈페이지 www.cha.go.kr)








증기기관차가 사라진 후, 쓸모없는 시설로 전락했지만, 고속도로도 없고 그저 기차만이 도시와 도시를, 나라와나라를 이어주던 옛 시절에는, 기차역과 급수탑이야말로 경찰서, 관공서와 마찬가지의 주요 시설이었다. 


옛날 뉴스를 찾아보면, 중국의 장학량의 시위대가 봉천역을 급습하여 급수탑을 폭파했다는 소식과 더불어 변전소, 급수탑, 정거장(기차역) 등이 주요폭파 대상물이었다고 명시하고 있다. 당시에는 부산역-경성역-(만주)봉천역으로 열차가 이어져 국제급행열차가 운행되었다. 봉천의 소식은, 경성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진 뉴스였다.



혹한기에는 급수탑도 얼게 되어 열차가 다니지 못하는 일도 생겨났다. 

영화 <안나카레니나>를 보면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증기기관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 나오는데, 그 정도는 아니라 해도 물을 사용해야 하는 만큼, 한파는 열차 여행을 방해하는 주요한 상황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급수탑이 얼어버려 열차가 임시 휴업을 해야하는 사태도 일어났다. 



교통부에 보고된 바에 의하면 지난 15일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16일 상오 8시 현재 정읍지방은 32미리, 순천지방은 12미리의 적설량을 보여 열차운행에 지장을 가져오고 있다 한다. 한편 삼척 철도국관내 철암지구의 급수탑이 얼어붙어 제 1881, 1882 열차가 운휴되었다고 한다.

-동아일보 1958년 1월 17일 





기능을 잃어버린 급수탑을 유쾌하게 활용하는 방법은 없을까? 


여러 지자체에서 급수탑과 역사 시설물을 관광시설로 활용하는 방안을 내놓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좀더 새롭고 창조적인 방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네덜란드의 건축그룹 zecc는 네덜란드 쇠스트 지역에 방치된 급수탑을 주택으로 개조한 바 있다. 집에 대한 고정관념이 굳건한 우리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례지만, 기발하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사라져가는 오래된 건축물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일은 늘 관심을 가져야할 것이다.



근대문화유산을 재활용하는 프로젝트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지금, 관점을 바꾸는 새로운 활동이 분명 필요한 시점이다. 테마파크가 되어버린 근대건축물이 아닌, 주민들에게 정말 필요한 장소로서 재활용되는 아름다운 사례를 많이 많이 보고 싶다.  








하우징 관련 잡지에 네덜란드 건축가 그룹 zecc의 프로젝트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이들 발상이 재미있어 소개한다. 이들은 방치되거나 폐허로 남은 건축물을 주택으로 변용하는 데  능수능란한 재능을 보여준다. 


폐 기차역과 벽돌로 지은 공장은 근사한 주택으로 바뀌었고 다양한 시설들이 학교로 바뀌거나 학생들을 위한 장소로 바뀌었다. 그 중에서 눈에 띈 것은 폐 급수탑을 주택으로 바꾼 사례다. 



네덜란드 쇠스트 지역에 1931년에 지어진 급수탑이 방치된 채 남아있었다. zecc는 이것을 9층으로 나눠 공간을 적절히 배열하여 주택으로 개조했다. 보통은 땅에 길쭉하게 집을 짓고 각기 다양한 공간을 배치하기 마련이지만 건축가는 수직으로 세워서 공간을 해결했다. 철재 나선 계단을 따라 현관과 거실, 주방과 식당, 게스트룸, 아이들 방, 욕실, 사우나, 서재, 마스터 베드룸, 라운지가 차례대로 형성되었다. 크고 넓은 집이 아니라 원형의 공간이 차곡차곡 쌓인 높은 집이 탄생했다. 









화이트와 검정, 그리고 회색이 적절히 어우러진 내부는 세련된 분위기를 풍긴다. 욕실의 상부에 둥그런 철재 구조물은 이 건물이 급수탑이던 시절 물탱크의 아랫부분이다. 건축가는 이 부분을 남기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 공간을 물과 관련된 시설인 욕실로 꾸며서 건축물의 역사를 재치있게 남기고자 했다. 이들의 리노베이션 방식은, 문화유산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장소를 박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과감하게 변화를 주는 것으로 건물이 가진 역사적 가치에 질문을 던진다. 


(사진 출처- http://www.zecc.nl)

































육십대에 이르렀을까? 


작은 체구에 둥근 얼굴을 한 여인은 활발하다기 보다는 조금 느릿하게 몸을 움직이는 편이었다. 무심하게 문을 밀고 나선 여인의 눈매가 갑자기 솟아오른다. 입술은 감정을 내보이는 기관이라는 듯, 꽉 다물고 있으면서도 불편한 상황에 맞서 부당함을 외치는 듯했다. 



그 여인이 불쾌하게 바라보는 곳에 내가 있었다. 



나로 인해서 그녀는 불쾌하고 불편했고 부당한 대우를 받은 듯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었다. 여인의 감정은 내게로 전달되었다. 나는 거리를 걷고 있었고 오래된 아파트 앞에 서서 그곳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카메라는 꺼내지도 않았다. 사진을 찍는 것에 대한 불쾌감이 아니었다. 건물 앞을 지나가거나 건물에 관심을 갖는 것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었다. 그 옆 건물로 옮겨갔을 때는 세 남자의 시선을 동시에 받아야했다. 건물 모퉁이 1층의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들로 보였다. 그들은 내가 사진을 찍어도 제지하지는 않았지만 등이 타들어갈 정도로 강력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그들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멀찍이서 건물 전체를 바라볼 때도 세 사람의 시선은 내게 고정되었다. 그들은 그 누구도 건물에 관심 갖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무심하게 거리를 지나가기를, 자신의 집이 마치 앞뒤에 있는 높은 건물의 그림자인 양 그 누구의 시선도 끌지 않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이 집에 사는 모든 사람의 눈빛이 그러할까? 그렇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아파트인 청풍장 그리고 소화장 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청풍장은 1941년에, 소화장은 1944년에 지어졌다. 지어진 연대가 3년의 차가 있을 뿐, 외관이나 내부 평면, 규모가 거의 같다. 두 건물은 멀티플렉스 영화관과 높다란 주차빌딩 사이의 좁은 도로에 나란히 있었다.  '가장 오래된'이라는 수식어는 건물에는 그다지 매력적인 수식어가 되지 못한다. 그것은 '노후되고 퇴락하고 시대에 뒤떨어진'과 같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적절한 보수와 수선을 해왔다면 모를까. 집은 세월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아파트는 건축물 안전진단에서 위험등급을 받았다. 벽돌이 주 구조제로 되어 있고 물을 사용하는 곳은 콘크리트로, 생활공간은 목재로 구조를 세웠는데, 후에 재시공하고 공간을 변용하면서 목재 구조체가 안전성을 확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래 3층 건물인데 어느 사이에 4층이 증축되기도 했고 1,2층은 상업용도로 발코니를 넓히는 등 조금씩 집의 규모가 커져 온 탓이다. 게다가 좁은 골목에 인접하고 앞 뒤로 고층건물군에 둘러싸여 있어 재건축 사업도 큰 잇점을 보기 어려워 여러 차례 추진하다 무산되었다. 문화재 등록은 가당치도 않다. 각 가구별로 알아서 고치고 넓히고 해온 탓에 공동으로 사용하는 부분은 노후가 더욱 심화되었다. 페인트칠을 하고 뒤틀린 곳을 보수하는 일은 과연 언제가 마지막이었을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집이다. 




연구자들은 당시의 건축기술과 현황을 살펴보는 주요자료로 가치를 평가하면서 어떻게든 유지하자고 촉구하지만, 그것이 이 집을 유지하도록 하는데 어떤 식으로 작용할 수 있을까?



  

1930년대, 서울, 부산 할 것 없이 도시화가 가속되던 시기로 거슬러가보자.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주택이 턱없이 부족했고 주택을 공급하는 일이 정부사업에 큰 축을 차지했다. 도시인들이 거주하기에 가장 적합한 형태가 아파트란 사실을 그때도 알아챘던가 보다. 그 전까지는 2층 정도로 일식 목구조의 연립주택이나 상가주택이 지어졌다면, 이때부터는 3층 이상의, 콘크리트 구조의 아파트가 지어지기 시작한다. 서울에 세워진 최초의 아파트로 기록된 미쿠니 상사의 관사(1930)가 이때 지어졌고,  조선영단이 세운 목조형의 혜화 아파트가 1942년이 지어진다. 부산에는 청풍장이 최초의 아파트라는 기록을 갖고 있으며 현존하고 있다. 






청풍장, 소화장이 있는 남포동 거리는 일본인들이 부산 앞바다에 상륙한 후 생겨난 신도시다. 반듯한 도로가 생기고 각종 관공서와 쇼핑가가 들어섰고 용두산에는 신사가, 그 너머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이, 한켠에는 자갈치시장과 부평시장(국제시장)이 생겨나 활기가 넘쳤다. 도로를 가로지르며 전차가 달렸다. 번화한 거리의 중심에 3층으로 지어진 최신식 아파트 '청풍장'과'소화장'이 들어섰다. 20평과 27평 두 가지 평형으로 내부는 복도가 있는 다다미방이었다. 전기설비와 상하수도는 물론, 수세식 화장실이 설치되고 쓰레기를 모으는 장소(더스트 슈트)가 있는 최신구조였다.  



부산으로 몰려든 인구를 적절히 수용하기 위해 해안가 매립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청풍장, 소화장이 있던 남항 부근도 한때는 해안가였다가 매립하여 주택지로 변모햇다. 매립은 동양척식주식회사 주도로 이루어졌는데, 동척은 자회사인 조선도시경영회사를 세워 주거지 개발과 주택건설업을 병행했다. 청풍장과 소화장은 바로 조선도시경영회사가 세운 아파트다. 



광복 전에는 조선도시경영회사와 일본인의 소유였던 이 아파트는 적산으로 분류되어 한국인에게 불하되었고 전쟁 때 피란민을 수용하면서 4층을 증축하고 내부 구조도 여러 가구를 수용할 수 있도록 변화되었다. 그 후로 대지 소유주와 건물 소유자가 나뉘었는데, 등기가 된 집도 있고 누락된 집도 있으며 증축된 부분은 여전히 미등기상태다. 소유자가 실제 거주하기도 하고, 임대로 사는 사람도 있으며 도대체 어떤 인물이 살고 있는지 파악되지 않는 가구도 있다. 다다미가 여전히 깔린 방도 있고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변용이 이루어진 집도 있다. 그들 모두가 남루한 삶을 사는 빈곤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는 오산이다. 국제 시장을 배후로 쏠쏠한 재미를 보는 사람들도 있고 하루하루 만족하는 자영업자들도 있다. 



벌써 70년을 오가는 건물. 이 아파트의 복잡한 상황이야말로 파고들수록 실타래가 엉켜있는 우리 사회를 종횡으로 압축해놓은 듯하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미문화원으로 잘 알려진 동척 부산지점은 1929년 9월에 세워졌다. 광복 후 미군이 주둔하면서 미문화원으로 사용되었고 한국전쟁기에는 미 대사관으로도 사용되었다. 1999년에 반환되어 2003년 부산 근대역사관으로 개원했다. 부산의 개항기를 보여주는 다양한 자료는 꽤 보는 재미가 있다. 3층에서 열리는 특별전도 빼놓지 말것. 전시관람은 무료다. 또, 1층 도서관도 늘 열려있다. 근대역사관과 연계되어 도서관이 있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이곳이 보물같다. 근현대 자료들만 모아둔 전문도서관이 생길 때도 된 것 같은데 소식이 없다. 활용법을 찾지 못해 닫혀있는 근대문화유산을 전문도서관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추진해보면 좋겠다.  




폴 비릴리오의 책 <bunker archeology 벙커 고고학>은 의미심장한 책이다. 프랑스 건축철학자인 비릴리오는 어린시절 노르망디 해안가에서 나치의 콘크리트 벙커를 보았다. 망망한 바다를 향한 벙커들은 공간과 시간, 역사와 기억, 그리고 미래에 대한 징후를 보여주었다. 그는 고고학자의 시선으로 벙커를 바라보고, 마침내 새로운 건축이론을 이룩해냈다. 이 벙커를 찍은 수많은 아름다운 사진들을 퐁피두 센터에 전시하기도 했다.


그의 이야기에 앞서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책에 수록된 벙커 사진들이었다. 이 벙커들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현장을 증언하는, 적국 나치의 전쟁수행물로서 끊임없이 메시지를 생산하고 있다. 아마도 세상에 또다른 거대한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그 자리에 남아 숱한 이야기를 뿌리게 되리라.




벙커, 공장, 창고와 같은 건축물은 그 나름의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다. 인간의 스케일, 인간의 감각을 넘어선 극단적인 공간들에서, 우리는 압도적인 감흥을 받고는 한다. 단순하고 거대한 공간, 장식없는 무뚝뚝한 기능적인 공간이 아기자기한 집이나 화려한 저택이나 고풍스러운 성들만큼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부스러진 모서리나 곰팡이가 흔적을 남긴 동그란 무늬뿐만 아니라, 그저, 창이 없거나 턱없이 작은 낯선 구조물 속에 물리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특수한 감각들. 이런 공간에서 인간이라면 마치 환각에 빠진 듯 하나의 생각밖에는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공간을 설계한 사람은 목표를 수행하기 위해 건축의 구조와 언어를 짜맞추었을 것이며, 이런 공간이 탄생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인 이유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문화유산 중에서도 산업유산이나 전쟁 유산, 혹은 군사 유산 등으로 명명된 장소들을 특수하게 들여다 봐야하는 데는 좀더 역사적이며 사회적인 맥락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 맥락을 더듬다 보면, 당대 사람들의 심리, 감정, 생각들에 다가갈 수 있을 거다. 그 지점은 무척 흥미롭다. 


















가덕도 외양포의 일본군 벙커에 대한 연구 논문을 발견하고서, 부산 휴가의 마지막 여정으로 외양포에 들르기로 했다. 외양포는 1904년 러일전쟁을 위해 일본군의 진지가 구축된 곳이다. 당시에 지어진 것들로는 사령관 관사, 장교관사, 막사, 위병소, 창고 등인데, 남아있는 것만 해도 32개동에 이른다고 한다. 포대 진지 역시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남아있으며, 그외 시설은 주민들이 주거로 사용하고 있다.



가덕도는 분명 섬이다. 최근 들어 부산 신항과 다리로 연결되어 있어 굳이 배를 탈 필요가 없다는 점이나 부산과 거제도를 연결하는 거가대교의 연결지점,즉, 고속도로가 바다 밑 해저터널을 향해 돌진하는 지점에 있어 섬의 초입에 꽤나 유입인구가 생겨났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조용한 어촌 마을이다. 근처 바다로 낚시하러 나가는 꾼들이나 물놀이하러 온 사람들에게는, 주민의 수도 많지 않고 푸른 숲이 우거진 이 섬이 꽤나 즐거운 놀이터처럼 보이리라. 다만, 지금도 꽤 폭이 넓은 도로들로 섬을 가로지르는 공사가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 이것이 조금 의아스러울 법도 하다. 관광객으로 몸살을 앓거나 주민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지도 않은 조용한 마을에 이토록 도로 공사를 많이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방 토건족들의 나랏돈 먹기 사업은 아닐까.






가덕도가 이토록 조용한 이유는 이곳이 여전히 군사시설 보호지역이 넓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외양포는 증개축이 불가한 국유지로 오랫동안 묶여있었고, 외양포 남단에는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군사제한지역이 이어진다.


제한 지역은 남쪽 바다를 삼면에 바라보는 섬의 하단부 지역인데, 그곳에 1910년에 지어진 가덕도 등대가 있다. 2009년 여름, 취재를 위해 가덕도 등대를 방문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날도 오늘처럼 맑았고 촉촉한 물기를 머금은 풀들이 바닷바람을 맞으며 넓게 펼쳐져 있었다. 바다를 향해 불쑥 내민 평평한 땅은 바다를 감시하기에 적당한 위치였다. 섬의 끄트머리에 서니, 1905년 러일전쟁 시기, 러시아의 북항함대와 일본해군이 격전을 치렀던 그 바다의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 해전은 결과적으로 러일전쟁의 승세를 일본으로 기울게 했다. 이 해전에 대비하게 위해 일본 해군은 가덕도에 진지를 구축했다. 



가덕도 앞바다는 역사 속에서 언제나 중요한 군사지역이었다. 

부산과 진해를 방어하는 요충지로서. 

그것은 지금도 유효하다.






 



대항포를 지나 외양포로 가는 지역을 내려다보면천혜의 요새라는 말을 실감할 정도다. 대항포를 지나 높다란 언덕을 올라간 후 바다쪽으로 휘어지고 내륙으로 움푹들어간 도로를 따라 가면 완만한 호를 그리고 있는 외양포가 멀찍이서 보인다. 바다로 시선을 던지면 동남해안권의 섬들이 서로 마주보며 겹을 이루고, 또 트여진 틈으로 먼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마을 쪽은 또 어떤가? 올망졸망 나즈막한 집들이 드문드문 자리잡은 그곳은, 외지인에게는 그저 한촌의 유유자적한 모습 그대로였다. 오래묵은 집들을 낡은 옷을 수선하듯 그렇게 조금씩 수선하고 수리하면서 살아온 그런 모습들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일본식 기와가 얹혀진 지붕, 비늘판벽으로 마감한 외부, 창문의 구조 등으로 가옥의 본래 형태를 더듬을 수 있다. 


태양도 열기를 삼킬 수 없어 뱉어내고만 있던 그 한낮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집 안에 있는 듯 고요했다. 올망졸망 매달린 살림살이들이 아니었다면 인적은 전혀 감지할 수 없고, 풀벌레와 까마귀들만이 울어 재끼는 이 마을에 쉽게 다가갈 수 없었을 것이다. 









가덕도 외양포의 일본군 포대 진지.  



외양포 마을 배치도 

(자료 출처-<가덕도 외양포의 일본군사시설에 관한 연구>, 이지영, 서치상, 건축역사연구 제 19권 3호 통권 70호 2010년 6월)









<가덕도 외양포의 일본군사시설에 관한 연구(이지영, 서치상 저, 건축역사연구 제 19권 3호 통권 70호)>는 기밀 해제된 육군성대일기류의 <밀대일기> 등의 사료를 통해 확인된 사실들을 바탕으로 외양포 일대를 좀더 조밀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때는 1904년 8월 3일로, 우리가 갔던 날처럼 무더운 여름이었다. 일본군 제3임시 축성단 소속의 공병 소좌 마쓰이 쿠라노스케가 책임자로 외양포에 나타났다. 그는 전쟁 수행에 적합 여부를 판단하여 외양포 일대에 군사 기지를 구축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해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조선 정부를 압박하여 진해 일대를 군사지역으로 확보했고, 외양포는 임시군사기지로 선택했다. 마쓰이 소좌를 필두로 다양한 조사를 벌인 후 주민의 가옥 64채를 매수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주민들이 제대로 보상금을 받지 못하고 터전을 잃어버렸음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일제는 그 자리에 280mm 유탄포 포대와 탄약고, 군사령부 사무실과 관사와 막사, 창고, 위병소, 우물 등을 세웠다. 반듯한 교통로가 닦이고 통신망이 깔렸으며, 정기적으로 시험사격이 행해졌다. 








포대 진지의 북측 탄약고. 두 개의 탄약고가 있고 오른쪽은 와플형 콘크리트 구조물을 이어붙였다. 방음과 엄폐용이다.  








포대 진지는 대략의 위치를 알고 있음에도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대나무 숲과 덤불이 뒤덮어 언덕배기 정도로만 보였다. 평평한 길과 그 앞에 세워진 비석을 보고서 그 안쪽으로 들어가자 눈앞에 진지가 펼쳐졌다. 단단한 콘크리트 벽에 얼룩덜룩한 색이 퇴색되고 바래졌지만 분명히 남아있는 그곳은 벙커였다. 



연구 보고서에는 포대 진지에 구축된 구조물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북측에 두 개의 탄약고와 옹벽이 있고, 맞은 편에 출입구가 있는 두 개의 구조물이 있는데, 포측탄고(대피소)라고 했다. 그 사이의 평평한 공간에 280밀리 유탄포를 장착하는 포창이 각각 2개씩 모두 6개가 있었다. 포창의 흔적은 풀로 뒤덮여 거의 남아있지 않다. 두꺼운 콘크리트 구조물은 대나무를 심어 내부를 엄폐했고, 와플형 콘크리트 구조물을 연결하여 벽을 친 것은 방음과 안전을 위해서라고 한다. 유탄포의 형태를 찾아보니 위의 사진과 같은 이미지를 찾을 수 있었다.


벙커의 규모는 폭 18미터, 길이 78미터이며 적의 공격에 포를 보호하기 위해 콘크리트 천장은 수십cm로 만들어야 한다는 규정으로 무척이나 단단하게 지어진 외양포 벙커. 후에 외양포에 주둔했던 사령부가 진해와 마산으로 옮겨간 후에도 일제 패망까지 수차례 증개축하고 보수했다. 그러나, 외양포의 포대진지는 정작 실전에 사용된 적은 없고, 포대 시험 사격 등의 일들이 있었다는 기록만이 남아있다.   



그런데 의문이 생겼다. 알록달록한 페인트는 언제 칠해진 것이며, 불탄 흔적들은 어떤 의미일까?  군사지역으로 설정되면서 우리 군도 이 장소를 이용했을까? 그리고 이곳에 있던 280밀리 유탄포는 어떻게 되었을까? 태평양 전쟁에 이르러 훨씬 강력한 화기들이 등장하면서 퇴물이 되어버린 수많은 무기들의 운명은? 



폴 비릴리오가 보았던 노르망디 해안의 나치 벙커뿐만 아니라, 우리 땅의 해안 요지에도 여전히 수많은 벙커들이 남아있지 않을까? 











부분적으로 불탄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으나, 이것이 전쟁 수행 때문에 생겨난 것인지 후대에 만든 것인지 알 수 없다. 

벽에 칠해진 페인트도 언제 형성된 것인지 궁금증이 남는다. 




포측탄고(대피소)의 입구. 내부에는 창이 없는 넓은 공간이 있다. 포측탄고는 2개가 있으며, 내부에서 이어지지 않는다.  

나무와 풀이 마구잡이로 자라나 외부에서 보면 완만한 둔덕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





맞은 편 탄약고는 내부 깊은 곳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똑같이 상부에 불탄 흔적이 있는데,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 




포측탄고의 벽에 그려진 그림들. 어떤 의미가 있을까?












(좌)1909년에 지어진 위병소. 헌병대가 사용했다. 좌측의 하늘색 부분은 최근에 증축된 것.

(우)포대 사령부의 사무실 건물. 일본식 기와를 얹고 골함석으로 마감했다.




비늘판벽와 일본식 기와를 확인할 수 있는 집들. 사무실, 관사, 막사 등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규모가 큰 막사나 관사는 이렇듯 여러 세대가 나눠서 쓰고 있다. 

집집마다 사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제각각 다르게 변모한 외관이 흥미롭다.

 






















벽화마을 이후 5년,  

주 수암골은 어떻게 달라졌나?





우후죽순. 비온 후 대나무가 자라나듯, 그렇게 쉽게도 마을에 벽화가 그려진다. 


지역을 막론하고, 마을을 가꾸고 마을을 만들고 마을을 재창조하는 모든 일이 벽화로 시작된다

서울 이화동마을, 통영 동피랑, 부산 감천마을은 벽화마을의 교과서같은 곳이 되었다. 

부산만 해도 여러곳에, 대구, 태백, 군포, 수원, 천안 등 전국의 신상 벽화마을은, 연이어 매스컴에 등장하고 블로거가 인터넷에 소개하면서 새로운 관광지로 떠오른다. 


몇 군데가 조명을 받으니 비슷비슷한 벽화마을이 등장한다. 주거정비지역이나 외딴 농촌마을에 활력을 줄 목적으로 공공미술의 하나로 시작된 마을 벽화 프로젝트가 맥락없이 사용되고 눈요기 사업으로 전락한다. 

제발 벽화를 그리지 말아달라고 주민들은 말한다. 낙후된 마을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질문해볼까?  사람들은 왜 벽화마을을 찾아갈까? 

과연 그림 때문일까? 




내가 찾은 해답은, 골목이다. 


벽화마을에는 벽화가 아니라 골목이 있기 때문에 가는 거다. 




대단지 아파트가 세워진 지가 높은 지역이나 반듯반듯한 신도시 주거타운의 대로에서 절대 찾아볼 수 없는, 경사를 따라 꼬불거리고 올록볼록한 그 골목을 걸으러 가는 거다. 골목은, 차 한대가 겨우 지나갈까 말까한 폭의, 집과 집 사이에 난 길이다. 


골목은 점점 좁아져서 대문으로 인도하거나, 집과 집 사이의 틈을 작은 호흡으로 메워준다. 골목은 좁은 집과 마당의 확장이기도 하다. 내 유년의 골목도 그러했다. 골목 한켠에 돗자리를 펴거나 의자나 평상을 놓아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이야기를 나눈다. 날 좋을 때는 빨갛게 고추를 말리고 나물을 말리던 골목의 풍경들.



골목은 담이 튀어나오거나 집이 앉혀진 모양에 따라 꼬불거리기 마련이다. 그런 골목을 거닐면 집들이 살아있는 것 같다. 모두 똑같은 집이 아니라, 모두 다른 집으로서. 집집마다 삶의 모습이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해도, 지붕색이 다르고, 창문 모양이 다르듯이 성격이 다르고 개성이 다른, 그런 삶들이 아른거린다. 



우리 도시에서 가장 많이 사라져버린 것이 골목이리라. 골목은 허물어지고 합쳐져 넓고 쭉 빠진 도로로 바뀌었다. 오래된 집들은 되살릴 수 있으나 한번 바뀌어버린 길은 되살리기 어렵다. 

 

 

 


 

사실, 그림 따윈 없어도 좋았다. 골목만 살아있다면.

 

 

그렇다면, 벽화는, 공공미술은, 이런 마을에 어떤 역할을 해야할까?

 

 

 

 

















봄이 더디 오던 3월 무렵, 잡지의 의뢰로 청주 수암골을 돌아보았다. 


수암골은, 빵을 만드는 소년이 등장했던 드라마를 촬영한 마을로 잘 알려져있지만,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청주에 있는 화가 부부로부터 수암골이라는 마을에 벽화를 그렸다는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벽화 프로젝트를 진행한지 5년이 흐른 후, 마을은 어떻게 변화했는 지가 궁금했고, 또 한편, 수암골은 어떤 역사와 이야기를 가진 마을이었나,가 더 궁금해졌다.  


또한, 지인이 귀뜸해준 이야기-2008년에 진행된 벽화 프로젝트의 총괄 기획자가 지금까지도 여전히 마을일에 관여하고 있다는-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문화 기획자 이광진 씨의 전화번호를 들고, 청주 수암골로 갔다. 




수암골은 우암산 기슭에 전쟁피란민들이 모여살던 달동네에서 시작되었다. 재건시대, 청주를 먹여살린 강인한 노동력을 제공해온 수암골 주민들은 자식들을 모두 번듯하게 키워 도시로 내보내고 이제 나이든 부모들가 되어 자신들만큼이나 오래된 마을에서 살아가고 있다. 


신기하게도 이 마을은 도시 안에 편입되어 있으나, 전통마을의 풍습을 간직하고 있다. 김장철이면 집 앞마다 배추가 쌓이고, 장 담그는 날이면 축제라도 열린 듯 마을이 떠들썩하다. 정월대보름이면 돼지를 잡고 풍물을 울리며 지신밟기 행사를 벌인다.

 

 


서서히 재개발의 바람이 불어오자 청주의 역사를 한켠을 증언하는 이 마을은 풍전등화, 속수무책이었다. 이광진씨는 이 마을의 색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마을의 역사를 일깨우는 공공예술 프로젝트로 벽화와 사진전을 추진했다. 벽화 프로젝트에는 30여 명의 지역 예술가들이 참여하여 마을 주민들과 대화하면서 이루어졌다. 주민들의 바람, 주민들의 꿈, 주민들의 이름, 주민들의 현재 모습이 벽에 그려졌다. 




벽화 프로젝트는 그림만 그린다고 모든 게 완성되는 것이 아니었다.

 

 

사후 관리가 더욱 중요했고, 벽화를 통해 마을이 좀더 혜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연결해야 했다. 특히, 수암골은 오래된 집들이며 빈 집이 많아 툭하면 담이 허물어진다. 그림이 찟겨 나가는 셈이다. 


매년 새롭게 정비하는 일이 만만치 않지만, 어린이들의 체험학습 장소로도 이용되고 벽화 그려보기 등의 활동으로 마을에 활력이 생기기도 했다. 수암골 사람들은 담을 개인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 듯했다. 마을 공동의 캔버스로 내놓은 것이다. 처음에는 예술가들의 공공 미술 프로젝트였지만, 점차 시민들이 참여하는 형태가 되었다.


 

후에, 주민들은 원치 않았으나 드라마 촬영이 이루어졌고 관광객이 끊임없이 모여들었다.

 

 

그동안 흐지부지하던 재개발 사업도 재개되어 마을 절반이 허물어졌다. 벽화도 사라지고 사람들도 이사를 나갔다. 수암골 주변으로 카페도 생기고 게스트하우스 공사도 허가가 떨어졌다. 청주 시내의 전통적으로 유명한 국수집과 빵집이 들어와 관광객의 휴식처가 되었다. 관광객은 많아졌지만 수암골 주민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 과정을 지켜보던 기획자는 뜻있는 주민들과 마을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일을 도모하기로 마음 먹었다. 

 

 

마을 공동체 협의체인 '마실'을 운영하면서 수암골의 변화를 함께 모색하는 것이다. 마을 아주머니들은 식당 겸 주막인 '밥상'을 열었고 주민들이 손수 만든 기념품들도 판매한다. 기념품은 벽화에 등장하는 아이들을 캐릭터로 활용했다. 안내지도를 자발적으로 나눠주고, 텃밭을 일구며, 빈 가내수공업 공장은 도서관으로 바꾸어 나가는 일 등이 수암골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마을에 벽화가 그려진 후,

수암골은 두 가지 변화가 공존한다.

 

 



첫째,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고층 건물과 카페, 레스토랑이 생겨나고 차랑이 다닐 수 있도록 도로가 넓어지는 등 마을 구조에 변화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


둘째, 마을의 규모가 툭 하고 절반으로 잘려지고 말았으나, 벽화로 인해 용기를 얻은 주민들이 공동체를 온전히 유지하고자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떠나는 사람이 많아지면 새로 찾아드는 사람도 생겨나는 법이다. 빈 집에는 새로운 장소를 찾아온 예술가들이 둥지를 튼다. 이 동네가 좋아서 왔다는 젊은 공예인들의 공방이 오래된 집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조금씩 수암골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나도 그 편에 살짝 줄서보았다. 




나는 그날의 기록에 '다정한 골목'이라는 말을 썼다. 나를 바깥으로 내몰지 않고 감싸주는 담과 골목을 느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연세드신 주민분들이 관람객을 따뜻하게 맞아준다는 느낌이 강했다. 아마도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다정한 듯하다. 골목은 사람들이 사는 집들로 이루어지고 그들의 발걸음과 그들의 웃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예술이 촉발시킨 마을의 변화는, 그 외형에 있지 않다. 사람들의 삶에 깃들인 공동체 정신과 링크되는 데서, 공공예술이 가치를 가진다. 나는 수많은 벽화마을 프로젝트에 그것을 질문하고 싶다. 벽화가, 그들의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청주 수암골



원래 동네 이름은 수동이며, 주민들은 15통 사람들이라 불렀단다. 그런데, 도로명으로 지번이 바뀌면서 골목 이름을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주민들은 골목에, 수동의 '수'자와 우암산의 '암'자를 따서 수암골목이라 이름을 붙였다. 수암골이라는 이름은 주민들이 스스로 만든 골목에서 파생된, 이 마을의 별칭이다. 보통은 마을이름에서 골목 이름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 마을 이름은 또 나름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므로 수암골은 골목이 주인인 마을이다.




수암골 주민들이 가장 원했던 것은 문패였다. 부부의 이름을 모두 쓴 문패들이 많았다. 




정교한 지도는 아니지만 골목의 주요 벽화들을 표시한 지도도 그려져있다. 

수암골에서 담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마을 공동의 캔버스다.




오래된 마을일수록 담이 쉽게 무너지고 부스러진다. 그래서, 벽화 사후관리가 더 중요해진다. 

매년 덧칠하고 더 그려야 흉물이 되지 않는다. 뉴스보도로는 벽화 사후관리로 프로젝트의 3%의 비용을 떼어놓아야 

한다고 하던데, 3%로 과연 사후관리가 될까? 이 빠진 아이 벽화는 원래 아이가 1명이었는데, 

담이 허물어져 한 아이를 더 그려야 했었다고 이광진씨가 전했다, 누군가 와서 몰래 그려놓기도 한다고. 

또, 자발적 참여자들이 자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한다.




국수와 막걸리를 먹을 수 있는 식당 겸 주막 '밥상'은 주민들이 공동으로 운영한다. 

마실이라 새겨진 몇 가지 기념품도 만들어판다. 







































장소에 대한 기억은 언제부터일까? 


어렸을 적의 기억이 조각조각 단편으로만 남아있을 뿐이지만, 그래도 몇몇의 장소를 꽤나 의미심장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장소들은 어디일까? 답을 찾기는 어렵다. 부모님이나 친적들에게 들어보면 나와 관련된 일들은 주로 시장에서 이루어진 것 같다. 특히 엄마의 반복된 증언으로는, 시장에서 나는 자주 사라졌다는 것이다.


젊디젊은 엄마는 젖먹이 아들을 등에 업고, 말도 하고 걷기도 하는 나이의 딸(나)을 손으로 이끌며 시장을 나가곤 했다. 한참 시장 아줌마들과 흥정하고 돌아서면 뒤에 있어야 할 어린 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 이름을 외쳐부르며 골목을 다니다, 포기하고 파출소에 가면 그 딸이 거기서 울고 있단다. 한 손에는 오뎅 꼬치를 들고서.



"그게 어느 시장이야?" 

마흔이 된 딸이 물어본다.


"서부시장. 대구에서 큰 시장이라. 

아를 못찾아서 서비산 로타리에 있는 파출소에 신고하러 갔는데, 

문 밖에서도 바가지 깨지는 울음소리가 들리더마."

엄마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다. 



대구 서부시장은 1971년에 문을 열었고, '한 때' 서문시장, 칠성시장과 함께 대구 3대 시장으로 꼽혔단다. 어쩌면 나는 서부시장에서 길을 잃고서 엉뚱한 방향으로 살아갔을 수도 있었던 것인가? 그 시절에는 시장에서 엄마는 아이를, 아이는 엄마를 자주 잃고서 길바닥에서 울고는 했다. 하지만, 조금 기다리면 엄마가 아이를 찾아냈고, 노점에서 콩국물이나 오뎅 등을 먹으며 잠시 동안이지만 버려졌다는 서러움을 꿀껏 삼키곤 했다. 


그러므로 오뎅은 서러움 덩어리였다. 콩국물은 채 마르지 않아 눈썹에 맺힌 눈물과 함께 삼키는 짭쪼름한 그런 것이었다. 종이인형과 장난감, 먹음직한 과자와 눈깔 사탕. 그런 것들을 보고서도 갖지 못해 울고, 울다보면 또 서러워져 계속 울던 아이들. 시장은 서러움의 장소이고, 매번 좌절하면서도 엄마가 시장에 갈 때면 또다시 따라나서는 욕망의 장소였다. 나는 시장 가는 걸 좋아했다. 지금도 시장이라고 하면 반사적으로 심장이 쿵쿵거린다. 




시장하면, 부산에 살때의 기억이 더욱 생생하다. 나는 엄마를 따라서 오시게 시장이나 온천시장, 부전시장, 동래시장을 자주 갔다. 크고 유명한 시장이었다. 오시게 시장은 오일장이었다. 장이 서는 날이면 물건 파는 사람과 물건 사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아홉살 쯤 우리집에 오게 된 강아지 '복실이'도 오시게 시장 출신이었다. 검은 비닐 봉투에 고구마처럼 담겨온 조그만 강아지를 품에 안던 날, 그 뭉클했던 감정이 지금도 기억 어딘가에 있다. 복실이는 4년 후 바깥에서 놀다가 다른 집에서 풀어놓은 쥐약을 먹고 죽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그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러고서는 오시게 시장도 자주 가지 않게 되었다. 인터넷 뉴스를 찾아보니 그때도 2일, 7일 열렸던 오시게 시장이 지금도 그 날짜 그대로 열린다고 한다. 태광산업 앞 장전동에서 열렸던 그 시장은 지금은 노포동 쪽으로 장소를 옮겼지만 변함없이 전통장이 열린단다. 



시장의 운명은 그런 것인가 보다

다니던 시장이 없어지면 그렇게 안타깝고 불편한 것. 

설렘을 주는 장소를 하나 잃어버린 아쉬움.





박경리 선생의 소설 <시장과 전장>에는 해방공간의 개성 부근 연안이라 불리는 마을에서 교편을 잡은 지영이 시장을 헤매는 장면이 나온다. 전쟁이 터지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삼팔선 부근 마을에서 지영은 무엇을 찾으려했을까? 남편과 두 아이, 모두 서울에 두고서 혼자 가족의 굴레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가족이 아니라면 어디라도 좋다는 심정으로 멀고 위험한 곳으로 온 것이다. 지영을 위로해주는 장소는 시장이었다.  



시장은 축제같이 찬란한 빛이 출렁이고 시끄러운 소리가 기쁜 음악이 되어 가슴을 설레게 하는 곳이다. 동화의 나라로 데리고 가는 페르시아의 시장-그곳이 아니라도 어느 나라, 어느 곳, 어느 때, 시장이면 그런 음악은 다 있다. 그 즐거운 리듬과 감미로운 멜로디가. 그곳에서는 모두 웃는다. 더러는 싸움이 벌어지지만 장을 거두어버리면 붉은 불빛이 내려앉는 목로점에서 화해 술을 마시느라고 떠들썩, 술상을 두들기며 흥겨워하고. 대천지 원수가 되어 무슨 이로움이 있겠는가. 오다가다 만난 정이 도리어 두터워지는 뜨내기 장사치들. 

물감 장수 옆에 책을 펴놓고 창호지에 담배를 마는 사주쟁이 노인도 서편에 해가 남아있는 동안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온갖 인생, 넘쳐 흐르는, 변함없는 생화이 이곳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이다. 

지영은 이곳이 좋고, 혼자 거니는 외로움이 좋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좋았다. 시장의 음악과 시장의 얼굴들은 어린 날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향한 곳도 없는 그림움과 어린 날의 아품이 바람처럼 지영의 가슴을 친다. 

....(중략).....


지영이 처음 연안에 왔을 때도 이 시장 길을 지나갔다. 낯선 도시, 낯선 거리, 그리고 낯선 사람들, 이 시장 길을 지나갈 때 지영은 안심하고 기쁨을 느꼈다. 


  

                        ------<시장과 전장> 박경리, 나남출판, 2008(초판발행 1964년)

































목척시장은 대전에 있다. 일제강점기 주택을 개조한 카페를 찾으러 갔다가 우연히 듣게 된 이름이 목척시장이었다. 목척교 주변이라 시장 이름도 목척시장이다. 


목척시장은 이미 사라진 시장이다. 


재래시장이 퇴락하게 된 것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시장이 사라지고 오래된 집터만 남은 것은 아마도 재개발 때문이리라. 퇴락한 도시 특유의 오래된 냄새가 풍긴다. 닦아지지 않은 세월의 먼지도 느껴진다. 좁은 골목 사이로 촘촘하게 마주보고 있는 문과 창, 다양한 형태의 상점들이 여전히 시장의 모습을 짐작하게 했다. 그 시절, 이곳은 얼마나 시끌벅적 요란스러웠을까? 아웅다웅 흥정하면서도 손에 한가득 채소와 생선을 들고 나오며 뜨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향하지 않았을까?




타박타박 걸으며 사라진 시장 속으로 들어간다. 

한낮의 태양은 쨍했지만 짙은 그림자가 골목에 드리웠다.  
























목척시장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옛 동아일보에 이런 기사가 있다. 



대전 본정 2정목에 원대전시장이 잇는 일면에 춘일정 2정목과 3정목 주민들이 출일정파출소 후면에 약 사백평가량의 공지에 미곡과 신탄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매매하게 된 목척시장이 일정한 시일도 없이 매일개시되어잇어서 부근 주민의 편이를 도하던바 지난이십삼일부터 대전서에서 시장규측 위반이라하야 이를 해산케하고 취체를 철저이하게 되엇다 이 토지는 김갑순 씨 소유로 장차 공설시장을 만들복안으로 무등서장당시에 무료제공하기로 하고 그와같이 비공식시장을 개시하게 된 것인모양인데 그후 신탁회사로 하여금 매월 7원의 지료를 상인들에게 증수하게 된 것이라 한다.(동아일보 1933년 11월 26일자)


그 후 시장 설치에 대한 건의각 쇄도하게 된다.


1936년 봄, 지역 구역장들과 기성회 간부들이 주축이 되어 목척교 부근에 목척시장을 설치하자는 건의를 대전부에 제출하게 되었는데,  3월 23일에 1600여명이 서명 날인하여 진정서를 넣게 되었다. 이들은 부청, 상공회의소, 경찰서 등으로부터 원조를 구해서 시장 설치를 적극적으로 주장했다는 것. 당시 본정 2정목에 있던 우시장은 영정으로 옮겨가는 일이 결정되어 있었다. 














대전 원도심의 주요 소매시장으로 성장했던 목척시장은 그 주변을 대규모로 재개발하려는 대형 건설사의 황금빛 미래상에 취해 조용히 바스라졌다. 총 9만4341m²(2만8538평)의 533필지 내에 53층의 호텔 및 오피스텔, 지하 7층 지상 60층의 아파트, 백화점, 영화관 등이 들어선다는 계획이었다. 


요즘 목척시장은 자발적으로 모여든 젊은이들이 중고시장을 여는 장소로 유명하다.  대형건설사의 화려한 투시도가 아니라, 시장을 이용하고 도시를 애정하는 사람들의 작은 활동이 모여서 시장의 재생이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목척시장을 돌아보며 쓸쓸함을 덜 수 있었던 것은, 그것 때문이리라. 


소소하지만 아름다운 손길.










카페 안도르



일본식 목조 주택과 1930년대의 서양식 주택 형태가 섞인 오래된 건물이 카페로 변신했다. 대전부청의 관사촌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다는 이 집의 구체적인 역사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 건물 바로 옆에 있는 건물도 거의 같은 구조의 주택을 입면만 개조하여 복합상가로 만든 것인데, 이 건물과 함께 연구해볼만 하겠다. 바깥의 거대한 향나무가 무척 인상적이다. 향나무를 심는 것은 일본식 전통이라고 들었다. 목척시장에 닷찌 플리마켓이 열리는 날이면, 카페 안도르도 동참하여 즐거운 장터가 된다고 한다.  























현저동, 도시의 폐허



폐허라고 하면 떠오르는 장소가 있습니다. 

몇 달 전 다녀온 현저동이라는 동네입니다. 




얼마전, 박완서 선생의 소설들을 읽다가 현저동이라는 지명을 발견했습니다. <엄마의 말뚝> <그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같은 선생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소설에는 어김없이 현저동이 등장합니다. 선생의 소설에는 장소가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현저동에서 살았을 때, 돈암동에서 살았을 때, 그리고 명동으로 일하러 다닐때의 풍경은, 그 삶의 연결성에 비해 그 모습이 확연히 달랐나 봅니다. 


선생은 각각의 장소마다 각기 다른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개성 근처의 시골마을에서 살가운 어린시절을 보내다가 처음 서울로 와서 머물게 된 현저동은 어린 소녀의 눈에도 쉽게 이해되지 않았던가 봅니다. 산등성이를 따라 촘촘하게 들어선 집들은 어수룩했고 악다구니를 하면서 부대끼며 살아가야하는 달동네마을이었지요. 선생은 현저동을 '좁다란 초가가 켜켜이 들어선, 도시빈민층이 살던 달동네'라 표현했습니다. 


선생의 가족은 처음 몸을 뉘었던 좁은 집에서 벗어나 좀더 언덕 위에 있던 6칸짜리 기와집으로 옮겨갑니다. 집과 집 사이 남은 자투리땅에 세워 축대가 높고 마당이 삼각형으로 나있던 집을 천오백원에 사서 왔지요. 축대 아래 집 지붕쪽으로 마당을 내어 꽃을 심고 정원을 가꾸며 괴불마당집이라 불렀지요. 남루하고 소란한 와중에도 그 시절의 기억이 무척 아름다운지 선생은 괴불마당집의 기억을 아름답게 회상하고 있습니다. 



어린 박완서가 처음으로 외었던 집주소, 현저동 46-418번지. 



나는 그곳이 어딘지 궁금했습니다. 현저동을 찾아보니 서대문형무소 공원을 넘어 서울과학고등학교 주변으로 나왔습니다. 대부분의 주소명이 '산 00 번지로 되어있는 이곳. 하지만, 좀더 찾아보니 당시의 현저동과 지금의 현저동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지금의 현저동 맞은편 무악동도 현저동의 일원이었다가 행정개편되면서 현저동과 무악동으로 나뉘었습니다. 


선생의 주소지는 지금은 없는 번지입니다. 세월이 얼마나 흘렀습니까? 그대로 남아있다는 게 이상하지요. 지도 검색을 해보면 이 두 지역 모두 재개발예정지라 표시되어있었습니다. 이미 여러곳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듯 좁은 사각형 모양의 집들이 드문드문 들어서있습니다. 


현저동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서대문 전철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무악동 방향으로 갑니다. 아직 무악동에 이르려면 거리가 남았는데 이미 많은 폐허들이 보입니다. 돈의문 주변 재개발 예정지였습니다. 빈 집, 빈 거리는 도시의 벙커처럼 침묵 속에 존재합니다. 독립문을 지나서 언덕으로 꺾어 올라갑니다. 몹시도 경사가 진 도로를 자동차가 잘도 올라갑니다. 이제 내려서 걸어보기로 합니다. 


재개발 예정지여서 많이 파헤쳐진 것은 아닐가 했는데, 무악동은 아직 재개발의 여파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경사를 따라 켜켜이 들어선 집들에서 알콩달콩한 삶들이 보입니다. 이 언덕길 너머로 등산로가 이어져있나 봅니다. 얼마가지 않아 마치, 몽마르트르 언덕길 같은 계단 앞에서 '한양 도성가는 길'이라는 푯말을 발견했습니다. 무악동 인근 산책로를 표시한 표지판도 나옵니다. 종로구에서 만든 동네 골목길 관광지도 무악동 코스가 바로 이길과 이어지나 봅니다. (참고로 동네 골목길 관광코스는 알찬 정보가 담겨있으니 답사여행을 하시려는 분들은 꼭 참고하세요.)













올망졸망하게 연결된 경사로의 집들이나 소소한 동네 풍경에 마음이 푸근해집니다. 경사를 거의 내려왔다 싶었는데, 골목길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집니다. 오래된 한옥이 늘어선 거리가 있었습니다. 한옥들은 살림집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식당으로 쓰기도 하는데, 좁은 골목길로 연결되어 운치가 있습니다. 도시형 개량한옥입니다. 192-40년대에 많이 지어졌지요. 
























골목을 따라 걸어갈수록 미로를 거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지역은 모텔, 여인숙이 즐비합니다. 과거에도 이 지역은 음식점과 유흥업소 유곽이 있었겠지요. 무악동 일대에는 노후된 주택지들이 다수 보였습니다. 그때그때 맞춰서 길을 낸듯, 계단으로 연결된 좁은 골목길도 있었고, 그 좁은 길을 따라 집들이 촘촘합니다. 오래된 집과 그나마 최근에 지어진 집들이 서로 어깨를 맞추고 있기도 합니다.























무악동을 한바퀴 돌고 현저동으로 향합니다. 서대문역사공원 뒤쪽으로 동네가 보입니다. 대로를 건너가기 위해 신호등을 기다리는 동안 맞은편을 보니 인왕산이 멋진 자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왕산을 마주보는 동네군요. 현저동은. 




동네로 점점 가까이갈수록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꽃분홍 잎사귀도 보이고 초록빛으로 너울거리지만 왠지 회색빛 집들이 생동감을 잃은 듯 보였습니다. 현저동은 이미 재개발이 시작된 듯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개발이 멈추어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있었습니다. 낡고 퇴색한 빈 집들이 입을 벌리고 나자빠진 모양새였습니다. 사람이 살았다면 이렇게 흉물이 되지는 않았겠지요. 

저 오래된 집들에서 얼마나 많은 달콤한 삶들이 있었을까요. 그들이 남기고 간 살림살이의 흔적이 왠지 가슴에 남습니다. 미쳐 가지가지 못한 것들, 기탄없이 털어버리고 간 오래된 것들이 뒤섞여 잉잉거리는 것 같습니다.


큰 골목 가의 몇몇 집들은 사람들이 여전히 살고 있습니다. 골목에는 조합과 재개발업체 사이의 첨예한 갈등을 담은 메시지들이 바람따라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동네 아주머니 몇 분이 길을 걷고 있었지만 고요하기 짝이 없는 동네는 이미 삶을 잃어버린 듯했습니다. 현저동의 풍경이었습니다. 































박완서 선생은 책에서 전쟁을 맞은 서울의 풍경을 서술하면서 폐허의 곳곳을 묘사했습니다. 하지만 폐허는 그날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우리 도시 곳곳에 이런 폐허가 엄연히 존재합니다. 전쟁 때는 공습으로 살던 집을 잃고, 지금은 대기업의 포크래인 아래서 살던 집을 잃고. 삶의 터전이 적층되지 않고 계속 부서지고 무너지는 상황을 볼 때마다 우리는 폐허를 힘겹게 디디고 살아가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 폐허 속에서도 꽃이 피고 풀이 자라고 초록이 일렁입니다. 희고 작은 꽃들이 회색의 폐허를 덮어줍니다. 

어디서 생겨난 것인지, 꽃과 풀들은 회색의 틈을 메우며 삶을 잃은 집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나도 위로를 받습니다. 괴불마당집에 일렁이는 꽃들도 이랬겠지요. 

녹진한 삶을 위로하며 그렇게 피어났겠지요. 






































                             이제는 익숙한 표지판이죠?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이라고 새겨진 동판. 






연천, 폐허에서 듣는다



언젠가, 한국전쟁 납북자 명부를 보게 되었다. 이름과 나이, 주소, 그리고 행방불명되거나 납북된 장소, 연도가 명시된 자료였다. 납북자 명단은 여러 차례 작성이 되었는데, 1950년 서울 수복 이후, 그리고 해마다 진행되었고, 정전 협정 이후에도 한차례 진행되다가 마무리되었다. 친가 외가가 모두 대구 경북인 나로서는 납북과 관련된 이야기를 자라면서 들은 적이 없다. 간간히 소설이나 자료에서 보았을 때도, 납북이란 공습이나 총살, 전투, 학살 등 전쟁과 관련한 가장 보편적인 단어로만 들렸다. 경험하지 못한 피상적인 단어나 행위로서. 



명부는 손글씨로 담담하게 공식적인 것들만 적혀있었으나, 

나는 그 행간에서 아주 슬픈 뒷모습을 보았다. 



그 누군가는 스무살 대학생이었고, 그 누군가는 학교에 가는 길이었고, 그 누군가는 병원이나 일터에 있다가 사라졌다. 흰 셔츠를 입은 등을 떠밀리며 당황한 얼굴로 뒤돌아보는 그 얼굴이 마지막이기도 했고 밝게 웃고 집을 나서서는 돌아오지 않는 이도 있었다. 고지를 점령하느라 죽고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조용히 사라지는 것도 전쟁이었다. 전방에서 전투가 있을 때, 후방에서는 약탈과 악다구니가 있었고, 하늘 높은 곳에서 폭탄을 떨어트리는 공습이 있는가하면, 바닥에선 암시장 밀거래를 하면서 배를 채우던 피란민의 생활도 있었다. 전쟁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고지를 점령하여 국경선을 넓히는 것과 전쟁 후의 정치적 상황에 유리하게 이끄는 게 전쟁의 방식일 테지만, 민간인은 그저 학살당하고, 전사하고, 굶어죽고. 그렇게 죽어가는 게 전쟁이었을 것이다. 



이창래 선생의 한국전쟁을 다룬 소설 <생존자>에서는 전쟁은 배고픔이었다. 



그 무엇보다 처절했던, 부끄럽고 두려워하면서도 먹어야 했던, 먹을 게 없어서 슬펐고 또 미쳐가는 순간이 소설에 등장한다. 가족의 죽음보다 나의 자존감보다, 그 모든 것보다 우선했던 것은 배고픔. 후방에는 배고파 싸움을 벌였고, 전방에는 배가 고파 싸움을 할 수 없었다. 1951년 겨울, 미군이 압록강을 탈환하고서도 종내 중공군에게 밀려 파죽지세로 내려왔던 이유도, 기세등등하던 중공군이 임진강 전투에서 패퇴했던 것도 배고픔 때문이었다. 보급로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아 식사도, 탄환도 떨어졌으니 싸울 이유도 약해지는 것이었다. 











폭우로 지뢰를 묻은 야산의 흙이 휩쓸렸던가보다. 전쟁 전 채 완공하지 못한 

철도 터널로 가는 중간에 마주친 금지구역 표지판과 지뢰에 대한 경고문. 

조심스레 표지선 바깥으로 빙 둘러 하천쪽으로 내려가니 폭우 이후 철철 넘치는 

물 덕분에 물고기가 펄펄 난다며 한창 물고기 낚는 재미에 빠진 주민들을 발견했다.

"고기 많아요!"라며 그들은 웃었다. 결국 폐 터널을 구경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터널 앞 널찍한 공터에서 양봉을 하고 있는 마을 주민들 때문이었다. 붕붕 날아다니는 

벌이 지뢰보다 더 무서웠던 것이다. 




유엔군 화장터 건물에서 만난 흰색 장미. 조화가 놓여있었다. 우리는 몰랐던 장소를

누군가는기억하고 애도하고 있었던가 보다. 폐허에서 멈칫거리는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다. 누군가를 잠시 기억하고 또 애도하기 위해서. 





올해가 정전 60주년이다. 두 세대가 지나가는 사이, 아예 '잊혀진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우리의 삶이 매일매일 전쟁이라고, 전쟁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사는데도, 우리 부모 세대에게는 전쟁이란 오로지 단 하나의 것만 가리켰다. 나는 그분들과 다른 관점에서 한국 전쟁을 알고 싶다. 내가 가장 잘 하는 방식으로 전쟁을 소환해보기로 한다. 장소를 찾고, 그 장소에 벌어진 일들을 찾는다. 



연천은 철원을 가기 전에 먼저 들렀던 곳이다. 몇 군데 폐허로 남은 장소가 아니더라도 연천에서 전쟁을 읽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곳곳에 안내판으로, 경고판으로, 혹은 돌무더기로, 그도 아니면, 허수아비 대신 사용하는 인민군 사격표지판으로 전쟁이 남아 있었다. 연천은 한국전쟁의 큰 획을 긋는 전투가 발발했던 곳이다. 이른바 중공군의 춘계대공세를 저지했던 임진강 전투가 그것이다. 연천 일대에 구축했던 영연방군 29 보병여단과 중공군의 싸움으로 기록된 설마리 전투는 3일간의 전투로 인해 큰 손실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인해전술로 밀어부치는 중공군을 저지하여 후방을 지키는 데 크나큰 기여를 했다. 죽음으로 되받아친 시간싸움에서 중공군은 세를 잃었다. 서부전선은 죽고 쫓으며 얇디 얇은 국경선을 주거니받거니 했다. 주거니 받거니 사이에는 수많은 죽음이 있었다. 영연방에는 벨기에와 아일랜드 부대도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 역시 봄이 완연한 연천에서 다수 전사했다. 영국은 미국에 이어 2번째로 많은 군인을 파병했다. 그것은 그많은 많은 군인이 전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투의 중심지에 설마리 전투 전적비가 세워졌다. 영국의 국빈이 방문할 때, 반드시 찾아가 경의를 표하는 곳이기도 하다.  




죽은 자를 거두기 위한 장소도 필요한 법. 




연천에는 유엔군 화장장 시설이 있다. 치열한 싸움 뒤의 처리를 위해 이런 시설도 만들어졌던가 보다. 1952년에 세워진 곳이라는데, 6월초만 해도 마른 풀잎이 듬성듬성하던 언덕배기가 한달 사이에 무성하게 자란 풀더미에 휩싸였다. 누군가, 이곳을 기억하고 애도하고 간 것처럼 흰색 장미가 한무더기 놓여있다. 조화(造花)이자 조화(弔花)였다. 부서지고 무너져 벽체의 일부와 굴뚝만이 남아있는 이 장소는 급박한 상황을 보여주듯, 막돌을 마구쌓아 시멘트를 부어 굳혔다. 군인의 시신을 어떤 방식으로 처리했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았다. 근처에 영국군 묘지가 있다고 하는데, 미처 가보지 못했다. 민통선 안 마거리에 1951년에 세워진 화장장 시설이 있다고 한다. 통제구역이라 출입이 어려워 문화재 지정이나 관리도 되지 않았다.



나는 어떤 나라가 한국전쟁에 파병했는지 궁금해졌다. "미국, 영국, 홍주, 네덜란드, 캐나다, 뉴질랜드, 프랑스, 필리핀, 터키, 그리스, 남아공, 벨기에,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그리고 의료지원을 했던 나라도 있었다."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이들이 혹독한 겨울과 뜨겁고 습한 여름을 견디며 한반도에 있었다. 나는 폐허에서 그날의 역사를 소환해본다.  폐허라도 남아있기에 역사의 한토막을 불러내고 되새길수 있었던 것이다. 전쟁 유적을 조금더 적극적으로 찾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유엔군 화장장 시설(등록문화재 제 408호)



유엔군 화장장 시설이 연천의 첫 답사지였다. 거친 돌조각으로 쌓아올린 굴뚝과 듬성듬성하게 남아있는 벽체가 전부다. 하지만, 장소는 무언가 증언하고 있다. 아직 조심스럽게 그 이야기를 소환한다. 한달 사이 무성하게 자라버린 잡초들을 보니, 자연의 생명력이 이토록 강하구나, 하고 새삼 느끼게 된다. 그곳은, 끝나버린 삶을 추스리는 장소이자, 이토록 새파란 생명을 도처에서 발견하는 장소였다. 






인민군 모습의 사격연습용 물체가 허수아비를 대신하고 있는 곳이 연천. 길은 고요하고 움직임도 없지만 곳곳에 군부대가 포진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914년 경원선 개통으로 문을 연 연천역. 경원선은 백마고지까지 운행한다. 





연천역 급수탑(등록문화재 제 45호)


연천역 내부에 근대문화유산이 2채가 있다. 둘다 급수탑이다.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67년까지 사용했다.

지금은 문에 자물쇠가 채워진 채다. 네덜란드에서는 재기발랄한 건축가들이 급수탑을 주택으로 개조한 사례도 있는데, 그저 방치된 시설로 남아있어 아쉽다. 내부를 관람하게끔 해도 좋을 텐데. 네덜란드 사례에서는 상부에 물탱크가 있고 하부는 창고로 썼다. 상부로 올라가는 계단도 있었고. 






상자형 급수탑이다. 어떤 용도로 사용했을지 궁금하다. 보통 급수탑하면 원통형인데, 이 건물은 보조 용도로 활용하지 않았을까? 

건물 벽에는 전쟁 중 총탄을 맞아 떨어져나간 자국이 있다. 베를린 국립회화관 건물도 외부 벽체에 총탄자국이 선명하게 있었다. 국립회화관의 경우, 깨끗하게 활용되는 건물벽에 촘촘한 총탄자국이 있으니 그 아찔함과 아연함이 더 컸던 것 같다. 












전쟁의 흔적이 비껴가지 않았다. 









대광리로 향하는 길. 어떤 이유에서인지 놓다만 철교가 물길을 가로지르고 있다. 대광리 폐터널을 보러가는 길에 이 폐철교도 볼 수 있다. 이 철교는 어디로 향하던 것일까? 어떤 이유에서 놓다가 만 것일까? 철교 앞쪽 먼곳에 유사한 형태의 교량 다리가 보인다. 추리소설의 힌트처럼 남아있는 폐허들이 무언가 정보를 주는 것 같다. 계속 자료를 찾아볼까 한다. 





 폭우로 토사가 흘러내리면서 매설된 지뢰들이 유실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길을 가다보면 경고문을 자주 보게 된다. 지뢰라니, 너무 무섭잖아. 이런 안내판이 우리가 처한 상황을 경고하는 그런 것인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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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가을쯤이었나, 인사동 골동품가게에서 옛날 엽서를 구경하고 있었다. 주인 할아버지가 물끄러미 나를 보더니 유리 진열장 안에 있는 엽서를 가리킨다. 모두 엽서 4장이 합쳐져 하나의 풍경을 형성하는 시리즈 엽서다. 엽서를 모두 연결하니 꽤나 번화한 마을 풍경이 나온다. 



철원이었다. 



철원을 굳이 엽서로 제작하면서까지 홍보하려 했다면, 이 도시는 타지의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마땅했을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경성이나 부산, 대전처럼 큰 대로와 높은 빌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꽤나 번화한 도시 풍경을 보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철원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철원. 그곳은 일종의 국경, 바다보다 더 깊은 경계가 있어서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경계가 있는 도시다. 철책으로 둘러진 군사분계선, 무장 군인들이 대응하는 남방한계선, 민간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관리되는 민통선 등 보이지 않는 경계선들이 그어진 엄격한 땅이다.  최근에 와서는, 군사분계선 남북으로 4킬로미터에 이르는 DMZ를 두고 생명과 평화의 땅이라고도 하는데, 그것 또한 와닿지 않는다. 나에게 금기의 땅은 상상으로만 존재한다. 어쩌면 그곳에는 거친 야생같은 자연만이 숨쉬고, 어쩌면 그곳에는 오래전 전쟁 때 묻어놓은 지뢰가 스스로 터지고 어쩌면 그곳에는 죽음과 정적만이 감도는 그런 곳이라고. 세상에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어딘가. 나는 금기의 땅을 그렇게 두렵게 상상하고 있을 뿐, 그곳의 모습이 실제 어떠한지 전혀 가늠할 수 없다. 










하지만 엽서를 보고서 철원의 역사가 더없이 궁금해졌다. 경계선으로 나뉘기 전에는 상상의 땅이 아니라 사통팔달 통했던 번화한 도시였다. 촘촘하게 집들이 자리잡고 시장과 상점, 관공서와 철도역, 병원과 여관이 사이좋게 모여있었다. 1914년에 경성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이 철원을 통과하면서 도시는 조금씩 근대도시의 모습을 갖춰갔다.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철원의 평평하고 넓은 평야를 접수하고 일본민간기업 불이흥업이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장 운영을 하면서 철원으로 인구의 유입이 늘어났다. 1930년대에는 금강산으로 향하는 금강산전기철도가 놓여 관광객을 끌어모았다. 이렇게 홍보엽서를 제작한 이유도 철원이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에 놓인 꽤 볼만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방직공장이 생기고, 금융조합이 문을 열었으며, 농산물 검사소가 활발이 영업했고, 2600여명의 학생이 다니던 보통학교가 개교했다. 철원역은 금강산 관광을 하려는 사람들로 천여명씩 북적거렸고 백화점이 문을 열고 손님맞이를 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로 국민 여배우로 인기를 구가하던 배우 차홍녀가 지병으로 급사하기 전 마지막 공연을 펼쳤던 철원극장이 있었다. 이렇듯 인구가 모이고 산업이 발달하던 도시가 철원이었다.



감히 그 시절을 상상할 수 있을까? 



엽서를 들고 철원으로 갔다.

 




당시와 지금의 철원읍은 다르다. 옛 군청소재지인 월하, 중리, 관전, 사요, 외촌 등의 5개 마을을 일컫는다. 지금은 대부분이 민통선 내부에 있다. 물론,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단다. 전쟁이 마을을 초토화했기 때문이다. 백마고지, 아이스크림고지(이건 반전있는 이름이겠지.), 김일성 고지, 피의 500능선....한국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접전지들이 포진하고 있다. 포탄과 폭격으로 산능성이가 물컹해지고 수천명의 병사들이 목습을 잃은 땅이 어찌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겠는가. 감쪽같이 사라진 도시는 군사시설로 채워지고 위험을 알리는 숱한 표지판들과 군사작전으로 파묻은 지뢰들로 여전히 긴장감을 느끼게 했다. 민통선 내부에는 폐역이 된 철원역, 월정리역과 농산물 검사소, 노동조합, 얼음창고, 금강산 전기교량 철교 등이 전쟁으로 파괴된 모습으로 남아있고, 민통선 밖에는 1946년에 세운 노동당사와 철원제일교회의 흔적, 그리고 철원의 당시 인구와 도시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는 수도국지 등의 흔적이 남아있다. 




새삼스럽게 알게 된 사실은 철원땅이 신라 말기 고구려 회복운동을 펼쳤던 궁예가 세운 태봉국이었다는 것이다. 천년전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성곽을 쌓았던 궁예로부터 철원이라는 지명도, 한탄강이라는 이름도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태봉국의 도성터를 군사분계선이 절반으로 자르고 있다고 한다. 더 멀게는 홍적세 시기에 화산작용으로 형성된 철원 땅이 빙하기를 거치면서 깊은 골을 형성하여 한탄강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가깝게는 민통선 내부에 형성된 농촌마을은 1968년부터 단계적으로 시행된 이주민들의 정착촌으로 개발된 것이다. 

 

 

그 중간에 철원땅에 큰 상흔을 내었던 한국전쟁이라는 사건이 지금껏 큰 물줄기 혹은 핏줄기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 전쟁은 수천년에 걸친 땅의 역사를 사라지게 했고 그 후의 역사에도 줄곧 영향을 미쳐왔다. 엽서 속의 드넓은 철원읍은 찾을 수 없었다. 다만, 폐허로 남은 철원의 전쟁 유적들을 끌어담았다. 전쟁의 비극은 사라진 도시 그 자체에 있었다. 철원은 60년간 줄곧 폐허였고 여전히 폐허이며 앞으로 폐허일 것이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엽서 속 사진을 찍은 장소는 어디일까? 그곳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지금 또 어떠할까.

  그건 여전히 상상 속의 일이다.














노동당사(철원읍 관전리)- 등록문화재 제 22호



철원 일대는 38선 이북의 지역으로 해방정국에서 북조선에 포함되었던 지역을 한국전쟁이후 수복한 것이다. 노동당사를 보게 된 것은 그런 맥락이다. 이 건물을 매체에서 자주 보아온 탓인가, 나는 노동당사가 예상보다 규모가 작아서 깜짝 놀랐다. 더 무시무시하고 더 거대한, 검은 동굴같은 건물일 것이라 상상했기 때문이다. 가까이 가기만 해도 어둠의 기운에 훅 빨려들어갈 것 같은 그런 공간을 상상했던가보다

이미 폐허가 된 노동당사 건물은 담담한 모습이었다. 종전 60년, 한창 젊은 나이에 불구가 되어버린 채 60년의 세월을 비바람에 시달려온 건물을 보면서, 만기로 형을 살고 나온 전범의 모습을 떠올렸다. 더이상 빳빳하고 두려움을 주는 존재는 아니지만, 그러하기에 건물에서 자행된 수많은 살상행위에 대해서도 뚜렷하게 밝혀졌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60년이 지났건만, 전쟁 시기, 정확하게 규명되지 않는 일들이 여전히 산재하다. 

건물은 벽돌조와 시멘트로 지은 것으로 이미 내부가 헐려나갔을 정도로 파괴되었고 푹 패인 총탄자국 등도 숱하게 남아있다. 건물을 지탱하기 위해 세운 골조들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이런 전쟁 유적지들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타진하고 있기에, 다시 보게 되는 건물이다. 















철원 수도국지 내 급수탑(철원읍 사요리) - 등록문화재 제 160호 


강원도에서 유일하게 설치된 상수도 시설로 1936년에 지어졌다. 급수탑이 3기, 출입구가 3군데인 저수조, 그리고 관리사무소로 보이는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500여 호, 2500여 명에게 마실 물을 제공했던 이 장소가 악명을 떨치게 된 것은 전쟁시기 저수소에 사람들을 집어넣고 학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기 때문이다. 

지금도 저수조에는 물이 찰랑거리며 차있는데, 그 깊이를 알 수가 없었다. 저수조에서 찬 바람이 불어오면서 상당히 위협적인 느낌을 받았다. 로톤다 모양의 급수탑은 낭만적인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었지만, 수도국지의 건물들이 몹시 수상하게 여겨졌다. 수상한 시절, 수상하게 사용된 건물이 어디 이것뿐이랴. 뚝섬 수도박물관에는 당시의 상수도 시스템에 대해 잘 소개되어 있는데, 저수조 바닥에는 모래 등이 차 있어 물을 걸러주는 역할을 했다. 자세히 보이지 않으나 이곳 역시 저수조 바닥에는 물을 걸러주는 모래층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며, 후달리는 다리를 이끌고 바깥으로 나왔다.




















승일교(동송읍) -등록문화재 제 26호



한탄교라는 이름으로 놓기 시작한 다리가 완공되어서는 승일교가 된 까닭은 무엇일가? 이승만의 '승'과 김일성의 '일'을 땄다는 것은 뭔가 좀 이상하고,  전쟁 중에 공을 세운 인물의 이름이라고 추정한다. 어쨋건 지금 이 다리의 이름은 승일교이며, 1999년에 앞에 한탄대교가 새로 놓이면서 차량을 통제하고 인도교로 사용하고 있다. 

자세히 보면 다리의 아랫쪽 모양이 딱 절반씩 서로 다르다. 왼쪽은 둥근 아치가 촘촘한데 반해 오른쪽은 각이 둥글어진 사각형과 같은 모양이다. 1948년 북측에서 군사목적으로 설치하다가 전쟁이 터져서 중단했던 것을, 1952년 철원에 주둔했던 미군 공병대대가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해 군수품 보급로를 구축하기 위해 급히 완성했다. 

공사시기도 다르고 공사 주체도 다른데 공사의 목적도 다르고 공사의 이름도 달랐던 다리.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를 보여주는 다리다. 흥미롭게도 다리 위는 서로 달라지는 지점이 없이 연결되어 있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교각의 구조도 흥미롭지만 이 다리를 건너가면서 왠지 새로운 시대를 향해 걸어간다는 느낌이 들어 참 묘하다 싶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고 그것은, 통합, 통일, 화합, 그런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먼저 손을 내밀줄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절개지 위쪽 동네에서 내려다본 아랫동네. 

                                                                                                                              경사지에 앉은 창신동 풍경.  









창신동, 여름 



 

 

요즘 같은 무더위에 굳이 창신동까지 답사를 가게 이유는 사진 때문이었다. 창신동 절개지를 찍은 1950년대의 사진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made in 창신동>이라는 전시회는 창신동의 역사와 현재의 모습을 잘 갈무리해놓아 보는 재미가 있었다. 봉제거리와 쪽방촌, 다문화거리와 오래된 집들. 창신동을 설명하는 몇가지 중 돌산 절개지를 사이에 두고 산 위와 산 아래에 자리한 집들을 찍은 사진은 창신동의 특징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창신동을 설명하는 다양한 단어들이 있지만, 나는 절개지, 단어만 품고 그곳으로 갔다. 과연, 창신동은 조심스레 걸어내려가야하고 힘겹게 걸어올라야 하는 경사지였다. 그때의 집들은 조금씩 다른 모습이지만, 절개지의 모습은 남아있었다.

동대문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경사로를 올라 낙산공원이 멀찍이서 보이는 낙산삼거리에서 내렸다. 길은 가팔랐다. 경사로를 따라 내려가면서 동네 특유의 소음을 들었다.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착착착착’하면서 규칙적으로 들린다. 집집마다 겉으로는 오래된 동네의 상가건물이나 작은 집처럼 보였으나 모든 집들이 동대문 광장시장의 하청업체로서 옷과 각종 부재료와 소품을 만들어내는 봉제거리였다. 전시회에서 보던 봉제거리는 여전히 성업중이었다.

내려가던 길을 틀어서 오르막을 따라 다시 올라가니 집의 모양새나 규모가 좀더 오래된 듯 보이는 골목이 나타났다. 그 집들 뒤로 회색빛 돌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돌산 위에는 여전히 집들이 빼곡했고 돌산 언저리, 집을 지을 수 없는 장소를 제외하고는 모든 땅이 사람 사는 집으로 채워져있었다.

절개지라고 적힌 푯말을 확인하고 절개지 위로 계단을 따라 올라가보았다. 한쪽에서는 창신동 골목 일대가 내려다보이고, 반대편에서는 서울의 동쪽 시내가 한눈에 보였다. 오래된 집들은 건물은 남루할지언정, 전망 만큼은 최고였다.

돌산을 넘어섰으나 예의 귀에 익은 재봉틀 소리가 ‘착착착착’ 들려온다. 봉제거리는 돌산 너머 또다른 경사로 골목 안으로도 이어지는 모양이다.

이제 이동네를 떠올릴 때는, 집과 집 사이의 회색빛 공백같은 절개지와 귀를 간지럽히는 재봉틀 소리, 그 두 가지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나는 그 언덕에 서서 그 옛날의 서울 풍경을 조금 상상해보았다. 광화문에서 홍릉까지 이어진 전차가 오락가락하면서 소음을 내고, 도시 곳곳에서 랜드마크를 짓느라 흙먼지를 만들어내던 1920년대 말이다. 낙산에 아직 집이 들어서지 않았고 폭탄을 터뜨려가며 위험천만하게 화강석을 떼어내던 시절. 왼편에는 낮게 엎드린 초가지붕의 집들과 검게 윤기가 흐르는 오른편의 기와기붕 촌이 뚜렷한 경계를 만들던 풍경들을.

 

 

 

 








앞으로 흥인지문을, 등 뒤로 낙산을 둔 창신동은 조선시대에는 궁궐에 살다가 퇴직한 궁녀들이 모여살았고 풍경이 좋아 고래등같은 기와집들이 지어지기도 했다. 국궁을 하던 정자도 있었다. 낙산의 질좋은 화강석을 떼어내던 채석장으로 바뀐 것은 1900년대 초반. 석조전과 조선은행(한국은행 본점)을 지을 때부터 창신동의 채석장은 바삐 돌아갔다.

1920년대에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는 거대한 공사와 경성역, 경성부청 신청사를 짓는 등 화강석을 조달해야 하는 일이 더욱 많았다. 창신동의 돌산은 점점 더 날카로운 절개지를 형성했다. <일본, 조선총독부를 세우다(허영섭 지음)>에는 창신동 채석장에서 화강석을 채석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채석된 돌은 전차를 활용하여 광화문까지 운반되었다.  


 

“산 전체가 화강석으로 노출되어 있어 돌을 더내기가 편리했고 화강석의 석질도 뛰어났다. … 돌을 뜨는 데는 이미 그 시절에 공기 압축기를 사용했다니 그야말로 최신식 기술이었을 것이다. 창신방 돌산은 골조공사를 맡은 시미즈쿠미 회사가 직접 운영을 맡았다. 이미 옛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정식 허가를 받아 돌을 캐내던 중이었다. 허가기간은 1919년 삼월까지로 되어 있었다. 이곳 창신방의 낙산 주변은 그전부터도 경성 일대에서 채석장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었다. ‘너른 방위’, ‘마당 바위’ 등등 이 일대에 전해내려오는 적잖은 바위 이름부터가 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 채석장의 일꾼들은 화강석 큰 덩어리를 쪼아내고 남은 부스러기 돌 조각도 그냥 헛되이 버리지 않았다. 부스러기는  또 그것대로 신작로 공사에 잡석과 함께 다져넣었다.”      - <일본, 조선총독부를 세우다> 허영섭 , 147~148p


 

 

절개지가 날카롭게 형성될수록 웅장한 건축물들이 생겨났고 매끈한 도로가 완성되었다. 낙산의 돌은 서울의 건물을 짓고 온갖 도로에 뿌려져 새로운 서울의 모습을 만들었다. 또한 능수버들을 구경하러 나들이객이 몰려들던 낙산 일대의 풍경도 옛 정취를 잊었다.

 

거대한 돌산 위 아래를 빼곡히 채운 조그마한 집들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졌다. 창신정 택지지구에 열을 맞춰 정리된 ‘ㄷ’자형 한옥단지-한옥의 지붕선이 열을 맞춰 세워져 장관을 이루는 풍경이었다. 


반면, 돌산 아래 위의 무척 위험한 장소에는 당국의 눈을 피해 토막집이 생겨났다. 급격히 치솟는 소작료에 농사를 포기하고 도시로 상경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경성은 극심한 주택난을 겪었다. 그들은 경성의 변두리와 청계천 등지에 흙을 파고 지붕을 씌운 움막집을 짓고 몸을 피했다. 이러한 집을 토막집이라 했고 이들은 일용직 노동을 하면서 근근히 먹고 사는 도시 빈민이었다. 창신동 돌산 주변에는 채석장에서 돌을 캐거나, 연통을 소제하거나, 인력거꾼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살던 토막집들이 있었다. 

 

 

 


십일일 오후 세시 사십분 경에 동대문 외숭인동 청수조채석장에서 돌깨틀이는데 사용하는 화약이폭발하야항부시내창신동사십이번디천덤석(천점석)동리오십칠번디 류성진 숭인동 삼십번디 최선룡의 세사람이 중상을 당햐야 생명이 위독하든 바 원인은 수일전에 광산용화약팔십 몸메를 장사척 직경 일척오촌가량이나 툴흔돌구멍에 폭발물을 너코도 화선에 불을 대어노하도 폭발되지 안흠으로 다시끄내다가 그와가티폭발된것이라더라.  

(1928년 9월 13일 동아일보)

 

 

창신동 3번지 채석장에서 무게가 천 관이 넘는 큰 바위가 120척이나 되는 곳에서 굴러 떨어져서 아래에 있던 집을 덮쳤다.  

(1933 5월 24일 동아일보)

 

 

창신동 채석장은 육이오 동란 후 미군에서 운영하면서 채석에 있어 많은 화약을사용한 관계로 동민들을 위시한 부근 임산부들에게 많은 피해를 끼치고 있어 부근 동민들은 미군당국에 진정서를 제출한 결과 미군이 최근 철거하게 되었는데 다시 서울시에서 동 채석장을 직접 운영하여 앞으로 채석이 시작될 것이라는 소문이 유포되어 부근 시민들에게 다시 공포와 위협에 봉착하게 하고 있었는데 … 

(1954년 1월 23일 동아일보)


 

 

 

전쟁 후에는 북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의 무허가 판자촌이 도시의 좁은 틈을 메웠다.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채석작업이 중단되었으나 절개지의 집들은 여름 장마철이 오면 낙석사고로 더욱 위험천만했고, 수도나 화장실이 없어 불편했다. 노후된 불량주택을 개량하기 위한 시도가 50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어져 지금에 이른다.


 






서울 창신동의 높다란 돌산 일대 2천여 가구는 물긷는 일이 밤낮을 가림없이 하루중의 가장 큰일과가 됐다. 이곳주민들은 온 식구가 7백여m 나 밑으로 내려가 공동수도나 큰 길 가 양지회관에서 물을 길어 돌산언덕배기를 오른다. 이길은 물지게를 지고 한번 오르는데다 다섯번이나 쉬고 또 쉬어야 집에 도달하고 보면 물통의 물은 3분의 2가량 밖에 안된다.

(1967년 7월 29일 경향신문)




 

서울시는 채석장 절개지 가운데 낙석위험이 있는 종로구 창신동23일대 27백여평에 대해 오는 8월까지 보수공사를 벌이는 한편 재해발생에 대비해 인근 40여가구의 주민들에... 

(1993 6월 3일 경향신문)


 



깎아지른 절개지에 살아가는 고충이야 말해 무엇하랴. 지금도 경사로 때문에 걸어다니는 일이 쉽지 않은 이 동네의 주요 교통수단은 오토바이다. 채석장의 운명은 어느 순간 끝이 났지만, 집의 역사는 시대를 자르지 못한 채 복잡한 켜를 여전히 갖고 있다. 


한쪽 켜에는 고층 아파트가 자리잡았으나, 오랫동안 동네를 지킨 사람들의 절개지 집들은 여전히 서울을 내려다보며 오래 전과 다름없이 서울의 풍경을 남겨둔다. 서울의 시간을 지켜낸다.










<made in 창신동>과 관련해서 창신동을 둘러보는 <도시의 산책자>라는 답사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프로그램은 끝났지만, 창신동의 풍경은 그대로겠지요. 답사 프로그램은 러닝투런이라는 문화단체에서 진행했고, 이들은 창신동에 '공공공간'이라는 장소를 만들어 예술 문화 프로젝트를 지역 사람들과 공유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창신동 답사를 계획하고 있다면 공공공간에 꼭 들러보시길.



<도시의 산책자>라는 답사 프로그램이었죠. '공공공간'에서 지도와 오디오 가이드를 받아들고 답사길에 나섰습니다. 



가장 가보고 싶었던 절개지. 지금의 모습입니다. 까마득한 경사지에 서서 다시 회색의 공백을 바라보니 그 풍경이 놀랍기만 합니다.

이곳의 집들은 계획된 필지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덧붙여지고 보수하면서 만들어진 흔적이 역력합니다. 




(좌)필요에 따라 덧붙여져 완성된 외관. 

(우)미스테리 주택이라 불리는 집. 일제강점기 문화주택처럼 보이는데요. 오랫동안 빈집입니다. 




보통의 상가나 주택처럼 보이는 집들이건만 어김없이 재봉틀소리가 경쾌하게 들립니다. 그 언저리에서 도시의 유물을 발견했습니다. 





러닝투런이라는 문화단체에서 운영하는 '000간(공공공간)'은 1호점과 2호점 두 개가 있습니다. 

창신동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면 이곳으로!




동네의 커뮤니티를 지키기 위한 조그마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창신동 주민들이 함께하는 앱라디오방송 '덤' 

그리고 동네 사랑방같은 장소들. 













충남도청사 이전, 

그리고 그 이후 







 

거대한 건물이 완전히 비었다. 2,267m2에 달하는 3층짜리 건축물이 손에 꼽을 정도의 인원을 남겨두고 모두 떠났다. 2012년 말, 대전에 있던 충청남도청이 내포 신도시로 옮겨갔다. 원래 공주에 있던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옮겨온 것이 1932년의 일이니, 80년만에 도청사가 또 다시 새로운 장소를 찾아간 것이다. 


노란색 타일이 붙은 육중한 건물은 1930년대 관급 건물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좌우가 정확하게 대칭되는 긴 건물은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마치 빨려들것 같은 현관 포치는 시커먼 입과도 같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도청사를 드나들었을까? 이미 세월을 머금어 어둑해진 외부의 타일들과 수십년동안 손길이 닿아 반질반질해진 돌로 된 계단 난간들. 도시를 스쳐간 수많은 바람과 발길이 닿은 건물을 본다. 

비어있는 건물은 안식년을 맞이한 초로의 교수같은 모습이다. 안타깝기보다는 평온한 분위기다. 고풍스런 자신에게 어울리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전,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듯하다. 


주변이 사위어가는 저녁 나절, 조용히 건물을 돌아보았다. 한켠에는 <충남도청사 그리고 대전>이라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비어있는 건물에 어둠이 서서히 내리니, 내부가 더욱 깊고 더욱 넓게 느껴졌다. 고윤수, 안준호 두 학예사 선생님의 도움으로 전시와 건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중앙계단


2층 중앙계단과 복도







조선시대부터 충청감영이 있었던 공주는 전통적으로 행정과 문화의 중심지였고, 일제강점기에는 감영을 도청사로, 관찰사를 도지사라 하여 명칭과 역할이 다소 바뀌었지만 여전히 도청사는 공주에 있었다. 초대 충남도 장관에 박중양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철도 특수를 누리며 점점 규모를 키워가던(바꿔 말하면 일인들의 세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던) 대전으로 충남도청사를 옮겨야 한다는 의견이 자주 등장했다. 박중양이 총독부에 정식으로 도청 이전을 건의하는가 하면, 총독이 충남도청 건과 관련한 뇌물수수에 연루되는 일도 있었고, 대전 유지들과 공주 유지들이 각자 충남도청을 사수하기 위한 궐기대회를 하는 등 첨예한 방향으로 흘렀다. 



"최후의 일각까지 도청을 사수하라"

"유림도 궐기, 총독부에 진정서 제출"

"지사 관저에 연일 쇄도, 부인들도 첨단적 활동"

"충남도청 이전 반대차 동경의회에 제출, 진정위원 급파"



등 당시 신문에 실린 기사들은 남녀노소 일인 한인을 가리지 않고 한몸이 되어 자기 도시를 지키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시절을 보여준다. 



충남도청 이전 문제는 일본 정계에서도 골치아픈 사안이었다. 결국, 격렬한 저항과 시위, 로비와 첩보전을 거쳐 대전으로 도청사를 이전하기 위한 예산이 확정되었다. 대전이 충청도의 새로운 중심이 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1900년대 초, 농가 몇 채 만이 유유자적하던 대전이 불과 30년만에, 철도와 도청이라는 승부수로서 충청의 중심도시로 급성장하게 되었다. 도청을 빼앗기게 된 공주 시민들은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그 대안으로 철도 부설, 연초전매국 공장 건설, 의학전문학교 건립을 요구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1931년 6월 신청사를 짓는 공사가 시작되었고 그해 12월에 상량식이 거행되었다. 








1920년대말 대전 시가 풍경(자료 출처-충청남도청사 기록화조사보고서)




공사중인 충남도청사(자료-충남도청사 그리고 대전, 전시 카탈로그)




충남도청사의 위치가 절묘하다. 대전역 광장과 마주보는 도로 끝에 도청사가 자리하게 된다. 대전역과 도청사라는 대전의 두 가지 호황의 축이 형성된 것이다. 청사를 짓기 위한 토지는 김갑순이라는 자가 선뜻 내놓았다. 김갑순은 현재 대흥동, 은행동 일대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 인근 지역의 땅을 희사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자기 소유의 땅이 도시계획 안으로 유입되게 된 것이다. 유성온천을 개발하는 등 대전갑부로 불리는 김갑순의 전성시대가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다. 도청사의 대전 이전으로 인해 대전의 지가는 일제히 상승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전답에 불과한 지역도 도시계획으로 개발되는 호황을 맞이했다.







1932년 신축당시 내부 사진/ 1층 평면도( 자료- 충청남도청사 기록화조사 보고서)





1931년 6월에 착공하여 14개월이라는 단시간에 완공된 도청사는 웅장하고 위풍당당했다. 관급 공사는 총독부 소속의 건축가들이 맡았다. 이 건물은 이와스키 센지와 사사 게이이치가 설계했다. 이와스키 센지는 경성제대 건축과 교수로 있으며 경성부청(옛 서울시청), 경성재판소(현재 서울시립미술관), 경성제국대학 본관 등 서울의 주요 관공서들을 설계했다. 이와스키가 1931년 6월에 사망한 후, 사사 게이이치가 뒤를 이었는데, 그 역시 당시 건축계의 실력자로 활동했다. 


날개를 단 대칭형의 이 건축물은, 이전 시대의 화려함 보다는 단순하지만 위엄있는 공간을 선보인다. 외벽 장식이나 바닥타일, 조명이 매달리는 부분의 장식 등은 소소한 장식은 놓치지 않았고, 특히 벽돌 쌓기를 활용한 장식과 스크래치 타일은 독특한 맛을 느끼게 한다. 1920년대 후반, 30년대의 건축물에는 스크래치 타일이 유행하듯 사용된 건물이 많다. 무척 섬세하고 공정이 복잡하게 짜맞춰진 타일 구조로 보아, 노련하게 이 타일을 제조하던 회사가 있었으리라. 일본에서 만들어서 가져온 것일 확률이 높다.  


건축물을 보다보면, 당시 건축재료 중에서 무척 섬세하고 까다롭게 작업한 것들을 보면 제작회사와 제조산업에 대해 궁금해지곤 하는데, 그에 대한 연구도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창틀과 창호의 섬세한 황동 철물의 섬세함도 엿볼 수 있다.  







충남도청사 입면도(자료- 충청남도청 기록화 조사 보고서)




1932년 10월 14일 7천여명의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신축 청사 앞에서 오전 10시 이청식을 거행했다. 당시에는 2층으로 완성되었는데, 딱히 지붕을 얹지 않은 이유는 증축을 고려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1960년, 정경운 교수의 설계로 3층을 올려 증축하고서 도청사는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헐겁게 보였던 건물이 마지막 층을 올리고서야 마무리된 느낌이 든다. 



도청의 역사가 곧 대전의 역사다. 한국전쟁, 이후 재건시대를 거치면서 도시가 얼마나 처참하게 불탔고 또 얼마나 힘겹게 일어섰는지, 장소의 한 가운데에서 시대의 굴곡에 따라 도시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신도시가 발달하고 원도심(구도심)이 활력을 잃어가는 슬픈 과정도 지켜보았고, 지금 그 원도심이 다시 일어나는 것도 지켜보고 있다. 



건축물은 등록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어있는 건축물을 다시금 활력있게 하는 것은 그 도시 사람들의 이야기, 삶의 모습들이 아닐까? 무엇으로건, 건축물은 그 도시의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들이 머물고 쉬고 이야기하는 장소로서.  













역사가 된 건축, 시간을 담다라는 부제가 달린 <충남도청사 그리고 대전> 전시회.

대전의 역사와 충남도청사의 건립과정, 한국전쟁과 재건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도청사의 역사를 보여준다. 도청사의 역사는 대전의 역사와도 같다. 

전시는 11월 30일까지 옛 충남도청사 1층에서 열린다. 전시와 더불어

건축물을 둘러보는 여유도 누리길 권한다. 관람시간- 오전 9:30~오후 5:30.

 

















솔랑시울길을 따라서

대전 소제동 관사촌 걷기 







대전을 다녀왔다. 한 3년 만인가. 답사 기회가 몇 번 있기는 했는데 일정이 맞지 않았다. 가보고 싶은 곳도 있었고 달라진 거리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가 겨우 기회를 잡았다.

그동안 충남도청사는 신도시로 이전했고 대전에 살던 지인은 서울에 완전히 정착했으며 대전에서 전시회를 하던 몇몇 아티스트들은 다른 도시로 터전을 옮겼다. 대전 토박이 빵집은 서울에서도 유명해졌고 – 동네 빵집들이 이렇게 대단해진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튀김 소보로를 먹기 위해서, 그 집 팥빙수를 먹기 위해서 멀리서 택배 주문을 하는 상황이란다.


뾰족집은 결국 헐렸다. 이축복원을 하기 위해 부재들을 옮겼다고 한다.(실측도면은 그렸겠지.) 사라진 건물들을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남아있는 것들은 표지석을 만들어 지켜나가려 하는 한편, 공동화 현상으로 텅빈 구 도심은 오히려 젊고 재기발랄한 사람들의 참신한 문화공동체의 장소로 활용된다고도 한다. 그동안 자잘한 변화들이 도시에 생겨났다. 작지만 분명한 변화들을 감지하면서 소소한 기쁨을 느꼈다. 도시의 한켠은 거대한 아파트 단지를 꿈꾸며 높고 낮은 모든 것들을 없애버린 평평한 땅으로 바뀌어있지만 또다른 한켠에서는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지키고 남기려는 움직임이 있다. 지금은 전자의 힘이 훨씬 강력하지만 머지 않아 두 힘이 자발적으로 균형을 이루게 될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를 해본다.


대전 사람들조차도 이 도시는 뚜렷한 인상이 없다고 하지만, 어느 도시나 속살을 파헤쳐 보고 뒤집어 보아야 새로운 것들이 보이는 법이다. <어린 왕자>에서도 그러지 않았나? 진정 아름다운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나는 이 말이 도시에도 적용된다고 믿는다. 눈에 보이는 뚜렷한 자취들이 아니라, 알듯 말듯 느껴지는 좋은 느낌이 도시에서도 필요하다고 말이다.


대흥동과 신도시쪽에서 머물던 예전 경로를 벗어나 대전역 뒤쪽의 소제동으로 이번 여행의 목표지를 설정했다. 소제동은 철도 관사촌이 형성되었던 곳인데, 그 중 한 곳을 ‘대전근대아카이브포럼(DMAF)’이라는 단체에서 임대하여 문화공간 거점으로 운영하고 있단다. 소제동 42호 관사를 찾아서 일단 걸었다.












대전역 동편 출구로 나가면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철도보급창고가 있다. 이곳에서 음악회를 열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었다. 

지속가능한 활용방법은 없는 걸까? 







철도와 도청, 도시의 확장



대전은 너른 들판이었다. 자연스럽게 범람하던 하천 주변에 평평한 땅이 펼쳐진 한촌이었다. 솔랑산이라는 나지막한 산도 있었고 그 앞에는 소제호라는 호수가 시원하게 펼쳐졌다. 개나리가 덤불을 이루고 여름이면 연꽃이 호수를 뒤덮으며 장관을 자랑했다. 그 한촌 어귀에 1650년대에 지어진 우암 송시열의 사가가 있었다. 연꽃과 국화, 구기자나무가 장관이이라 하여 그 집의 사랑채는 기국정이라 불렸다. 이곳에서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고 글을 지었다. 그러니 아무것도 없던 한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근대의 풍경은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바꾸어놓았다. 1904년 경부선 철도가 놓이면서 도시라는 구조체가 이식된 것이다. 철도역은 소제호를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한산한 들판에 세워졌지만 이미 새로운 도시를 예고했다. 경부선 열차는 대전에서 하룻밤 숙박을 하고 다음날 남쪽으로 출발했다. 그러므로 대전에는 숙박시설과 먹고 마시고 사고 즐기는 곳이 생겨나야 마땅했다. 일본인 상인과 군인들이 대전에 입성했다.


다카사키 소지 교수의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이라는 책에는 이런 내용이 보충되어 있다. 일본군 수비대와 헌병관구 등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혹시나 있을 의병투쟁에 대비해서였고, 통감부에서 의병진압을 공표한 이후로는 가열차게 호남선 철도건설을 추진하게 되었다. 호남선이 완성된 1913년에는 명실상부 두 철도 노선이 만나는 요충지가 되었다. 1904년 88명에 불과하던 일본인은 1911년에 3891명에 육박했고, 1912년 전등이 들어와 불을 밝혔다. 라고. 그리고 1932년 공주에 있던 충청남도청사가 대전에 신축됨으로써 도시는 도약했다. 대전역과 도청사. 두 개의 축이 대전을 일군 셈이다.



1907년 소제호 뒤쪽에는 대전신궁이 세워졌고 소제공원이라 하여 보고즐기는 곳이 되었다. 공설운동장도 생겨났고 편의시설도 다양하게 설치되었다. 대전은 철도를 세우며 벌어들인 돈과 철도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들이 뿌리는 황금으로 움직였지만 엄연한 거대도시로 점차 꿈틀거리고 있었다.  뜨내기의 도시에서 정주민의 도시로 바뀌어가는 것이다. 

철도 기술자와 노동자들이 살던 관사촌이 소제동 지역에 있었다. 소제동 관사촌은 1920년대에 형성된 것이라 한다. 대전역전시장에 남관사촌이, 역사 북서쪽에 북관사촌이 1910년대에 형성되었으나 전쟁과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사라지고 소제동 동관사촌만 남았다.



대전시가지도 (1933) 일부(자료 인용- <소제동 근대이행기 대전의 역사와 경관> 대전광역시 출판)








42호 관사를 찾아가는 길



대전역 동편 출구로 나서면서 맞은 편과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철도보급창고 건물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골목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도대체 길을 파악할 수가 없어 스마트폰에서 42호 관사의 주소를 입력했다. 골목이 촘촘해서 길찾기가 쉽지 않다. 상당히 오래된 집들이 어깨를 맞대로 있는 골목이 묘하게 시선을 끈다. 그곳으로 들어선다. 소제동 관사촌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상당히 오래된 살림집들이 묘하게 닮은 구조로 열을 지어 서있다. 지금은 불량주택 등으로 분류되었을지도 모를, 노후가 심한 주택들이다. 살던 사람들이 떠나버린 방치된 주택도 있고 애써서 고쳐가며 살고 있는 집들도 있었다.




관사촌 건물은 아니지만 오래된 집들이 시대를 증언하고 있다. 60년대 지어진 주택단지가 아닐까? 








자료에는 40여 채의 관사 건물이 남아있다고 하는데, 그 외에도 상당히 오래전에 지어진 주택들이 즐비한 것을 보니 이 지역에 새삼 호기심이 생겼다. 즉, 관사촌은 아니지만 그 주변으로 살림집이 대규모 단지로 들어섰다는 것인데, 어떤 건축업자들이 이런 주택 건축에 개입되었는지, 어떤 구조를 모델로 해서 지어졌는지 등등 해답을 찾을 수 없는 궁금증이 밀려왔다. 빈집을 담바깥에서 넘어보니 천장이 낮은 집들은 ㄱ자 구조를 하고 있고, 마루와 퇴, 방이 구분되어 보였다. 자료집<소제동, 근대 이행기, 대전의 역사과 경관(대전광역시 출간)>을 보니 1948년 지도에는 없고 1974년 항공지도에는 이 지역에 집들이 있다. 이 골목에서 북쪽으로 두 블럭 쯤 올라간 지점부터 관사촌 건물들이 등장한다.

 









                                     이 골목들이 참 좋았다. 적당히 넓고 깨끗하고 잘 구획된 미로같은 골목.







42호 관사를 향해 골목을 돌다보니 조금씩 시대를 거슬러가는 느낌이 들었다. 길과 집들이 묘하게 달랐다. 반듯하고 적당히 넓은 골목과 단정하게 구획된 담은 오래전에 계획되었음에도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의 수준을 느끼게 했다. 골목은 미로같았다. 골목을 돌다보면 어느 순간 80년 전으로 훌쩍 여행을 갈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이 골목이 꽤 마음에 들었다. 고급 기술자들이 살던 중산층 동네라는 느낌이 들었다.
























 


소제동 철도 관사 분포도. 빨강과 검정으로 표시된 것이 철도관사로 확인된 것.

(자료 인용- <소제동, 근대이행기, 대전의 역사와 경관>, 대전광역시 출판)



실측한 철도 관사 조감도(자료 인용- <소제동, 근대 이행기, 대전의 역사와 경관> 대전광역시 출판) 





바깥 골목을 따라가면 규모가 큰 일자형 집이 등장한다. 지붕이 높고 길이가 길다. 바깥에서 보기에도 전형적인 한옥구조와는 달라보이는 집들이다. 기숙사 형태로 방들이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자료집에는 하나의 집이 내부가 대칭인 두 세대의 집으로 이루어진 형태가 보편적이라 한다. 나무로 된 전신주와 가로등이 아슬아슬하게 세워진 이곳은 관사촌이 분명하다.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는 집들 너머로 아쉽게 시선을 던져보았다. 내부는 어떤 모습일까?



솔랑시울길이라는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니 머지 않아 42호 관사가 나타났다. 대전근대아카이브에서 운영하는 문화공간이다. 오늘은 사람이 없다. 비가 내린 후여서 우중충하지만 길을 걷는 것이 불편하지 않다. 먼 과거에도 많은 사람들이 걸었던 그길이다. 길에 솔랑시울이라는 예쁜 이름을 붙였다. 솔랑산은 소제호 뒤쪽에 있던 산인데, 지금은 소제호도 솔랑산도 없어지고 소제동과 솔랑시울이라는 이름만 남아있는 것이다. 



솔랑시울길 주변의 관사건물은 1920년대 동관사촌을 설명하는 지도에 등장하는 바로 그 건물들이다.항공사진으로는 분명하게 집의 형태와 규모를 파악할 수 있지만 바깥에서 보기에는 모든 집이 비슷하게 낡았다. 42호 관사의 경우는 다른 집들과 달리 나무비늘판벽으로 마감되어 있는데, 앞서 본 건물들보다 42호 관사가 더 오래된 것으로 짐작했다. 골목은 담을 따라 반듯하고 집은 비슷비슷한 규모다. 반듯하게 잘 닦인 길이 상업지역과 주거지역으로 구획되는 지점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관사촌에서 원형을 간직한 것이 40여 채. 그외에 다소 변형된 것들까지 포함한다면 더 많은 건물을 관사촌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철도 관사촌이 이 정도 규모로 남아있는 사례는 소제동이 유일하다. 42호 관사촌은 흐릿한 회색의 거리에 선명한 색을 발산한다. 없어지기 전에 기록하겠다는 것, 더이상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도시의 역사찾기는 조금씩 계속되고 있다. 이미 오래전에 관사촌은 일반에 집들을 내놓았다. 코레일 승무원들을 위해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학교 기숙사 모양으로 생긴 건물이 따로 있다.  


솔랑시울길을 따라 모퉁이를 도는데 아주 오래된 세탁소가 있었다. 주인 어르신이 세탁물을 가지고 왔다갔다 하시는 걸 보니 여전히 성업중인 모양이다. 세탁을 마친 옷들이 세탁소 문 앞에 걸려있는데, 검은 제복 비슷하다. 자세히 보니 가슴팍에 코레일 마크와 글자가 새김되어있다. 그러니, 이 길은 여전히, 철도 승무원들이나 기술자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거다. 




사라진 소제호, 왜?



“어, 물길이 없네.”

1920년대 동관사촌과 관련된 지도를 보다가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소제호가 그려진 1925년 대전시가지도에 소제동 가장자리에 깊게 형성된 대동천은 보이지 않았다. 지하철이 지나는 길도 아니며 신도시도 아닌데, 이 물길은 도대체 언제 형성된 것일까? 자료집을 뒤젂이다가 소제호의 매립과정을 알게 되었다. 

 




대전지도 1910년대 말                                                                   대전지도 1928년 

(자료 인용- <소제동, 근대 이행기, 대전의 역사와 경관> 대전광역시 출판)




1948년 항공사진. 오른쪽 상단이 동관사촌. 

(자료 인용- <소제동, 근대 이행기, 대전의 역사와 경관> 대전광역시 출판)







대전역은 주류천인 대전천을 앞에 두고 지류천인 대동천이 철도선을 가로지르며 넉넉한 소제호를 뒤에 두고 있다. 거대한 급수탑이 있어야 했으니 하천과 인근한 지역에 역사를 짓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다만 지류하천인 대동천이 자주 범람했다. 철도역과 대전천 사이는 춘일정, 영정, 본정 등 일본인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었으므로 지천의 범람은 꽤나 골치였겠다. 1927년 치수사업이 시작되었다. 소제호를 매립하고 지천을 없애고 도시 북쪽에서부터 물길을 뽑아내는 인공수로를 만든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대동천이다. 호수를 메우기 위해 솔랑산과 인근 구릉이 사라졌다. 소제호가 사라질 즈음, 신궁도 대흥동으로 옮겨졌다. 사라진 소제호 위에 새로운 관사촌이 생겨났고 지금 그 아래 위로 무수한 집들이 켜켜이 들어섰다. 



산을 없애고 호수를 메우고 물길을 바꾸면서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도시의 삶. 언덕을 깎고 돌산을 밀고 오래된 집들을 없애고 삶의 흔적들을 지우면서까지 포기할 수 없는 우리 도시의 삶과 똑같이 겹쳐지지 않는가?
















건물은 우리 삶의 바탕화면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자리를 지키고, 대화하듯 독백하듯 존재감을 드러낸다. 문득, 그 존재감을 확인하는 순간, 건축은 예술이 되고 시가 되고 이야기가 된다. 나는 그 순간을 기다린다. 건축물이, 공간이 나에게 말을 걸어올 때를, 아니면 내가 그 존재를 확인하려 다가가야하는 순간을. 


나는 대학로를 좋아한다. 서울에 처음 온 그날도 대학로를 가장 먼저 가고자 했다. 대학로 언저리의 학교에서 입사시험을 보았고 대학로 언저리에서 지금 남편이 된 한 남자의 전화를 받았고 대학로 언저리에 있는 회사를 다녔으며 대학로의 한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대학로의 한 다방을 몹시도 좋아하며 대학로의 한 서점을 또 좋아하며, 대학로의 영화관을 좋아한다. 대학로의 오래된 건물을 좋아한다. 붉은 건물이 군집된 거리를 걷는 것을 좋아한다. 아주 높지 않은 건물들이 내게 공간을 빌려주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다. 어수선할 때도 많지만 차가 사람을 배려한다. 







                                                  





















그 어느날 바라본 대학로의 건물 하나는 뜯어볼수록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대학로 문예극장의 붉은 벽돌은 시간에 따라 햇살의 농도와 방향에 따라 그림자의 길이를 늘려 공간의 깊이를 조였다 풀었다 반복하고 있었다. 벽돌이 만든 레이어는 별다른 장식도 아니거늘 건물의 외부를 변화무쌍하게 컨트롤한다. 날씬한 펜슬 스커트에 슬쩍 그어놓은 슬릿처럼 딴딴한 벽돌벽도 슬쩍 갈라졌다. 스커트처럼 바람에 나폴거리지 않더라도 보여줄 듯 보이지 않는 투명하고 긴 틈이 시선을 잡는다. 








건물의 측면은 이렇듯 벽돌 장식이다. 조분조분한 나무 그림자 아래에 마치 점자처럼 솟아오른 작은 엠보스.

유쾌한 기분이 든다. 







                                       

  창도 장식도 없는 건물의 뒷모습은 큐브를 조각조각 맞춘 듯한다. 매스를 분절하고 뒤틀고 붙여서 완성된 외부, 내부는 공연장과 입구 홀이 서로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 아마도 이런 방식의 입면을 다시 보기는 어려우리라. 우리는 매끈한 유선형을 미래형이라며 반기는 중이거나 저렴하고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단순한 형태의 건물들을 보게 될 테니까. 하지만, 이토록 다이나믹한 입면을 가진 건물을 다시금 보고 싶다. 










                              






                    







문예회관 바로 옆의 아르코미술관. 이 역시 벽돌로 이룩한 한편의 시다. 비례감이 좋은 창 주변의 벽돌로 쌓은 레이어들은 입체감이라는 미묘한 언어로 건물의 형태를 완전히 바꿔놓는다. 그저 매시브한 건물인데 단순하지 않고 볼수록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길을 걸으면서 보게 되는 건물 중 10퍼센트만이라도 보는 재미를 주는 건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걷고 싶은 거리는, 잘 지어진 건축물과도 관련이 있다. 









대학로 아르코 예술극장 + 미술관

 




오래되고 고즈넉한 거리, 연속적으로 늘어선 붉은 벽돌 건물들,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리는 길거리 예술가들의 퍼포먼스, 소극장 공연을 알리는 포스터, 그리고 대학병원. 대학로의 풍경이다. 북적이고 소란스럽지만 한편 고즈넉하고 예스러운 곳. 서울대 캠퍼스가 이곳을 떠난 지 30년도 더 흘렀지만 대학가의 열기는 여전히 대학로의 공기 속에 떠돈다.


대학로 하면 마로니에 공원과 더불어 붉은 벽돌로 지어진 아르코 예술극장(1981년 완공)과 아르코 미술관(1979년 완공) 두 개의 건물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이 두 건물은 대학로의 풍경과 분위기를 형성하는 구심점이자 이 거리의 역사와 정체성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한국 건축계를 대표하는 김수근의 주요작품이기도 하다.


1925년부터 경성제국대학이, 광복 후에는 서울대 캠퍼스가 자리잡았던 대학로. 서울대가 관악으로 캠퍼스를 옮기고 난 1970년대, 대학로는 아파트 단지로 바뀔뻔했다. 다행히도 학교 건물을 역사적 기념물로 남기자는 서울대 측의 의지와 문화예술 공간으로 바꾸자는 문화예술계의 요청을 서울시가 받아들여 공연장과 소극장, 미술관과 갤러리가 있는 문화공간으로서의 대학로가 탄생하게 되었다. 당시 이 장소를 문화예술의 거리로 바꾸자고 주장했던 인물 중에 건축가 김수근이 있었다.


김수근이기에 그의 건축물은 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을 정도로 건축계에서 그가 가진 영향력은 대단하다. 건축을 예술의 분야로 확장하여 다양한 소통의 현장을 진행했으며 건축의 미학적 해법과 철학, 기술까지 다채롭게 실험해온 인물이기 때문이다. 특히, 김수근은 붉은 벽돌을 조형적으로 탁월하게 표현한 건물을 많이 남겼다. 한 장 한 장 쌓아 올리는 벽돌이야말로 건축의 장인정신을 표출할 수 있는 재료다. 김수근은 진부하고 하찮게 여겼던 벽돌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려 미학적 완성도를 가진 건축재료로 격상시켰다. 대학로에 유난히 붉은 건물이 많은 것도 그의 건축언어가 지닌 파급력 때문이라 할 것이다.


마로니에 공원을 둘러싸고 있는 아르코 예술극장(전 문예회관)과 미술관(전 미술회관)은 거리의 배경이 되는 물리적인 장소이자 풍경 속에 어우러지는 한편의 시 같은 건물이다. 수많은 공연과 전시를 통해 배출한 예술가들이 남긴 숱한 이야기들도 이 장소를 특별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겠지만 단순히 건축이 가진 아름다움만으로도 이 건축물은 의미가 있다.


단단하고 엄격한 성격을 가진 벽돌 입방체들이 자유롭게 조립된다. 외부는 쪼개지고 내부는 길게 연결되는 미묘한 공간이 펼쳐진다. 정면과 배면, 측면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입면이 다채롭기에 길에서 보면 움직일 때마다 건물의 형체가 계속 변화한다. 입방체를 조합하여 하나의 조각 작품을 만든 것 같다. 벽은 어떤가? 엄격하게 지정된 자리의 벽돌을 돌출시켜 비어있는 벽면마다 무늬가 드러난다. 엄격하게 잘려진 입면은 빛을 받아 날카롭고 세련된 그림자를 만든다. 건물은 한 장의 추상화가 된다.


조각이며, 그림이며, 또한 시가 되는 건축. 그 위로 시간의 흔적이 내려 앉으며 붉은 벽돌의 색이 더욱 깊어졌다. 이 웅장한 예술 작품이 우리 삶의 배경이 되어준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벅차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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